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폴리스 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 옮김 / 새만화책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흥미로운 만화책이다. 만화를 만나기도 전에 만났던 글이 하나같이 새롭고도 낯선 것이었으므로.


‘이란Iran'이라는 말은 ’아이리아나 바에조Ayryana Vaejo'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리안족의 시원始原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반유목민적인 이 사람들은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의 조상이었다. 메디아인들은 기원전 7세기에 처음으로 이란 국가를 세웠다. 그리고 키로스 대왕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기원전 6세기 키로스 대황은 고대의 가장 큰 제국 중 하나가 되는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란은 1935년 마지막 샤*의 아버지인 레자 샤갸 국호를 ‘이란’이라고 부르게 하기 전까지 보통 그리스식 명칭인 ‘페르시아’라고 불렸다. (p.4)


작가 마르잔 사트라피의 말대로 이 거대한 문명의 나라는 과거의 명성과는 무관하게 기억되고 있다. 

‘폭력’과 ‘혼란’으로 기억되기 이전에 그곳에는 분명 폭력과는 무관한 다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걸 우린 잊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물음은 검은 베일에 대한 기억을 술회하는, 1권의 첫장면에서부터 강하게 울려진다.





나는 온전히 신의 정의이며 사랑, 그리고 응징이고 싶었다.(p.15)

그녀 여섯 살 때부터 장래희망은 선지자였다. 

매일 밤 하느님과 대화를 했고 자신이 경전을 만들기도 했다, 비록 그 책의 존재는 할머니만 아는 것이었지만.

 

잠재적인 강간의 위험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은 여성이 의무적으로 베일을 써야 한다고 선포했다.

(TV) 여자의 머리카락은 빛을 내어 남자들을 흥분시킨다. 그게 여자가 베일로 그들의 머리를 가려야 하는 이유이다. 만약 베일을 쓰지 않는 게 더 문명화된 것이라면, 동물들이 우리보다 더 문명화됐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빠) 말도 안 돼! 놈들은 남자는 다 변태 성도착자로 생각하나 보군!!

(엄마) 당연하죠, 그들이 바로 변태니까!(p.80)

이 얼마나 무서운 강요인가. 이런 이상한 나라에서 마르잔은 여자였고 때문에 베일을 써야 했던 것이다. 

십대의 나이에서부터 남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최초의 방어라는 것이 베일이었고 

그걸 거부하는 여성들은 손가락질 받거나 -오해받는 것은 다행이다-위원회애 회부되거나 

되먹지 못한 남자로부터 성폭력을 당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녀의 엄마는 언어폭력에 시달리기도 했다.)



(마르잔) 하지만 공정해지자구. 만약 여성이 베일 쓰는 걸 거부해서 감옥에 가야 한다면, 남성들 또한 서구의 상징인 넥타이를 하는 게 금지되어야 해. 그리고 여성의 머리카락이 남성을 흥분시킨다면, 그와 똑같이 남성의 드러난 팔뚝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렇다면 남성들은 긴팔 옷만 입어야 한다구. 무엇보다도 우선 좀 공평해야겠지.(p.81)

마르잔은 선지자의 자질이 다분한 아이인지도 모른다. 

나는 마르잔의 이 말을 들으며 왠지 모를 기대를 하게 되었다. 

고작 열 살 남짓의 나이에 이런 반박을 할 수 있다면 ‘혹시’!



여자애들은 군용 방한모를 만들었지만, 남자애들은 예비병사로서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엄마) 나스린 씨, 괜찮아요? 안색이 좋지 않네요.

나스린 아줌마는 우리 가정부였다.

(엄마) 말해 보세요. 안 좋은 일이라도…?

(마르잔) 괜찮아요?

(나스린) 아니요, 좋지 않아요. 우리 아들 녀석이… 이게 뭔지 아세요?

(엄마) 금색 칠한 플라스틱 열쇠군요.

