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이 거의 다 떨어지고 차가운 북서풍이 어김없이 불어오는 이 계절이 되면 늘 다시 찾아보는 그림이 있다. 바로 김홍도의 추성부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소장했고 가장 아꼈던 그림이라고 한다. 나는 올해 가을 내내 이 그림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간 봐왔던 단원 김홍도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그림이었다. 해학적이고 서민적이었던 온갖 풍속화들과 달리 이 그림은 먹물 번짐 기법도 거의 없는 바싹 마른 갈필로 나뭇잎이 거의 다 떨어진 나목들이 거센 북풍에 시달리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림에서 싸늘한 냉기가 서려 나올 듯 스산하기만하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추성부도는 보면 볼수록 그 그림 속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처음 봤을 때는 서글펐지만 자꾸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따뜻한 위안을 얻게 된다. 그림의 내용은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정경이지만 그 배경색은 따뜻한 파스텔톤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도 세월의 흐름 앞에선 우리 같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은 서글픔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위안이라는 것은 그저 좋은 말이 아니라 공감한다는 것. 너도나도 우리는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고 그 슬픔을 언어와 문자와 그림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




추성부도는 말년의 김홍도가 구양수의 추성부를 읽고 그 감상과 느낌을 그린 그림이다. 김홍도를 연구한 미술학자들은 추성부도를 김홍도의 살아생전 마지막 작품이라고 했다. 김홍도가 추성부도를 그린 시기는 1805년. 61세때이다. 그 이후 김홍도의 작품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홍도가 마지막으로 그린 이 그림의 영감을 제공한 구양수의 추성부란 무엇인가? 구양수은 중국 당나라때의 문장가로 고문진보에 그의 산문 추성부가 실려있다.


 추성부(秋聲賦). 말 그대로 秋聲(가을소리)에 대한 賦(송대에 유행한 산문형식). 쓸쓸한 가을 소리를 듣고 만물이 쇠락해가는 가을의 슬픔을 나타낸 명문장이다. 아래는 추성부 전문이다.


 때는 바야흐로 밤, 구양자(구양수)가 책을 읽고 있었는데, 서남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구양자는 이 소리에 섬뜩 놀라 중얼거렸다.

“이상도 하구나, 처음에는 그 소리가 비오는 소리 같더니 이내 음산하게 울부짖는 바람 소리로 변하고 그런가 하면 갑자기 파도가 기운차게 바위벼랑에 부딪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 마치 놀라 파도가 한밤에 곤두박질치고, 비바람이 느닷없이 휘몰라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중략-

구양자는 하도 괴이쩍어, 동자에게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밖에 나가 알아보라 일렀다.

한참 뒤, 동자가 들어와 말했다.

”하늘에는 별과 달이 눈부시게 희고 맑으며, 은하수 또렷학여 손에 잡힐 듯합니다. 사방 어디에도 인적이라곤 없으니, 그 소리는 분명 나뭇가지를 울리고 간 바람 소리입니다.“

나는 탄식하여 말했다.

”아, 슬프도다. 그 소리가 바로 가을 소리였구나. 기다리지도 않던 가을이, 누가 오라 하였기에 벌써 왔단 말이냐.“

-중략-

”젊어서는 그토록 붉고 곱던 얼굴이 어느세 늙어 고목처럼 되었고, 칠흑같이 검던 머리는 어느새 서리 맞은 듯 희어졌다. 금석처럼 단단한 바탕을 타고나지도 못한 몸으로, 덧없는 생명을 재촉하여 초목들과 더불어 부질없이 번영을 다투어 무엇 하겠는가. 생각하건대 사람이 나고 죽는 것, 또 한때 성했다가 곧 쇠하여 스러지는 것이 누구의 탓이겠는가?

그저 자연계의 출렁이는 큰 물결일 뿐이니, 가을 소리를 탓하여 무엇 하겠는가.

밤이 깊었는가? 동자는 대답도 없이 머리를 떨군채 졸고 있다. 다만 들려오는 것, 사방 벽에서 벌레우는 소리만 직직직직. 그 소리 나의 시름을 달래 주려는 듯하네.


 김홍도는 왜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성부도를 그렸을까? 1805년 11월 29일 김홍도는 지인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로부터 김홍도가 추성부도를 그린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다.


