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부터 멋진 책.

  다음에 읽을 책 1순위로 낙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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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도정일 / 민음사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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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명한 생물학자 최재천 박사와 도정일 교수의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라는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인문학자 도정 일 교수는 동서양의 모든 신화와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기술문명과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과 비전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내가 놀란 건  생물학  전공자인 최재천 박사에게도 생물학을 한 수 가르칠 정도로 해박한  도정일씨의 생물과 과학에 대한 지식과 깊은 안목이었다. 자신의 본래 전공영역도  아닌 생물학, 과학에 대한 지식이 저정도이면 도대체 그의 전공인 인문학, 문학에 대한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라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의 다른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도정일 교수는 책을 출판 안하기로 유명한 분이다. 그의 책 중에서 순수하게 그의 글로만 이루어진 책은 이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 한다>와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이라는 단 두 권의 단행본 밖에 없었다. 도정일 교수는 글을 잘 쓰기로 유명하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빈틈없이 정확하게 짜여진 톱니바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듯 미끈하고 무리 없는 논리와 유려한 문체에 매료되지 않을 독자는 드물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독특한 문장력과 뛰어난 설득력이 조합된 명문중의 명문이다. 아쉬운 것은 주옥 같이 훌륭한 글들을 묶은 이 책이 출판사에서도 이미 오래전에 절판되어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희귀서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얼마 전 우연히 인터넷 헌책방인 북코아에서 이 책을 운 좋게 구입했다.
 
 ‘문화, 문학, 시대에 대한 에세이’를 담고 있는 이 책은 크게 문학비평이론과 문화에세이로 나뉘어져 있다. ‘3부 혼돈시대의 소설’ 이라는 문학비평이론에서 관심이 가는 부분은 ‘시뮬레이션 미학, 또는 조립문학의 문제와 전망’이라는 글이었다. 도정일 교수는 이 글에서 이인화씨의 소설<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조립소설, 혹은 짜깁기 소설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소설이 문학과 소설의 이름으로 용인 받을 수 있는지, 또 그런 조립소설을 지탱하는 이론적 토대는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담담하고 논리적으로 펼쳐 보인다. 이인화 씨의 소설<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소설을 나는 오래전에 매우 재미있게 읽었고, 그 파격적인 소설의 형식에 대해 전율하면서도 이런 구성도 소설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 기억이 있다. 이인화씨는 자신의 소설은 혼성기법을 차용한 구성이라고 주장하였다지만 도정일 교수는 이러한 혼성기법을 정당화하는 간텍스성(intertextuality)의 미학은 이인화의 소설적 구성을 용인해주는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도리어 흔히 짜깁기 소설, 혹은 조립소설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이론적 근거는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레이션 이론이라고 도정일은 주장한다. 시뮬레이션 이론은 이 세상에 진품과 모조품을 구분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모든 소설, 모든 텍스트, 그리고 우리의 삶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진본이고 무엇이 모조인지 구분할 수 없는 디지털시대에서 이인화의 소설은 단순한 짜깁기, 조립소설이 아니라 철저한 시뮬레이션 미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이 표절이라는 도덕적인 비난을 받을 수 없고, 다만 우리는 그러한 시뮬레이션 미학을 추구하는 문학작품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뿐이다라고 도정일 교수는 결론을 내린다. 이인화의 소설에 대한 도정일 교수의 긍정적 인식은 타당한 듯 하고 나도 그러한 인식에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4부는 문화 에세이 글 묶음인데  4부에 실린 5편의 글들이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특히 <압구정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라는 글은 근대적 생산, 소비 양식의 절정에서 생긴 우리시대의 유토피아 압구정이라는 공간이 우리가 자본주의의 실천 30년 끝에 이룩한 ‘계급문화의 천국’이자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모순이 남김없이 그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는 모순의 디스토피아 임을 역설하고 있는데 그 옛날의 오렌지족들과 서울 강남의 문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재밌고 흥미롭다 못해 통쾌한 쾌감? 마져 느끼게 하는 명문?이다. 이 글은 1990년 초반의 서울 압구정과 강남 일대를 다루고 있지만 2011년 현재의 서울 강남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유효한 도구적 틀을 제공하고 있다. 도정일 교수의 인식과 사유는 결코 일회성에 그치는 단순한 감상문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셈이다. 

