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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암살이라는 스캔들(나이토 치즈코,  고영란 역, 역사비평사)

  

 '암살' 사건을 다룬 일본 메이지시대 미디어 서사의 욕망을 다룬 책이다, 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식민지 시기를 공부하고 있는 내겐 여러 모로 꼼꼼히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그 자체로 공부가 될 뿐 아니라, '담론 연구'라는 방법론 자체에 대한 성찰의 가능성도 동시에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일본 메이지 시대 신문기사를 읽는다는 건, 식민지 조선의 관제 매체와, 당국의 영향을 지배적으로 받았던 민간매체를 주된 사료를 삼았던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확실히 '외부'를 제공한다. 제국의 신문지상에 등장한 명성황후와 김옥균, 안중근의 모습은 새롭게 보인다. 그들은  제국의 욕망 지형도 안에서 요청되는 배역을 부여받고 다시-새롭게 '해석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 책의 의의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나아가 '식민지-여성'이라는 타자를 재생산하는  제국의 남성지배 미디어 공동체에 의해 주조된 '이야기'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 "텍스트에 담긴 암묵적 전제와 결론들은 결코 독자=미디어 공동체의 은밀한 욕망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말로 미디어 내러티브의 가장 강력한 성립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끊잆없는 스테레오타입을 통해 이야기 주체의 욕망을 재생산하는 '제도로서의 이야기' 그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암살 이야기' 뿐 아니라, '이야기를 암살'한다는 저자의 기획이 "암살이라는 스캔들"이란 제목에 담겨 있는 것이다.

 

2.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아마미야 가린, 김미정 역, 미진북스) 

   

프레카리아트, 이 말은 예전에 읽은 아마미야 가린의 전작 <성난 서울>(꾸리에, 2009)에서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책을 우익 록밴드 보컬로부터 좌익 문화운동가로 '전향'한 한 일본인 젊은 여성의 이념적 편력과 문화적 실천이 궁금해서 읽었었다. 사실 아직도 그녀가 누구인지는 잘 가늠되지 않는다. 다만 얻은 것은 있었다. 눈에 띠는 요란한 의상을 입은 채로, 닥치는대로 '현장'에 나타나고, 뭔가를 외치거나 쓰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는 그녀가, 책상에 앉아 오직 '머리'로만 읽거나 상상하는 내게, '눈'과 '머리'의 한계로 보지 못한 뭔가를 알려줬다. 한국에 88만원 세대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는 '로스트 제네레이션'이 있고, 이탈리아에는 '1000유로 세대', 그리스에는 '600유로 세대'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이건 그야말로 '만국의 (청년)노동자'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삶의 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그들은 끊임 없이 '글로벌적'으로 뭔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 '스쾃(squat)'같은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도 그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프레카리아트, 프리터, 청년실업자, 88만원 세대, 잉여... 등등 비정규적인 삶의 '양식'을 가진 이들을 부르는 이 서로 겹치는 명칭들의 다양함은, 어쩌면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들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청년(비정규)노동자는 엄연히 전일적인 시장지배 체제가 낳은 구조적 실재다. 이들은 정말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떤 '기획'을 가지고 있나. 이 책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기 위해 쓰였다.

 

3. 조선인극장 단성사 1907~1939(이순진, 한국영상자료원) 

 

