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마, 넌 호랑이야 샘터어린이문고 39
날개달린연필 지음, 박정은 외 그림 / 샘터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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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동물원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한다. 

새끼 반달곰이 어미를 공격해 상처를 입혔고 결국 어미는 죽었다. 

좁은 사자 우리에서 곁방살이를 하던 곰이 배고픔을 못 이겨 사자를 물어 죽였다.

 

어미가 죽었는지도 모르는지, 

불안하게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검은 반달곰에게서 무서움과 동시에 애잔함을 느꼈다. 

엇이 동물들을 이렇게 몰아갔을까. 

동물들에게 ‘자연스럽다’는 건 뭘까. 

동물들의 눈에 비친 그곳-동물원의 일상은 어떨까. 

이런 시선으로 상황을 다시 보려할 때 이 책을 만난 건 필연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동화 『잊지 마, 넌 호랑이야』속엔 

단편동화가 셋, 본성을 잃어가는 동물이 세 종류 등장한다. 

시베리아엔 가본 적 없는 시베리아 호랑이, 

중국 자룽 습지에서 아내를 만난 두루미, 

사람들의 관삼과 명령에 익숙해진 아프리카 코끼리. 


이 셋의 공통점은 동물원에서 사람들을 만나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점.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의지한 채, 

부드러운 흙 대신 시멘트 바닥을 밟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 주인공들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은 어른들에게 들었던 고향을 상상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파 한다는 점.


 

“아빠가 말했어. 날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기회가 찾아온다고. 나는 스스로 그 기회를 만들어 낼 거야.”

갑돌이의 끈질긴 설득에 갑순이가 꿈꾸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날고 싶은 두루미, 갑돌이> 중 p.62)


아이들과 동물원에 간 모습을 상상해보자. 

‘예쁘다, 저것 봐, 크구나, 신기해’ 같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아이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들은 보통 여러 동화나 만화를 통해서 

순화되고 인간화된 동물들만 만나왔으므로, 인간처럼만 바라본다. 

실제 동물을 보아도 지나치듯 ‘보고’ 말고,

 그들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 볼 생각은 하지 못하기도 한다. 


한번이라도 다큐멘터리 속 푸른 초원이나 하얀 빙산 속에서 

살아 숨쉬는 동물들의 생활을 본 아이들은 알 것이다. 

동물원에서 만난 동물들에게선 

자연의 품에 안겨 눈빛과 동작이 살아 숨쉬던 

동물들의 그것과 같지 않다는 걸. 동물원은 뭔가 이상한 곳이란 걸.




“꽁이야, 혹시 여기가 아프리카야?”

“아프리카는 아니야. 하지만 어쩌면 비슷한 곳일지도 모르지.”

“그럼 여기가 동물원보다 나쁜 데는 아니지?”

“알 수 없어.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동물원을 떠난 코끼리, 꽁이와 산이> 중p.134)



동화집을 읽으며 동네를 산책하던 중, 끽끽 소리가 들렸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겨울철새들이 대열을 맞춰 날아가고 있었다. 

몸이 아파하던 갑순이가 그토록 그리던 자유로운 날갯짓이 저런 것이었단 생각에 

마음이 툭-하고 열리는 듯 했다. 소중한 실제를 만나 감사하 듯.


동화 속의 녀석들은 비록 힘들었어도 

아직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동물들이 자연 속에 많이 살아가고 있으니까, 

이런 책을 읽으며 자연에 대해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아질 거니까,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만은 말아야지. 

주섬주섬 동화책의 책장을 덮으며 쓰린 마음을 위로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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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2014.12
샘터 편집부 엮음 / 샘터사(잡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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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맺음달에게.


드디어 만났군요, 그간 안녕하셨어요? 감기는 안 걸리신 거죠? ^^


‘아직 가을인가?’ 갸우뚱하다가 불쑥 겨울을 맞이한 기분이예요. 

11월의 수능일 진눈깨비가 날리는 걸 보았거든요. 

눈이라 부르기엔 다소 미약한 작은 가루 였지만 기분이 묘했습니다. 

거리엔 아직 은행잎이 줄기에 단단히 매달려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가을과 겨울을 분간 못하는 상태에 놓였던 것 같아요, 시간 감각도 무뎌지고요.



샘터 12월호를 보고서야 겨울이라는 생각, 곧 올해가 갈 거란 생각을 해봤어요. 

선물과 흰 사람 그리고 빨간 고깔모자가 들어찬 표지를 보았거든요. 