 

 <문화의 몰락과 비평의 위기>라는 글에서 도정일 교수는 산업과 생산양식, 현대적 소비문화와 인간의 사회적 존재방식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현실적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었던 마광수 교수에게 애정 어린? 충고를 해주는 동시에 더불어 면죄부도 부여해 준다. 마광수 교수의 외설문학이 위선을 고발한다는 미명하에 우리사회에 던진 소통의 방식은 어린아이들 수준의 유치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정일 교수는 마 교수의 문학을 외설로 치부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요즘 마 교수의 책은 읽지 않지만 마교수의 문학적 소통방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호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도정일 교수가 말하는 외설과 외설이 아닌 것의 차이점(도정일은 외설이란, 성기와 성행위 장면 묘사의 파편적 연속 즉, 섹스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이러한 외설산업 생산물의 특징으로 진부성, 천박성, 반복성을 들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음란물, 포르노물 만이 외설산업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해진다. 외설이란 성행위를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총체성을 파편화하여 증오의 문화를 확대하는 일체의 모든 것이 해당된다는 것이 도정일의 생각이다)은 매우 적절하고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맨 마지막 글<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 한다>는 문학교육에 있어서 문학적 감수성의 모태인 자연 자체가 이미 산업화로 인해 불구의 형태가 되어버린 지금, 우리는 아이들에게 과연 어떻게 감성의 모태로서 본래의 자연을 다시 회복하고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학교육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도정일은 현대문명의 자연에 대한 야만성을 감수성어린 분노의 언어로 폭로한다. 근대적 생산 방식은 ‘자연의 품위에 대한 적극적 멸시’를 그 특징적 운용원리고 갖고 있다는 도정일의 표현이 다소 과격하게 느껴진다면 다음의 표현들은 어떤가?

 

 “이 원리(근대적 생산방식)는 어떤 의미에서도 가이아 여신(Gaea,땅)의 품위를 존중하지 않는다. 근대산업의 눈에 비친 그녀는 멍청이이며 산업과 호출의 명령 앞에 24시간 대기하는 도구적 노예이고, 쥐어짜기에 따라 석탄에서부터 다이아몬드 또는 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내놓아야 하는 식민지적 벙어리 자원창고... 산업폐기물 처리장을 제공하기 위해 자기 내장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소리 없이 대기하는 벙어리 처녀, 아니 창녀로서만 존재하는..”

 

 이러한 거침없는 표현과 폭로만이 이글의 전부는 아니다. 도정일은 이러한 생태계의 전면적 위기라는 모순 앞에서 문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극복의 모색 지점은 바로<문명의 재편>을 통한 자연 회복이라고 주장한다. 문명의 재편이 완료되어 불구의 자연이 회복되면 시인은 숲으로 가게 될 것이다. 과연 시인은 언제쯤 숲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이 책의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문학 분야의 글들은 평소 관심이 있었던 독자가 아니라면 소화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후반부의 이 시대의 문화, 시대에 대한 밀도 있는 글들은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도정일의 미끈한 문장을 즐기고 싶은 독자들은 필독서..

 

                                                                                            2011년 작성

도정일 교수는 작년(2014년)2월에 두 권의 산문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을 동시에 출간했다.
책 안내기로 유명한 분이라서 동시에 두 권의 책을 출간소식이 반가웠고 예약주문하여 구입했다.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도정일 문학선을 기획한 것 같은데 앞으로 도정일교수의 단독저서를 꾸준히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 오래전에 절판된<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의 출간 20주년 개정판도 곧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도정일교수의 글을 기다리는 사람들한테 반가운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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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로버트 하일브로너 & 윌리엄 밀버그 지음, 홍기빈 옮김 / 미지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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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사회의 형성(the making of economic society)이라는 원제를 가진 자본주의 경제의 역사서.