 언젠가부터 식민지기 조선 영화를 찾아보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식민지 조선에서 모던과 첨단의 상징으로 간주됐던 '영화'를, 21세기인 지금 본다는 것은 기묘한 체험이다. 과연 우리는 같은 텍스트를 보는 것일까. 식민지 조선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의 내용, 영화에 나타난 당대의 풍속,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의 모습 등을 상상하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그들도 영화관을 나오면서 조금은 어색함을 느꼈을까? 그렇다면 그건 '영화'라는 미디어 자체의 낯섦 때문일까? 그들도 방금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까? 이 모든 '상상'이 단지 '공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걸, '단성사'는 말한다. 그런 상상을 더 해보라고 자꾸만 부추긴다. 과연 단성사라는 '장소'는, 거기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 이미 '환상의 영사기'다. 식민지 조선에서 '극장'은 그 자체로 꿈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치열한 문화정치의 현장이었다. 그곳은 제국과 자본의 굴레 속에서 힘겹게 구축된 '이등국민'의 '영화 산업'이 펼쳐진 '현장'이다. 거기에 활동사진과 무성영화 시절을 거쳐 자체적인 조선영화를 제작하게 되기까지의 지난했던 조선영화의 꿈이 모두 아로새겨져 있다. 저자가 '단성사'라는 "흘러간 이름"을 다시 소환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가 스크린 위에서만 펼쳐지는 빛의 작용이 아니라 그 뒤에서 벌어지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이기도 하다"는 것. 온갖 부침을 겪으며 아직, 거기 있는 단성사를 읽자.  

 

4. 깔깔깔 희망의 버스 -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깔깔깔 기획단, 후마니타스) /  25일 -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울산공장 점거투쟁 기록(박점규, 레디앙)

 추천페이퍼에 '이런 책'들을 소개하는 건, 반드시 어떤 '신념' 때문만은 아니다. 공부하기 위해서다. 한국 노동자의 삶과 노동계급의 역사에 대한 기록 및 이론들을 다룬 몇 가지의 책들을 알고 읽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건 좀 기이한 체험이었다. 나는 왜 이전에 이런 책들을 알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니, 한국 노동계급의 투쟁사를 나는 한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교에서도, 그리고 미디어에서도 그런 책을 소개해 준 적이 거의 없었다. 지금까지 투쟁과 혁명을 '글로 배워야 했던' 나의 아비투스에 대해 약간의 난처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니 실은 오히려 '글로도 배울래야 배울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어떤 책들은 미디어에 과잉 노출되는데, 어떤 책들은 있는지조차 모른다. 온갖 것들이 다 상식과 교양의 대상이 되는 이 시대에, 유독 노동자에 관한 '앎'만은 철저히 은폐된다. '김진숙'과의 연대는커녕, '김진숙'이라는 존재를 알고 이해하는 데에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노동자의 삶이 있고, 그것이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나도 할 수 있고 해야 되는 일이 있다는 걸, 항상 너무 늦게 안다. 한진중공업 사태를 보도하(지 않)는 한국 미디어들을 보라. 늘 그랬지만, 한국 지배동맹의 가장 강력한 전략은 노동자들의 삶을 결코 가시화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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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딸 2011-08-0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깔깔깔 희망버스>에 한표 던집니다. 85호 크레인은 김진숙 위원의 문제만도, 혹은 한진 노동자의 문제만도 아닌 우리 모두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윈터 2011-08-09 16:45   좋아요 0 | URL
비의딸님 반갑습니다. 그렇죠. 며칠 전에도 <창비주간논평>에 실린 난감한 글과, 그에 대한 프레시안에 실린 반론문을 봤는데.... 이렇게 팩트와 논점을 가지고 대립하는 일이 왜 벌어진 걸까 생각해보면, 아무도 한진사태를 들여다보려고 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언론에서 쓰면 쓰는 대로, 안 쓰면 안 쓰는 대로, (안) 읽고 넘기고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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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 - 두 남자의 고백>(악셀 하케 & 조반니 디 로렌초, 배명자 역, 푸른지식) 

