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득이 -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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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스스로 말하는 완벽한 불행, 가난, 엄마의 부재, 아버지의 장애, 외국인 엄마의 뒤늦은 출현... 인생의 몇중고를 견디며 살아가는 완득이가 이토록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완득이에게 끝없이 손내밀어주는 똥주 선생 역시 조금은 판타스틱한 캐릭터다. 서로가 서로를 서로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나 강점 따위로 바라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관계. 민구삼촌과 아버지. 완득이가 어쩌면 버티고 살아가는 이유는 완득이 눈에 돌보아주어야 할 이들이 넘쳐나기 때문아닐까, 싶다. 불쌍하다. 불쌍하다. 내가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건 내가 그들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들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타깝고 불쌍하다. 그래서 손 내밀고, 그래서 함께 있고 싶고, 그리하여 함께 있기에 불행이 좀 더 달콤해질 수 있다. 불행의 단맛,,,, 이 불행을 더 이상 겁내거나 피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불행을 불행이라 부르지 않을 때, 불쌍한 이들끼리 서로 끌어안고 등두드려줄 때, 정신이 침몰당하지 않을 때, 그럴 때 행복이 찾아온다. 그런데, 그 불행 끝 행복 시작의 그 순간에 동주 선생의 자산이 큰 역할을 했다는게 쓸쓸한 여운을 남기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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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의 지붕
한수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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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말을 안 한다.

할 수 없는게 아니라 안 한다.

아이는 지붕위에 올라가는 걸 좋아한다.

사람들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관심은 애정인가?

이제 막 철거를 앞둔 명왕동.

거기에서 우주를 좋아하는 약국 삼촌과 상상을 즐겨하는 민수가 친구가 된다.

불안하고 팍팍한 현실을 그들을 아이는 지켜본다.

청진기와 대화하면서....

청진기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을 듣게 한다.

아이는 청진기를 목에 걸고 바깐 세상과 소통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드러내지는 않을 뿐.

세탁소. 정육점. 약국. 비보이. 삼수생. 팽할머니. 순댓국집. 성신설비.

그들이 그렇게 서로 관심을 가지고 모여 살면서 철거의 막막함을 견뎌내고 있는 그 곳이 바로 녹두장군이 찾던 그 곳이.다. 나귀 똥구멍 속.

보고도 못 믿고, 두고도 못 찾는... 그들의 어우러짐이란 마치 요란한 뽕짝밴드같다.

저마다의 목소리와 저마다의 사연으로 자기 소리를 내면서 서로가 서로를 안쓰럽게 보듬는, 그러나 여전한 소란.

평생 자신을 두들겨 팬 남편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컷 두들긴 다음 그 남편의 등짝에 약을 발라주는 아내. 한번 때리고도 이렇게 맘이 아픈데 넌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맘이 아팠겠냐는 그 소리에 달라진 남편. 그래, 그럴 순 있겠으나, 서로 꼭 두들겨야 되는 걸까?

데릴라도, 삼촌도, 김약사도, 민수도, 정육점도, 비보이 소년도,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녹두장군도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책장을 막 덮는데,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도 지금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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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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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실사 영화 중간중간에 애니매이션이 삽입되는 걸 본적이 있다. '열두살, 샘'이었던가? 하여간 몇편은 본 기억이 있다. 아비가 달리는 장면을 읽는데 머리 속에서는 애니매이션이 상영되고 있었다. 지구 본 위에서 분홍색 반바지를 입고 달리는 아비의 모습이...삶은 견디는 것, 살아내는 것, 아비와 남편의 부재가 모녀가 미치는 영향은 그 모녀가 어떤 모녀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 속의 부재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는 영향이란게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렇다, 우린 살면서 이렇게 숱한 자기 중심적 생각을 한다. 자기 혼자 멋대로 그려놓고 맞춰놓은 퍼즐 속에서 자신이 마치 정답을 알고 있는양 의심없이 살아간다. 그러다,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된 순간이 닥쳐온다. 그 때, 깨지거나, 눈감거나.... 타인의 시선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대해 고정된 삶. 무관심의 관심. 관심의 무관심. 초점이 다르기에 성립가능한 역설이다.

<스카이 콩콩> 마음이란, 참 이상하다. 그렇다. 그 마음이 무엇이기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면 우린 그저 마음을 따라가는 수 밖에 없다. 마음이 나를 이끄는 대로. 모두들 인생의 최대의 모토가 "내 마음대로" 인 것처럼 자신들의 마음을 강조하나, 실은 그 마음이 무엇인지, 그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제대로 모를 때가 많다. 추락하는 고무동력기 처럼.

<그녀가 잠 못드는 이유가 있다> 그렇지. 잠 못드는 건 이유가 있지. 뭔가에 계속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잠을 앗아간 건 숱한 후회와 부끄러움들. 그 가운데 어쩌면 아버지와 편치 않은 관계가 그 원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주제넘는 짐작을 해 본다. 행복하면서도 고통스러운. 행복을 지향하나 행복으로 가기위해 밟아야 할 숱한 지뢰들. 나를 놓고 줌 인, 줌 아웃하며 적절한 이해와 고통을 만끽하는 밤에는 잠이 오기가 힘들겠지....

