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 2014.11
샘터 편집부 엮음 / 샘터사(잡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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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1은 참 외로운 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뾰족하게 솟은 것이 이 녀석의 머리처럼 보여 앞으로 삐죽 튀어나온 저것은 녀석의 눈썹이거나 모자의 챙처럼 보입니다.

1은 멀뚱히 서서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요, 왜 이 숫자를 보고 있노라면 녀석의 쓸쓸한 등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까요.

태생적으로 외로운 수 1마저도 가끔은 싱긋 웃고 있는 때가 간혹 있습니다. 

11이란 숫자가 되었을 때요.

홀로 서 있던 1이 둘 모이니 나란히 걸어가는 두 다리가 보입니다, 두 사람도 보입니다.

멀리 떨어진 채로 멈춰있는 1이 아닌, 

어딘가로 걸어가는 11이 간혹 다른 1을 만난 것 같은 11을 보면 전 든든하고 뿌듯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런 면에서 11월은 산책이 자연스레 어울리는 달입니다.

단풍과 낙엽 사이를 오가는 앞 사람의 모습에서도 나란히 걷는 노부부의 걸음 속에서도 불쑥불쑥 11을 만나거든요. ^^



11월의 순우리말 이름은 ‘미틈달’이랍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치닫는 달이란 뜻입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숫자 11을 보았는지 샘터 11월호는 특집으로 ‘하염없이 걸었다’란 주제를 걸었습니다.

외로운 길을 걷던 20대의 서러움, 7일간의 사막 레이스 끝에서 만난 박수소리, 

무전여행 길 위에서 만난 낯선 이의 나눔, 황량한 마음으로 떠난 도보 여행이 남긴 작은 변화 

이런 것들을 담아냈습니다.

11은 왠지 모르게 든든하게 느껴진다던 제 감상이 그저 저 혼자만의 감상에 그치지 않을 것 같아요. 

(이 글들을 만나면 홀로 걸어도 나란히 걸어도 둘이 되어 있는 1들-11을 느끼지 않을까요?)



샘터 11월호 중에서 전 <알맹이로 승부하리라(p.33)>란 글이 가장 와닿았습니다.

성우 공부를 하는 20대 청춘의 깨달음이 담긴 짧은 글입니다.

5년 간 성우시험을 준비하면서 ‘다른 이의 말을 자신의 말처럼 전하는

 성우는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걸 느꼈다고 하더군요.

차마 ‘뱉지 못했던 말을 대사에 담아 전하는’ 걸 하고 있다는 생각,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진짜 자신의 마음을 담아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해요.

내 안에 숨어있는 혹은 숨겨놓은 진짜 나를 만나는 것이 진실한 나를 만들고,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는 나라는 사람이겠죠?


 

11월 호엔 작가 최인호 1주기 전 소식도 있었습니다.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 ~11월 8일까지. ‘사물의 시간’이란 코너에서 작가 1주기를 맞아 특별히 다루었습니다.)

50년 동안 소설을 썼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가 아닌 작가로 남고 싶어 했던 그를 그리워 하는 이들이 여러 유품을 모았다고 해요.

십자가와 묵주, 손녀가 만든 솜 눈사람과 만년필이 놓인 앉은뱅이 책상은 작가가 흘린 눈물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던 마음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35년 6개월간 샘터를 통해 연재한 소설 ‘가족’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이 맞닿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범한 가족의 소소한 일상이 그려진 이 소설의 연재가 끝나자 이웃과 이별한 것처럼 헛헛함을 느낀 독자도 많았다고 하잖아요.

조금 투박하지만 부끄럽지만 우울하지만 우습기도 하지만 나와 내 가족의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진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의 연장선 위에 놓인 것이겠지요?

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최인호 작가의 전시회도 읽어본 적 없던 소설 ‘가족’도 궁금해졌습니다.



어떤 다큐멘터리의 방송작가는 가끔은 장례식장에 가 앉아 있다고 합니다(<장례식에 가면 보이는 것들(p.54~55)>).

돌이킬 수 없는 것들,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오늘은 소중한 영원’이라 생각하며 돌아온다고 하죠.