 로쟈가 적확하게 지적한 대로, 이 책의 제목은 독자를 교란시킨다. "나는 가끔 성자일 때가 있다"가 더 겸손한 제목인데, 우리는 종종 그 반대로 착각한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책이 강력하게 표방하는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이 두 아저씨의 대화로부터 기대하기란 힘든 일이 아닐까.(아저씨 두 분의 이야기를 참견 없이 장시간 듣는 건 원래 좀 험난한 일이지만...^^) 독일의 두 저명한 지식인 남성이 터놓고 이야기하는 자기 안의 모순, 지식과의 괴리 등에 대한 고백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학생운동 이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 사회적 책임, 정의와 같은 가치에 둔감해지며, 오직 쓰레기 분리수거를 통해서만 자기보존과 옹호의 길을 구하게 된 이들. 그런데 이들의 속물근성에 대한 고백이 오히려 여느 속물들에게 안정적인 자기위안의 내러티브를 마련해주는 것은 아닐지. 자폭할 줄 아는 속물이야말로 '고급속물'이기에. 자, 들어나 봅시다. 속물지배의 대한민국에서 '속물'에 대한 (자기)성찰은 일단 매우 드무니까.  

  

2. <자기만의 방 - 고시원으로 보는 청년 세대와 주거의 사회학>(정민우, 이매진)

 "석사 학위 논문이라는 종(種)의 지위에 관한 의문 또는 의구심"에 답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란다. '고시원', 과연 석사학위논문다운 주제다 (양자는 고학력,고성취를 위해 마련된 시공간이면서 동시에 과도기, 결여 ... 등의 용어와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자기만의 집"이 아니라는 것에 주의할 것. 이 책은 부제가 잘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시원'을 통해 본 청년 세대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책이다. 마침, 저작의도를 아주 잘 말해주는 구절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지적 자유를 얻으려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독립의 조건이다. (...) 이 시대의 ‘자기만의 방’이라 할 만한 고시원은 독립의 조건을 준비하는 자리인 동시에 그 조건의 불가능성을 폭로하는 자리다." 이 '집 아닌 집'에 사는 이들이 형성하는 '정서적 (비)공동체'의 사연을 담은 몇몇 이야기가 떠오른다. 김애란의 <노크하지 않는 집>, 일드 <라스트 프렌즈> 등등. 부동산 투기가 들끓는 한국에서 청년들의 '집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슬프게도 흥미롭다.

 

3. <분노하라>(스테판 에셀, 임희근 역, 돌베개) 

'분노하라'. 미쳐라, 목숨 걸어라, 뭐해라... 등등 예전에 나온 그 어느 명령어보다도 따르고 싶어진다. 아니, 사실 그런 명령어투를 쓰지 않아도 절로 분노하게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한진중공업, 홍대, 강정 해군기지... 그 얼마나 많은가, 분노할 일들. 불과 30여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이 작은 정치 팜플렛이 가져온 나라 안팎의 '사회적 분노'의 결과들을 볼 때, 우리는 놀란다. 그리고 곧 알게 된다. 그 분노 신드롬이 실은 이 책 한 권이 야기한 결과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냉소와 무관심으로 가장한 채 억압해왔던 '변혁'에 대한 열망들의 집합임을. 이 책에서 저자는 레지스탕스 정신의 핵심을 이루었던 '불의에 대한 불복종'을 호소한다. 93세 노장의 '분노론'은 이런 것이다. '분노'는 '격분'과 다르다는 것. 진정한 분노는 '비폭력', 즉 '자기 자신을 정복한 후, 타인의 폭력 성향을 정복하는 일'이라는 것. 그리하여 오직 '희망의 폭력'만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실현태는 '투표'와 '참여'라는 것. 어떤가, 마음에 드시는지. 21세기 한국의 '다중'이 내린 결론과 견주어보고 싶어 진다.

 

  

4. <소금꽃나무>(김진숙, 후마니타스) 

 183일째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지 말이다. 비도 엄청 오는데 그 검은 구름 아래서 끝내 버틴다. 폭력과 배신과 거짓말의 드라마, 직무유기를 밥먹듯 하는 한국 언론을 정면으로 내려다보며, 오직 심장처럼 깜박이는 트위터만을 등대 삼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7년에 출간됐던 <소금꽃나무>의 한정판이  올해 6월에 다시 나온 건, 바로 그녀를 지지하고, 그녀와 연대하기 위해서다. 같은 책을 두 권 갖게 된 것, 처절한 불행이다. ... ... 그러나, 같은 책이지만 같지 않다! 희망버스는 연이어 내려간다. 그녀는 "강제로 끌려내려가지 않는다." 김진숙의 인생,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 어떻게 봐도 '소금꽃'투성이인 그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 다른 어떤 저명 인사의 추천사도 필요 없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온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할 거다. 영웅도, 작가도 아닌 그녀는 내가 아는 그 어느 작가보다 글을 잘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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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는 정치다(장 미셸 지앙, 목수정 역, 동녘) 

