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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평점 :
솔직한 사람이 부럽다.
아니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되살릴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그것이 내가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이유 중 하나다.
사고가 있었다, 그리고 사건이 벌어졌다.
온 나라가 모두 보았고 들었다.
커다란 배가 천천히 기울었고 천천히 침몰했다.
그 짧지 않은 시간 속에 누군가의 아빠, 엄마, 딸, 아들...
그들이 속수무책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시간들을 실시간으로 담아내던 수많은 렌즈들과, 수많은 목소리 중에
어느 하나 그들에게 손 내밀지 못했다.
도움이 되는 어떤 한 마디도 지시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고를 보았고, 사건에 맞딱뜨리게 되었다.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이제 이 두 장의 필름을 분리해야 한다. 겹쳐진 필름이 이대로 떡이 질 경우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프레임, 즉 ‘세월호 침몰사고’로 기억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언론이 아직도 이 타이틀을 쓰고 있다. 별다른 오류가 없어 보이지만 여기엔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함정이 있다. 명사는 모든 것을 아우른다. 그리고 인간의 무의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를 ‘사고’로 인지하기 마련이다. 사소한 문제인 듯하나 이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p.56, 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중에서)
작가 박민규는 책 속에서 사고와 사건을 떼어 보라고 말한다.
사고에는 의도가 없지만, 사건에는 의도가 있다며 그 둘의 차이를 논하며 우리에게 되묻는다.
국가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저버렸을 때/국가는 어떤 처벌을 받아야(p.59)하냐고.
그리고 다시 내 가슴을 두드리는 말을 한다.
단 한 번도 진실이 밝혀진 적 없는 나라에서 이 글을 쓴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이고 이곳에 발붙인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모두 한 배를 탔기 때문이다(p.63).
일본이 몰았던 배, 자발적으로 배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의 양을 늘렸고
적재물로 붐비는 배 안에서도
‘잘 살아보자’는 방송 하나만을 들었다는 비유적인 표현이,
실제 세월호가 어디서 왔는지
불법임을 알면서도 얼마만큼의 적재물을 과하게 실었는지
급박한 순간에도 상위의 지시를 받았음직한 선원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내보내기만 했다는 사실과 묘하게 겹친다.
그래서 더 비통하기만 하다.
내가 있는 곳이 어느 호(號) 위인지 헷갈릴 수 밖에 없다.
모든 힘의 관계를 시혜의 관계로 표상하도록 하는 언설들이 난무하는 순간, 우리는 베푸는 지배자, 약자들이 가여워 눈물 흘리는 인정 많은 권력자를 받드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비로운 지배자의 표상 반대편에는 무력하고 보호받아야 할, 그리고 그것에 감사할 수 있을 뿐인 우리의 표상이 존재한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그와 같은 표상을 가진 이상, 심판자의 위치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자리의 역전은 가능하다. 가령 우리는 유권자로서 선거기간 동안 우세할 수 있다. 그러나 모처럼 주어진 우세함은 합리적인 선택의 자리가 아니라 베풂을 받았던 자의 반대 표상, 즉 베푸는 자의 자리가 된다. (p.77~78,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중에서)
애도와 구조의 대열을 이룬 많은 남녀의 모습을 비추며 조난자와 그 가족을 마치 한가족처럼 돕고 있는 한국인 집단 이미지를 제시한 그 프로그램은 최종적으로 동정과 협력이 한국인의 국민적 동일성임을 믿도록, 나아가 그 동일성에 따라 자신을 정의하고 자긍自矜하도록 시청자를 유인한다. 한마음 한국인 이미지의 시퀀스 이후 화면에는 장중한 선언의 템포로 분절된 한 줄의 문장이 뜬다. “아픔을 함께하는 당신, 당신이 대한민국입니다.” 이 국민의식 고취를 위한 호명은 모든 노골적인 이데올로기적 고작이 그렇듯이 혐오스럽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인이라는 존재가 추악한 인류학적 사실이 돼버린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p.124, 황종연 -‘국가재난시대의 민주적 상상력’ 중에서)
무작정 감성에 홀려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과거의 한 순간도 다시 본다.
아무 행동 없이 노란 리본을 장식물처럼 달고 다니던 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스스로의 아픔에 잠기면서도 한 걸음 물러나는 사람들을 본다.
무엇을 위한 눈물인가, 어떤 것을 향한 아픔인가.
문학인들의 글들은 다 낫지 않은 상처로 스며드는 짠 바닷물 같다.
그러나 정부 수반만 바뀌면 세월호 참사와 같은 재난이 재발하지 않으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우리는 특정 정권의 정당성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국가는 과연 민주정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적합한 형식인가. 국가의 권위는 과연 아무 특권 없는 사람들의 공생과 양립이 가능한가. 국가는 과연 다른 모든 유형의 공동체보다 높은 충성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 사회는 물질적 자원의 태반을 국구가 통제하는 상태 속에 오랜 기간 머물렀던 까닭에 국가의 권위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제도와 관행을 만들었으며 국가 이데올로기에 의존하여 사회의 열망과 이상을 정의하는 습성을 길렀다. (p.129, 황종연-‘국가재난시대의 민주적 상상력’ 중에서)
책을 빨리 읽을 수 없었다.
줄을 넘어가고 단락을 넘어가며 페이지를 넘어가면서
그때 그 순간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순간순간의 충격과 기억,
잊을 래야 잊을 수도 없는 시간으로 되돌아 가는 기이한 체험을 했어야 했다.
그 체험은 내가 느낀,
묵직한 그 무언가가 어떤 이름을 가진 감정인지
하나씩 밝혀지는 순간이었기도 했다.
작가들의 목소리를 빌어
그 형체와 구성과 근본을 알 수 있어서
다음 장으로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아직도 이 책에 대한 내 감정에 더 솔직하지 못하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과 감정을 꼬집어 표현하지 못하는 내가 가엾다.
그래서 수많은 인용으로 내 마음을 대신할 뿐이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아홉 구의 시신을 바다에 둔 채,
수색 중단 요청을... 유가족이 울음을 삼켜가며 마음을 전했다.
수색 중단에 대한 요청일 뿐이지
세월호를 세월 속에 방치하겠다는 말은 아닌데
어떤 이들이 곡해할까 두렵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고
이백 여 일이 훨씬 지난 지금,
국가는 무엇을 했으며
국민은 무엇을 요구했는가 무엇을 받아냈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세월호 승객 희생 사건을 ‘영구미제사건’으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한우리 북카페에서 도서를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