 

장례식장에 가는 것 보다 저는 조용히 거리를 걷겠습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치닫는 이 시기에, 

혼자 그렇지만 터덜터덜 걷는 내 다리와 함께, 

나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누어 보아야 겠습니다.

얼마만큼 내게 진실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지, 

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소중한 것들은 없는지.

11월이 시작되는 이 시점, 샘터 11월호 덕분에 저는 숙제를 하나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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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2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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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인적 감상

며칠 전에 우연히 애거사 크리스티를 '다시' 만났습니다.
제목에 끌려서요, 제목은 [딸은 딸이다]였죠.
네. 딸이 등장합니다, '딸'이 있으니 당연히 엄마도 나오겠죠? ^^

서로에게 애틋한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애틋했던(!) 두 사람의 갈등의 이야기이자,
엄마와 딸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들로 이루어진 책이었죠.

저는 지금껏 애거사 크리스티를 
추리소설 작가로만 생각했었는데 큰 코 다쳤습니다.
사람의 대화, 말소리, 보면서나 느낄 수 있는 줄 알았던 사람의 분위기까지 
하나하나를 잘 살려 보여줍니다. 
마음 속에 어떤 마음이 일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까지요!



#2. 인물들

앤: 차분하고 조용한 여자, 세라의 엄마.
세라: 열아홉, 활기 찬 소녀, 변화를 싫어하는 아이. 앤의 딸.
리처드(일명 콜리플라워?ㅋ): 앤에게 다가온 오랜만의 사랑. 앤과 재혼을 꿈꾼다.
로라: 영국에서 '데임' 작위를 받은 노부인. 강연이나 상담을 통해 심리에 관한 조언을 한다. 앤과 세라 모두를 가까이에서 지켜봐주던 존재.
게리: 세라의 친구. 실패가 끊이지 않는 남자.

인물들은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정부나 앤/세라/리처드의 주변인물 몇몇 분.(비중이 크지 않아 생략)
대부분의 구도는 앤과 세라, 세라와 리처드, 리처드와 앤.
그리고 이 세 사람의 마음 속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가지런히 놓인 마음에 금이 가는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을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 
순간 순간의 감정, 주변의 상황, 마음 속의 생각들까지 놓치지 않고 풀어놓는다.
각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쉽게 상상하고 쉽게 공감할 수 있게 한 것이 작가의 힘!!!

* 번외로, 나는 왜 자꾸 멋있게 나이 든 로라 같은 인물들에게 끌릴까. (그것이 궁금하다?!ㅋㅋ)




#3. 계획
애거사 크리스티의 이 시리즈에 기대 중이지요.
(이 시리즈라 함은, 애거사 크리스티가 힘든 일을 겪던 시기였던 1930년~1956년까지 스스로의 명성은 내려놓고,'메리 웨스트매콧'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장편 소설들이 '포레'에서 하나씩 출간되는 걸 말합니다. ^^)
-또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보여줄지
-어떤 갈등을 어떻게 만들어 내고 또 어떻게 풀어낼지
알고 싶어졌거든요.


무엇보다, 
이 여사님이 보여주시는 '갈등'과 '문제'라면 
꼭 해결의 실마리는 안고 있을 거라고 믿게 되는 걸요.
그런 '혜안'을 -간접적으로나마- 배우고 싶은 마음, 그래서 읽고 싶어 집니다.



[봄에 나는 없었다], [장미와 주목] 그 다음으로도 쭈욱 책이 나왔으면..... :)






p.s.

아들은 그가 부인을 얻기 전까지만 아들이고, 딸은 평생 딸이다'

프랭클린의 말이라더군요. 실제로도 책의 겉표지에 쓰인 글입니다.

이 책을 읽은 후에 얼마나 더 곱씹었는지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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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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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달려라 아비』로 만났던 김애란 작가를,

너무나 유명해진 『두근두근 내 인생』과 다시 만났다.

영화 포스터를 띠지로 입은 '오디오북'인 채로.

 




#1. 소설에 대하여


오래 전, 단편들을 통해 만난 작가 '김애란'에게 느낀 건 

글이 묘하게 곰살궂더라는 것.

짧은 이야기들 속에서 반짝이는 재치와 새침한 듯 감추어 둔 온기를 만났더랬다.


다른 소설들을 한참을 제쳐두고 

다시 만난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은 그 다정함이 한 가득 묻어나는 소설이었다.