예전같으면 12월이 드디어 왔다며 방방 거렸겠죠, 

크리스마스와 겨울방학만 손꼽고 있었을텐데.... 지금은...잘 모르겠어요. 

마음을 가다듬는 한 해 끄트머리 달, 맺음달’이란 이 12월이 왜 이리 야속한지요.


돌아오는 해마다 1월을 신나게 시작하고, 12월엔 맥이 빠진 채로 

다시 다음 해를 “자, 다음~”하고 기다리는 것 같은 모습이, 

색깔도 감정도 향기도 하나 없는 것 같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신에게 미움을 산 시시포스¹의 처지라도 되는 것처럼요. 

애써 올리면 굴러 떨어지고 힘내서 올리면 또 굴러 떨어지고...어쩜 이렇게 부질없는 삶인지 말이예요. 

생각해보면 2014년의 결승점 근처에 몇 가지의 깃발들을 당차게 꽂아둔 것 같은데, 

결혼이나 이사 이런 큰 행사(!)를 겪고 나니 풍파에 흐트러져 있었거든요, 

게다가 어떤 깃발은 아예 사라져 버렸어요.(누가 뽑아가 버린 거지 싶어요.ㅠㅠ)


시시포스나 떠올리며 가라앉은 마음으로 맞이하는 제가 ‘시작’이란 트라우마를 겪는 환자같기도 하죠? 

(너무 과한 비유였나요? 심각한 얘기는 아닌데, 놀라신 건 아니죠? 물론 지금은 그런 상태가 아니니까 염려 마세요^^) 

어떤 트라우마 전문 클리닉 원장님²조차도 본인이 암 진단을 받고 나서는 

분노와 우울, 원망과 절망 사이를 오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분은 이겨내셨어요, 멋진 말씀도 남기셨죠.

암 이전의 삶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선택할 수 없고 어쩔 수도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어쩔 수 있는 노릇’도 분명 있다. 그것은 이전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일이다


와닿았어요.

2014년의 시작, 사실 첫단추부터 제 의지에 의해 결정된 게 하나 없었거든요. 

얼렁뚱땅 급박하게 진행된 혼인신고, 이사(원룸 아저씨의 술주정을 전화로 받았던 끔찍한 기억이예요), 

결혼식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가풍(?)과의 적응. 

시작되어 버린 낯선 게임 안에서 제 패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헤매기만 했어요. 

(그나마 제 의지로 했던 건 채용서류를 위해 미리 받았던 신체검사, 신혼여행 계획의 일부, 재테크 밑그림 그리기 정도랄까요?

사실 그것들조차... 지금은 "의미없다~"의 소리를 들을 지경이 되었다는 게.. ;;;ㅋ)

그 한 마디를 보면서 곰곰히 저를 돌이켜봤어요.

다시 생각하면, 2014년의 뜨뜻 미지근한 이 상황을 잘 맺은 후에 

새로운 삶의 방식, 삶의 목표를 다시 짜면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이 ‘시작’ 트라우마 따위 금방 이겨낼 수 있는 거잖아요?


산처럼 우뚝하고 못처럼 깊으면 봄날의 꽃처럼 환히 빛나리라³

2015년을 제 의지대로 맞이하기 위해 내년 다이어리를 마련했어요. 

내 인생의 내리막과 오르막⁴, 그 무엇이건 예상하고 여유있게 계획하면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맺음달, 제 부족함을 돌아볼 수 있게 

그리고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응원의 글들(비록 그들이 제가 볼 거란 걸 염두해두고 쓰지 않았더라도)을 만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남은 기간 잘 지내 보아요.


잘 해줄게요, 12월씨... 잘 부탁드립니다~아. ^--------^


                      -  2014.11.26.오후 10시, 사랑을 담아 맺음달을 맞이하며.




1) 그러나 살아야 한다(송정림, 샘터 12월호 p.50~51)

2) 암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김준기, 샘터 12월호 p.58~59)

3) 옛 공부벌레들의 좌우명-의(義)에 죽고 살다(박수밀, 샘터 12월호 p.28~29)

4) 내 인생의 내리막과 오르막(김신회, 샘터 12월호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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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생물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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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자는 어떤 존재일까? brown_and_cony-17

내가 아는 여자는 ‘손녀’라서 눈치보고 

‘여자아이’라서 고무줄 놀이 안하는 아이도 다 있담?,하는 눈총도 받고 

‘소녀’라서 가슴가리개를 차고 

‘여자’라서 통금시간이 자연스레 정해지고 

‘신부’라서 결혼식장의 꽃이(영혼 없는 인형이 된 기분으로) 되고, 

‘아줌마’라서 김장에 예민해져야 하고 

‘엄마’라서 아이 육아와 교육에 능해야 하고 

‘부인’이어서 남편의 직장 동료들이나 남편의 친구들 내외와 얼굴을 터야 하고 

‘어머님’이어서 다 큰 자녀의 소소한 일상에도 마음을 쓰게 되는 존재. 

