잎이 거의 다 떨어지고 차가운 북서풍이 어김없이 불어오는 이 계절이 되면 늘 다시 찾아보는 그림이 있다. 바로 김홍도의 추성부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소장했고 가장 아꼈던 그림이라고 한다. 나는 올해 가을 내내 이 그림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간 봐왔던 단원 김홍도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그림이었다. 해학적이고 서민적이었던 온갖 풍속화들과 달리 이 그림은 먹물 번짐 기법도 거의 없는 바싹 마른 갈필로 나뭇잎이 거의 다 떨어진 나목들이 거센 북풍에 시달리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림에서 싸늘한 냉기가 서려 나올 듯 스산하기만하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추성부도는 보면 볼수록 그 그림 속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처음 봤을 때는 서글펐지만 자꾸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따뜻한 위안을 얻게 된다. 그림의 내용은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정경이지만 그 배경색은 따뜻한 파스텔톤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도 세월의 흐름 앞에선 우리 같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은 서글픔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위안이라는 것은 그저 좋은 말이 아니라 공감한다는 것. 너도나도 우리는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고 그 슬픔을 언어와 문자와 그림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




 추성부도는 말년의 김홍도가 구양수의 추성부를 읽고 그 감상과 느낌을 그린 그림이다. 김홍도를 연구한 미술학자들은 추성부도를 김홍도의 살아생전 마지막 작품이라고 했다. 김홍도가 추성부도를 그린 시기는 1805년. 61세때이다. 그 이후 김홍도의 작품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홍도가 마지막으로 그린 이 그림의 영감을 제공한 구양수의 추성부란 무엇인가? 구양수은 중국 당나라때의 문장가로 고문진보에 그의 산문 추성부가 실려있다.


 추성부(秋聲賦). 말 그대로 秋聲(가을소리)에 대한 賦(송대에 유행한 산문형식). 쓸쓸한 가을 소리를 듣고 만물이 쇠락해가는 가을의 슬픔을 나타낸 명문장이다. 아래는 추성부 전문이다.


 때는 바야흐로 밤, 구양자(구양수)가 책을 읽고 있었는데, 서남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구양자는 이 소리에 섬뜩 놀라 중얼거렸다.

“이상도 하구나, 처음에는 그 소리가 비오는 소리 같더니 이내 음산하게 울부짖는 바람 소리로 변하고 그런가 하면 갑자기 파도가 기운차게 바위벼랑에 부딪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 마치 놀라 파도가 한밤에 곤두박질치고, 비바람이 느닷없이 휘몰라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중략-

구양자는 하도 괴이쩍어, 동자에게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밖에 나가 알아보라 일렀다.

한참 뒤, 동자가 들어와 말했다.

”하늘에는 별과 달이 눈부시게 희고 맑으며, 은하수 또렷학여 손에 잡힐 듯합니다. 사방 어디에도 인적이라곤 없으니, 그 소리는 분명 나뭇가지를 울리고 간 바람 소리입니다.“

나는 탄식하여 말했다.

”아, 슬프도다. 그 소리가 바로 가을 소리였구나. 기다리지도 않던 가을이, 누가 오라 하였기에 벌써 왔단 말이냐.“

-중략-

”젊어서는 그토록 붉고 곱던 얼굴이 어느세 늙어 고목처럼 되었고, 칠흑같이 검던 머리는 어느새 서리 맞은 듯 희어졌다. 금석처럼 단단한 바탕을 타고나지도 못한 몸으로, 덧없는 생명을 재촉하여 초목들과 더불어 부질없이 번영을 다투어 무엇 하겠는가. 생각하건대 사람이 나고 죽는 것, 또 한때 성했다가 곧 쇠하여 스러지는 것이 누구의 탓이겠는가?

그저 자연계의 출렁이는 큰 물결일 뿐이니, 가을 소리를 탓하여 무엇 하겠는가.

밤이 깊었는가? 동자는 대답도 없이 머리를 떨군채 졸고 있다. 다만 들려오는 것, 사방 벽에서 벌레우는 소리만 직직직직. 그 소리 나의 시름을 달래 주려는 듯하네.


 김홍도는 왜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성부도를 그렸을까? 1805년 11월 29일 김홍도는 지인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로부터 김홍도가 추성부도를 그린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다.