"문화는 정치다". 온갖 질문들이 빗발치게 하는 제목이다. 이 책의 키워드는 '문화정치'로 설정되어 있으며, 이 책의 소개란에는 '문화'와 '정치'의 생소한 결합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저술의도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문화'와 '정치'의 결합은 사실 하나도 안 생소하다. 아마 "정치는 문화다"라고 말해도 이의가 거의 없을 정도로, '문화'와 '정치'의 상호보족관계에 대해서는 익숙하다. 그렇다면, 이 책이 '문화정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부터 물어야겠다. '문화정치'란 말은 이미 '1910년대의 무단통치에 이어, 3.1운동의 영향으로 수행된 1920년대 일제의 통치양식'을 일컫는 말로 학술적 시민권을 얻었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TV와 영화, 음악과 공연과 같은 대중미디어를 다룬 비평들 또한 '문화정치'를 화두로 삼고 있다. 과연 '문화정치'란 무엇인가. 이 책은 이 물음의 답을, 최근 정치적으로 가장 '뜨거운' 나라인 프랑스의 역사로부터 찾는다. 물론 역자는 아주 적실하게도 최근 가장 '선동적인' 여성 칼럼니스트 목수정이다. 

 

2. 다미가요 제창(정영혜, 후지이 다케시 역, 삼인) 

   이 책 제1장에는 저자의 에누리 없이 완벽한 논리가,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번역되어 있다. "결국 피차별자가 그 차별을 고발하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차별을 방치하지 않기 위한, 스스로 내면화하지 않기 위한 의무 말이다. 결코 차별을 없앨 책임을 혼자 도맡아서가 아니다. 그런데 ‘다수자’들은 이러한 ‘소수자’의 고발을 <지원>한다는 형태로 반차별의 태도를 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차별과 싸우는 주체가 되고 차별을 없애는 데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차별하는 사람들이지 피차별자가 아니다. 그런 것을 ‘다수자’가 ‘소수자’를 <지원>한다고 하는 순간, 그 책임은 교묘하게 ‘소수자’에게 전가되고 ‘해주기’, ‘받기’라는 상하관계가 생겨나 다시 ‘다수자’가 우위에 선다. 이러면 차별 구조를 똑같이 덧칠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최근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재일조선인의 문제의식이 강상중, 서경식과 같은 남성의 것이었다면, 이 책에서 2.5세 여성 재일조선인인 저자는 인종주의와 국가주의의 공모에 '젠더 정치'마저 가세한 차별의 구조를 사정 없이 파헤친다. 그리하여 "다미가요 제창", 기미(君, 군주)를 다미(民, 민, 백성)로 바꿔 국가로 정해진 기미가요 대신 다미가요를 부름으로써, 강요된 국민국가의 국민 위치를 넘어서자는 결의가 담겨 있는 제목을 달았다 한다. 너무 익숙한 결론인가? 그 아쉬움이 바로 '다문화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사유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유관한 것이 아니겠는가. 

