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성자 프란체스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오상빈 옮김 / 애플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프란체스코는 부자집 아들이었다.

부자집 망나니 아들로 살다가 문득 이렇게 사는 것의 헛헛함을 알고 회심을 하였다.

그리고 헐벗은 채 맨발로 떠돌아다니며 '서로 사랑하라!'고 설교를 하고 다닌 것이 회심 이후 나머지 인생이다. 그는 왜, 자신의 육체에 끊임없이 가혹한 주문을 하며 육체의 편안함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던가. 그건 아마도 육체가 쾌락을 탐하였을 때 그 끝이 없음을, 육체의 쾌락을 추구한 자로서 깨달았기에 그러했던 것은 아닐까. 육체에 집중할 때 영혼이 망가졌음을 경험했기에 그러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삶은 사실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에 기초한 것이다. 육체가 쾌락에 젖어 있을 때 영혼은 그 찬란함을 잃게 될 것이며 영혼이 하나님과 맞닿아 있을 때 육체는 결코 안락할 수는 없을 거라는.....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의 성자로서의 수행과정을 보면서 고행을 일삼는 불교의 승려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도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다. 육체의 고행을 통해 정신의 일깨움을 추구했고 그래서 영원한 평화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 육체가 살아있는 한, 육체에 집중하는 한 모든 것은 찰나적이며 그 찰나는 또한 헛되고 헛될 수 밖에 없으니.

그러나, 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헛되다 할 수 있겠는가. 불교의 해탈이나 천주교의 영생이나 이생의 유한한 삶이 아닌 영원하고도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

육체와 영혼이 과연 서로 구분되며 대립하는 것인지, 그리고 유한함은 곧 허망함인지....

이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프란체스코의 삶에 전폭적으로 동의가 될 듯 하다.

프란체스코를 읽으면서 내가 알게 된 건, 내가 꿈꾸는 삶 가운데 큰 그림 하나가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 공동체가 운명이나 생계를 같이하는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기대고 의지하고 나누며 살 수 있는 것, 그저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랑 함께 살아가는 것.... 그런 것을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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