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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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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유명한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
  그는 1978년, 20대 초반에 알래 

  스카로 이주해 1996년 캄차카반

  도에서 불곰의 습격을 받아 목숨

  을잃기까지 20여 년간 알래스카

  에머물며 알래스카의 자연을 담 

  아낸 세계적인 야생 사진가이다.

 

  호시노 미치오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내가 자주 찾는 사이트 지리산 닷컴   (www.jirisan.com)의 주인장이 이 책을 읽고 쓴 글을 본 후였다. 지리산 닷컴 이라는 사이트의 주인장도 역시 사진작가이다. 지리산 닷컴이라는 홈페이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먼저 이곳부터 방문해보시길... 아름다운 지리산의 풍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순박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를 보고나서 사진에 대한 나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진이 엄연한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진에 대해 잘 몰랐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사진은 그저 멍하니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책의 표지를 넘기면 압도적인 알래스카의 풍경과 야생동물 사진이 펼   쳐지고 40 여 년간 알래스카의 툰드라에서 에스키모가 되어 살아온 백   인 밥 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밥 율은 원주민 에스키모 여인인 캐리와 결혼해서 평생을 알래스카의 혹한에서 사냥과 채집으로 자급자족하며 살아왔다. 밥과 호시노는 오랜 친구이다.

 

 책의 중간 중간에 알래스카의 풍광과 야생동물을 담은 사진이 펼쳐지는 가운데 알래스카에 불어 닥친 거대한 화폐경제의 물결에 휩쓸려가는 에스키모와 내륙 원주민들의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이어진다. 알래스카의 위대한 자연에 이끌린 호시노의 문장은 단순하고 경쾌하면서도 담백하다.

 

 그는 자연만을 담는 사진가는 아니었다. 그 아름답고 위대한 대지에서 소용돌이치는 다양한 인간들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다. 바로 자본주의 경제화의 물결이 알래스카에도 불어 닥친 것이다. 화폐경제가 추구하는 개발과 파괴의 바람이 알래스카에 불고 있었고 호시노는 자신의 사진작업이 아직 파괴되지 않은 순수한 알래스카의 마지막 모습을 담는 행위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필사적으로 알래스카를 사진에 담았다. 불과 43세의 나이에 러시아의 캄차카 반도에서 사진 작업 중 불곰의 습격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도대체 왜 그는 그런 죽음을 맞아야 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생전 호시노의 말이 그 의문에 대한 답이리라. “자연은 인간의 삶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마저 포괄하는 것임을.. 자연은 아름답고 잔혹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강하고 연약하다.”
 
  책을 펼치니 알래스카의 아름다운 풍경사진이 나를 압도했다. 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책과 사진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다. 사진이 많아서 그런지 책은 단숨에 읽혀지는데 근래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장을 덮은 경험은 처음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가보지 못한 알래스카의 풍경이 아른거리는데 불현듯, 이 답답한 곳에 앉아 책과 씨름하고 있는 순간이 숨이 막혀온다. 갑자기 여행이 미치도 록 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

 

 

무더운 여름, 시원한 청량감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이 제격이다. 때로는 수 백페이지의 글보다 단 한 장의 사진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더 큰 감동을 주기도 한다. 바로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들이 그러하다.


 그가 찍은 사진은 피사체를 억지로 고정시켜 찍어 낸 흔적이 없다. 사진이 아니라 그 피사체 앞에 내가 그냥 서 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의 글도 마찬가지.. 글 중간 중간에서 자연과 삶, 생명에 대한 놀라운 철학적 성찰과 사유를 엿볼 수 있다. 그 철학적 사유의 폭은 깊고 넓고 날카롭다. 마치 생명의 정수만을 쥐어짜낸 에센스 같기도 하고 삶에 통달한 선승들의 오도송 같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호시노 미치오의 이 아름다운 사진을 보고 바람 같은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그 누구든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과 글에 매료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책만큼 말과 글로 그 느낌을 표현하기 어려운 책은 처음이다. 더 이상의 언어는 필요 없을 것 같다. 먼저 이 책을 읽고 보라. 빌려볼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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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
존 R. 설 지음, 정승현 옮김 / 까치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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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빠르고 쉽게 읽히는 책.

설 교수의 자신감에 찬 설득력 있는 어조와 약간의 유머감각이 섞인 문체가 좋았다.