<사랑의 인사> 아버지의 부재. 반복되는 소재, 혹은 주제이다. 수족관에서 일하는 주인공. 수족관 유리 너머로 본 오래 전에 잃어버린 아버지.... 그에게 전하는 인사. 사랑의 인사. 슬픔이, 쾌락이, 계속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격정도 일상이 되면 지겨워 질 수 있는 법. 우린 다 그렇게 각자에게 최적화된 힘의 양으로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는 거다.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바람 부는 여름 날 저녁. 아이는 졸음을 참으며 아버지에게 머리를 맡긴 채 자신이 태어나기 까지의 전사를 듣고 있다. 아버지의 연애는 찌릿하고 화려하다. 찰나적이며 허망하다. 아이의 졸음과 불꽃놀이 같은 아버지의 연애가 어우러져 잔잔한 듯 경쾌하며 환상적이다. 

<종이 물고기> 옥탑 방의 네면을 가득채운 이야기들, 그리고 새로 채워 나갈 다섯 번째 벽면의 소설들.... 서로 다른 그 이야기들이 연결되어 그것들이 서로 얽혀 하나의 거대한 종이 물고기가 되는 장면, 포스트 잇들이 물고기의 비늘이 되어 일렁이는 장면. 어쩌면 그동안 그가 세상에 나서 꾸었던 꿈, 세상을 알고 자기를 드러내고 배우며 또 다른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한 비상이었던가. 벽이 무너지기 전 그 종이 물고기는 벽을 무사히 탈출하여 그의 머리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기를 그 속에서 숨을 고르고 또 다른 비상을 이뤄 내길....

<노크하지 않은 집> 읽는 내내 그녀들 사이에 연대가 일어나길, 공감과 소통이 이루어지길, 그리하여 그 삭막하나 불완전한 분리의 공간에서 그들이 서로를 인식하고 위로해 줄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결국은 서로가 너무나 똑같아서 만날 수 없었다. 그 똑같음이 부끄러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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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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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이 인상적이었다.

정신줄을 놓은 것 처럼 보이는 김지영씨.

내가 기대했던 건 살짝 그 뒤의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였다 보다.

거꾸로 김지영씨가 왜 그렇게 정신줄을 놓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쭉 살펴 보는데,,, 약간 맥이 빠졌다.

그 인생의 많은 대목이 어쩌면 대한민국 여자라면 몇번씩 겪거나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할말들이 많을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말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읽고 나서 한껏 자기 이야기들을 하던 사람들이 그 이야기들의 이면에 있는 차별적 구조의 원인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게 되었다.

어쩌면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싸인이겠지... 싶으면서도 행간에 그런 혜안이 좀 더 깔려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러면 최소한 정답은 아니더라도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닥을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한편으로는 김지영의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대처에 울분이 터지기도 한다.

부당하다면 부당하다고 실컷 소리라도 쳐 볼 일이지.... 이불 속에서 떨거나 면접장에서 치마를 붙들고 혼자 분개하거나... 아닌 걸 아니라고 말 못하고 신발 속에서 발가락 엿이나 먹이는 일들을 평생했다면 그 역시 정신줄을 놓게 된 원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나의 일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책임지지 못한 것이다. 물론 사회의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구조가 있었다. 그래, 분명 있었다. 그것이 가정에게로 이어지고, 개인의 내면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개인은 점점 무력해지고 작아진다. 짓눌려 있다......

진정, 다른 대안은 없는 건가?

여성들의 연대? 아니다. 여성들이라고 다 같지도 않을 뿐더러 여성들의 적이 남성은 아니다. 그러면?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어 있어라, 스스로 주문하고, 깨어 있겠다, 스스로 결심한다. 깨어서 아닌 건 아니라고, 얼굴을 붉히고 주먹을 휘두르지 않더라도, 웃으며, 자연스럽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말하며 살련다. 최소한 말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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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성자 프란체스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오상빈 옮김 / 애플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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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는 부자집 아들이었다.

부자집 망나니 아들로 살다가 문득 이렇게 사는 것의 헛헛함을 알고 회심을 하였다.

그리고 헐벗은 채 맨발로 떠돌아다니며 '서로 사랑하라!'고 설교를 하고 다닌 것이 회심 이후 나머지 인생이다. 그는 왜, 자신의 육체에 끊임없이 가혹한 주문을 하며 육체의 편안함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던가. 그건 아마도 육체가 쾌락을 탐하였을 때 그 끝이 없음을, 육체의 쾌락을 추구한 자로서 깨달았기에 그러했던 것은 아닐까. 육체에 집중할 때 영혼이 망가졌음을 경험했기에 그러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삶은 사실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에 기초한 것이다. 육체가 쾌락에 젖어 있을 때 영혼은 그 찬란함을 잃게 될 것이며 영혼이 하나님과 맞닿아 있을 때 육체는 결코 안락할 수는 없을 거라는.....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의 성자로서의 수행과정을 보면서 고행을 일삼는 불교의 승려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도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다. 육체의 고행을 통해 정신의 일깨움을 추구했고 그래서 영원한 평화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 육체가 살아있는 한, 육체에 집중하는 한 모든 것은 찰나적이며 그 찰나는 또한 헛되고 헛될 수 밖에 없으니.

그러나, 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헛되다 할 수 있겠는가. 불교의 해탈이나 천주교의 영생이나 이생의 유한한 삶이 아닌 영원하고도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

육체와 영혼이 과연 서로 구분되며 대립하는 것인지, 그리고 유한함은 곧 허망함인지....

이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프란체스코의 삶에 전폭적으로 동의가 될 듯 하다.

프란체스코를 읽으면서 내가 알게 된 건, 내가 꿈꾸는 삶 가운데 큰 그림 하나가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 공동체가 운명이나 생계를 같이하는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기대고 의지하고 나누며 살 수 있는 것, 그저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랑 함께 살아가는 것.... 그런 것을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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