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는 항상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나가지 말라는 가냘픈 호소도 내면에 있었다.
너는 네 안의 무엇을 찾아 이곳까지 온 게 아니냐. 여기서 짐승처럼 사는게 네가 원한게 아니더냐. 사람 사이에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거기에는 심연이 있고 그 심연을 들여다 보면
뛰어 들고 싶은 법이다. 겉멋같으니! 뛰어 들겠다. 가고 싶으니 가겠다.
그래서 나는 절과 겨울과 눈의 극장에서 나왔다.
벗이여 스승이여 너는 세상에 참 아름다운 이름이 많다고 했다.
물빛의 수색(水色), 강의 서쪽 또는 서쪽으로 흐르는 강인 서강(西江)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준 것은 너였다.
사람의 이름이 지명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어떤 이름에는 살아 있어도 그런 힘이 느껴진다고 했다. 가장 흔한 질료인 말에 힘을 넣고 신을 넣고 혼이 되어 함께 뛰어노는 일이 문학이라고 너는 말했다. 이 애, 세월 세월 세월은 가고 이름은 남았다. 추억은 경멸할 만한 것이다. 그것에 먹히는 한은.
가볍게 내리는 비처럼 머리를 두드려 깨우는 추억은 아름답다. 우리가 함께 살아있는 동안.
이 글은 성석제가 친구 기형도를 추억하며 쓴 글의 일부이다.
5년도 더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그의 책 [위대한 거짓말]을 만났을 때 난 대략 6%쯤 남아있던 불신을 모조리 거두고 완벽한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읽은지도 오래되고 수중에도 없는 책이라(아아, 너는 정녕 어디에 있단 말이냐 흑) 솔직히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허나 수첩 한 귀퉁이에 옮겨 놓은 저 문장들 중 나는 특히 사람 사이에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는 구절에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그리고 심연 속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데 무서워서 동동거리고만 있던 내 뒤통수를 가격하며 겉멋!이라고 일깨워 준 그를 나는 이 글의 제목처럼 '스승' 이라고 모시기 시작했다.
96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처음 만난 그의 <첫사랑>은 특이한 울림, 정도로 기억되었다.
다음에 읽은 단편집 [새가 되었네]는 내 관심사를 그의 이름 세 글자로 온통 메다꽂게 만들만큼 재미있었다. 그래서 열심히 찾아 낸 장편 [왕을 찾아서]와 장掌편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연달아 내처 읽었는데 그 후 난 그를 재밌어서 죽겠는 사람의 1순위로 바로 등극시키고 내친 김에 그를 덜컥 사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에 대한 내 마음이 성냥불처럼 화르륵 타올랐다가 이내 꺼져버리지 않도록 만들어준 진정한 힘은 그의 '소설' 이 아니라 그냥 그의 '글' 이었다.
그 '글'이 바로 [위대한 거짓말]의 말미에 나오는 <스승들>이다.
그 글에서 성석제는 스스로의 과거에 대해 그 속에서 만난 '스승들'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 낸다. 그 속에는 바로 성석제 본인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글이 재밌기는 했을 망정 대단히 훌륭하거나 뛰어나서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속의 똘망한 소년이 혹은 얼치기 같은 젊은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버린, 사소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나온 책 [즐겁게 춤을 추다가]를 읽다가, '겨울 눈밭을 보며 나는 울었네' 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곳에서 죽고 싶다' 고 고백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덩달아 눈물이 날 뻔 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사람들은 그의 농담과 수사에 익숙해져 그를 재미있는 혹은 웃긴 이란 형용사로 수식하기를 즐긴다. 물론 그것은 꽤나 어울리는데다 가장 적절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에게 그는, 웃음이 아닌 웃음으로 내 심연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려 방심하게 만드는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항상 나를,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게, 만드는 묘한 존재다.
그리고 웃기는 것보다 울리는 것보다 언제나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거라고,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 나의 애정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도 같다. 어쩌다 놓쳤는지 제대로 가는건지 과녁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어 모르겠다. 화살이 부메랑처럼 돌아올 수 있다해도, 나는 돌아오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