 

어릴 땐 온종일 말을 줍고 다녔다. 엄마 이건 뭐야? 저건 뭐야? 종알대며 주위를 어지럽혔다. 각각의 이름은 맑고 가벼워 사물애 달싹 붙지 않았다. 나는 어제도 듣고 그제도 배운 것을 처음인 양 물어댔다. 손가락을 들어 무언가 가리키면, 식구들의 입에서 낯선 소리를 가진 활자가 툭툭 떨어졌다. 바람에 풍경(風磬)이 흔들리듯 내가 물어 무언가 움직이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이건 뭐야?'라는 말이 좋았다. 그들이 일러주는 사물의 이름보다 좋았다. (p.10~11)

 

아이가 있다. 

세상의 온 단어들을 조금씩 줍고 다녔다는 아이. 

바람이 불면 자기 안의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치는 걸 느끼는 아이. 


세상을 꼬물꼬물 살아가는 한 아이가 연상되려는 때, 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낸다.

아버지? 나도 모르게 나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내가 세상의 사물들에 달린 '이름'들을 하나씩 쌓아가던 나이의 아버지를. 

아버지는 양복을 입고 까만 서류가방을 들고 아침이면 사라졌다 저녁이면 나타났다. 부모님 방엔 책이 한 가득 들어차 있었고 책상의 서류들에선 아버지의 서릿하고 삐죽한 어른 글씨가 '제안'이니 '협상'이니 '분석'같은, 손에 잡을 수 없는 단어들만 한 가득 쏟아내고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는...어라, 내가 떠올린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의 새끼'라는 말을 듣는다, 

열일곱 학생이었단다, 

태권도를 잘한단다, 

아니 실은 '스트리트 파이터'를 잘 한단다. 

아이의 외할아버지 앞에서 처음으로 포기를 잘한단 사실을 깨달았단다.


아이는 젊은, 아니 어린 아버지와 어린 어머니를 두었구나. 

좋겠다, 젊으니까. 

서로 가까운 나이에서 시작해서 같이 나이 들어가잖아. 

어쩌면 세대차이라는 걸 덜 느낄 수 있을 거잖아.



열일곱이 된 게 기적인 아이, 아이의 이름은 '한아름'이다. 

병실에 앉아 나이듦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는 아이,

남들보다 빨리 늙어가는 아이, 

노인의 몸을 지닌 아이,

혈압약, 진통제, 관절약, 위장약을 챙겨먹어야 하는 아이.


이 아이가 갖는 특이한 상황 때문에 

이 아이와 이 부모에게 낯설음을 느끼려는 찰나, 발견하게 된다.

참 솔직하고 밝은 가족들이라는 걸.

그렇게 '아름'이를 살아내게 하는, 작가의 맑은 마음을.


어머니의 심장은 오동통한 달처럼 내 머리 위에 떠, 나무가 초록을 퍼트리듯 방울방울 사방에 비트를 퍼트렸다. 그것은 정보량의 최소 기본단위를 말하는 비트(bit)이기도 하고, 가수들이 음악을 만들 때 쓰는 비트(beat)이기도 했다. 이 비트(bit)와 저 비트(beat)는 몸 곳곳에 중요한 메씨지를 보내며 삐라처럼 흩날렸다. 듣다보니 뭔가 '되고 싶어지는' 게 누가 들어도 참 선동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리듬이었다. 명령어를 전달받은 세포들은 곧장 행동에 돌입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트를 맞고, 기관들이 움트며 기지개를 편 거였다. 간이 부풀고 콩팥이 여물며 우둑우둑 뼈가 돋아났다. 나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종종 내 꿈에서, 어머니가 꾸는 꿈과 만나 두서없는 대화를 했다.

'엄마......'

'응?'

'엄마......'

'그래.'

'나 자꾸 가슴이 떨려요...... 가슴이 아프도록 뛰어요......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이러다 죽을 것만 같은데...... 도무지 멈출 수가 없어요.'

'아가야.'

'네?'

'나도, 나도 그래, 가슴이 자꾸 뛰어. 가슴이 저리도록 뛰는데 멈출 수가 없어......'     (p.32~33)

 

이 사람들이 갖는 

특별함이 '다름'이라는 차이로 느껴지지 않고,

'남다름'이라는 색다른 느낌으로 마음 속으로 파고든다는 걸.