 

  무려 6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책인데 교양경제학 서적 중에 이 책만큼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책은 처음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주요개념 과 역사적 형성과정에 대한 지식 습득은 물론이고 자본주의의 과거, 현재, 미래   에 대한 통찰과 혜안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 책은 1968년 초판 출판 이래 2008년까지 무려 12번의 개정을 거친 12판의 역사를 자랑하는 책답게 인간역사의 새벽에 등장한 최초의 시장(물물교환시장)에서부터 2008년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한 미국발 금융위기까지 다룬 인간경제의 대서사시이다. 바로 이점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다룬 다른 어떤 저서와도 다른 독특한 성격과 매력을 이 책에 부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1960년대 이후 40년간은 현대 자본주의의 역사적 성격이 극적으로 변했고 자본주의가 인간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극도로 확대된 시기인데, 이러한 최근의 중요한 변화까지 놓치지 않고 자본주의 역사에 편입시켜 분석한 책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자본주의의 역사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저자인 하일브로너는 미국의 진보경제를 대표하는 학자답게 이 책에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해 시종일관 냉혹하고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시선을 유지한다. 그러나 하일브로너의 이러한 분석태도는 자본주의와 시장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과 시장을 정확하고 제대로 보기위한 도구적 틀로서 이해해야 된다. 과거와 현재의 자본과 시장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분석해야 미래의 자본주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저자의 분석적 틀과 시선은 날카롭고 냉혹하지만 자본주의의 공과에 대한 서술은 치우침 없이 공평하다.

 

 다시 말해, 하일브로너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그 자체를 악덕 혹은, 미덕으로 보지 않는다. 부유함이 악덕이 아니며 가난과 빈곤 또한 미덕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하지 않는다. 하일브로너의 이러한 치우침 없는 공평하고 냉혹한 시선은 요즘 우리나의 일부 진보언론 매체가 쏟아내는 자본주의와 시장에 대한 이유 없는 극도의 증오심과 적대감으로 무장한 기사와 글들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솔직히 보수언론들의 자본과 시장에 대한 짝사랑보다 일부 진보매체의 극단적인 자본주의 혐오(시장경제가 곧 망해야 될 것 같은 논조들)가 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조선, 중앙, 동아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의 시장경제 예찬과 일부 진보언론의 극단적인 시장경제 증오 편향 가운데서 적절한 균형을 잡는 게 필요하다. 바로 이런 적절한 균형적 시각을 하일브로너에게서 읽을 수 있다.

 

  이 책에서 하일브로너는 인간사회가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세 가지 방식을 전통, 명령, 시장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전통은 원시적 물물교환과 자급자족적 경제, 명령은 강력한 왕권으로 통치되는 경제, 그리고 시장은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조율하는 시장메커니즘이 주도하는 경제체제이다. 저자는 이 세 가지 큰 틀로 유사 이래 전체 인간경제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를 설명한 부분도 흥미롭지만, 1929년 미국 대공황을 분석한 하일브로너의 독특하고 정확한 견해와 사유를 읽고 나면 당시 미국대공황의 여러 원인들이 결코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무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대공황의 근본적 원인은 바로 ‘대박에 대한 광적인 열망’이었던 셈이다. 이윤과 투기를 불리기 위한 극단적이고 비도덕적 조작들이 무분별하게 횡횡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경고메세지도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다.