(나스린) 아들 녀석이 학교에서 이걸 받아 왔지 뭐예요. 전쟁에 나가 운 좋게 죽는다면, 이 열쇠가 천국으로 이끌 거라고 그랬대요.(p.105)

그러나 마르잔은 아직 어렸던 걸까. 

가난한 아이들이 열쇠를 목에 걸고 지뢰밭에서 천국으로 날아오를 때, 

마르잔은 파티에 참석할 때 구멍이 송송난 스웨터와 쇠사슬에 징이 박힌 목걸이가 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펑크록과 어울려서 

기분이 날아오르고 있었을 뿐이다.


전쟁에 어린 아이들을 동원하기 위해 군인은 못할 짓을 한다. 

가난한 동네에서 온 아이들에게 사후의 삶이 ‘디즈닐랜드보다 낫다’고 교육시키고 

끝없이 노래를 부르게 하여 세뇌시키는 것이다. 최면에 걸린 그 아이들은 전장의 총알받이가 되게 하는 구조. 

조지오웰의 <1984>에서의 세뇌 역시 그런 것 아니었나. 

끝없이 어떤 믿음을 주입하는 것, 자신의 생각을 갖지 못하게 끝없이.


 

1984년.... 이 혁명적 기질이 다분한 소녀는 14세가 되었고 ‘아무 것도 더 이상’ 그녀를 ‘두렵게 하지 못했다(p.149)’ 

장신구를 금하려는 교장과 몸싸움을 하기도 하고 

학교의 잘못된 가르침을 듣고는 선생님은 왜 진실을 가르치지 않냐고 반박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이 종교적이며 여자에게 지나치게 억압적인 이란에서 딸이 더 위험해질 것을 깨닫고 

오스트리아의 프랑스 학교로 유학을 보내기로 한다.

그녀, 그곳에서 선지자로 자랄 수 있을까?




-2권에 대한 이야기 및 책에 대한 전체 총평은 2권 리뷰에 적도록 하겠다.-


http://blog.aladin.co.kr/ohho02/688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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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은 따뜻하다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쥘리 마로 지음, 정혜용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파란색은 따뜻하게 그 둘을 물들였다-『파란색은 따뜻하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때문에 찾게 된 책이다. 

영화 속에서 읽은 블루는 혼돈의 블루, 외로움의 블루(http://ohho02.blog.me/100204940849)였던 것에 비하면 이 책은 파란색을 ‘따뜻하다’라고 인정할 수 있었다. 

작가 쥘리마르가 선택한 푸른색의 미세한 톤tone이 신의 한수였던 걸까? :) 

만화책이라 편안하게 들고 다니면서 읽어야지 했는데 조금 크고 표지가 두꺼워서 놀랐다. 밖에 들고 다니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





클레망틴이라는 고등학생이 나오고 엠마라는 대학생이 나온다. 영화 속의 아델 대신 클레망틴이 나오는 것 빼고 설정들은 거의 같다, 각자 문학을 전공하고 미술을 전공하는 것도 영화와 똑같다. 클레망틴의 학교 친구들, 둘의 만남, 둘의 사랑 모두.


물론 다른 것도 있다. 무엇보다 인물의 설정이 다르고 결말도 다르다. 

클레망틴의 일기장을 통해 둘의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영화에서 ‘직접’ 거론되지 않은 세세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결말은 영화보다 극적이어서(책이 영화보다 극적인 건 뭘까?) 아쉬움도 남는다. 영화와는 다른 하나의 작품으로서 먼저 만났더라면, 새롭고 놀라운 소재를 편안하게 다가오게 만들어준 ‘소녀의 체온’이 묻어나는 책이라고 좋아했을 듯 하다. (소녀의 것이라고 해서 상냥하고 향기로운 꽃향기가 난다고 착각하는 일은 없겠지?^^;)




굳이 영화와 이 작품을 좀 더 비교하자면

하나. 클레망틴과 엠마는 평범하고 지극히 평등한 사이에 놓인 듯 하다. 영화에서는 둘의 계층이 다르다는 걸 암시하는 장면들이 꽤나 등장한다, 엠마의 집, 가족들, 그리고 그 친구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엠마의 일상이 그렇게 지나치게 드러나지 않는다. 또 두 사람이 모두 겪는 혼란이 둘을 평등한 상태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클레망틴에게는 자신과 성(性)이 같은 ‘여자’를 사랑한다는 혼란이, 엠마에게는 클렘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연인이 곁에 있다’는 혼란이 있다.