아름이가 부모님에게 남기고 간 소설 속의 소설, [두근두근 그 여름]은 

남들이 보기에 늙은(?) 아이가 얼마나 어리고 싱그러운 마음으로 단어들을 모으고 모았는지를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체하지 못한 젊음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풀어쓰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소설의 백미.

다르게 이름 짓자면 한아름의 [사전].



 

 #2. 오디오 북에 대하여


오디오북: 책과 띠지 각각에 NFC에 접근할 수 있는 마크가 있음. 

폰의 NFC기능을 켠 상태에서 폰과 그 마크를 수직선상에 놓게 되면 '더책'이라는 앱에 접근할 수 있음.

자동으로 책 [두근두근 내 인생]의 오디오 북에 접근하게 됨.

​(* NFC(Near Field Communication)란,13.56MHz 주파수 대역을 사용하여, 약 10cm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무선 데이터를 주고 받는 통신기술을 일컫는다.)

 

장점: 

외로울 때 켜 두었더니 자동으로 책을 읽어준다.

전화가 왔어도 끊기지 않았다. 

성우들은 때로는 아이의 목소리로 때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로-리얼하게 연기한다.

페이지별로 찾아 들을 수 있다(장점이자 단점? 아래에서 다시 얘기하자)

 

단점:

페이지별로 찾아 들을 수 있었지만,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이 페이지별로 끊기는 게 한계.

즐겨찾기/북마크 기능이 있었지만 이상하게 다시 켤 때마다 못 찾더라 (이것은 작동을 잘못한 나의 탓인 듯)



[두근두근 내 인생]이 영화로 만들어지던 시기에 오디오 북이 가능한 소설을 함께 만났다.

활자화된 책을 스스로 읽는 걸 더 선호하는 나로서는 이 녀석들의 선호도를 표시하자면,

소설 책오디오 북 ≠ 영화  쯤 되겠다.

(참고로 아직 영화는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영화와 소설 작품은 별개라는 생각.)



오디오 북 같은 경우는,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 있거나 

단순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책을 읽고 싶으나 환경이 허락치 않을 때(시야(시선) 확보 불가?)

정말 유용하게 잘 쓰일 녀석이기도 했고, 

성우의 목소리와 연기력에 따라 만족도 높게 찾아질 컨텐츠이기도 하단 생각.

(소설을 먼저 읽지 않고 오디오 북으로 만난 후에 텍스트를 접하면 소설에 대한 느낌이 다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연기톤을 살려 읽을 책과 무덤덤하게 연기하지 않고 읽을 책을 

출판사나 전문가 집단에서 잘 선별해주면 좋겠다는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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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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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에! 겐자부로, 

누군가가 던진 그 말 장난이 마음에 들었다.

상을 준다는 천황에게 맞서 자신의 뜻을 밝힌 작가의 괄괄함도 좋았다.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책 <개인적인 체험>은 

근거 없는 믿음, 유쾌한 농담(?)처럼 

가뿐히 내 손 위에 놓이게 되었다.


버드, 첫 머리에 나오는 주인공을 만나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후두둑 담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존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가 왔다가 사라진 모양.

그때부터였나 

책 넘기는 속도가 더뎠다.


버드,라는 호칭 때문에 

책 속에 비일비재하게 등장하는 -소리나는 대로 쓰여진- 외국어 때문에

그리고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문학작품들 때문에

나는 그가 어떤 나라의 어떤 사람인지 헷갈렸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우당탕탕 래빗이 넘나들고, 

'모래 사나이'가 잠깐 보였다가 허공 중에 쏟아져 내리고,

어디선가 애드가 앨런 포가 내 옆모습을 보다가 사라졌다.

나는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그런 생각만 가득했다.



주인공 버드와 그의 꿈-아프리카와 술과,

아내와 아내와 너무 닮은 장모와 여자친구 히미코와 

버드가 버렸던 -기쿠히코, 

그리고 뇌 헤르니아의 장애를 안고 새로 태어난-또 다른- 기쿠히코.

무리를 지어 버드를 괴롭혔던 젊은이들과의 조우.