 

 또 하일브로너는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제공한다. 케인즈 경제학이 비록 스태그플레이션을 해결하지 못했지만 그의 경제학이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미래가 반드시 시장경제체일 필요도 없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모색이 필요한 이유를 이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경제학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고 경제사 교과서의 용도로도 유용하다. 어떤 용도로 이 책을 선택하든 간에 모두 자신이 원하고 기대했던 이상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참모습과 변화의 궤적, 그리고 미래에 대한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자본주의를 더 크고 더 넓게 보고 싶은 분에게 이 책을 추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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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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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읽은 <현의 노래>를 끝으로 김 훈이 쓴 책은 모두 완독하게 되었다. <현의 노래>는 김 훈의 첫 역사소설 <칼의 노래>와는 느낌이 많이 다른데 <칼의 노래>가 거칠고 날카롭다면 <현의 노래>는 부드럽고 유약한 느낌이 나는 소설이다. 나는 김 훈의 역사소설 3부작 중에서 <남한산성>을 제일 좋아한다. <칼의 노래>는 여름의 치열함이 느껴지고 <남한산성>에서는 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 사람들의 민중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며, <현의 노래>는 봄과 여름사이에 약동하는 생명이 떠오른다.

 

 <현의 노래>에는 멸망해 가는 가야의 예인 우륵과 그의 부인 비화, 우륵의 제자 니문, 가야를 배신한 대장장이 야로, 가야왕의 죽음에 순장되기를 거부하고 도망친 궁중시녀 아라,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의 군주 이사부 등이 등장하는데 소설적 구성은 복잡하지 않고 비교적 단순하다. 등장인물 외에 소설을 이끌어 가는 것은 가야의 쇠와 금이다.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 야로와 금을 다루는 예인 우륵은 공통적으로 망해가는 가야를 배반하지만 그 둘의 마지막 운명은 엇갈린다. 둘 다 쇠와 금은 가야의 것도 신라의 것도 아니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지만 쇠는 언제든지 병장기로 변할 운명을 타고난 것이어서 쇠를 다루는 야로는 살아남지 못한다. 금은 소리를 만들어내는데 이 소리는 가야를 멸망시키지도 않고 신라를 공격하지도 않는다. 소리는 국경도 주인도 없는 이 땅위의 생명의 흐름과도 같아서 신라 장군 이사부와 진흥왕은 우륵의 가야금 소리와 더불어 자족한 모양이다.
 
 이 작품은 제목처럼 현의 소리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다. 도무지 알듯하면서도 모를 듯한 소리에 대한 작가의 수많은 말들은 너무나 정제되어 있어서 눈과 가슴에 잡아두기 어렵다. 작품은 김 훈의 다른 작품들처럼 주어와 술어 사이에 한 두 개의 간단한 수식어만 달린 짧은 문장들로 짜여진다. 그러나 이 <현의 노래>의 문장들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 아름답고 현란하고 생생하다.

 

 감정의 묘사는 극도로 절제하는 대신에 감각에 대한 묘사는 극단적이라 할 만큼 정교하고 치밀하다. 감정을 포기하고 감각묘사에 치중함으로서 작가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진한 살 냄새 나는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가야왕의 시녀 아라가 오줌 누는 장면을 묘사한 글이 그러하고 우륵의 아내 비화의 생김새를 시각적 인상을 버리고 오로지 냄새로만 묘사해 내는 대목이 그러하다. 김 훈에게 있어 오줌을 누는 행위는 단순한 생리적 배설현상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그 행위는 생명의 원리라는 면에서 숭고하게 느껴진다.

 

 작품속의 주인공들은 저절로 만나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자석처럼 끌려 서로 몸을 섞고 바람처럼 헤어지고 두려움 없이 죽어간다. 이러한 삶의 과정과 운명에 대해 사람들은 비난도 원망도 하지 않으며 기쁨도 슬픔도 느끼지 않고 분노도 절망도 하지 않는다. 김 훈은 아마도 고대인들의 삶이 현대인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현대인들이 가공할 무한경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의 익숙한 상식으로 여기듯이 고대인들은 흥망성쇠하는 왕들의 운명에 제 고을과 제 몸을 두려움 없이 의탁한다.

 

 그러나 그들이 오로지 거대한 운명에만 몸을 맡긴 것은 아니리라. 작품 중 궁중시녀 아라와 우륵의 제자 니문의 인연은 안타깝다. 작가는 그 미완의 인연에 비로소 감각이 아닌 감정을 엮어 놓았다. 궁중시녀 아라와 니문의 인연이 자아내는 슬픈 감정의 카타르시스는 이 소설의 백미다. 김 훈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의 다음 작품의 배경은 19세기 초 조선이라고 한다. 역사소설이 또 나오겠다.