 

3. 느낌의 공동체(신형철, 문학동네) 

  기어코 '추천'을 하고야 말게 만드는 게 신형철의 힘이라면 힘이다. 신형철이라는 눈에 띠게 똑똑한 사람이 이 미치게 찌질한 시대에마저 그렇게 열심히 읽고 쓰지 않았다면 문학 따윈 옛날에 버렸을 거다, 라고 말하게 만든다. 내가 신형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과 실망은, 그가 고백하는 문학에 대한 애증, 그것과 약간 닮았다. (물론 나는 그처럼 열렬하게 고백하지 않을 것이고, 최대한 계산하며, 끝내 숨길 것이지만) 아직 잊지 않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그가 쓴 문장들의 울림을. 그때 '다시' '미문'이 가진 위안을 힘을 믿기 시작했다. ('미문'에 대해 주관적으로 재정의하게 해줬다는 점에서 그에게 조금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지혜와 성실에 대한 찬탄을 들을 때면 '나도 조금은 그렇게 느껴', 라고 동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온갖 시와 소설집 머리말과 뒷표지에 예의 그 '미문'으로 된 주례사 멘트를 쏟아낼 때는 숱하게 실망도 해봤다. 이제부턴 미워하겠다고 '거의' 다짐도 해봤다. 내가 보기에 그는 '문학'에 대해서는 '급진적'이고, '정치'에 대해서는 '온건한' 듯 했다. 그런 이분법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그런 걸 왜 싫어했는지 가끔은 나도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그런 걸 다 걷어치우고, 위악과 교만, 과장과 허영 없이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들이 요즘 내게 필요하다. 그가 적은 서문의 말대로 "느낌의 공동체", 그 소박한  공동체에 가끔은 귀속되고 싶단 말이다. 

 

4. 포 피시(폴 그린버그, 박산호 역, 시공사) 

 '올해의 가장 멋진 책표지' 같은 걸로 뽑아줘야 할 것만 같은 책(당연히 한국어판 말고 원서의 것) <포 피시>의 네 주인공은 연어, 농어, 대구, 참치다. 헛, 다 맛있는 것들!!! 생선 그림을 보고 거의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고 있을 뻔한 순간에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영국 정부에서 권장하는 것처럼 일주일에 두세 번씩 생선을 먹어서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는 기준이 전 세계인에게 적용된다면 지금보다 바다가 서너 개는 더 있어야 한다" 아, 이 책은 강제 양식과 남획을 자행하는 인간의 탐욕에 의해 파괴되는 해양현실을 조명한 책인가보다. 그래서 이 책은 서두에서 '단 한 번이라도 물고기를 식품 아닌 생명으로 여긴 적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전에 나온 또 하나의 좋은 책, <헝그리 플래닛>(윌북, 2008)도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라며 독자에게 '얼굴을 가진 동물들'을 보여줬었다. 또랑또랑한 눈을 가진 소와 돼지, 양들이 네모 반듯하게 잘라져 부위별로 포장되는 과정은, 적어도 그걸 보는 그 순간에는 '불편한 진실'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물고기'는 얼굴을 가졌나? 식물에게서 '얼굴'을 찾지 않듯, 물고기의 '통각(痛覺)'도 조금 상상하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그 문제에 답하기 위해 '물고기의 생명'에 집중하기보다, '식량자원과 환경파괴'의 문제로 다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렵도록 검푸른 바다와 물고기의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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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 2011-06-0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문화는 정치다>를 갖고 있습니다. 아직 읽지 못했지만...
재일조선인이 쓴 <다미가요 제창>이 참 끌리네요.

윈터 2011-06-08 20:48   좋아요 0 | URL
앗, 교고쿠도 님 반갑습니다.
<문화는 정치다>는 순전히 '문화정치'에 대한 오랜 관심과, '목수정'에 대한 최근의 관심,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일시적 관심에 의해 선택했습니다 ㅎㅎ 읽어보고 싶어요.
<다미가요 제창>은 저도 기대가 되는데요. '재일조선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남성의 목소리들과 동질화되었던 '여성' 재일조선인 학자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많이 읽히고,여러 독자들에게 귀감이 된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자의 성실성과 영민함에도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고요. ^^