“가을부터 위독한 지경을 여러차례 겪고 생사간에 오락가락했으니 오랫동안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중에 한 해의 끝이 다가오니 온갖 근심을 마음에 느껴 스스로 가련해 한들 어쩔수가 없습니다”


 조선 최고를 호령했던 위대한 화가 김홍도, 그러나 그도 이제 자신의 죽음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것이다. 김홍도는 한때 종5품의 충청북도 연풍 현감도 지냈지만 재산은 모두 말랐고 자식과도 멀리 떨어져 늙고 병들어 의탁할 곳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말년의 김홍도가 젊어서부터 유학 공부를 하며 외우다시피 했던 고문진보의 추성부를 이때 떠올린 것은 자연스런 일일듯싶다. 김홍도는 자신의 마지막 화혼을 이 작품에 쏟아부었으리라. 그림을 보면 그 흔적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물기가 적은 거친 갈필로 그려낸 배경은 조선의 평범한 양반 가문은 아닌듯하다. 아마 중국 송나라의 어떤 사대부집을 상상했을 것이다. 집 가운데 초로의 구양수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여기서 말년의 김홍도가 오버랩된다.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늙은 선비는 김홍도 자신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초로의 남자는 동자에게 밖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를 정체를 알아보라고 한다. 동자는 서남쪽에서 나는 소리는 그저 바람이 나무에 스쳐 지나가는 소리일뿐입니다라고 한다. 초로의 남자가 들었던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추성부 원글을 다시 보면 그 소리는 대단히 시끄럽고 요란하고 두려운 소리로 한껏 과장되어 묘사되어 있지만 실은 늦가을 밤 서남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뒹굴고 서로를 마찰하는 나뭇가지와 낙엽들이 구르는 소리일 뿐이다. 그렇다. 가을의 소리, 우리는 평소 그 소리에 무심하지만 바람 부는 날 자세히 들어보면 온갖 가을 낙엽이 도로에 구르는 소리는 전혀 예사롭지 않다. 쏴르르르 쏴아악.. 바짝 말라 무게도 거의 없을법한 낙엽들이 그렇게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세상과 풍경을 뒹굴고 있다니.. 깊고 조용한 가을, 늦은 밤 갑자기 몰아친 북풍에 온갖 나뭇가지와 낙엽들이 흔들리는 소리는 구양수의 표현대로 천군만마가 돌진하는 듯 두렵고 괴이한 소리로 들릴 것은 분명하다. 누군들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구양수는 황급히 집안의 동자를 불러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보라고 시키지만 돌아오는 동자의 대답은 그저 나뭇가지 사이의 바람 소리일뿐입니다(聲在樹間). 구양수 탄식하여 말하길, 아 그소리가 바로 가을의 소리였구나. 기다리지도 않던 가을이, 누가 오라고 하였기에 벌써 왔단 말인가.


 세월이 흐르는 소리였고 여름내내 치열하고 푸르게 삶의 활력을 뿜어내던 그 싱싱한 산천초목이 모두 말라비틀어지고 사그라져가는 비명이었던 것이다. 인간으로 치면 중년 이후 노년에 접어들어 몸은 병들고 하는 일들은 힘에 부쳐 정신은 나날이 흐려져 가는데 먼 미래를 기약할 수 없고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커져 가는 시절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올랐다.


“마흔 살에는 의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는 귀로 들으면 순순히 이해되었으며, 일흔 살에는 마음이 하고 싶은 것을 따라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공자가 자신의 인간적 성장을 담담히 표현한 이 대목에서 내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바로 이순(耳順), 예순살에 귀로 들으면 순순히 이해되었다는 구절이다. 주희의 주석을 보면 耳順은 듣는 것을 모두 통달한다고 되어 있다. 사람의 일, 세상의 그 어떤 일이나 사건을 들어도 그 원리나 이치를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경지다. 그러나 나는 이순을 좀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이순의 순을 한자 원래의 의미에 충실하게 순하다, 순응하다, 순종하다의 뜻으로 본다면 이순은 귀가 순해진다. 듣는 것이 순해지고 순응하게 된다의 의미로도 충분히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부터 유학을 공부해 왔던 단원 김홍도가 추성부도를 그린 시기는 그의 나이 예순, 논어의 위정편에 나오는 이순의 나이와 같다. 김홍도는 그림뿐만 아니라 음악에 능했고 유학의 학문도 꽤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가 평생 유학이나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상적 군자의 모습이 되기 위해 수련했다면 이순의 김홍도는 세상일이나 사람의 일 어느 것 하나도 순리를 잘 파악할 수 있을 나이이리라. 그러나 이순의 김홍도가 순리대로, 순응하여 들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소리, 바로 추성, 가을의 소리였을 것이다. 그 소리는 자신이 직면한 죽음을 예고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순의 김홍도도 거슬릴 수 밖에 없는 소리다.