적어도 내가 아는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이 복잡한 생물- 여자를 어떤 말로 규정지을 수 있을까.




마스다 미리는 일상 속의 복잡한, 지루한, 뻔한 에피소드에서 

특별한 소소함을 잘 알아채고 그걸 온전하게 고이 담아내는 작가다. 

때문에 그녀가 에세이를 쓰건 만화를 쓰건 내 귀는 팔랑거린다. 

이번엔 어떤 시선으로 나와 공감할 건가요-하며.   :D



무거운 것쯤은 번쩍번쩍 들어올리며 ‘힘이 장사네요’를 칭찬으로 듣고 손가락 브이를 만들어 보이는 미리씨. 

옛날엔 꽤 미인이었을 여자들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어 하고, 

3억 엔이 생긴다 해도 평생 만화를 그리고 싶어하는 그녀.


특유의 섬세한 감정, 하찮은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끝끝내 자기만의 만족을 찾고 빙긋 웃는 그녀를 보면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언젠가,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그려본 적이 있다. 

그때 그 선택을 내린 나는 저쪽 세상 어딘가에, 

그때 이 선택을 내린 나는 이쪽 세상에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생각. 

마스다 미리의 그림과 글을 보고 있노라면 

저 세상의 마스다 미리, 이 세상의 나를 의식하게 된다. 



하지만 가슴에서 젖이 나오는 엄마가 되면, 

나는 여자들뿐인 교실에 그녀는 남녀합반인 저쪽 교실에 따로 떨어져 있게 되겠지. 

미리씨가 아버지와 나란히 서서 멀뚱히 엄마와 동생이 들어간 교실을 밖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그림이 왠지 짠하다.

 

큰 사건도 큰 위기도 없고,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화려한 주인공이 등장하지도 않지만... 마스다 미리여서 좋다. 

공감할 수 있는 여자 이야기여서 좋다. 

그리고 그녀의 여자 이야기가, 이제부터는 내가 아는 여자 이야기와 조금씩 달라질 테지만... 그래서 좋다.



아무런 생각없이 ‘아직 결혼 안하신 거예요? 해보면 좋은데’같은 

입에 발린 듯 시덥지 않은 반응이 불쑥 내 입에서 나온다 해도, 

무반사에 가까운 내 반응에 크게 마음 다치지 않을 그녀이니까.. 

그 안에 숨어들어 있는 내 마음을 알아채 줄 그녀이니까.. 좋다.


아마 앞으로도 쭈욱- 공감하는 사이가 될 것이다, 우리는

백수 아줌마에게도, 골드 미스 작가에게도 

‘나만의 행복’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찌릿~하고 통하고 있으니까.



내게도

아마 내가 아는 행복이 있는데,

그 사실이 누군가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해도

별로 상관 없을지도 몰라.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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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필립 클로델 지음, 심하은 옮김 / 샘터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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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구에게나 오감(五感)이 있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외부의 것을 느끼는(感) 다섯 가지 감각.

누구에게나 오감은 주어져 있지만 

사람마다 각자 주로 사용하는 감각은 따로 있다 한다. 

다른 감각보다 예민하거나 더 발달한 감각, 당신에겐 무엇인가?





작가이자 영화감독 필립 클로델에게 그 감각은 후각이 아닐까. 

제목 『향기』를 마주하고 제일 처음 든 생각이었다. 

(황금색에 가까운)노란 색과 검은 색이 조화롭게 펼쳐진 

프랑스 거리가 담긴 표지를 보면서 

빵 굽는 냄새, 프로방스 지방의 허브 향기, 

때로는 지하철에서 풍겨오는 특유의 지린내 

같은 걸 떠올리며, ‘좀 뻔한데?‘ 생각해보기도 했다. ^^;;;


게다가 조금 있다가 만난 ‘차례’ 속 글자들엔 향기라 부르기 민망한 것들이 있었으니...

증류기, 대마초, 호텔 방, 사체, 새 시트, 

잠든 아이, 장밋빛 사암, 체육관, 깨어남, 여자 성기, 여행. 