그리고 유물론과 이원론에 오염된 철학을 정화하는 논변이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성과이다.

한 번 읽을 가치도 없는 책이 난무하는데 이 책은 단연코 두 번 이상 읽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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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행복하게 - 자연과 공동체 삶을 실천한 윤구병의 소박하지만 빛나는 지혜
윤구병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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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과 행복은 양립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보통 행복해지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유일무이하게 돈과 부를 꼽을 것이다.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돈과 물질적 부를 대체할 다른 조건을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전직 국립대 철학 교수였던 윤구병은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가난을 당당히 말한다. 과연 우리는 윤구병의 말대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 거리낌 없이 가난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부유함이 아닌 가난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가난과 행복의 융합을 시도하는 윤구병은 국공립공대인 충북대 철학과 교수를 15년간 지내다가 지난 1995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교육을 하는‘변산교육공동체’를 설립했다. 안정된 수입과 정년이 보장되는 국공립대 교수직을 그만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힘든 결정이다. 그 결정의 배경을 윤구병은 이 책의 앞날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다 좋다 쳐도 가난은 지긋지긋하다고요? 강요된 가난은 그렇겠지요.

  그러나 스스로 선택하는 가난한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학 교수직을 사퇴하고 윤구병은 부안에서 논 삼천여 평과 밭 만여 평에 직접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삶이 정말 행복한 삶임을 실천하고 증명한다. 그러나 윤구병은 일머리도 트이지 않고 서툴고 굼뜨기 짝이 없는 풋내기 농사꾼 주제에 몇 년간 제 앞가림을 하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귀농을 했지만 근 5년간 제대로 된 소출(그는 주로 주곡인 쌀과 보리, 밀등을 생산한다)을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은 비료와 농약의 사용이 아닌 철저한 유기농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구병은 그동안의 살림살이는 빚으로 꾸려온 셈이라고 겸허하고 부끄럽게 반성하지만 그 반성의 배경엔 주곡농업만으로 자급하기 어려운 한국의 농업현실, 즉 국가의 잘못된 농업정책이 있음을 암시한다. 현재 우리나라 전체 주곡 자급률이 25퍼센트 밖에 안 되는데도 독립국가 행세를 할 수 있다고 믿고, 비교생산비 우위설을 내세워 값비싼 공산품을 내다 팔아 값싼 농산물을 사서 먹는 게 더 경제적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나라 살림을 맡고 있는 한, 농민들이 아무리 바둥거려보았자 주곡 농사로 이 상품경제 사회의 거센 물결을 헤쳐 살아남기가 불가능하다고 윤구병은 따끔한 비판의 일침을 가한다. 그러면서도 윤구병이 절대로 돈이 안 되는 주곡농업중심의 유기농에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유기농과 주곡이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윤구병의 글을 읽다 보면 우리농업, 우리 쌀, 우리 보리, 우리 밀을 지키는 것은 자본과 시장의 논리로는 절대 이해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는 5년간의 농사꾼 체험으로 현재 우리 농업과 농촌의 현실과 문제점, 대안을 정확하고 확실하게 제시한다. 농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흉년이 아니라 풍년이라고 역설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정말 제대로 된 농사꾼이 된 모양이다.

 

  주곡이 아닌 환금작물에 깊이 의존하는 한국농업의 특성상, 과잉 생산은 농산물 가격의 폭락을 의미하고 높은 시설비, 인건비를 필요로 하는 환금작물 농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농촌 환경의 다원적 가치’에 주목한다. 생존은 기본이고 사람들의 인성과 덕목, 사회의식을 길러낼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생활형태로서 농촌의 소규모 공동체들의 활성화를 윤구병은 지향한다.(일부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농촌의 소규모 공동체 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데 개인적으로 '공동체' 라는 말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낀다. 개인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공동체 조직은 위험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가난하게 사는 길, 좀 더 힘들게 사는 길, 좀 더 불편하게 사는 길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길임을 그는 몸소 실천해 보이고 있다. 그것이 공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가난하게 살면 그만큼 이웃이 가난을 덜고, 자신이 좀 더 힘들게 일하면 그만큼 이웃의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이 걷힌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가난은 이제 더 이상 당장 끼니가 걱정되는 그런 절대적 가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난, 혹은 불편함이 결코 행복의 반대편에 있지 않음을 여실히 실천하고 증명해 보임으로써 우리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가볍게 듣고 넘기기 어렵다. 적어도 그는 아무런 행동과 실천도 없이 입으로만 녹색과 환경을 운운하는 환경근본주의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를 환경근본주의자들과 차별화시켜주는 것은 바로 그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윤구병이 생태와 환경근본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의 농법은 우리 조상들이 수천 년 간 해온 전통적 경작방식을 따른다. 물론 이러한 농법은 결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환경을 해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맹목적인 유기농법의 고수는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지배되기 쉽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변질되기 쉽다. 아니, 벌써 유기농은 자본, 시장에 충실한 하나의 고가 농산품으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는가? 대형 마트나 할인점 유기농 코너에 진열된 유기농 농산물이나 식품들은 소득이 충분치 못한 서민들이나 저소득 계층에겐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현재의 유기농이 생산성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윤구병은 과학기술에 대한 이 근원적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인간이 과학과 이별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과학의 지배력은 중세 유럽의 교회의 지배력과 비교조차 어렵다.