(엠마의 혼란에 대처하는 두 사람의 행동에도 주목해볼 만하다. 모두 둘의 ‘이끌림’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둘이 나누는 사랑이 ‘혼자만의 파란색’이 아니라 ‘함께 하는 파란색’이라는 기분이 드는 이유.


둘, 앞서도 밝혔지만 두 캐릭터의 설정이 다르다. 엠마는 다소 우유부단한 면이 있는 성인의 모습, 클레망틴은 엠마를 만나 용기가 생기는 청춘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영화 속 아델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엠마와의 생활을 시작한 것 같았는데 여기서의 클레망틴은 그렇지 않다. 클레망틴이 쓰는 일기를 통해 그 내면을 더 많이 내보여주기 때문에 클레망틴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능한 듯.


(자꾸 영화라 비교해서 아쉽긴 하지만 영화 속 ‘레아 세이두’가 연기한 엠마는 결단력이 있고 책임감이 있는 여자였고 아델이 그 매력에 빠져'들어간' 것 같아 보였다. 엠마가 ‘나의 뮤즈’라고 아델을 다른 사람 앞에서 칭송하는 순간 나는 또 얼마나 행복했는지!(읭?))





p.85

난 왜 걔에게서 이 모든 걸 원하는 거지? 난 왜 온통 이런 생각뿐이지? 그건 정말 끔찍해!

뭐가 끔찍한데?

난 그러면 안 되는데. 걔는 여자애야. 정말 끔찍하다고.

이봐 클렘, 끔찍한 건 말이야, 석유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인종청소를 해대는 거지, 어떤 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끔찍한 건,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건 나쁜 일이라고 사람들이 네게 가르친다는 거지. 그녀가 너와 같은 성(性)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안그래?

클레망틴이 혼란스러워하던 시기에 친구와 나누는 대화다. 엠마가 클레망틴의 엄마에게 하는 말-‘제가 남자였더라도 클렘은 저와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요(p.14)’에 견줄만한 멋진 대사!









p.s. 

둘의 사랑이 운명적이었다는 것을 표현한 초반의 거리씬

영화에서 ‘정말 아름답고 숨막히게’ 표현했다....

때문에 나도 모르게 책과 영화를 비교하고 있나봐.(작가 쥘리 마르에게 미안해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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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하나뿐인 당신에게 - 영화심리학자 심영섭의 마음 에세이
심영섭 글.사진 / 페이퍼스토리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몇 개월 전에 심리학 책을 신통찮아 한 적이 있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심리학 서적을 한 권 집었는데 순전히 영화 얘기가 한 가득 들어있었다. 단편적인 영화 속 장면과 그것은 어떤 증상이라 명명하는(?) 구성, 알고 싶은 이론에 파고들 수 없었기에 책의 평가를 낮게 했다. (책의 겉과 속을 전혀 다르게 분류한 누군가에게 속은 기분이었으므로.) 며칠 전에는 강신주의 저서를 읽었다. 철학이 문학을 안고 있는 형식의 책이었다. 서로 다른 장르가 섞여 있긴 했지만 문학에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고 철학의 입장이 주가 되어 있는 책이었다. 지나치게 흐물거리지 않은 구성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여기, 하나뿐인 당신에게』라는 책은 이 둘과 비슷하다. 책이 담고 있는 것이 심리학 같기도 하고 영화 같기도 하다, 아니 감정지침서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분명 다르다, 나를 속였다는 느낌도 주지 않고 지나치게 딱딱한 느낌도 주지 않는다. 영화심리학자가 쓴 ‘마음 에세이’라고 책의 색깔을 제대로 분류 해놓았다. 부담스럽지 않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고 또 때때로 멈추어 놓아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영화를 빌어 쓴, ‘’에 대한 에세이이니까.