 추성부도를 그리기 전 김홍도는 나이 들고 병들어 의탁할 곳 없었으며 객지를 떠돌다가 늦가을 밤 구양수가 들었던 그 가을의 소리를 김홍도 자신도 들었으리라. 자신의 남은 운명을 직감하고 김홍도는 마지막 붓을 들어 올렸다. 늦은 가을밤, 홀로 앉아 혼신의 힘을 다해 거친 갈필로 붓을 움직이는 김홍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관직까지 내려주었던 성군 정조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떳고 자신의 그림 한 장을 얻기 위해 비단을 들고 줄을 서던 사대부 양반들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병마에 시달리며 자식의 학비조차 도울 수 없고 지인들에게 의탁하며 남은 삶을 연명해야 하는 처지. 구양수의 추성부를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깊이 음미한 김홍도는 자신의 그림 왼쪽에 추성부 전문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추성부의 마지막 두 글자는 별도의 공간에 강조하듯 써 넣었다. “歎息”(탄식!)




 얼마전 나태주 시인이 나온 방송을 우연히 보았다. 시인은 딸에게 “ 내 묘비 앞에서 슬퍼하지 마라, 나의 부재를 생각하지 말고 너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렴” 시인의 서늘한 이 한마디에 나는 찬물에 세수한 듯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렇다. 인간은 필멸하는 존재다. 메멘토 모리.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을 관찰해서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경험적 지식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필연적으로, 실존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주저한다. 내가 언젠가 죽을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그 가능성이 나에게 지금 100퍼센트 확률로 닥쳐올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의 부정성을 제거하려고 애쓴다.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되도록 피하고 싶어한다. 사실 우리 삶의 모습이 그렇다. 종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며 그렇게 살다가는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 허덕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져버린다. 어차피 죽을 건데 이짓은 해서 뭐해라고. 그래서 우리의 청춘은 소멸과 죽음을 믿지 않고 영원히 살 것 같이 열정적이다. 그 열정은 인간의 삶과 문명을 이끌어온 주동력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죽음과 소멸의 공포는 추상적이고 멀리 있을 때 더 커진다. 죽음과 소멸을 더욱 더 멀리 피하기만 할 것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육체는 소멸의 가능성이 점점 더 농후해지기만 하는데 말이다.그러므로 여기서 필요한 것은 소멸을 오히려 다 자주 떠올려보는 역설이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자주 생각해보고 생의 무상함이 나의 삶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천천히 깊에 들여다보고 관조함으로서 삶을 더 선명하게, 더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게 된다. 남방불교의 수행법 중에는 생명이 꺼진 우리의 육체가 어떻게 부패 되어 백골화 되어가서 한 줌 먼지로 사라지는지 그 과정을 끊임없이 떠 올리는 명상법이 있다. 2,600년 전 붓다는 생노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하였는데 붓다의 해결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세상 모든 것의 무상함을 직시하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만약 1년뒤에 죽는다면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해진다. 지극히 지엽적이고 사소하고 의미없는 싸움과 논쟁에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내게 가장 소중한 것들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이유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유한한 존재임을 늘 상기한다면 단 1분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지 않은가. 인지과학쪽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상실과 부정적인 사건을 겪으며 성장한다고 한다. 슬픔이 인지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이 계속 남아있다는 것. 슬픔은 집중력을 강화시키고 실수로부터 배우도록 만들어 일의 생산성도 높여준다고 한다. 죽음과 소멸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슬픈 사건이다. 그러나 그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피하지 않고 찬찬히 관조 해보는 것은 삶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필멸하기 때문에, 내가 유한 하기 때문에 내 행동과 생각의 틀을 완전히 새로 짤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내 주변에 가족, 친구, 동료, 지인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더 해야되지 않을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불안하다. 거대한 강은 바다로 가는 길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기에 여유롭기 그지없지만 폭우에 미친 듯이 흐르는 흙탕물은 돌과 바위에 이리저리 부딪히고 어디로 갈지 몰라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어 황망하기만 하다. 삶에 목적은 없지만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나는지 잘 안다면 우리는 나중에 자연이 내미는 소멸이라는 청구서를 받아도 참 잘 썼습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김홍도의 추성부도가 따뜻한 위로가 되는 이유는 그도 나도, 우리 모두 같은 가을의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가을에 들리는 소리가 이제는 편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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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 김동인 단편전집 1 - 배따라기, 태형, 광염 소나타, 배회, 약한 자의 슬픔 외 36편 한국문학을 권하다 3
김동인 지음, 구병모 추천 / 애플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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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약한자의 슬픔> 김동인 처녀작

