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연극론 - 해외미학선 18
앙토넹 아르토 지음, 박형섭 옮김 / 현대미학사 / 1994년 4월
평점 :
품절


종일 앙토넹 아르토의 '잔혹연극론'을 붙들고 앉아있었다. 전공이 영화라는 놈이 영화사 한 번 이렇게 맘먹고 공부한 적 없었는데 20세기 실험연극사에 이토록 목을 매고 앉았다니, 역시 선생의 역할은 실로 중요하구나 느껴진다.

아르토의 이론은 지금에 와선 그리 독창적이라고 느껴지진 않지만 1933년에 이토록 완벽한 아방가르드 연극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는 데 새삼 탄성을 자아낸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실험연극이라 떠올리는 많은 것들은(리빙씨어터, 그로토프스키 등등) 사실 아르토의 '잔혹 연극' 이론에서 영향받은 것들이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사실주의로 알려져있는 연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래, 현대의 아방가르드 연극 또한 아르토의 '잔혹 연극' 이래 별달리 진보 내지는 변화한 게 없어보이니 연극이란 예술이 좀체 보수적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예술에 비해 더디 가는 것인지 아니면 변화 그 이면에 무언가 다른 것들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르토는 한평생 알 수 없는 질병 탓에 몰핀을 달고 살아야 했던 인생이었다. 신체의 자유롭지 못함을 다른 데서 갈구하다보니 연극 쪽에서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여간 그의 발상은 선구적이어서 천재로 숭앙되기에 지나침이 없지만 그 발상을 실현으로 옮길 건강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법이다. 내가 아는 한 사람도 타고나지 못한 건강 때문에 그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완벽한 천재가 되는 길은 이처럼 완벽하게 어렵다.

불어로 쓰인 글들이 원체 이렇게 현학적인 것인지 아니면 번역이 영 시원찮은 것인지, 대강의 가닥 말고는 뭔가 잡히는 게 없는 글 같아 그게 좀 불만스럽긴 하지만 희대의 천재가 남긴 흔적을 이렇게나마 볼 수 있다는 데 위안을 삼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 - 역사학자 4인의 문명 비교 탐사기
박한제 외 지음 / 사계절 / 200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네 명의 사학자가 1년여간의 준비를 거쳐 연구와 답사를 거친 나름의 성과물이다. 우리가 '세계사'로 알고있는 세계의 역사가 서구인의 시각으로 정립되고 쓰여진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세계를 '중화'의 변방으로 본 중국의 입장으로만 파악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젊은 학자들의 이러한 시도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유라시아. 유럽과 아시아를 묶는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국가별로 나뉜 지역적 사고 경향을 지닌 요즘 사람들에게 그리 친숙하게 다가오는 개념은 아니다. 그렇지만 책의 각 장 앞에 실린 지도로 알 수 있듯 유럽과 아시아는 큰 한 덩어리이고 우리가 미국과 더불어 세계의 주축이라고 믿어오고 있던 유럽 역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유라시아 대륙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땅이었다. 우리는 세계사의 한 지점에서부터 서구인들에 의해 조작되고 왜곡된 역사를 객관적인 세계사로 오인하며 배워왔던 것이다.