 

비교적 최근의 영화 <연애의 온도>나 <건축학개론>에서부터 1946년 작 <멋진 인생>까지 다양한 영화가 실려있다. 영화가 두서없이 실린 건 아니냐고? 그렇다면 나는 분명 지난 번에 읽었던 책처럼 평점을 낮게 매기고 말았겠지. 작가 심영섭이 20년간 상담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인생에 대한 질문들에 맞춰 영화들을 골랐다. 영화와 글이 균형 잡혀 있다. 지극히 인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래서 감히 ‘삶에 대한 에세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영화이자 글,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잠깐 펼쳐보면, 오필리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도 실려있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말-“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라 버림받음에 의해서, 더 일찍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는다.”를 통해 살며시 열쇠를 들어 보인다. ‘아, 그렇지. 이별같은 것 때문에 나도 참 많이 성숙했었는데’하고 마음을 열면서 열쇠를 받아들자 영화 <자전거를 탄 소년>의 일상이 그려진다. (보고 싶었지만 제대로 본 적 없는 영화를 만나 행복한 기분은 책의 또 다른 매력이다.^^이 작품처럼!)


소년 시릴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아주 뒤늦게 알게 된다. 빨간 자전거가 버러졌듯 자신 또한 버려졌다는 현실은 시릴을 무너뜨리는 것 같다. 헛된 희망을 품었다가 다시 또 넘어지는 시릴,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고 몸부림쳐도 외면받았던 어린 내가 보이는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스산하다. 시릴 마음속에 뚫린 휑한 구멍이 내 것인 양.

이러한 ‘무너짐’의 과정은 버림받은 이들의 가장 고유하고 독특한 심리적 과정이기도 하다. 상실에 대한 슬픔과 저버림과의 차이는 ‘자존감의 붕괴’라고 할 수 있다. 상실에 대한 슬픔과 저버림과의 차이는 ‘자존감의 붕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사별의 과정을 거쳐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은 오히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저버림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일종의 심리적 폭력이다. 뿌리 깊은 자존감에 일방적인 어퍼컷을 당한 이들은 아픔조차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최승자의 시 <일찍이 나는> 속 버림받은 여자처럼. (p.184)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멈춰있지 말고, 버림받았으므로 저멀리 밀쳐졌으므로 일어나야 한다. 나무에서 떨어진 시릴이 죽은 듯 쓰러져 있다가 전화 벨소리에 거짓말처럼 일어나듯이 책을 읽는 그대(혹은 나)도 그래야 하지 않겠냐고 누군가가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철학자는 구명하지만 심리학자는 다독인다, 며칠간 비슷한 구성으로 된 두 책(『강신주의 감정수업』과 심영섭의 『지금 여기 하나뿐인 당신에게』)을 읽으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강신주는 강단있게 밝혀내지만 심영섭은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각각의 책이 만족스러운 건 내용도 구성도 각각의 장점이 잘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이야기를 넘나들면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주는 작가에게 고맙다.

 

 

 






버려져야 선택받는다. 인간은 버려짐을 통해 다시는 버려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무쇠처럼 단련한다. 무너짐의 극한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누군가에게 버림받을 수도, 누군가를 버릴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난 왜 이렇지?’(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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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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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강신주, 책을 통해 인연이 닿은 동갑내기 친구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철학자다. ‘철학’이라면 좀 어렵게 느꼈던(왜 죽고 없는 철학자들만-철학자의 사상이나 말보다!- 내게 매력적이었던 걸까, 철학은 아직 살아있는데) 나는 차분히 강신주와 친근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처음은 여러 명사들이 공동으로 지은 책에서 우연찮게 시작되었다. 과학을 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글이었던 것 같은데 느낌이 생각만큼 강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잊었다, 강신주의 매력을 알기엔 글이 짧았다. 시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의 다른 저작물들도 보았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도 철학도 모두 어려운 장르였으므로 너무 일찍 지쳐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익숙한 소설들을 두고 철학자가 바라보는 감정에 대해 풀어쓴 책이다. 소설의 옷을 입고 있기에 이해가 쉽고 그 안에 드러난 감정들은 철학자의 이론을 끌어오기에 적절한 예인 것 같다. 때문에 즐겁게 읽힌다.