1919년 2월 3일 김동인 자신이 발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에 발표한 소설이 소설을 읽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데 2025년인 지금부터 무려 106년 전에 쓰여진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오래되고 낡은 느낌이 없었다는 점이다그리고 무엇보다 무척 재밌게 쓰여진 소설이었다김동인의 처녀작이라고 하는데 처녀작치고는 너무나 완성도가 높지 않은가게다가 김동인이 1900년 생이므로 이 소설은 김동인이 불과 약관의 나이에 쓴 첫소설.


 이 소설이 발표된 1919년 2월 3일이면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한달전당시 조선 전국토가 일본제국주의 군화에 짓밟히고 신음하던 시대였다고 역사 교과서는 말하고 있고 당시 모든 조선인들은 오로지 식민지 독립만을 열망하고 있었을 거라고 여겼으니 문학이니 낭만이니 이런건 사치에 불과하지 않았던 시대였지 않았나하는 내 편견을 말끔히 때려부순 작품국어 교과서 지문에서나 부분 부분 조금씩 접할 수 있었던 근대 한국문학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김동인의 이 처녀작 하나만을 읽었을 뿐인데 당시 한국문학 수준이 이 정도로 높고 성숙했었다는 것이 놀라웠고 온몬에 전율이 일었다당시 문학가들의 문학적 성취란 정말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요즘 한국 문학작품 읽을거리가 없었던 터라 우리 근대문학이라는 새로운 읽을거리 발견에 즐겁기도 했다김동인하면 <감자>,<배따라기>가 너무나 유명하지만 내가 지금 내가 읽는있는 김동인 전집은 그의 작품을 발표순으로 편집해서 처녀작<약한자의 슬픔>을 맨먼저 읽게 되었다이 소설에 대해 내 느낌을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설의 주인공 강 엘리자베트.

권력과 재력이 있는 가문에서 방과후 선생 노릇을 하면서 숙식을 제공받아 학당에 다니는 스므살 여자부모도 형제도 없는 고아출신인 듯한데 당시 여자나이 20살까지 교육을 받고 있었다는 설정은 엘리자베트가 당시 근대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신여성임을 짐작케한다.
이 소설은 처음에 평범한 로맨스 소설같아 보였는데 읽어나갈수록 꽤 무겁고 어두운 소재를 다루고 있다양반집 주인 남작이 엘리자베트의 방을 찾아오면서 모든 비극과 갈등이 시작된다남작과 육체적 관계를 맺어가는 대목이 무척 흥미로운데 적극적으로 남작을 거부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비난하고 부끄러워 하면서도 어느새 그녀는 남작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어간다는 묘사그럴만하다비록 신교육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전근대의 악습과 관행이 힘을 쓰던 시대였고 여자가 독립적으로 살기엔 어려웠을 것이니 가난한 시골출신의 엘리자베트에게는 남작의 부정행위가 신분상승의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소설에서 엘리자베트는 똑똑한 신여성으로 묘사되지만 그녀 역시 세속적 인간이고 원초적 욕망을 가진 인간임을 김동인은 놓치지 않았다남작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부분은 제법 에로틱하다남작의 욕정을 채우는 비극적 순간에 난데없이 에로틱한 느낌이란 또 무엇인가그런데 그 비극적 상황에서 스며나오는 정념에 이질감이나 거부감이 들지않는 점도 신기하다근대문학사 책들을 보면 김동인은 극단적인 문학지상주의자탐미주의자라고 평가하는데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직접적인 묘사없이 간결하고 절제된 문장만으로도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기법에 능해서 읽는 내내 김동인이라는 작가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탐미주의자 김동인이 작품 주인공 엘리자베트 불과 20살의 여인이었고 남작의 아이를 지우려 병원에 가는 동안 전차에서 남자들의 시선을 즐기기도 하고 병원 의사가 진찰하면서 자신을 만지는 동안 의사의 손길에서도 야릇한 쾌감을 느끼기도 하는 묘사들.. 당시 억압된 성에 서 눈을 떠가는 신여성들의 모습이었던가하지만 김동인은 진취적인 신여성들을 혐오했다고 하는데 소설속 엘리자베트의 이런 이중적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는 단편소설이라는 분량의 한계 때문에 어려울 것 같다.