유기농을 돈벌이로 여기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유기농 또한 화학, 비료농업 만큼 지속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농민들이나 기업농이 고소득을 기대하여 유기농에 매달린다면 우리는 우리 농업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현재 우리나라의 농업이 망해가고 있는 이유는 농사가 돈벌이기 안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휴대폰 팔아 쌀 사먹자는 주장만 설득력을 얻고 있다. 농업이 돈의 문제를 떠나 생존과 문화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골에 전원주택 짓고 텃밭 가꾸며 사는 것만이 진정한 생태적 삶에 가까운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모든 사람이 그런 삶을 살수도 없고 또 그런 삶이 우리사회의 주류적 흐름이 될 수도 없다. 직접 유기농 농사를 짓지 않아도, 시골로 귀농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지속가능한 생태적 삶을 살 수 있다. 바로 자기 자신과 우리문화를 바꾸는 것으로서 그러한 삶이 가능함을 윤구병은 몸으로 직접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삶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법은 윤구병이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삶의 언저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7월 9일 patra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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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식의 종말 - 탐욕스러운 식욕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데이비드 A. 케슬러 지음, 이순영 옮김, 박용우 감수 / 문예출판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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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식이나 식사 때 과식습관으로 후회한 적이 많았던 터에 우연히 도서관 책장에 꽂힌 "과식의 종말"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나날이 둘레를 더해가는 아랫배에 대한 걱정 때문에 계획에도 없는 책을 즉흥적으로 읽게 되었다.

 

 저자인 데이비드 케슬러 박사는 미국 식품의 약국(FDA) 국장을 지낸 소아과 의사로서 현재 미국인들이 직면한 비 만과 과식 문제를 개인의 의지력 부족이 아닌 좀 더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문제로 이해하고 그 원인을 과학적, 심리적으로 진단한 다음 과식의 종말에 이를 수 있는 대안과 처방을 내려준다.

 

 케슬러 박사는 먼저 과식의 원인인 설탕, 지방, 소금을 ‘나침반의 세 점’으로 명명하고 과식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명한 다음 위의 나침반의 세 점이 유발하는 우리머릿속의 ‘뇌’의 ‘항상성 체계와 보상체계’를 공범으로 지목한다. 다시 말해 미국 대중음식들과 식품산업들이 생산해 낸 가공식품은 사실 설탕, 지방, 소금으로 범벅된 것이며 이 설탕, 지방, 소금의 삼박자가 어우러져 우리 뇌 속의 쾌감 중추를 자극하면 보상, 학습, 기억으로 뇌에 각인되면서 우리 몸의 본능적인 항상성을 교란시키고 음식을 먹는 습관적 행동을 제어할 수 없게 되어 과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미국 식품산업의 음모는 바로 고 당분, 고 지방, 고 염분 식품을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이 먹게 하는 것이고 식품산업의 이윤추구라는 목적을 위해 어떻게 사람들을 과식의 늪에 빠뜨리는지를 식품산업 종사자의 증언을 통해 밝히고 있다. 설탕, 지방, 소금이 음식에 대한 충동을 강하게 만들고 그 충동을 충족해 주면 우리 뇌의 뉴런에는 설탕, 지방, 소금에 더욱 강력히 반응하게 되는 코드가 새겨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 코드는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섭식 습관을 발현시키게 된다는 것이 케슬러 박사의 주장이다.