가령 내가 스피노자가 정의내린 감정 중에 하나- 사랑(amor)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다(p.79)라고 말하는 철학서를 읽었다고 치자.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이라는 딱딱한 글투를 읽으면서 ‘아, 역시 스피노자가 말해주는 철학이 진짜지’하고 감탄하고 그 글귀를 몇 번이고 곱씹을까? 아니. ‘이 양반, 사과나 심느라 바빴나 말을 왜 이렇게 딱딱하고 짧게 썼데?’하고 불평하지 않을까. 죽은 자의 입에서 나온 말과 살아있는 내가 겪는 현실의 간극을 ‘지금’을 사는 철학자’ 강신주가 직접 메워주고 있다. 그가 적절한 소설을 챙겨 이야기를 풀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설의 줄거리에만 치우쳐 ‘철학적인 접근’을 놓아버리지도 않는다. 소설의 형식과 철학의 알맹이가 잘 어울려 빚어진 책이다. 사이사이 들어간 미술작품이나 (소설)작가에 대한 짧은 정보도 유익한 편이라 책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 제법 흐뭇하기까지 하다.

 

앞서 예를 든 사랑의 감정은 연민이나 박애 혹은 동경, 호의, 끌림과는 다르게 분류되어 있다. 다른 것과의 차이는 무얼까, 왜 사랑에 빠질까, 스피노자가 말한 ‘외부의 원인’은 사랑의 상대인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은 그리움이란 말인가. 그 알쏭달쏭한 이야기는 누군가를 만나 과거보다 더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는 기쁨을 누릴 때, 우리는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p.79)고 명쾌하게 해석되어 있다.(‘명쾌하게’라는 말은 강신주의 뒤를 밟으며(?) 만난 팟캐스트를 통해 그의 목소리와 웃음, 강연의 태도를 통해 느낌 감정이다.^^전부를 들은 건 아니지만, 그는 꽤 호탕하게 강연을 하는 듯 했다.) 이어 따라오는 펄벅의 소설 『동풍 서풍』 일부에서 드러나는 주인공 궤이란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을 인용한 부분을 읽지 않아도 이해가 되는 것도 강신주의 감정수업이 수강 만족도(?)가 높은 이유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후회’라는 감정은 미처 생각해 본 적 없는 새로운 문제를 만나는 경험이기도 했다. 후회가 많은 사람은 결국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 그 후회 속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걸 조절할 수 있었을 것이란 착각이 숨어있다는 것. ‘후회’라는 단어는 알았어도 그 단어의 밀도는 하나도 모르고 썼던 건 아닌지, 내가 가졌던 후회라는 건 혹시 다른 감정을 잘못 이른 말은 아니었는지 한참을 생각했어야 했다.

‘후회’에 대한 스파노자의 정의에서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이라는 표현에 방점을 찍어야만 한다. 자신이 모든 불행을 직접적으로 초래할 수 있는, 일종의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에만, 우리는 후회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모든 불운을 자기가 초래한 것이라고 믿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은 선택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믿는 것만큼 거대한 착각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큰 오만이 또 있을까?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면 모든 불행을 객관적으로 보기 보다는,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 이런 사람은 후회라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기가 힘들다. 결국 후회는 신과 같은 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p.393~p.395)

 