 

 엘리자베트는 남작의 아이를 지우는데 실패하는데 병원 의사가 가짜약을 줬기 때문이다가짜약이라니.. 여기서 소설적 재미와 긴장감이 배가된다아이를 지우는 약이 당시 있었을까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만일 정상적으로 아이를 지웠다면 소설의 행방과 결말은 어찌되었을까엘리자베트는 아이를 지우고 못하고 결국 남작의 집을 떠나게 된다그녀는 시골로 가서 남작에게 정조유린에 대한 배상서생아의 승인신문상 사죄광고 게재 청구소송을 걸게 되지만 재판부는 엘리자베트의 주장에 신빙성도 없고 증거도 없다며 재판자체를 기각해버린다재판에 패소하여 그 충격으로 앓아눕게 된 엘리자베트신열을 앓다가 결국 아이를 사산하게 된다사산한 핏덩이를 손에 쥐고 그녀는 약한 자의 슬픔을 생각한다자기의 설움열패자의 설움좀 더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피력하지 못했던 약함그 약함을 엘리자베트는 표본생활 20년이라고 했다자신의 20년 인생이 약한 자의 슬픔의 전형적인 표본이라고 한 것이다그녀는 유산후 더욱 날카로워진 이성을 가동하여 뜬금없이 인류애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렇다나도 시방은 강한자이다자기의 약한 것을 자각할 그때에는 나도 한 강한 자이다강한 자가 아니고야 어찌 자기의 약점을 볼 수가 있으리요어찌 알 수 있으리요?(그의 입에는 이김의 웃음이 떠올랐다)

-중략-

만약 참 강한 자가 되려면은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우주에 널려있는 사랑자연에 퍼져있는 사랑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사랑그렇다 내 앞길의 기초는 이 사랑그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그의 앞에는 끝없는 넓은 세계가 벌여 있었다누리에 눌리어 살던 그는 지금은 그 위에 올라섰다그의 입에는 온 우주를 쳐 누른 기쁨의 웃음이 떠 올랐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엘리자베트가 실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뜬금없이 거대한 사랑 담론이 펼쳐지긴 하지만 엘리자베트가 몰락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열린 결말에 나도 즐겁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이 소설을 읽는 내내 엘리자베트를 은근히 응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동인은 1900년 태어나 1951년에 사망했다지금의 내 나이에 죽은 것이다그의 말년은 행복하지 않은듯하다약물중독(아마 마약인듯)과 지병에 시달렸는데 6.25 한국전쟁때 그는 몸이 아파 한강을 건너 피난을 가지 못했다몸져누운 상태서 북한군에게 심문을 당했고 그 다음해 사망했다고 한다불과 50년 남짓 생존했던 김동인생전에 장편 15편 이상과 단편 75편을 발표한 다작 작가였다그의 짧은 삶에서 아쉬운 것은 그가 너무 일찍 타계하여 말년에 집필중이던 장편역사소설<을지문덕>의 완성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다그의 단편전집은 애플북스라는 출판사에서 <김동인단편전집1>, <김동인단편전집2> 총 2권 출판되어 있다내가 지금보고 있는 김동인 전집이다. 김동인 단편전집에는 얼마전 영화화된<파과>로 유명한 구병모 작가가 쓴 김동인 소개글 '바랜 붉은 빛'이라는 글도 정말 재밌고 흥미롭게 읽었다. 김동인을 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구병모의 추천글을 읽어봤으면 한다. 김동인에 대한 이해가 훨씬 깊어질 것이다. 


 김동인이 말년에 약간의 친일행적을 보인점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 친일행적이 그의 문학적 성취에 드리운 그림자는 그리 짙어 보이지는 않는다동시대 활동했던 춘원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이 이광수의 친일행적으로 인해 무색해진 것에 비해 김동인의 작품에 계몽주의 이념이 크게 녹아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그의 친일행적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이것은 물론 내 개인적 느낌일 뿐이지만 앞으로 계속 그의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나가면서 확인해 볼 숙제로 남겨둔다그의 친일이 말년에 약물중독과 망가진 신체에서 정신이 무너져 내린 결과의 과오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도 있는데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글에서 그의 친일에 대한 공과에 대한 평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아니다역사가와 문학평론가들이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 많은 연구나 논평을 해왔을 것이므로..