“가을부터 위독한 지경을 여러차례 겪고 생사간에 오락가락했으니 오랫동안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중에 한 해의 끝이 다가오니 온갖 근심을 마음에 느껴 스스로 가련해 한들 어쩔수가 없습니다”


 조선 최고를 호령했던 위대한 화가 김홍도, 그러나 그도 이제 자신의 죽음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것이다. 김홍도는 한때 종5품의 충청북도 연풍 현감도 지냈지만 재산은 모두 말랐고 자식과도 멀리 떨어져 늙고 병들어 의탁할 곳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말년의 김홍도가 젊어서부터 유학 공부를 하며 외우다시피 했던 고문진보의 추성부를 이때 떠올린 것은 자연스런 일일듯싶다. 김홍도는 자신의 마지막 화혼을 이 작품에 쏟아부었으리라. 그림을 보면 그 흔적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물기가 적은 거친 갈필로 그려낸 배경은 조선의 평범한 양반 가문은 아닌듯하다. 아마 중국 송나라의 어떤 사대부집을 상상했을 것이다. 집 가운데 초로의 구양수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여기서 말년의 김홍도가 오버랩된다.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늙은 선비는 김홍도 자신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초로의 남자는 동자에게 밖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를 정체를 알아보라고 한다. 동자는 서남쪽에서 나는 소리는 그저 바람이 나무에 스쳐 지나가는 소리일뿐입니다라고 한다. 초로의 남자가 들었던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추성부 원글을 다시 보면 그 소리는 대단히 시끄럽고 요란하고 두려운 소리로 한껏 과장되어 묘사되어 있지만 실은 늦가을 밤 서남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뒹굴고 서로를 마찰하는 나뭇가지와 낙엽들이 구르는 소리일 뿐이다. 그렇다. 가을의 소리, 우리는 평소 그 소리에 무심하지만 바람 부는 날 자세히 들어보면 온갖 가을 낙엽이 도로에 구르는 소리는 전혀 예사롭지 않다. 쏴르르르 쏴아악.. 바짝 말라 무게도 거의 없을법한 낙엽들이 그렇게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세상과 풍경을 뒹굴고 있다니.. 깊고 조용한 가을, 늦은 밤 갑자기 몰아친 북풍에 온갖 나뭇가지와 낙엽들이 흔들리는 소리는 구양수의 표현대로 천군만마가 돌진하는 듯 두렵고 괴이한 소리로 들릴 것은 분명하다. 누군들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구양수는 황급히 집안의 동자를 불러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보라고 시키지만 돌아오는 동자의 대답은 그저 나뭇가지 사이의 바람 소리일뿐입니다(聲在樹間). 구양수 탄식하여 말하길, 아 그소리가 바로 가을의 소리였구나. 기다리지도 않던 가을이, 누가 오라고 하였기에 벌써 왔단 말인가.


 세월이 흐르는 소리였고 여름내내 치열하고 푸르게 삶의 활력을 뿜어내던 그 싱싱한 산천초목이 모두 말라비틀어지고 사그라져가는 비명이었던 것이다. 인간으로 치면 중년 이후 노년에 접어들어 몸은 병들고 하는 일들은 힘에 부쳐 정신은 나날이 흐려져 가는데 먼 미래를 기약할 수 없고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커져 가는 시절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올랐다.


“마흔 살에는 의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는 귀로 들으면 순순히 이해되었으며, 일흔 살에는 마음이 하고 싶은 것을 따라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공자가 자신의 인간적 성장을 담담히 표현한 이 대목에서 내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바로 이순(耳順), 예순살에 귀로 들으면 순순히 이해되었다는 구절이다. 주희의 주석을 보면 耳順은 듣는 것을 모두 통달한다고 되어 있다. 사람의 일, 세상의 그 어떤 일이나 사건을 들어도 그 원리나 이치를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경지다. 그러나 나는 이순을 좀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이순의 순을 한자 원래의 의미에 충실하게 순하다, 순응하다, 순종하다의 뜻으로 본다면 이순은 귀가 순해진다. 듣는 것이 순해지고 순응하게 된다의 의미로도 충분히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부터 유학을 공부해 왔던 단원 김홍도가 추성부도를 그린 시기는 그의 나이 예순, 논어의 위정편에 나오는 이순의 나이와 같다. 김홍도는 그림뿐만 아니라 음악에 능했고 유학의 학문도 꽤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가 평생 유학이나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상적 군자의 모습이 되기 위해 수련했다면 이순의 김홍도는 세상일이나 사람의 일 어느 것 하나도 순리를 잘 파악할 수 있을 나이이리라. 그러나 이순의 김홍도가 순리대로, 순응하여 들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소리, 바로 추성, 가을의 소리였을 것이다. 그 소리는 자신이 직면한 죽음을 예고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순의 김홍도도 거슬릴 수 밖에 없는 소리다.


