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목사님 열린어린이 창작동화 10
로알드 달 지음, 쿠엔틴 블레이크 그림, 장미란 옮김 / 열린어린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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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목사님. 오랫만에 읽은 로알드 달의 작품이다.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유머이다. 유머는 하나의 사실이나 상황을 보는 보다 여유있는 시선에서 나온다. 유머 넘치는 작품을 쓰는 작가들은 분명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작가이다. 그 가운데 로알드 달의 유머는 그 짜릿함이나 깊이가 남다르다. <멍청씨 부부 이야기> 처럼 어린이들을 위한 글을 쓴다고 공히 내놓고 이야기 하는 작가가운데 이렇게 갈때까지 가는 걸 그려내는 작가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난독증에서 착안한 단어를 거꾸로 말하는 목사님이라는 캐릭터는 엄격하고 진지해야 할 설교의 장면을 유머러스하게 만든다. 설교가 꼭 딱딱해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달 할아버지의 전언이다. 뭐라고 꼭 정해놓은 대로 세상을 보고, 정해놓은 대로 살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고, 우리 모두 다르니까 그게 더욱 우리 세상을 재미있게 만드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 하고 있다.  

 웃으며 사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웃으며 살기 위해서는 삶의 곳곳에서 웃을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아야 한다. 웃음은 새롭고, 신기하고, 비일상적인, 즐거운 경험에서 비롯된다. 웃는다는 건 삶을 새롭고, 신기하고, 즐겁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 목사님이 거꾸로 목사님 처럼 설교한다면 잠이 확 깰것이다.  

달라야 웃음이 나온다. 매냥 똑같다면 새롭고, 신기하고, 즐거울 것이 뭐 있겠는가. 다른 것에 대한 관용, 그게 유머의 시작이고, 그게 스스로를 개방한다는 지표이며 이런 개방성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보다 행복하고 충일하게 만드는 것임을 달 할아버지는 애즈녁에 알고 있었음을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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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8-08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알드 달 오늘 꼭 다시 읽어야겠어요 :)

지나가다가 반가운 작가 이름이 보여서 슬쩍 읽고 갑니다!
자기소개 글이 참으로 멋지네요. 정말 그게 행복의 길인 것 같아요.
비가 많이 오네요. 비조심하시길 ^^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 일리노이 주립대 학장의 아마존 탐험 30년, 양장본
다니엘 에버렛 지음, 윤영삼 옮김 / 꾸리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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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는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는 장르구분이 모호하다.  

난 무엇으로 읽었나? 피다한 사람들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그런 줄로만 알고 읽고 있었는데 끝에가서는 촘스키 언어이론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자신이 무신론자가 되게 되었다는 짧은 고백. 꼭 무엇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엄격한 복음주의 선교사였던 자신이 무신론자가 되게 된 것에 대해 좀 더 긴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대부분의 내용은 자신의 경험, 주로 피다한 말을 배우는 것에 관한 자신의 경험들을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나열해 놓았다. 이 경험들과 무신론으로 가게 되는 자신의 사유의 변화를 함께 엮어서 서술했더라면 훨씬 더 설득력 있지는 않았을까? 아님 훨씬 더 어설퍼 지려나?

마지막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언어를 문화적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인 것 같다. 나름 설득력 있는 부분이다. 워프-사피로 가설과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스스로 당당한 피다한 사람들은 사실 신을 받아들일 여지도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도 행복한 무신론자로 산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자신의 삶에 온전히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던 신을 버리게 되는 과정은 확실히 보다 긴 설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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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연못 2011-10-16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향신문 2011년 10월 8일자에 도서평론가 이권우의 길위에서 책읽기 코너에 이 책에 대해 긴 서평이 있습니다. 이권우씨도 신앙을 버리게 된 부분에 관심을 가진것 같습니다. (1)피다한족의 지금 여기에의 삶 (2) 경험의 직접성이라는 특성을 가진 피다한족의 말- 순환이 없는 언어 ..이 두가지 면이 기독교의 보편성과 유일성이라는 특성을 잠식했기에 신앙이 해체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또는 말씀이 순환 또는 변화하여 이 세상과 모든 일이 이뤄진다는 것과 피다한 족의 지금 여기에 머무는 삶은 극점에 있는 것 아닐까요?
 
-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디어드리 베어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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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그 길이에 놀랍다. 아주 오랜만에 아니 거의 처음이었나 11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느라 무척 숨가빴다. 말로만 듣던 융, 그저 어렵게만 느껴졌던 융, 한때 프로이트의 총애를 받았으나 박차고 나와 홀로 정신분석을 개척했던 고집센 사람으로서 융,  그가 이야기 하는 아니마, 아니무스, 집단 무의식은 나름 재미는 있지만 조금 뜽금없지 않나 하는 생각, 이런 것들이 그동안 내가 융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며 사전지식이다.   

 융의 인생은 한마디로 "참 잘났다"이다. 이 잘남이 때로는 찬탄으로, 때로는 야유로, 때로는 숭배로, 때로는 경멸로 왔다갔다 해서 그렇지 잘난 것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을 듯 싶다. 

 전기를 읽는 내내 나는 융의 생애도 생애지만 융의 생애를 이토록 조목조목 짚어낸 전기작가의 노력이 더 감탄스럽다. 한 장에 붙는 자세한 미주의 목록이 때로는 전체 장의 분량에 육박한다. 얼마나 꼼꼼히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읽는 내내 디어드리 베어가 최대한 공정하게 최대한 꼼꼼히 융에게 접근하려 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의 머리 속을 들여다보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오만에 빠뜨릴 수 밖에 없다.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데 누군가 넌 이렇구나 라고 말해준다면 우리가 그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건 두가지다. 경멸과 의존.  