 

오늘은 2025년 8월 15일 광복 80주년이다당시 식민지 시대를 견뎌낸 우리 선조들의 고단했던 몸과 정신을 생각해본다그들이 포기하지 않았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지 않은가.. 희망을 잃지 않고 묵묵히 삶에 매진했던 선조들에게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약한자의 슬픔>줄거리

주인공 강 엘리자베트. 시골출신, 약관의 나이, 경성에서 학당을 다니며 양반집 자제 방과후를 돌봐주면서 그 집에서 기숙한다. 엘리자베트는 매일 등굣길에서 마주치는 청년 이환을 편연(짝사랑)하지만 감히 고백을 하지 못하고 애태우기만 한다. 한편 자신이 기숙하는 양반집 주인 남작은 엘리자베트를 밤마다 찾아와 육체적으로 유린한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저항한번 해보지 못하고 급기야 남작의 아이까지 임신하고 만다. 남작의 후처가 될 수도 없고 정조를 잃은 상태로 짝사랑하던 청년 이환도 포기하고 학업조차 그만두고 파멸하게 되고 경성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서 남작에게 손해배상의 재판을 청구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녀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결내리고 패소한 그녀는 신열을 앓다가 뱃속의 아이를 유산한다. 유산되어 쏟아진 자신의 아이, 그 핏덩이를 안고 약한자의 슬픔을 오열하다가 마침내 강한자가 되기로 한다. 하기싶은 일을 자유로이 하는 자가 비로소 강한자가 될 것이고 거기서 사랑과 진리를 발견하게 되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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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닮고 싶다


국가하천 낙동강변에서 물빛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거대한 물줄기는 소리도 없이 흐른다물빛은 순해지고 햇볕은 물에 부서져 눈이 부시다. 강변 낮은 웅덩이에는 팔뚝만한 가물치가 떼 지어 헤엄치고 개구리, 두꺼비가 알을 낳는다. 산수유, 매화가 피고 버들강아지 솜털은 통통해진다. 이곳에 오면 세상사 일은 잠잠해지고 나는 어느새 차분해진다. 날뛰던 기억과 추억과 불안은 여기선 힘을 못 쓴다. 봄이 오는 강가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만하다. 강물은 망설임 없이 바다로 흘러가는데 나는 항상 무얼 망설이는 것일까? 강은 제 스스로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흐른다. 그 흘러가는 모습은 너무나 편안해 보인다. 나도 저 낙동강처럼 이유없이 살아도 편안해지고 싶다. 저 강을 닮고 싶다


2025.3월. 봄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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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구걸할 때, 사랑을 받는 것으로 여길 때, 내가 준 사랑에 대해 보답을 받으려고 할 때, 사랑은 갈등과 눈물의 씨앗이 된다.

​ 사랑은 시작되는 순간 이미 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 사람의 존재에서 느끼는 기쁨을 통해 나는 이미 사랑에 대한 보답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거래를 하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를 바라고, 그 사람을 소유하고 독점하려고 하며, 그러한 바램이 충족되지 않으면 상대방을 원망한다. 그럼으로써 그 관계는 착취로 변질된다.

​ 사랑이 착취와 거래로 변질되는 이유는 '나'를 지키려는 욕망 때문이다. 지켜야 할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착각, 사랑을 받아야만 '나'의 결핍이 채워진다는 착각 때문이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애초에 지킬 수도 없고 채울 수도 없으며,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이 텅 비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투심은 무명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감정이다.

​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고 해서 충족되는 것도 아니고,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결핍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텅 빈 그 자체로 충만하다. 사랑받고 싶은 이유는 생각과 기억의 다발에 불과한 '나'라는 허상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허상은 지킬 필요도 없고 채울 필요도 없다. 허상인줄 알면 그뿐이다.

​ 실체 없는 허상인 '나'를 타인의 사랑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은 소금물로 갈증을 해소하려고 애쓰는 것과도 같다. 사랑을 갈구하는 한 끝없이 목마르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나'는 텅 빈 피리이기에 어떤 바람도 나를 채울 수 없고 그저 통과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을 뿐임을 모르는 것이다.