 

 설탕, 지방, 소금이 잔뜩 들어가 있는 음식들이 과식의 원인이 된다는 지적은 대체로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케슬러 박사가 굳이 책 지면의 3분의 2이상을 설탕, 지방, 소금이 유발하는 과식의 메커니즘을 중언부언식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은 매우 지루한 느낌을 주고 이 책의 가독성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게다가 과식에 대한 거창한 욕구 이론은 이미 과식과 비만이 공공의 적이 되어버리고 그에 대한 엄청난 담론들이 쏟아져 나온 마당에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흔해빠진 정보 중에 하나가 아닌가? 또 거창한 이 책의 제목인 ‘과식의 종말’ 에 비해 책의 끝부분에 몇 십장을 할애하여 소개해 놓은 과식의 치료법과 대안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다만 과식을 야기하는 사회적 자극을 없애는 데 있어 공공정책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케슬러 박사의 주장은 오로지 돈에 대한 원시적 욕망으로 무장한 식품산업의 야만적 잔인성이 가득한 우리사회에서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역시 책을 읽는 것만으로 과식의 종말은 오지 않을 것 같다.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가는 것은 다름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2011년 7월 8일  patra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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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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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계 프랑스 작가 로맹가리(Romain gary)의 단편 작품집을 읽었다.

 

 이 책의 제목을 차지하게 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단편이외에 모두 15편의 주옥같은 단편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어떤 휴머니스트>, <벽- 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본 능의 기쁨>등이 기억에 많이 남는 인상적이 작품들이다. 특히 <벽- 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작품은 현대 산업사회의 파편화된 개인들이 얇은 벽이라는 장애물을 사이에 두고 겪는 소통의 근본적 불가능성을 액자식 구성과 기막힌 반전의 기법을 사용하여 묘사한 수작이다.

 

 이 <벽>이라는 작품은 보통 단편소설의 평균적 분량보다 훨씬 짧은 이야기이지만 모파상의 단편 <목걸이>를 읽고 났을 때의 그 허무적이고 충격적인 반전에 한동안 망연자실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벽>이 준비해놓은 슬프고 참담한 반전에 또 한번 놀라고 절망하게 될 것이다. <벽>의 이야기는 어떤 의사가 상상력과 영감이 떠나버린 한 작가에 대해 ‘벽’에 관한 실화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의사는 소설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벽은 원래의 뜻도 되고 비유적인 뜻이기도 하네.”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세 들어 사는 젊은 남자와 아름다운 젊은 여자. 젊은 남자는 외로움에 지쳐 있지만 옆집의 아름다운 처녀를 순수하게 사랑하게 된다. 그녀 또한 지독한 고독과 세상과의 단절로 고통을 겪다가 어느 날 독약인 비소로 자살을 하게 되는데 비소 중독으로 인해 죽어가는 그 여자가 내지른 고통의 신음을 옆방의 청년은 얇은 벽의 반대편에서 듣고 그녀와 다른 남자의 잠자리에서 생긴 소리로 오해하고 크게 실망하여 전깃줄로 자살하게 된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결코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다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시니컬하게 묘사한 안타깝고 가슴을 저리게 하는 사랑이야기이다. 의사가 말했듯이 그 벽은 인간과 인간과의 진실한 소통을 방해하는 모든 허위의식과 관념, 물질적 욕망을 대변한다. 불통을 상징하는 벽이 사라진다면 사람과 사람은 소통될 수 있을 것인가? 로맹가리의<벽>을 읽고 나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개별적 고독에 대해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 다른 단편 <어떤 휴머니스트>에서는 인간성의 이중성, 속물적 근성을 2차 세계 대전의 나치 치하 독일이라는 배경에서 담담히 그려내고 있는데 이 소설에서 로맹가리는 인간이성의 숭고함과 속물적 근성 모두에 대해 그 어떤 선악적 가치판단을 유보한다. 요컨대 인간의 본성인 이성과 욕망이 결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20살 연하의 유명한 여배우와 결혼하고 결국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로맹가리의 인생 자체도 그의 비극적인 단편만큼 기이하고 특이하다.

 

 

                                                                                          2011년 7월 5일  patra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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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alee 2014-11-29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쾌한 해석 감사합니다
로맹가리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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