교고쿠 2011-06-08 21:17   좋아요 0 | URL
사실 일본의 천황제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저로써는(저는 재일조선인들과 비슷한 정서를 갖고 있는듯 합니다), 저 책 반드시 읽어봐야겠어요. 서경식, 강상중, 이양지, 현월, 유미리, 양석일, 원수일, 이회성 등의 재일조선인이 쓴 책들을 서재에 한가득 꽂아두고 있습니다. ^^
(오죽했으면 도일해서 재일조선인 문학을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윈터 2011-06-08 22:06   좋아요 0 | URL
네. 이 문제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교고쿠도 님과 앞으로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을 것 같네요. ^^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1.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김원, 이매진, 2011. 4) 

 1999년에 처음 나왔던 책이 2011년인 지금 다시 출간된 이유는 자명하다.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그 물음이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에. 1999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잊혀진 것들'이 제대로 복원되고 애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은 누구에게 읽힐까. 80-90년대 신화화된 학생운동의 주인공들? 혹은 그것을 '풍문'으로만 전해 들은 지금의 철없거나 영악한 대학생들? 거의 제대로 직시된 적 없는 80년부터 91년 5월까지의 수많은 죽음과 파토스들이 아직 해석을 기다리며 지금 우리 앞에 있다. 그 죽음을 헛된 치기로 치부하며 망각하는 것도, 혹은 당시의 경험을 훈장처럼 지니며 신화화하는 것도 모두 올바른 애도는 아닐 것이다. 이를 잘 알기에 저자는 개정판 서문에 꼼꼼히 적어두었다. "80년대의 트라우마는 증언돼야 하며, 증언될 수 있도록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 동시에 나는 여전히 80년대를 '낭만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경험하고 지켜본 현실과 그 의미를 망각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쓴다는 저자의 그 '윤리적 이성'이야말로, 80년대가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큰 미덕이리라.

 

2. <국민과 서사>(호미 바바 편, 류승구 역, 후마니타스, 2011. 4) 

  독창적인 탈식민 이론가 호미 바바의 신간이다. 그가 서문에서 잘 밝혀놓은 것처럼 '국민'과 '서사'의 유비관계는 흥미롭다. "국민은 마치 내러티브와 같이 시간의 신화 속에서 자신의 기원을 잃어버리고 마음의 눈 속에서 자신의 윤곽을 온전히 드러낸다" '국민'이라는 공고한(듯 보이는) 역사적 전통이, 기실, 어떻게 그 역사적 기원을 은폐하고 '문화적 강박'이 되는지를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문제의식이다. 저자는 '국민'의 문제를 내러티브 작용의 문제로 보고 연구하려는 것이 "단순히 언어와 수사에 주목하는 것만이 아니라 개념 대상 자체를 바꾸려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국민 담론을 구성하는 언어의 양가성, 국가 내러티브 속 언어의 수행성 등 '국가'와 '내러티브'를 겹쳐 사고할 때 사유 가능한 층위와 교호관계, 그리고 그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효과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저자들은 성실하게 새로운 개념과 방법론을 모색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라틴 아메리카의 고전들이 형성한 국가 내러티브의 계보와 그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논한 저자들의 문제의식이 16편의 글 속에 명징하게 드러난다. 이 책이 근대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자연화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해 줄 것인지 기대된다.

  

3.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한윤형, 최태섭, 김정근, 웅진지식하우스, 2011. 4)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잘 지은 제목이다. 항상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라는 말은 언제 어디에서나 요구되는 미덕이자 올바름, 그리고 궁극의 아름다움으로까지 이야기된다. 그러나 그 '최선'은 누구를 위해 있는가. 혹, 누군가 그런 나의 '최선과 열정'을 착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같은 '열정 강박'의 논리와 담론에 대해 저자들은 '열정 노동'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제출한다. 모든 것을 개인의 선택과 노력의 탓으로 전가시키는 사회에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열정은 어떻게 맹목이 되는가'일지도 모른다. 나의 '열정'의 외부에 대해 '열정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이의 '열정'은 오히려 '맹목'에 가깝다. '열정 논리'에 개재된 계급과 세대의 착취구조를 감히 알려고 할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 '열정과 패기'의 주체인 젊은이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열정적 지성'일 것이다.