 추성부도를 그리기 전 김홍도는 나이 들고 병들어 의탁할 곳 없었으며 객지를 떠돌다가 늦가을 밤 구양수가 들었던 그 가을의 소리를 김홍도 자신도 들었으리라. 자신의 남은 운명을 직감하고 김홍도는 마지막 붓을 들어 올렸다. 늦은 가을밤, 홀로 앉아 혼신의 힘을 다해 거친 갈필로 붓을 움직이는 김홍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관직까지 내려주었던 성군 정조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떳고 자신의 그림 한 장을 얻기 위해 비단을 들고 줄을 서던 사대부 양반들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병마에 시달리며 자식의 학비조차 도울 수 없고 지인들에게 의탁하며 남은 삶을 연명해야 하는 처지. 구양수의 추성부를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깊이 음미한 김홍도는 자신의 그림 왼쪽에 추성부 전문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추성부의 마지막 두 글자는 별도의 공간에 강조하듯 써 넣었다. “歎息”(탄식!)




 얼마전 나태주 시인이 나온 방송을 우연히 보았다. 시인은 딸에게 “ 내 묘비 앞에서 슬퍼하지 마라, 나의 부재를 생각하지 말고 너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렴” 시인의 서늘한 이 한마디에 나는 찬물에 세수한 듯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렇다. 인간은 필멸하는 존재다. 메멘토 모리.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을 관찰해서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경험적 지식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필연적으로, 실존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주저한다. 내가 언젠가 죽을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그 가능성이 나에게 지금 100퍼센트 확률로 닥쳐올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의 부정성을 제거하려고 애쓴다.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되도록 피하고 싶어한다. 사실 우리 삶의 모습이 그렇다. 종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며 그렇게 살다가는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 허덕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져버린다. 어차피 죽을 건데 이짓은 해서 뭐해라고. 그래서 우리의 청춘은 소멸과 죽음을 믿지 않고 영원히 살 것 같이 열정적이다. 그 열정은 인간의 삶과 문명을 이끌어온 주동력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죽음과 소멸의 공포는 추상적이고 멀리 있을 때 더 커진다. 죽음과 소멸을 더욱 더 멀리 피하기만 할 것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육체는 소멸의 가능성이 점점 더 농후해지기만 하는데 말이다.그러므로 여기서 필요한 것은 소멸을 오히려 다 자주 떠올려보는 역설이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자주 생각해보고 생의 무상함이 나의 삶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천천히 깊에 들여다보고 관조함으로서 삶을 더 선명하게, 더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게 된다. 남방불교의 수행법 중에는 생명이 꺼진 우리의 육체가 어떻게 부패 되어 백골화 되어가서 한 줌 먼지로 사라지는지 그 과정을 끊임없이 떠 올리는 명상법이 있다. 2,600년 전 붓다는 생노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하였는데 붓다의 해결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세상 모든 것의 무상함을 직시하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만약 1년뒤에 죽는다면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해진다. 지극히 지엽적이고 사소하고 의미없는 싸움과 논쟁에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내게 가장 소중한 것들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이유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유한한 존재임을 늘 상기한다면 단 1분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지 않은가. 인지과학쪽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상실과 부정적인 사건을 겪으며 성장한다고 한다. 슬픔이 인지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이 계속 남아있다는 것. 슬픔은 집중력을 강화시키고 실수로부터 배우도록 만들어 일의 생산성도 높여준다고 한다. 죽음과 소멸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슬픈 사건이다. 그러나 그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피하지 않고 찬찬히 관조 해보는 것은 삶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필멸하기 때문에, 내가 유한 하기 때문에 내 행동과 생각의 틀을 완전히 새로 짤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내 주변에 가족, 친구, 동료, 지인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더 해야되지 않을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불안하다. 거대한 강은 바다로 가는 길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기에 여유롭기 그지없지만 폭우에 미친 듯이 흐르는 흙탕물은 돌과 바위에 이리저리 부딪히고 어디로 갈지 몰라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어 황망하기만 하다. 삶에 목적은 없지만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나는지 잘 안다면 우리는 나중에 자연이 내미는 소멸이라는 청구서를 받아도 참 잘 썼습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김홍도의 추성부도가 따뜻한 위로가 되는 이유는 그도 나도, 우리 모두 같은 가을의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가을에 들리는 소리가 이제는 편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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