 그래서 융에게는 적도 많고 지지자도 많았나 보다. 그리고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살면서 제일 힘든 과제는 자신의 머리 속을,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밝히고 그 안에서 통합된 자기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융은 한 생애 전체를 통해 보여 주었다. 

잘난 사람들끼리 모여 하는 자존심 싸움, 권력 싸움, 그들은 스스로를 충분히 분석을 한 걸까? 정신분석이 하는 분석과 성찰은 분명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석을 통해 자신을 성찰했다면 분노와 배신, 암투, 시기 같은 진흙탕 싸움을 없거나 덜하였을 터인데.... 

통합된 자기에 이른자는 자신의 삶에 대해 당당할 수 밖에 없다. 자기에 직면했을 때 당당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삶을 말로 사는게, 아니라 그냥 사는 것, 매 순간, 자신과 직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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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스팟 - 내가 못 보는 내 사고의 10가지 맹점
매들린 L.반 헤케 지음, 임옥희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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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신체 구조상,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다 볼 수 없다는 것,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더 잘 보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인간의 마음. 맹점이 있으되 맹점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들. 그래서 늘 저지르는 오류는 바로 자기중심성. 자기가 자기를 제일 잘 알고, 자기가 자기의 모든 것을 알고, 아니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 인간의 심리. 일단 인간이 하나의 생명체로 유기체로 환경에 적응해 나가야 하는 엄중한 사명이 있다는 점에서 오류의 근원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응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적응된 상태란 익숙함을 말한다. 익숙한 상태에서 새로운 시도, 다각적인 검토는 또 다른 노력, 별도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니 웬만하면 에너지를 비축하고자, 편하고자 하는 인간의 행동양식으로 볼 때 적응된 상태에서 익숙한 상태에서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생활하는 것이 편하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면 결정적인 실수와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그것이 주는 파장이 사실 되돌이킬 수 없거나 혹은 너무 엄청난 피해이기에 자기 중심성은 결국 자기 발등을 찍게 되는 근원적 오류가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하라!" 생각해 보면 생각하지 않았기에 저지르는 실수 혹은 잘못된 선택 때문에 얼마나 발을 동동구르고 얼마나 처절하게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계속 생각하지 않아 일어나는 실수와 오류들의 연속이다. "생각하라!" 이 원칙을 마음에 새기고, 새기고, 자신을 객관화 하는 최선의 방법은 (내가 찾은) 기록이다. 기록하고, 들여다보고, 다시 쓰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쓰고, 다시 생각하고,,,,, 그런다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한 최선의 선택. 이제 거시적인 삶의 본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나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미시적 실천방안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라, 그리고 기록하라!" 를 오늘 부터 실천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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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기 과외 난 책읽기가 좋아
로리 뮈라이유 글, 올리비에 마툭 그림, 최윤정 옮김 / 비룡소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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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프랑스의 이야기지만, 우리 곁에는 라디슬라스들이 넘쳐 난다. 라디슬라스의 부모님들도. 뭐든 다 잘해야 마음이 놓이는, 스스로 하기 보다는 뭐든 돈을 내고 배워야 최선인 줄 아는 라디슬라스와 그 부모들. 아이들은 놀면서 배우는 건데, 아이들의 놀이가 곧 학습인데, 그런데 이걸 잘못 받아들이는 부모들은 멀쩡한 아이들의 놀이마저 빼앗아 놀이로 포장한 학습의 장으로 만든다.  

놀게 해 준다고, 몇만원씩 내고, 밀가루를 뒤집어쓰질 않나, 놀게 해 준다고 또 몇만원씩 내고 흙을 밟게 해 준다. 노는 것 마저 구조화되고, 상업화되고, 시간이 정해져 있다. 어디서든 스스로에게 충분히 침잠할 시간을 주질 않는다. 

왜 노는 것 마저 돈을 지불하고 배워야 하는 세상이 되었을까? 라디슬라스의 부모님은 왜? 라디슬라스가 모든 걸 돈을 내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라디슬라스는 자신이 배우는 것이 나중에 어떤 쓸모가 있는지를 조목조목 얘기할 줄 안다. 예를 들어 영어를 배우는 것이 미래의 직업 선택에 어떤 도움이 될지, 첼로를 하는 것이 미래의 자기 인생에 어떤 유익을 줄지.... 라디슬라스가 현재 배우는 건 미래를 위해서다. 우리의 아이이들이 현재 공부에 내몰리고,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다. 12년동안 대학을 준비하고, 대학 생활 또한 직업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결국 좋은 직업을 갖고 돈을 많이 벌고 잘 살기 위해서 어렸을 때 부터 돈을 많이 쓰면서 배운다.  

오지않는 미래를 준비하다 보니 사실 좀 불안하다. 말로는 이것이 꼭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 결과가 어떨지는 잘 모른다. 그래서 학원을 보낸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잘 배우는 가도 중요하지만 일단 학원을 보내면 부모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책임을 덜 수 있다. 학원을 보내서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학원 선생을 탓하면 되니까.  

부모들이 많은 돈을 써서 뭔가를 가르치는 건, 아이가 자라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욕망과 뭐든 돈을 씀으로 인해 자신의 책임을 조금은 덜고자 하는 자신없음과 불안의 표현은 아닐까. 

라디슬라스와 라디슬라스의 아빠, 그리고 우리 곁의 라디슬라스와 그 부모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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