이 책은 세계사의 큰 흐름을 '팍스 몽골리카나'의 시점으로 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이루었던 유목민 몽고족.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광활한 제국을 형성해가고 확장해가고 쇠퇴해갔는지를 보면서 우리가 알아오던 서구 중심의 세계사 이면에는 바로 동쪽에서부터의 자극이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리하여 과거와 역사는 엄연히 다르며 문화에는 다양성만 존재할 뿐 우열을 가리는 일은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새로운 세기의 문명간의 마찰이 서구의 자기중심적 우월주의에서 나온 대결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사족이지만, 좋은 책은 저렴한 가격에 널리 읽혀졌으면 한다. 물론 각 국가의 유적지 사진과 지도 등이 수록되어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코팅된 지질로 만들어진 책에는 부담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종이만 바꾼다면 책값도 싸지고 책 무게도 가벼워질텐데. 그 부분이 가장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
이석우 지음 / 시공사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요즘 서점에 가면 우후죽순 쏟아져 나와 있는 교양 미술 입문서들 사이에서 지적 호기심을 조금 더 충족시키기 원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볼 만하다. 이 책은 역사가가 서양의 역사를 축으로 하여 풀어낸 그림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가 없었던 태초부터 그림을 그려 소망을 표현했던 인류의 역사는 바로 예술사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을 사랑하는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태초, 중세, 르네상스, 혁명기, 현대까지 서양 역사의 넓은 부분을 한 권에 담아보려는 노력은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역사학자의 안목으로 선택한 작품들은 책의 순조로운 흐름에 기여하고 있다. 오키프나 로드코 등 새로운 작가들에 대한 소개도 신선하게 느껴졌고, 비슷한 두께나 재질의 다른 책들보다 책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에 수록된 도판의 상태가 조금 더 양호했으면 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녹슨 쇳덩이, 납, 모래, 이 모든 것들을 황금을 변하게 해줄 수 있는 연금술! '연금술사'는 우리 삶의 권태, 절망, 불행, 고통 따위를 기쁨, 즐거움, 행복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열쇠를 찾아가는 보물지도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여러 번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의 시기를 맞게 된다. 그렇지만 그 선택이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 따른, 우주의 뜻에 따른 결정이 될 것인지 아닌지 선택의 순간에 그것을 알아채기란 쉽지가 않다. '연금술사'는 바로 이러한 때에 우주가 나에게 보내주는 '표지'에 충실히 따를 것을 권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내 안의 진정한 내가, 우주가 보내주는 신호가 있지만 이것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특히나 온갖 정보와 광고가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서, 나의 욕구마저 나 자신의 욕구가 아닌 대중의 욕구가 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매스컴이 조장한 욕망이 내 욕망이 되는 세상에서 우주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보내온 신호를 알아채기란 참으로 쉽지가 않은 일이다. 시각만이 비대해져 이제는 눈으로 보는 것조차 믿지 못하게 된 세상에서 무엇이 과연 나만을 위한 표지인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자신의 삶을 황금으로 바꾸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든 그 표지는 나타날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항상 마음과 눈을 정결히 하고 기다리는 자세, 그것이 필요하다. 표지는 멀리 있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모
미카엘 엔데 지음, 차경아 옮김 / 청람문화사 / 2002년 1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시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고 즐기는 일을 하고 있을 땐 시간이 쏜살처럼 빠르게 지나버리고 괴롭고 힘든 일을 하고 있을 땐 시간이 너무나 느릿하게 지난다. 과학시간에 이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살면서 이런 경험은 수차 해보았을 법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별로 중요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일에 매달리는데도 시간이 빠듯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정말 스물네 시간이 맞는걸까? 시간을 여유롭게 쓰는 사람들을 보게되면 때로 저들은 나보다 하루를 몇시간쯤 더 오래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었다.

'모모'를 읽으면서 그제서야 나는 무릎을 치게 되었다. 내가 시간에 허덕이면서 지내온 것은 바로 다름아닌 '회색도당들' 때문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암묵적으로 회색도당들이 내게 던져주는 달콤한 권력과 돈과 심리적인 만족에 맛들여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삶을 조금씩 소진하며 살아온 것이었다. 내 시간의 꽃은 지금쯤 회색도당들의 냉동 저장고에서 건조되어 시가로 말려 연기로 사라져가고 있겠지!

모모의 도움을 받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시간과 삶을 앗아가고 있는 회색도당들의 정체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용감하고 씩씩한 모모는 나를 위해 또 한 번 세상을 멈추고 내 시간의 꽃을 돌려주려 올 것이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단숨에 끝까지 달려가게 되는 책, 누구나 한 번만 읽어도 사랑하게 될 책. 감히 이렇게 단언하고 싶다. 조금은 다른 템포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