이것들이 갖는 향기는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굳이 쓰려 했을까 의아하기도 했다.




다섯 살 때, 일곱 살 때, 열 살 때. 호텔 방은 방학을 의미했다. 방은 넓고 온통 낯설었다. 집에서 나는 냄새와 전혀 달랐다.

똑똑히 기억난다. 티를 산맥 외츠탈Ötztl* 계옥의 호텔 방문턱을 넘을 때부터 나를 반긴 것은 화장실 비누와 수건의 향기였다. (p.53)

‘호텔 방’ 부분을 읽다 말고, 공간이 갖는 특유의 냄새에 대해 잠시 떠올려 보았다. 

오빠가 몇 달을 입원해 있어 자주 오갔던 (병원) 병실의 냄새, 

명절이면 내려오던 부산의 냄새,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가던 골목의 냄새, 

동네 아이들의 집에 놀러갔을 때 느꼈던 특별한 냄새들도

(우리집에선 나지 않던 냄새가 다른 집에선 부각되곤 했다. 

가령 어떤 집은 장(간장?된장?)의 냄새가 미묘하게 어린 공기의 냄새가 난다거나, 

어떤 집에선 바짝 마른 섬유유연제 같은 냄새가 나기도 했다).


새로 씌운 모켓, 모두 똑같이 무향이고 실용적인 제품을 쓰는 세탁업체에 맡겨 깨끗이 빨아 다린 침구(이 무취도 결국 하나의 냄새다), 살균소독한 욕실, 향기 없는 옷장. 때때로 꽃병에는 꽃이 꽂혀 있다. 물론 대개는 향기 없고 소박한 난초다. 목욕 용품만이 향기를 낸다. 샤워 젤, 수분 크림, 비누. 그 향이 다시 기억난다. 어린 시절의 인상도. 호텔 방은 집과 똑같은 비누를 쓰지 않는 곳이다.(p.53~54)

외국의 호텔에 갔을 때 느끼는 이상 미묘한 냄새도 한번 떠올려 보았다. 

우리나라의 제품에선 맡아 본 적 없는 냄새가 샴푸와 비누 모두에서 똑같이 났던 것도 같다. 

(어쩌다 내가 이 작가님의 이야기에 편승해서 ‘냄새’ 찾기에 빠져 있는 거지? ^^;)




꼬마 니꼴라가 소년의 눈에서 본 세상의 이야기라면 

이 책은 그 귀엽던 꼬마가 적당히 예민하고 꼬장꼬장하고 괴팍한, 

그런데 다소 솔직하기까지 한 남자가 되어 과거의 시간들을 풀어 놓은 이야기라 할까. 

어린 아이의 눈에는 새롭고 반짝이고 특별한 것들이 

크게 과장되어 즐겁고 활기찬 세상을 이루어가곤 하지만, 

머리가 너무 커버린 어른이 되고 나면 그 특별했던 것들에조차 냉소적인 눈길로 다시 보게 되니까.


작가는 다소 엉뚱한 냄새로 시작해서 자기 고백을 하기도 한다.

가령 다섯 살 때 처음 만져본 볼록하고 부드러운 부분에 대해서라던가 

기욤 아폴리네르나 빅토르 위고의 시를 빌어 오글거리는 고백의 시를 써내려가던 기억들까지. 


이 남사스러운 고백들을 읽으며 주책이네 생각하다가도 달리 보이는 순간이 왔다. 

향기를 쫓는 남자의 코끝에서 점차 

살아 움직이는 사물들이 보이고, 

표정을 짓거나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 작가가 불러온 냄새 끝에는 그 시절의 순간과 그리운 사람들이 있었다. 

지하실의 냉기 어린 곰팡내 끝에는 

작가를 쏘아보는 표정의 세 이모할머니가 있고, 

시가의 냄새 속에는 마시고 춤추고 피워대는 청춘의 한자락이,

땀과 가죽 냄새와 모피 냄새와 부식토와 구운 빵의 냄새를 풍기는 

또래의 친구들과 여자와 가구, 그리고 음식들이 가득한 파티의 순간이 보인다. 

에프터 세이브의 푸른 냄새 속에는 남자에서 아기로 돌아온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보다 다정하고 편안하게 지낸 삼촌의 이야기는 곳곳에서 여러 향기와 함께 불쑥 떠오른다.



사람마다 오감이 있고, 

그 중에서도 주로 발달하는 감각이 하나뿐이라고 단정지어 말은 못하겠다. 