 

                                                                                            2010년 가을 작성

김훈 작가는 2011년에 장편<흑산>을 마지막으로 장편작품을 더 이상 내지 않고 있다. 위의 본문에 언급된 19세기 초 조선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바로 <흑산>이다. 그동안 계간잡지 <문학동네>에 몇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그의 단편을 찾아 읽는 것으로 김훈의 새 작품에 대한 갈망은 약간 해소 할 수 있었지만 내가 기다리는 건 김훈 작가의 다음 장편소설.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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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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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15년 5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6주기가 되는 날이다.

몇 년 전(아래 글 본문에 서거 2년후에 읽은 책이라고 쓴 부분이 있는 걸 보니 2011년인 모양이다) 노무현 자서전<운명이다>를 읽고 작성한 글 한편이 있어 업로드한다. 이 글에 담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생각은 벌써 4년 전이라 지금의 내 시각과는 좀 다르지만 전혀 고치지 않는다. 생각의 족적을 그대로 두고 다시 되짚어 본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고..

 

 2002년 대선 때, 나는 멋도 모르고 노사모를 응원하고 시험 직전의 강의실을 돌며 학과 후배들에게 명계남과 문성근이 주도한 희망돼지 저금통 후원을 부 탁 하는 전단지를 돌리곤 했다. 그때 내가 무슨 명확한 정치의식과 경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노무현, 그를 지지하고 응원해야 민주주의가 계속 발전하고 사회진보가 이루어 질 것 같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퇴임 후, 자신의 고향에 내려와 주민들과 자전거 타는 그의 모습을 보 는 것은 그의 정치적 공과와 관계없이 적지 않은 즐거움이었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으면서 노무현과 관련된 내 기억의 대부분은 극히 피상적이고 부정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대통령 재임 시절, 나는 거듭되는 실업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내 관심은 좋은 직업을 찾는 것에만 몰려 있었고 실업자 신세를 벗어나는 것을 인생최대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으니 그의 대통령 임기동안 일어났던 사건들과 정치, 경제적 문제들은 내 기억의 피질에 스며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정치인이자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도, 한 인간으로서의 노무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일상에 지친 평범한 소시민이었을 뿐이다.

 

이 책<운명이다>로 인해 비로소 나는 정치인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노무현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대통령 임기시절에 앓았던 그에 대한 나의 기억상실증도 뒤늦게 치유할 수 있었다. 그의 서거 이후, 2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지만, 뒤늦게 그의 자서전을 다시 읽게 된 것도 그저 운명 같기만 하다. 이 책을 보면서 그의 서거 때 느꼈던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막연한 슬픔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서야 인간 노무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에 대한 무성한 소문과 세간의 이야기들은 이 책으로 인해 이제 안개가 걷히듯 모두 사라졌다.

 

 노무현 자서전<운명이다>는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육필로 쓴 자서전은 아니다. 나도 이 점이 아쉬웠다. 이 책은 문재인 이사장의 노무현 재단이 자서전과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유시민 전 장관이 리라이트(rewrite)작업을 해서 나온 사후 자서전이다. 그러나 이 책은 노무현 자신이 바라본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고, 자료수집이나 리라이트 작업을 맡은 문재인, 유시민 두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존 시절 때 가장 가까웠던 정치적 동반자였음을 상기한다면 이 자서전은 분명 정본 자서전이라 할 만하다.

 

 책은 여타 자서전처럼 노무현의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다. 그의 정치적 도전과정은 그대로 한국현대정치사의 대서사시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소외받고 억압받던 약자와 노동자들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부터 정치에 입문하여 청문회 스타가 되기까지, 그리고 김영삼 전대통령의 3당 야합에 실망하여 지역주의와 야권분열 구도를 극복하기 위해 독자적 정치행보를 걷다가 김대중 전대통령의 평민당 입당, 그리고 대선후보자가 되어 정몽준과의 극적인 후보 단일화를 거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통령 당선까지의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유시민의 담백하고 빼어난 글 솜씨도 생전의 노무현을 재현하는데 한 몫하고 있다. 그의 대통령 재임시절의 공과도 치우침 없이 공정하게 서술된다.

