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요가 - 철학과 수련
버니 클락 지음, 최하란 옮김 / 스쿨오브무브먼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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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요가의 교과서라 불리는 책의 한글판.
번역 퀄리티가 나빠서 좋은 평점을 주기 어렵다. 주어, 목적어가 없는 문장과 비문은 기본이고, 단어 오역도 제법 있다.
사전을 찾아 읽을 수 있는 분이라면 원서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돈아까울 정도로 무책임한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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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길노래 카페의 서재 2
안석희 지음 / (주)벼리커뮤니케이션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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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노래 한 소절 흥얼거리며 먼 길을 걷는 느낌.
뜨거운 시절을 보내고 이제는 편안해진 저자의 솔직한 이야기에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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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핑퐁 - 베를린 장벽이 열린 날 돌베개 그래픽노블 & 논픽션 시리즈 만화경
마빌 지음, 윤혜정 옮김 / 돌베개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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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독의 분단과 통일 이야기를 한 아이의 성장담에 빗대 이야기하는 만화책. 생생하고 아름다운 그림체의 바탕에 작가의 진지한 질문과 고민의 흔적이 남아있다. 만화가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책이다. 옮긴이의 친절한 작품 설명이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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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을 위한 시크릿
헨리 클라우드 지음, 박종윤 옮김 / 시냇가에심은나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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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론다 번의 '시크릿'을 기독교인의 시각에서 재정리한 책이다. 론다 번의 시크릿보다 조금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부분이 있어서 도움되는 면도 있었지만 일면 기독교인들이 갖는 선민의식이 드러나는 것 같아 좀 불편한 부분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사람은 론다 번의 '시크릿'을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 않다. 나는 론다 번의 '시크릿'에서 언급하는 우주나 이 사람이 언급하는 '하느님'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헨리 클라우드는 하느님은 우주와 달리 '선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시련이 생겨나는 것은 선한 의지를 가진 하느님이 인간들을 돕기 위한 필요 때문에 마련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다. 이것이 론다 번의 책에 등장하는 '인간의 마음에 감응하는 자석과도 같은 우주'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론다 번 책에선 하느님도 결국 내 안에 계신다는 느낌이 드는데 헨리 클라우드의 책에선 하느님이 여기 내 안에 계신 게 아니라 저 멀리 우주 밖에 계신 것처럼 느껴진다.

'크리스찬이 아닌' 론다 번의 책에 반발하기 위해 씌어진 이 책은, 내용 자체로서는 나무랄 것이 하나도 없고 어떤 점에선 론다 번의 책보다 훨씬 자세하고 친절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신이나 우주에 대한 관점에선 차라리 론다 번의 견해를 좀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더라면 굳이 론다 번에게 냉소하는 이 책을 안내도 되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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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Harold S. Kushner 지음, 김하범 옮김 / 창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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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궁금하지 않은가?

정말로 세상에 신이 있고 그 신이 선하다면 왜 착한 사람들이 이토록 많이 고통스러운지, 못된 놈들은 어쩜 그리 잘 사는 건지.

가뜩이나 가난한 마을에 하루 아침에 폭탄이 떨어져 온가족이 산산조각 나고, 어린 아이에게 먹일 젖이 없어 갓난쟁이가 말라 죽고, 불치병에 걸리고, 남의 손을 빌지 않고는 연명할 수 없는 장애를 안고 태어나고, 다섯 살 여자아이가 매춘을 강요당하는-

이 까닭없는 고통들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들은 많은 생각들을 발명해냈다. 누군가는 하느님의 시험이라고, 누군가는 전생의 업이라고, 또 누군가는 자연의 방식이라고. 누구도 감히 이 모든 일이 '우연'이라고 흘려버릴 수는 없다. 그러기에 이 고통들은 너무도 잔혹하기 때문이다.

아들을 '조로증'이라는 희귀한 병으로 잃은 미국 어느 랍비는 자기보다 먼저 늙어죽는 아들을 14년간 지켜보며 이 말도 안되는 고통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의 결론은 역시나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오랜 성찰 끝에 그는 신이 '선하다'와 '전능하다'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일이라고 결론내린다. 신은 선하지만 전능하지는 않거나, 신은 전능하지만 때때로 악랄할 수도 있다는 두 가지 선택 중 택일해야 하는데 자신은 전자를 택하겠다는 거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고통은 인간이 자초한 것이거나 자연의 법칙일 뿐이지 신이 원해서 일어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로 신이 선하고 전능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일어난 고통을 이해하려면 어떻게든 내 머리로 이해되는 이야기여야 하기 때문에 저런 생각, 저런 선택이 가능했을 것이다. 나 역시 정말 오랜 시간을 신이 있는가, 신은 선한가, 신은 정말 전능한가를 고민하며 보냈다. 그럼에도 나는 신이 선하고 완전하다는 사실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다. 그 기대마저 없다면 고통을 견디고, 내일을 맞는 것이 무의미해져버리기 때문이었다. 다만 우리는 지금 이 고통의 끝을 알지 못하는 것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어왔고, 앞으로도 그리 믿을 것이다.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서 공감할 수 있었던 한 가지는 고통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왜냐고, 대상도 없는 그 누구에게 아주 오랫동안 물어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흡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 다만 내가 물을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뿐이었다. 어떡하면 이 고통 속에서 좀더 편안할 수 있을지, 어떡하면 이 고통에서 좀더 자유로워질지, 그 뿐이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내게 흡족하다. 왜냐고 물으며 분노하는 대신, 어떻게 할 것인지 방법을 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쿠쉬너가 사실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도 이제 그만 '왜'를 놓으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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