​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자립한 사람들이 함께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의존하지 않고, 아무런 기대와 조건 없이, 지금 여기에서 사랑할 수 있다. 그 사랑을 실체화하여 그것이 영원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립은 사랑의 필수 조건이다. 홀로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미소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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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 길고양이와 함께한 1년 반의 기록 안녕 고양이 시리즈 1
이용한 지음 / 북폴리오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딸아이에게 줄 책 선물로 고양이를 다룬 책을 찾아보다가 이용한 시인이 쓴 고양이 3부작 포토에세이집이 눈에 띄었다. 이용한 시인 약력을 살펴보니 시인이었고 고양이 작가로도 유명한 분이셨다. 3부작중 첫번째 책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는 품절이라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구입했는데 내친김에 3부작 전체를 알라딘중고에서 구입했다^^

출판순서로 보면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명랑하라 고양이>,<나쁜 고양이는 없다> 이렇게 되겠다. 세 권 모두 공히 이용한 작가의 주변에서 살아가는 길고양이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은 책과는 거리가 멀고 스마트폰 게임(배틀그라운드를 열심히 하는데 세상에, 여자 아이가 배틀그라운드를 즐기다니..)에 너무 빠져 있는 현실을 타개할 묘책이 없을까 고민했다. 마침 딸은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기에 그렇다면 고양이를 주제로 한 책을 선물해 준다면 글을 좀 읽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 점에서 이용한 작가의 고양이3부작 포토에세이가 제격이었다. 일단 내가 3권을 속도으로 훑어봤는데 상당히 좋은 책이다. 작가는 동네에서 만난 길고양이들의 생노병사, 희로애락을 정갈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그려 보인다. 길고양이에 대한 한없이 따뜻한 시선과 사랑이 느껴지고 페이지마다 가득찬 이쁘고 귀여운 길고양이들 사진을 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저자의 세밀하고 집중력 있는 관찰력 덕분에 길고양이들은 저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새로 태어난다. 저자는 책에 등장하는 수십마리의 길고양이들에게 모두 이름을 달아주었다. 딸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은 분명한데 혹시나 딸이 고양이 사진만 대충 후루룩 훑어보고 책을 탁 덮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왜냐하면 길고양이들 사진뿐만 아니라 작가가 담담하게 따스한 문장으로 써 내려간 길고양이들의 삶에 대한 보고서를 읽히는게 원래 목적이었으니까.. 어쨋든 딸아이가 한동안 스마트폰 대신 이 책들을 좀 열심히 뒤적여주면 좋겠다.

 

 

 고양이 3부작 중 가장 안타깝고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2권 <명랑하라 고양이>에서 길고양이 바람이가 기생충 감염으로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는 부분이었다. 이용한 필자가 새로운 동네로 이사와서 처음으로 만난 녀석이었고 먹이주기 3개월만에 겨우 모습을 드러낸 정말 바람같은 녀석이다. 먹이를 먹으로 올때도 먹이를 먹고 갈 때도 늘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졌다. 필자는 그래서 녀석 이름을 바람이로 지었다고 한다. 필자가 각별한 애정을 쏟은 녀석인데 어느날 바람이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린채로 나타난다. 눈에서 고름이 흐르는 바람이를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검사해보니 기생충 감염이었다. 야생에서 감염된 기생충이 뇌를 파고들어 전신을 마비시키는 무서운 병이었다. 치료할 약도 없고 속수무책으로 바람이는 온몸이 마비되어 죽어갔다. 길고양이 바람이는 이름 그대로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갔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처럼.. 바람이는 평소 자주 다니던 꽃다지 방죽에 묻혔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바람이가 끝내 애석하고 섭섭해서 이용한작가는 바람이의 무덤에 민들레 한 포기를 심어준다.

                늠름했던 왕초 고양이 바람이

 

 

 바람이가 묻힌 꽃다지 방죽에 민들레 한 포기가 피어있다.

 

 길고양이들이 삶은 쉽지 않다. 차에 치어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수많은 길고양이들뿐만아니라 고양이를 혐오한 동네 어른이 놓아둔 쥐약을 먹고 길고양이 온가족이 급사하고 자동차에서 흘러나온 부동액을 먹은 녀석들도 허무하게 삶을 마감한다. 이용한 작가의 말에 따르면 길고양이 평균 수명은 대략 3년정도. 집에서 키우는 집고양이 수명 15년에 비하면 놀랍도록 짧은 삶이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길고양들중에서 3년 이상을 사는 녀석이 드물어 보인다. 작년에 봤었던 길고양이를 해를 넘겨 다시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녀석들의 삶은 조건은 가혹하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도 생존의 조건이 녹록치 않겠지만 유독 길고양이들의 삶이 힘들어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생존 공간과 인간들의 생활 공간이 가장 밀접하게 중첩되기 때문일 것이다. 먹이를 얻을 가능성이 많은 곳은 바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간이기에 길고양이들도 도시에서 살아가는 개체수가 훨씬 많다. 다른 종과 상생할 줄 아는 법을 아직 제대로 터득하지 못한 인간들 세상에서 공생을 시도해야 하는 길고양이들에게 가장 위험은 적은 바로 인간이다. 생각해보면 길고양이들이 사람들이 챙겨주는 사료나 음식같은 먹이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현실은 정말 안타깝다. 그들은 애초에 자연과 야생에서 인간의 조력없이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었으나 이제 그들이 마음놓고 사냥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대신, 사람들의 공간에서 불규칙적으로 공급되는 한정된 먹이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된 것이다.

