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필립 클로델 지음, 심하은 옮김 / 샘터사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누구에게나 오감(五感)이 있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외부의 것을 느끼는(感) 다섯 가지 감각.

누구에게나 오감은 주어져 있지만 

사람마다 각자 주로 사용하는 감각은 따로 있다 한다. 

다른 감각보다 예민하거나 더 발달한 감각, 당신에겐 무엇인가?





작가이자 영화감독 필립 클로델에게 그 감각은 후각이 아닐까. 

제목 『향기』를 마주하고 제일 처음 든 생각이었다. 

(황금색에 가까운)노란 색과 검은 색이 조화롭게 펼쳐진 

프랑스 거리가 담긴 표지를 보면서 

빵 굽는 냄새, 프로방스 지방의 허브 향기, 

때로는 지하철에서 풍겨오는 특유의 지린내 

같은 걸 떠올리며, ‘좀 뻔한데?‘ 생각해보기도 했다. ^^;;;


게다가 조금 있다가 만난 ‘차례’ 속 글자들엔 향기라 부르기 민망한 것들이 있었으니...

증류기, 대마초, 호텔 방, 사체, 새 시트, 

잠든 아이, 장밋빛 사암, 체육관, 깨어남, 여자 성기, 여행. 

이것들이 갖는 향기는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굳이 쓰려 했을까 의아하기도 했다.




다섯 살 때, 일곱 살 때, 열 살 때. 호텔 방은 방학을 의미했다. 방은 넓고 온통 낯설었다. 집에서 나는 냄새와 전혀 달랐다.

똑똑히 기억난다. 티를 산맥 외츠탈Ötztl* 계옥의 호텔 방문턱을 넘을 때부터 나를 반긴 것은 화장실 비누와 수건의 향기였다. (p.53)

‘호텔 방’ 부분을 읽다 말고, 공간이 갖는 특유의 냄새에 대해 잠시 떠올려 보았다. 

오빠가 몇 달을 입원해 있어 자주 오갔던 (병원) 병실의 냄새, 

명절이면 내려오던 부산의 냄새,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가던 골목의 냄새, 

동네 아이들의 집에 놀러갔을 때 느꼈던 특별한 냄새들도

(우리집에선 나지 않던 냄새가 다른 집에선 부각되곤 했다. 

가령 어떤 집은 장(간장?된장?)의 냄새가 미묘하게 어린 공기의 냄새가 난다거나, 

어떤 집에선 바짝 마른 섬유유연제 같은 냄새가 나기도 했다).


새로 씌운 모켓, 모두 똑같이 무향이고 실용적인 제품을 쓰는 세탁업체에 맡겨 깨끗이 빨아 다린 침구(이 무취도 결국 하나의 냄새다), 살균소독한 욕실, 향기 없는 옷장. 때때로 꽃병에는 꽃이 꽂혀 있다. 물론 대개는 향기 없고 소박한 난초다. 목욕 용품만이 향기를 낸다. 샤워 젤, 수분 크림, 비누. 그 향이 다시 기억난다. 어린 시절의 인상도. 호텔 방은 집과 똑같은 비누를 쓰지 않는 곳이다.(p.53~54)

외국의 호텔에 갔을 때 느끼는 이상 미묘한 냄새도 한번 떠올려 보았다. 

우리나라의 제품에선 맡아 본 적 없는 냄새가 샴푸와 비누 모두에서 똑같이 났던 것도 같다. 

(어쩌다 내가 이 작가님의 이야기에 편승해서 ‘냄새’ 찾기에 빠져 있는 거지? ^^;)




꼬마 니꼴라가 소년의 눈에서 본 세상의 이야기라면 

이 책은 그 귀엽던 꼬마가 적당히 예민하고 꼬장꼬장하고 괴팍한, 

그런데 다소 솔직하기까지 한 남자가 되어 과거의 시간들을 풀어 놓은 이야기라 할까. 

어린 아이의 눈에는 새롭고 반짝이고 특별한 것들이 

크게 과장되어 즐겁고 활기찬 세상을 이루어가곤 하지만, 

머리가 너무 커버린 어른이 되고 나면 그 특별했던 것들에조차 냉소적인 눈길로 다시 보게 되니까.


작가는 다소 엉뚱한 냄새로 시작해서 자기 고백을 하기도 한다.

가령 다섯 살 때 처음 만져본 볼록하고 부드러운 부분에 대해서라던가 

기욤 아폴리네르나 빅토르 위고의 시를 빌어 오글거리는 고백의 시를 써내려가던 기억들까지. 


이 남사스러운 고백들을 읽으며 주책이네 생각하다가도 달리 보이는 순간이 왔다. 

향기를 쫓는 남자의 코끝에서 점차 

살아 움직이는 사물들이 보이고, 

표정을 짓거나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 작가가 불러온 냄새 끝에는 그 시절의 순간과 그리운 사람들이 있었다. 

지하실의 냉기 어린 곰팡내 끝에는 

작가를 쏘아보는 표정의 세 이모할머니가 있고, 

시가의 냄새 속에는 마시고 춤추고 피워대는 청춘의 한자락이,

땀과 가죽 냄새와 모피 냄새와 부식토와 구운 빵의 냄새를 풍기는 

또래의 친구들과 여자와 가구, 그리고 음식들이 가득한 파티의 순간이 보인다. 

에프터 세이브의 푸른 냄새 속에는 남자에서 아기로 돌아온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보다 다정하고 편안하게 지낸 삼촌의 이야기는 곳곳에서 여러 향기와 함께 불쑥 떠오른다.



사람마다 오감이 있고, 

그 중에서도 주로 발달하는 감각이 하나뿐이라고 단정지어 말은 못하겠다. 

필립 클로델의 글을 읽으면서 코가 열렸고,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눈이 트이고 그리움의 온기를 -살며시- 느꼈으니까. 


게다가 그가 움직이게 만드는 영화 속 그림들, 혹은 책 속의 그림들에서 

보이지 않는 여섯 번째 감각을 하나 불러 일으키게도 되었으니까.


작가의 다른 책이, 다른 영화가 더 보고 싶다.





p.s.

여기서 문득 내고 싶은 퀴즈, 달콤한 식물성 잼 같은 것, 사탕과 과자, 풀줄기와 대초원의 향기, 그리고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지만, 작가를 덮쳐왔던 그 향기는 어떤 추억과 마주하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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