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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ㅣ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고독하지만 낭만적이고 정의감 넘치는 시니컬한 남자.
레이몬드 챈들러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의 '전형'을 제시해 주었다.
이제는 이런 캐릭터가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풍자의 대상이 되거나 이에 반하는 안티 영웅들이 등장하고 있는 시대가 되어 버렸지만, 아직도 수많은 소설과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필립 말로의 흉내를 내고 있다.
단 4편의 장편 소설(물론 50여편의 단편들이 있긴 하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때 결코 많은 분량은 아니다.)에 등장한 셜록 홈즈가 아직도 고전 미스터리 소설의 수많은 탐정들의 원형이듯이 단 6편의 장편에 등장한 필립 말로는 수많은 하드보일드 히어로의 원형이다.
필립 말로가 등장하는 소설은 쉬이 읽히는 작품들은 아니다. 사건은 비비 꼬여 있고, 주인공은 끝없이 중얼거리며 도시의 어두운 거리를 비틀거리며 걸어다닌다. 명쾌함과 기발한 반전을 기대하며 "추리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는 챈들러의 소설을 집어든 독자들은 낯설음과 당혹감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필립 말로의 매력과 챈들러의 마법과 같은 문장에 빠져든다면 색다른, 그리고 아주 새로운 문학적 만남을 갖을 수 있을 것이다.
<기나긴 이별>은 필립 말로가 등장하는 6번째 장편이자 사실상의 마지막 작품이다. <빅슬립>, <안녕 내사랑>, <리틀 시스터>등에서 말로의 "패기"나 "우수", "냉소"를 보았다면 <기나긴 이별>의 말로에게서 우리는 "비애"를 본다. 어느덧 40대에 접어든 필립 말로는 지치고 고단해 보인다. 챈들러는 이 작품이 사실상 자신과 말로의 마지막 작품이 될것이라는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일까. <기나긴 이별>은 여타 앞서의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얼개를 지녔다. 기존 작품에서 늘 보여주던 의뢰인의 사건을 수임받아 2~3일의 짧은 기간동안 도시의 구석 구석을 다니며 시체를 발굴해 내는 말로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 볼 수 없다. 상당히 긴 시간을 두고 말로는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쏟아 붓는다. 사건을 숨가쁘게 쫓아다니던 옛 모습과는 달리 그는 사건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서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모두 이루었지만, 여전히 고독하다. 그것이 그의 숙명일까. 그는 세상 모든 얽히고 설킨 인간사에 "기나긴 이별"을 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p.s. 6권의 소설을 읽고 처음으로 말로의 리뷰를 쓰면서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역시나 버겁다. 이 책에는 더 깊이 있고 섬세한 리뷰가 어울린다. 순전히 부족한 나의 소양 탓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