 

 이 책이 보여주는 인간 노무현은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 초라한 흙집에서 태어나 판사, 변호사, 국회의원, 장관, 그리고 한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런 이력만 보면 분명 누구나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 어느 누구든 그를 실패한 대통령으로만 여길 뿐이다. 이 자서전은 분명 영광과 성공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시행착오와 좌절과 실패의 회고록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의 치열했던 삶은 결코 패배자의 인생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표면적으로 자살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지만 그 외피를 벗기고 나면 비로소 정치적 타살의 흔적을 역력히 발견할 수 있다. 그 흔적들을 이 책<운명이다>에서 분명히 나는 보았다. 그가 생전에 싸웠던 것은 특혜와 특권, 반칙, 기회주의, 지역주의, 노동탄압과 인권탄압, 정경유착 등이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쥐고 흔드는 거대 보수 언론과의 싸움이었다. 이 언론과의 싸움은 외롭고 힘든 싸움이었다. 그는 원칙과 신뢰, 투명과 공정, 분권과 자율, 대화와 타협을 무기로 수구보수 언론과 승산이 없는 싸움을 벌이다 패했다. 그래서 그를 바보 노무현이라 하지 않던가.. 그 싸움의 결과는 참담했다. 언론과 검찰을 개혁하려던 그는 퇴임 후 언론과 검찰에게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보복을 당했다.

 

 그는 왜 이런 삶을 살아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그는 승률도 좋았고 수임률도 높았다. 3당 합당의 주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을 따라 권력의 중심으로 갔더라면 그의 앞날은 출세와 성공, 부와 명예의 탄탄대로였을 것이고 오늘날 그의 실패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야합과 기회주의, 지역분열을 낳았던 김영삼을 떠나 지역분열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항했다. 그는 화려한 학력도 없고 재산도 없었고 힘있는 빽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 반칙을 자행하는 자에 대한 분노, 정의의 대한 열정 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인간 노무현의 정신이다. 그가 만들려고 했던 세상은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특권과 반칙이 통용되지 않는 상식과 원칙, 민주적 질서로 굴러가는 세상 말이다.

 

 그는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 물론 그의 주변에서 정당치 못한 자금이 흘렀고 그 돈을 그의 주변인물들이 떳떳하지 않게 사용한 정황은 분명히 있다. 특권과 반칙, 부정과 타협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주변인들이 저지른 잘못까지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누가 그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지키려 했고 잔인한 언론과 검찰의 보복의 순환 고리를 끊으려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증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구차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런 길을 택한다면, 자신을 버리지 않을 사람이 너무 많을 것이고 그 사람들이 받을 고통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먼저 자기 자신을 버렸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했다.

 

재임 중 수천 억 원 대의 비자금을 불법으로 조성하여 챙기고 권력을 위해 무고한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이들도 일말의 양심과 도덕조차 버리고 버젓이 산송장처럼 추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삶에 비해 그의 죽음은 과연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옳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옳을까?

 

그의 선택을 지탄하는 사람들은 양심과 도덕을 버린 자들의 삶을 겉으로는 비난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도 그들처럼 살 기회가 오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런 추한 삶의 길을 걸으려 할 것이다. 지독한 이중적, 위선적 태도로 물든 우리 삶의 현실이다. 이 현실은 서글픈 자화상이다. 노무현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있는 이 서글픈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경제를 파탄 낸 장본인으로,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받아 챙긴 파렴치한 범죄자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모든 실패를 변명하지 않고 말없이 인정했다.

 

 

이 책은 실패와 좌절의 회고록이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정신과 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더 이상 봉하 들판에서 자전거 타는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하여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비록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정신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분명 승리할 날이 올 것이다.

 

 

노무현을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을 때 손수건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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