  

 

4. <뉴레프트리뷰> 3, (마이크 데이비스 외, 공원국 외 역, 길, 2011. 4) 

 

이 시대 석학들의 가장 진보적인 사유를 소개해왔던 <뉴레프트리뷰> 3권이 나왔다. "기후 변화와 지구 환경"이라는 특집도 흥미롭지만, 새삼 '서구 신좌파의 역사'라는 제목을 단 스튜어트 홀의 글과, 에릭 홉스봄의 대담에 눈길이 간다. '일만 사회주의자 선언' 등 최근 한국의 젊은 지성들로부터 사회주의가 '진보의 가능성'으로 타진되고 있는 사례를 볼 때, 유럽 신좌파 지식인들이 어떠한 이론적, 정치적 실험을 거듭하며 <뉴레프트리뷰>를 발간해 내고 있는지를 회고한 스튜어트 홀의 글은 많은 참조가 될 것이다. 좌파 이론의 핵심 키워드인 노동자계급 주체론, 국제주의, 종교사멸론 등에 대한 견해를 밝힌 에릭 홉스봄의 견해는 어쩌면 <뉴레프트리뷰>의 내부이면서 동시에 외부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에릭 홉스봄과의 대담에 대한 평가를 언급한 서문에서는, 노회한 그가 좌파 역사학자로서의 입장을 철회하고 있으며, 세계사에 대해서는 명확한 전망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고 평했다. 이 글을 단서 삼아, <뉴레프트리뷰>라는 매체의 이론적 지평과 스펙트럼에 대해 생각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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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홉스봄을 싫어한다.

홉스봄은 알려진 것과 달리 백인 남성 우월주의자다. 이 사람 글을 보면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아주 하찮게 여기고(그는 식민주의자다) 페미니스트들을 아주 경멸하고 게이와 같은 성소수자들을 아주 혐오하고 흑인운동을 무시하는 철저히 유럽중심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는 백인 남성 마르크스주의자가 홉스봄이다.

너무 그런 거는 모르고 우리 학계에서는 이른바 진보 또는 이른바 보수 학자 전부 다 홉스봄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거 같다. 그러니까 말이다.

어쨌든 홉스봄은 그런 사람이다. 책을 면밀히 읽으면 그런 것을 알 수 있고 파악이 되는데 왜들 그렇게 홉스봄이라면 늘 난리들을 부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번역의 유령들(조재룡, 문학과지성사) 

 "번역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라고 썼다. 이 어딘지 익숙하고도 낯선 경구에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있다. 과연 번역은 이데올로기인가. 우리는 번역 혹은 번역비평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가. 아니, 어디까지 생각해봤는가. 번역이 가질 수 있는 사유의 정도, 방향, 형식, 이동... 흔히 일종의 매개어, 인공어로서 이해되던 번역(어)의 '운명' 같은 것을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과잉의식했던 것이 아닐까.  지난한 직역과 의역의 싸움, 혹은 철마다 불거지는 오역 논쟁 등을 떠올려도 좋겠다. 번역(어)는 언제나 '제대로 옮겨졌는가'만이 문제시되는, 철저히 기능적인 언어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체념하듯 알고 있다. 번역이 다다르는 것은 언제나 미달된 정확성이라고. 그러나, 그래서 더 중요하다. 번역의 동학과 정치가 매개해온 역사와 신화가. 그리고 여기 그 작업을 기꺼이 떠맡은 적임자가 있다. 조선의 고어와 불어 등 통언어적 사유를 직접 실천하며 저자는 최남선과 김현, 조세희를 거쳐 보들레르와 벤야민의 역사적 의욕들을 다시 불러낸다. 이제 '번역가'로서 다시 선 그들은 저자 앞에 그들의 문학과 정치, 그리고 무의식에 대해 고백해야 한다. 언제나 원전과의 위계 속에서 애물단지 취급 받던 번역어, 그런 알량한 위계 속에서나마 소인배들의 구별짓기에 심심찮게 동원되곤 했던 번역 논쟁만이 번역(학)의 전부는 아닌즉, 이제 "번역의 유령들"을 읽자.

