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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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책을 찾고 있었다, 틱장애를 앓는 소녀가 나온다 했던가.

아는 것 하나 없는 상태에서 도서관을 헤매다

<너는 모른다>의 표지를 봤다.


붉은 치마와 붉은 구두, 단정하게 신은 타이즈가 드러난

-소녀의 치맛단 끝자락부터 발끝까지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이 소녀가 내가 알고 싶어하는 어떤 소녀가 아니라 해도

'너는 모른다'고 단정짓는 아이라면 

'모른 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이 책을 만났다. 




#2.


책을 몹시 읽고 싶었고 궁금했다.

대책 없이 찾아온 이 책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하고 리뷰들을 들춰봤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리뷰들이 가족들의 특징을 나열해놓는 통에 

'나중에 알아도 될' 이야기들마저 기억하고 책을 접해야 했다. 

(이게 긴장감을 떨어뜨려놓긴 했다.)


너무 친절한 스포일러를 당한 덕에 줄거리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어느 날 강에 신원불명의 시체가 한 구 떠올랐다,고 첫 포문이 열리더니 

갑자기 '김혜성'이란 사람이 등장한다, 새엄마, 그의 아버지 김상호, 유지, 은성... 사람의 이름이 나열된다.

1장에서 불쑥 등장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한 가족이자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3.


아쉬운 건, 인물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이야기 속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산만해진다는 것이다.


특히나 하나도 매력적이지 않은, 

오직 '사건의 전개'만을 위해 등장하는 '영광'의 분량(?)이 쓸데없이 많아서 좀 싫었다. 게다가 정이 별로 가지 않는 '은성'의 -본연의 모습과 흡사할 것 같은- 산만한 삶이 영광이랑 같이 등장하는 부분들은 좀 별로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땠을까 하는 캐릭터이거나 별로 공감이 가지 않은 캐릭터에 대한 괜한 투정. ^^;;;ㅋㅋ



#4.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연민이 일었다.

다른 독자들과는 다르게 나는 '김성호'가... 슬펐다.

짐승이고 싶어하는 소년이었다가 외로운 등짝을 내보이며 바짝 엎드리는 가장의 모습.

혜성도 옥영도 유지도... 

상처 입은 자잘한 부분들이 엿보여서 

너덜너덜한 마음은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란 걸 알기에 더더욱 슬픈 사람들로 보였다.




#5.


책 속에서.


누가 물어보는 말에만 짧게 답할 뿐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법도, 먼저 입을 열어 종알대는 법도 없었다. 그런 태도가 은성을 편안하게도 불편하게도 했다. 아이는 비단 은성에게만이 아니라 누구한테나 골고루 무심했다. 혜성에게도, 아빠에게도, 심지어 제 엄마에게조차 우유를 넣은 딸기젤리처럼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인 적이 없을 것 같았다. 유지 앞에서 아빠와 새엄마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짝사랑에 빠진 얼간이처럼 굴었고, 그것은 은성에게 비밀스런 통쾌함을 안겨주었다.

동시에 그것은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쓸쓸함을 맛보게도 했는데, 유지의 무관심한태도가 생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환경에 기인한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인생을 유지는 아예 몰랐다. 알 필요가 없게 태어났다. 날 때부터 그 아이는 부러 눈꺼풀을 깜빡여 어른의 주의를 끌 필요가 없었고, 작은 몸의 중심을 더욱 낮추며 부모의 애정을 간구할 필요가 없었다.  (p.35~36)


MRT 신뎬션 을 타고 공관역에 내리면 대만대학 정문이 나타난다. 길 건너에는 학생들을 겨냥한 상가 골목이 조성되어 있다. 완탕이나 계란부침, 돼지고기튀김 같은 음식을 파는 난전과, 편의점, 저가 캐주얼의류 체인점, 운동화 매장 들이 허술한 벽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다. 언제와도 이십 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곳이다. 아름답게 각인된 청춘의 한 시절을 그리워하며 이곳을 찾아든 중년 사내들은 추억의 실체가 이토록 소란스러운 남루였음을 깨닫고 피곤한 걸음을 조용히 돌리곤 했다. (p.46~47)


아이의 발표회 때 오빠는 오지 않았다. 아빠도 오지 않았다. 급한 출장이라고 했다. 늘 일어나는 일이었으므로 섭섭한 맘은 들지 않았다. 협주를 무사히 마친 뒤에도 피아노 치는 소녀와는 계속 단짝으로 지냈다. 아이는 여전히 말수가 적었지만 그렇게 아껴뒀던 말들을 친구에게만은 아끼지 않았다.

“나 말이야, 어젯밤에 하늘을 날다가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지는 꿈을 꿨어.”

“와…… 신기하다. 어젯밤에 나도 그 꿈 꿨는데.”

“와…… 정말 신기하다. 그런데 왜 우리 꿈에서 못 만났지?”

아이가 말하자 여자애가 배를 잡고 웃었다.

“바보야, 당연하지. 내 꿈은 내 꿈이고, 네 꿈은 네 꿈이잖아.”

공연히 멋쩍어서 아이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하얀 운동화 코에 언제 묻었는지 모를 잿빛 얼룩이 어른거렸다. 소녀가 아이를 슬슬 피하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미안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가 없어.”

여자애가 한숨을 폭 쉬며 속삭였다.

“난 지금도 네가 좋은데.”

여자애는 비밀을 발설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번민 끝에 내린 결정은 친구에게 베푸는 마지막 우정의 선물인지도 몰랐다.

“근데 우리 엄마가 너랑 친하게 지내지 말래.”

둘은 긴 복도의 끝에 서 있었다. 아이는 친구의 눈동자에 밴 가책 어린 슬픔과 은밀한 호기심의 기미를 알아차렸다. 등뒤 환하게 밝은 유리창 너머로 흰 구름들이 펄럭이며 지나갔다. 친구의 입에서 나올 말을 더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너네 엄마, 세컨드라고.”   (p.161~162)





....특히 기억에 남은 부분...중에서도 일부다.

 뭐랄까, '우유를 넣은 딸기젤리처럼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미소'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 쓰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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