책을 읽기에 앞서 잠시라도 강신주의 목소리와 강연을 이끄는 태도를 알아본 것은 잘한 일이었던 것 같다. 때때로 ‘너무’ 명료하고 ‘너무’ 강단있게 소설을 해석하는 그를 만나면서 그의 목소리를 먼저 알지 못했더라면 그 ‘힘’에 지쳐서 책을 쉽게 넘기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므로. 한편으로는 그 명료한 시선과 태도는 어쩌면 철학자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숨어있는 것들 속에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거나 부여하거나 명명하는 것, 그것이 본디 철학의 일이므로. (철학은 배움 자체를 밝히는 것이라고, 학창시절 어느 교수는 철학 첫 시간에 그렇게 운을 뗐었다.)

 

책을 덮으면서 미처 읽지 못한 고전소설들과, 진득하게 만나지 못한 철학서들을 떠올렸다. 그 둘 모두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면 이것은 ‘끌림’이 옳을까.

끌림(propensio)란 우연에 의해 기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그 어떤 사물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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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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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판 포레스트 검프-『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100세 생일을 코앞에 둔 할아버지가 있다. 갑자기 창문을 넘어 요양원을 탈출한다, 실내화를 질질 끌면서. 어디론가 가고 싶었을까 요양원에서의 일상이 힘들었나 그리운 누군가와의 마지막 재회를 하고 싶었을까. 이 소설의 장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창문을 가볍게 넘는 이 노인을 따라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알란 칼손은 평범한 노인일 수가 없었다. 폭발물 제조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던 죄로 정신병원에 가야했을 때 알아챘어야 했다. (아니 그를 담당한 의사를 보고 알아챘어야 했을까?) 말은 많았지만 그만큼 겪은 일이 많아서 였고, 학력이라고는 평생을 두고 단 2년의 초등학교 생활이 전부이지만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면서 깨달은 것이 많았기에 부족함이 없다(아빠의 ‘사상’ 변화를 보고 들으면서 조차 ‘정치’의 위험성을 간파했으니 똑똑한 아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가 왜 낯선 청년이 맡긴 트렁크를 들고 가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가는 길에 트렁크가 따라왔고 그 트렁크 때문에 성난 청년들이 꽤나 폭력적으로 노인의 뒤를 따랐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p.47)이므로 그냥 지금의 상황에서 옳은 판단을 -단숨에- 내리는 것이 그만이었다.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몰랐던 세계사의 흐름을 알 수가 있다. 적어도 이 노인이 살아온 백여년의 시간에 대한 급박한 세계 정세는 단숨에 잘 읽힌다. 나라와 정치색 따위와 무관하게 알아갈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


간간히 칼손의 주변인물, 특히나 정치나 종교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지나치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인물들을 만나는 지점에선 좀 느리게 읽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이 모든 상황이 읽는 이를 유쾌하게 만든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자꾸 읽게 될지도 모른다.


알란 칼손이 어떤 나라에(행선지를 밝히지는 않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것을 직접 찾아보길) 비행기를 착륙시켜야 할 때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게 맡기라고 말한다. 나는 이 노인의 입에서 조종사의 언어가 나왔다면, 지금까지 읽은 분량과 무관하게 이 모든 이야기는 지나치게 허구이며 이 뻥을 끝까지 읽어내려갈 수 없다며 소설을 집어 던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알란은 영리한 노인이다.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채 눈을 껌뻑 느리게 감았다 뜨며 “뭐 문제 있수?”하고 내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아니요, 없어요. 할아버지. 전 할아버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요.”


영화화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수다스럽고 천역덕스러운 알란 칼손 역에 우디 알렌은 어떨까. 

어떤 영화가 만들어지건 소설 속의 상황을 잘 재현해 내기 위해선 꽤 많은 돈과 노력이 들어야 할 것 같다. 유쾌상쾌통쾌한 100세 노인의 기구한(?) 삶이 궁금하다면 이책을 읽어보길. 엔돌핀이 필요한 시점이라면 더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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