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는 96년 3월 초에 돌아가셨다.
여든 다섯에 돌아가셨으니 천수를 다 누리고 돌아가신 거라고 생각한다.
형, 누나가 서울에서 자취를 하던 시기에 어머니가 집을 비우고 서울에 며칠 다니러 가실 때면 고등학생이던 나의 새벽 등교길에 점심, 저녁 도시락을 싸주는 일은 당시 여든을 바라보던 할머니의 몫이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정정하셨고 활달하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들은 할머니의 장수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진학을 위해 나도 고향집을 떠나고, 할머니를 뵙는 일은 명절이나 방학에 집에 내려 올 때 뿐이었다. 그나마 집에 잘 붙어 있지도 않는 막내 손자는 할머니의 말 동무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나름대로 바쁘고 힘든 1년이 정신없이 지나고 96년 초 설을 맞이해 집에 내려왔을 때 할머니는 자리에 누워 계셨다. 지난 가을 추석때 까지도 정정하셨는데 치매 증상이 조금 보이기 시작하시더니 이내 걷기에도 힘든 몸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말씀도 잘 못하고, 나를, 우리 형제들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아버지만이 할머니의 시선 안에 들어올 뿐이었다. 두 돌이 채 안된 조카를 데리고 누나가 집에 들렀다. 우리는 그저 쓸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할머니 곁에 앉아 있었다. 누나는 눈물짓고 있었지만 아직 철없는 조카는 무엇이 좋은 지 헤헤 거리며 할머니 주위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 때, 우리 형제들도 알아 보지 못하던 할머니가 누우신 채 누나의 아이를 바라보며 웃으셨다. 그리고 조카의 손을 잡고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세대의 교체로구나. 흐르는 강물처럼 할머니의 세상은 이제 조카의 세상으로 흘러 가는구나. 한 세대가 사그라지고 또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구나. 사람의 사는 이치와 그 흘러감이 명징하게 내 눈앞에 보여지는 것 같았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순간을 맞이 할 날이 있으리라. 그것은 이별의 순간일까. 전달의 자리일까.
할머니는 한 달 후에 돌아가셨고, 조카는 벌써 초등학교 4학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