내 차 트렁크에는 늘 고양이 사료 한봉지가 있다. 어느 곳을 가든 고양이들이 눈에 띄고 그 중에서 배고픈 녀석들한테 사료를 놓아두고 간다. 녀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엔 역부족이지만 한끼라도 든든히 먹고 힘내서 생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도 여전히 명랑하라 고양이들아!. 좌절과 실패는 분별심으로 가득찬 인간들의 언어일뿐 고양이들은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잘 살아남을 것이다.

 

 

ps. 내가 만난 길고양이 이야기

 

 동네 편의점 앞에 출몰하던 누렁이.

길고양인데도 사람들한테 거부감이 없었다. 편의점 앞 의자를 아예 전세내고 누워있던 놈인데 재작년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기전에 사라졌다. 그 후로 1년이 지나 현재까지 다시 볼 수 없었다.  

 

 우리 시골 어머니집에 출몰하는 욕심쟁이와 겁쟁이.  

아래 검은털과 갈색털 조합이 욕심쟁이 암컷, 누워서 노는 노랑이가 겁쟁이 수컷이다. 둘은 모자사이인데 욕심쟁이가 겁쟁이 어미다. 욕심쟁이는 먹이를 혼자 독차지하는 못된 습관을 가진 덕에 딸아이가 붙여준 이름이고 겁쟁이는 먹이를 줘도 경계심이 너무 강해 사람한테 접근하지 않는 성격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고양이의 외모가 아닌 성격으로 이름을 붙여준 딸이 참 재밌다.

어미 욕심쟁이는 제법 나이가 들었다. 대략 7년 이상을 산 것으로 추정된다. 먹이에 욕심이 많아서 자기 자식인 겁쟁이가 사료를 같이 먹으려고 접근하면 앞발로 냅다 후려패버린다. 하긴 아들인 겁쟁이는 이미 젖을 뗀지 1년이 훨씬 지났건만 아직도 어미곁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겁쟁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게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겁쟁이가 성묘가 되자 욕심쟁이는 앞발로 후려치는 짓을 그만두고 모자가 나란히 겸상을 해서 다행이었다.

 

겁쟁이가 성묘가 되자 비로소 겸상을 하는 어미 욕심쟁이.

수컷인 겁쟁이가 어미보다 덩치가 훨씬 크다. 욕심쟁이는 일년에 3~4차례 정도 새끼를 놓는다. 거의 매달 임신상태인 셈인데 그래서 촌에 갈때마다 사료와 간식을 듬뿍 주고 온다. 시골에 혼자 사시는어머니는 고양이를 굉장히 싫어하셔서 늘 녀석들이 나타나면 "저놈에 꼬내이들 다 잡아야 된데이" 하시면서 고양이 밥그릇도 치워버리는 분이라서 "제발 우리들이 없는 사이 고양이 사료 좀 주세요" 라고 부탁하기 곤란한 형편이다. 두 녀석은 사는 곳이 일정치 않다. 욕심쟁이는 원래 이웃집 할아버지댁 집고양이였는데 지금은 길고양이가 되어 버렸다. 동네 어귀에서도 보이고 들판에도 보이는 것으로 보면 집고양이 정체성은 이미 오래전에 버린 듯하다.

 

욕심쟁이, 겁쟁이, 그리고 점박이.

겁쟁이와 점박이 둘다 욕심쟁이 자식이다. 우리가 시골집에 갔다가 떠나올 때면 녀석들은 어김없이 저런 일령횡대 집합 자세로 우두커니 바라본다.

사람들아! 사료랑 먹이 좀 자주 가져오란 말이다! 이렇게 시위하듯이 쳐다보는 것 같아 괜히 짠하다. 내일부터 또 다시 혹독한 추위가 찾아온다고 한다.

 안녕 고양이들아, 추위 잘 견디고 다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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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1-29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속의 고양이 이야기보다 실제 길고양이를 만난 후기가 더 재미있고,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

파트라슈 2021-01-29 21:38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