 

2. 예쁜 여자 만들기(이영아, 푸른역사) 

  

 지금이 아니라면, 그저 넘겨버렸을 책이라고 생각했다. 예쁜 여자도, 예쁜 여자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도 통속적으로 소비되는 코드가 되어 버린지 오래니까. 참신한 식민지적 사례를 아무리 찾아낸다 해도, 결론은 항상 같으니까. 예쁜 여자라는 강박, 거기에 스며 있는 남성과 여성의 (불균등한) 공모, 그를 통해 성립하는 성정치. 우리 모두 조금쯤은 그것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우린 정말 알고 있을까. 우리가 아는 것은 자명한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작금의 신정아사태와 그녀의 책, 그리고 장자연사건에 대한 세간의 분분한 해석들은 말해준다. 예쁜 여자, 섹시한 여자.... 그녀들은 정말 뭘 할 수 있고, 그 표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해주는 걸까. 중요한 건 외모보다 마음이라는 식의 도덕주의적 복음에 기대지 않으려면 책을 잃어야 한다. 근대 초기 조선의 여성들이 부딪혔던 미인 강박의 역사, 그 사연과 이에 대한 여성들의 해석의 역사가 이 책에 쓰여 있다. 

 

 

3. 언어의 감옥에서(서경식, 돌베개)  

 

 부제에 "어느 재일지식인의 초상"이 아니라,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이라고 썼다. 독자들에게 그는 이미 독특한 학문적 지평을 확보한 '지식인'이지만, 그에 대한 설명은 여전히 '재일조선인 2세'라는 어구로 시작한다. 그 명함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민족주의와 국민주의 등 그간의 사유의 궤적들을 통으로 엮어낸 출발임을 우리는 안다. 온몸으로 언어 내셔널리즘을 마주해야 했던 그의 독서가 궁금한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그에게 아직도 '고통의 흔적과 현실'을 보여주기만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는 계속 쓰고 있고, 한국과 일본에서, 학술논문과 에세이, 그리고 인터뷰 등 다양한 형식으로 더 나은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4. SYNC 2호(싱크편집부, 이미지프레임) 

 

 씽크, 라는 잡지 이름 들어본 적 있으신지. 몇달 전 1호를 보고 크게 놀랐다. 인문학의 위기, 태만, 자만 등등에 대한 진단과 대안이 횡행하는 요즘, 씽크는 젊고 빠르게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가장 명징한 산물이다. 인문학의 장을 넓히고, 보다 개방적인 말걸기를 시도하자는 말을 수도 없이 많이 하지만, 그 누가 했는지? 씽크는 최신의 인문학 담론들을 공들여 만화로 만들고, '잡지'의 형식으로 펴냈다. 물론 여전히 '교양만화'같다는 인상은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맨날 답도 없는 상업성과 오락성이라는 이분 구도에 대해 회의만 주구장창 거듭하는 젊은 인문학도들은 보라. 여기, 일단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잡지가 있다.

 

 

 

5.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베네딕테 잉스타, 수잔 레이놀스, 그린비

 

 그린비가 새롭게 '장애학컬렉션' 출판을 시작했다 한다. 실로 박수를 쳐주고 싶은 기획이다. '장애학?'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수전 손택이 '질병'에 대한 은유를 사유함으로써 그것이 우리의 인식체계 속에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는지를 탁월하게 밝힌 것처럼, 또한 이 책에게도 기대한다. 저자가 서로 다른 지역과 문화권에서 장애가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는지에 대한 문화인류학적인 서술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는 '장애'에 대한 고정된 상을 상대화해야 하며, '장애' 개념에 내재한 균열과 폭력을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 '장애'에 대한 시각의 외부를 확보하고자 했을 테다. '장애'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사유가 어디 흔하던가. 이 책은 3월의 신간 중 가장 직접적으로 '인문학'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한 책이다. 기꺼이 추천하고,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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