뭔가 끔찍한 느낌은 들었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좀 웃기는 구석이 있군-하는 생각으로 

멀리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바라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멀다'고 느끼고픈 마음이, 이 무거운 이야기를 피하가려는 내 발버둥이었을까.)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던 '슬라브어 연구회'가 

어느 한 순간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하는 가치로 변해버린다는 건,

아이를 쇠약사하게 하기 위해 차를 달리면서도 

혹여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남자를 본다는 건,

묘하게 재미있었다.


분명 심각한 이야기 임을 알면서도,

그리고 이 이야기 속을 두서없이 헤매고 있는 나를 알면서도

아이러니한 게 

세상의 모습이랑 똑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버드는 봉투를 뜯어 안에 든 편지를 읽으려다가 확률을 둘러 싼 학생 시절의 이상한 미신, 무언가 내용을 알 수 없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만났을 때 한족이 불행한 의미를 안고 있으면 다른 한쪽은 행복한 의미를 품고 있을 것이라는 미신이 떠올라 봉투를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이사장실을 향해 갔다. 이사장과의 이야기가 최악이라고 한다면 버드는 주머니 속 편지에 최상의 기대를 둘 만한 정당한 이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자넨 뭘 극리 초조하게 자기 아들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건가? 여긴 입원비도 그리 비싸지 않은데. 자넨 건강 보험증도 있잖은가? 어쨌든 자네 아이는 쇠약해지긴 했지만 떡 하니 살아 있다구. 아버지답게 느긋하게 기다리게나, 엉?"


"버드가 그날 밤 기쿠히코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기쿠히코는 호모 섹슈얼도 되지 않았을까?"하고 히미코가 주제넘게 물었다.


버드는 아기의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려 했던 것이다. 아기 눈의 거울은 말갛게 개인 깊은 회색으로 버드를 비추어 냈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미세하여 버드는 자신의 새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먼저 거울을 보아야지, 하고 버드는 생각했다.



이 소설의 가장 마지막에 힘주어 말한 '인내'라는 단어가
이유없는 '희망'보다 훨씬, 이 '개인적인 체험'과 맞아 떨어진다.

대부분의 독자들 역시 이 소설의 마지막의 문장을 깊게 음미하는 것 같다.  (다음 독자가 직접 읽어볼 기회로 남겨두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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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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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책을 찾고 있었다, 틱장애를 앓는 소녀가 나온다 했던가.

아는 것 하나 없는 상태에서 도서관을 헤매다

<너는 모른다>의 표지를 봤다.


붉은 치마와 붉은 구두, 단정하게 신은 타이즈가 드러난

-소녀의 치맛단 끝자락부터 발끝까지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이 소녀가 내가 알고 싶어하는 어떤 소녀가 아니라 해도

'너는 모른다'고 단정짓는 아이라면 

'모른 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이 책을 만났다. 




#2.


책을 몹시 읽고 싶었고 궁금했다.

대책 없이 찾아온 이 책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하고 리뷰들을 들춰봤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리뷰들이 가족들의 특징을 나열해놓는 통에 

'나중에 알아도 될' 이야기들마저 기억하고 책을 접해야 했다. 

(이게 긴장감을 떨어뜨려놓긴 했다.)


너무 친절한 스포일러를 당한 덕에 줄거리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어느 날 강에 신원불명의 시체가 한 구 떠올랐다,고 첫 포문이 열리더니 

갑자기 '김혜성'이란 사람이 등장한다, 새엄마, 그의 아버지 김상호, 유지, 은성... 사람의 이름이 나열된다.

1장에서 불쑥 등장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한 가족이자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3.


아쉬운 건, 인물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이야기 속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산만해진다는 것이다.


특히나 하나도 매력적이지 않은, 

오직 '사건의 전개'만을 위해 등장하는 '영광'의 분량(?)이 쓸데없이 많아서 좀 싫었다. 게다가 정이 별로 가지 않는 '은성'의 -본연의 모습과 흡사할 것 같은- 산만한 삶이 영광이랑 같이 등장하는 부분들은 좀 별로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땠을까 하는 캐릭터이거나 별로 공감이 가지 않은 캐릭터에 대한 괜한 투정. ^^;;;ㅋㅋ



#4.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연민이 일었다.