필립 클로델의 글을 읽으면서 코가 열렸고,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눈이 트이고 그리움의 온기를 -살며시- 느꼈으니까. 


게다가 그가 움직이게 만드는 영화 속 그림들, 혹은 책 속의 그림들에서 

보이지 않는 여섯 번째 감각을 하나 불러 일으키게도 되었으니까.


작가의 다른 책이, 다른 영화가 더 보고 싶다.





p.s.

여기서 문득 내고 싶은 퀴즈, 달콤한 식물성 잼 같은 것, 사탕과 과자, 풀줄기와 대초원의 향기, 그리고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지만, 작가를 덮쳐왔던 그 향기는 어떤 추억과 마주하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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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비슷한 사람 - 양양 에세이
양양 지음 / 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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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앉아 머그컵에 따끈한 물을 채운다. 

가만히 베란다 창으로 밖을 본다. 

낮은 층, 넓은 창,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읽을 수 있는 공간. 

어느 높은 원룸에 살 땐 누리지 못하던 것. 사치 아닌 사치. 

좁은 공간 책상 앞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던 세상 ‘안’....그리고 그걸 보는 나.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면 그 풍경이 될 수 있는 거리. 

문득 지금이 고마워진 건, 양양이 소개한 자기 방의 창문 이야기 때문.

5층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도시 풍경과 얕은 하늘이 보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토록 창문에 연연하는 까닭은 안의 내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창문이기 때문이에요. 가만히 앉아서 나는 저 건너편 집의 살림살이를 상상하기도 하고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 밥은 뭘 먹었는지를 궁금해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별을 보면서 내일의 날씨를 가늠해보기도 하고, 낮은 저편에 앉아 있던 새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그러고 보니 새들의 집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하고요. 그렇게 홀로 앉아서 바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거지요. 창은 나에게 멋진 화면이자 공상소설이자 ‘이상한 나라의 폴’이 사차원 세상으로 들어가는 구멍인 셈입니다. (p.023) 

넓은 창 앞에 함께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어색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었다.




가수 양양의 노래를 찾아 듣는다, 글을 읽다 말고. 

머릿 속에 양양이란 이름처럼 순하고 예쁜-다정하고 상냥한 가상의 목소리를 

하나 만드느니 진짜 이 사람의 목소리로 에세이들을 만나고 싶어서. 

<우린 참 비슷한 사람>을 노래하는 목소리가 말한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 한 건 아닌지  (<우린 참 비슷한 사람> 가사 중에서)

아닐 거예요, 아마도. 싱긋 미소지어 주고 싶다.

그녀가 은지에게 '선물'하고 향초와 오렌지를 내민 것처럼.


『쓸쓸해서 비슷한 사람』을 읽으면 읽을수록 ‘여행’이 그리워지곤 했다. 

검은 봉지와 장미 한 송이를 쥔 채 걸어가는 남자를 보면서도, 

부산이 그리워서 ‘부산오뎅’이란 가게를 향하는 양양을 상상하면서도, 

통영의 시장 어귀의 국밥집 소녀와 이모님들의 몸짓을 멀뚱히 바라보면서도, 

대학로 패스트푸드 가게의 엄마와 딸의 대화를 엿들으면서도, 

하다못해 쓸모있는 헌 물건들을 만나 골목에 쭈그려 앉은 작가를 떠올리면서도 

내내 바깥의 공기를 느낀다. 

몇 개월 자유로운 시간들 제대로 갖지도 못한 내 처지가 좀 억울해서 그런가, 

바깥의 공간 ‘안’에 자연스레 어우러지고 노래하고 글을 쓰는 작가가 부럽기도 하다.




창가에 앉아 심드렁하게 기타를 만지작거리면서, 

딱히 내게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진 않아도 

살며시 기댈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등에 싣고 있을 것 같은 그녀.


또 어딘가 떠났으려나 또 무얼 챙겨 집으로 들어왔으려나.

그녀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과 사물의 이야기를 들으면... 문득 떠나고 싶어진다.


기차는 떠나네 정해진 시간에

나는 떠나왔고 너는 돌아가네

처음 만난 풍경 안 적 없던 사람들

각자의 침묵과 창문 하나의 통로를 나누며

달려가네 기차는 종착역을 향하여 (<기차는 떠나네> 가사 중에서)






 *출판사 이봄이 마련한, 책 선물.*

기차를 타고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그 언젠가 가봐야지 했던, 통영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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