다른 독자들과는 다르게 나는 '김성호'가... 슬펐다.

짐승이고 싶어하는 소년이었다가 외로운 등짝을 내보이며 바짝 엎드리는 가장의 모습.

혜성도 옥영도 유지도... 

상처 입은 자잘한 부분들이 엿보여서 

너덜너덜한 마음은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란 걸 알기에 더더욱 슬픈 사람들로 보였다.




#5.


책 속에서.


누가 물어보는 말에만 짧게 답할 뿐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법도, 먼저 입을 열어 종알대는 법도 없었다. 그런 태도가 은성을 편안하게도 불편하게도 했다. 아이는 비단 은성에게만이 아니라 누구한테나 골고루 무심했다. 혜성에게도, 아빠에게도, 심지어 제 엄마에게조차 우유를 넣은 딸기젤리처럼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인 적이 없을 것 같았다. 유지 앞에서 아빠와 새엄마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짝사랑에 빠진 얼간이처럼 굴었고, 그것은 은성에게 비밀스런 통쾌함을 안겨주었다.

동시에 그것은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쓸쓸함을 맛보게도 했는데, 유지의 무관심한태도가 생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환경에 기인한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인생을 유지는 아예 몰랐다. 알 필요가 없게 태어났다. 날 때부터 그 아이는 부러 눈꺼풀을 깜빡여 어른의 주의를 끌 필요가 없었고, 작은 몸의 중심을 더욱 낮추며 부모의 애정을 간구할 필요가 없었다.  (p.35~36)


MRT 신뎬션 을 타고 공관역에 내리면 대만대학 정문이 나타난다. 길 건너에는 학생들을 겨냥한 상가 골목이 조성되어 있다. 완탕이나 계란부침, 돼지고기튀김 같은 음식을 파는 난전과, 편의점, 저가 캐주얼의류 체인점, 운동화 매장 들이 허술한 벽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다. 언제와도 이십 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곳이다. 아름답게 각인된 청춘의 한 시절을 그리워하며 이곳을 찾아든 중년 사내들은 추억의 실체가 이토록 소란스러운 남루였음을 깨닫고 피곤한 걸음을 조용히 돌리곤 했다. (p.46~47)


아이의 발표회 때 오빠는 오지 않았다. 아빠도 오지 않았다. 급한 출장이라고 했다. 늘 일어나는 일이었으므로 섭섭한 맘은 들지 않았다. 협주를 무사히 마친 뒤에도 피아노 치는 소녀와는 계속 단짝으로 지냈다. 아이는 여전히 말수가 적었지만 그렇게 아껴뒀던 말들을 친구에게만은 아끼지 않았다.

“나 말이야, 어젯밤에 하늘을 날다가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지는 꿈을 꿨어.”

“와…… 신기하다. 어젯밤에 나도 그 꿈 꿨는데.”

“와…… 정말 신기하다. 그런데 왜 우리 꿈에서 못 만났지?”

아이가 말하자 여자애가 배를 잡고 웃었다.

“바보야, 당연하지. 내 꿈은 내 꿈이고, 네 꿈은 네 꿈이잖아.”

공연히 멋쩍어서 아이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하얀 운동화 코에 언제 묻었는지 모를 잿빛 얼룩이 어른거렸다. 소녀가 아이를 슬슬 피하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미안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가 없어.”

여자애가 한숨을 폭 쉬며 속삭였다.

“난 지금도 네가 좋은데.”

여자애는 비밀을 발설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번민 끝에 내린 결정은 친구에게 베푸는 마지막 우정의 선물인지도 몰랐다.

“근데 우리 엄마가 너랑 친하게 지내지 말래.”

둘은 긴 복도의 끝에 서 있었다. 아이는 친구의 눈동자에 밴 가책 어린 슬픔과 은밀한 호기심의 기미를 알아차렸다. 등뒤 환하게 밝은 유리창 너머로 흰 구름들이 펄럭이며 지나갔다. 친구의 입에서 나올 말을 더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너네 엄마, 세컨드라고.”   (p.161~162)





....특히 기억에 남은 부분...중에서도 일부다.

 뭐랄까, '우유를 넣은 딸기젤리처럼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미소'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 쓰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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