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K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1
이옥수 지음 / 비룡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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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청소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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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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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는 아마도 허수경의 시집이 빠짐없이 있을 것이지만 손때가 타도록 읽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그 이의 책들을 여러 권 사들고 온다. 그가 타계했다면서. 나도 신문에서 기사를 읽었던 것 같다. 내게 허수경은 먼 곳에 가서 고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이국의 언어로 문화와 인류와 아름다움 같은 걸 공부해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기에 그 이를 부러워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내게는 내가 살지 못한 삶(사실 그는 독일에서 유학한 일이 외롭기 짝이 없었다고, 모국어를 잃을까봐 겁이 났다고 고백하건만)을 살았던 부러운 이라는 것 말고도 그의 죽음이 마음 아린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의 타계 1년 전쯤 친구 같고 언니 같았던, 첫 직장의 동료이자 선배인 이를 잃었다. 그도 60년을 못 채우고 돌아갔다. 그의 죽음이 너무 허망하고 믿기지 않았는데 어쩐지 어딘가 허수경과 닮았던 그 사람, 문학을 공부한 나보다 더 많은 시를 읽고 늘 음악을 듣고 늘 술에 취해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돌아가기 전 해에 바흐의 악보를 우편으로 보내온, 차를 몰고 동해바다 옆을 달리며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듣곤 하던 그 사람, 그 사람이 자꾸 떠오른다.

 

이 책은 허수경이 공부했던 독일 뮌스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소개되는 독일 시들이 신선하다. 헤르만 헤세나 안톤 슈낙, 전혜린, 괴테, 라이너 마리아 릴케... 독일어 문학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오랜만에 느끼며 읽는다. 고등학생 때는 한때 독일문학, 한때 러시아 문학, 이런 식으로 탐닉했던 것 같다. 허수경이 소개한 시들을 다시 찾아 읽고 괴테의 시집을 뒤적이고 게오르크 트라클의 시집을 구해왔다. 내 인생에 독어 원어로 그 시를 음미할 날이야 있을까 싶지만 어딘가 견고하고 서늘하고 음습하고 냉철하면서도 아름다운 도이칠란드 문학의 세계를 궁금해 하면서.

뮌스터가 얼마나 관광지로서 매력적인 곳인지는 잘 모르겠다. 독일이라고는 20년 전 서유럽 여행 중 어느 오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잠깐 들렀다가 동네에서 맥주 한 잔 하고 1박을 한 게 다이다(그러니 언젠가 독일을 꼭 다시 가봐야겠다). 고교시절 전혜린의 수필을 읽으며 그가 걷는 독일 거리의 쓸쓸함에 감정이입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얼마나 쓸쓸했을까. 얼마나 낯설었을까. 허수경은 또 얼마나 그랬을까. 게다가 그는 늘 두고 온 한국과 놓쳐버린 사랑을 아쉬워했으니까 더더욱. 유럽 여행을 할 때마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여행이라면 몰라도 여기서 살라고 한다면 살고 싶지는 않다. 만약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그걸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허수경은 아마도 내가 상상만 하는 그런 외로움의 늪을 경험했을 것이다.

 

문장이 아름다워서 몇 장면을 필사했다. 2차 대전에 양손을 잃은 루드게리우스 성당의 예수상 이야기와 강을 따라 온갖 박물관과 도서관, 문화원이 늘어서 있는 도시 이야기를. 이렇게 나만의 추모를 마치고 나는 과거로 돌아가 어린 날 읽었던 허수경의 시를 다시 읽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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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올리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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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는 그 사실이 놀라웠다. 첫 남편이 죽었을 때는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여기 세상이 있다고. 하루하루 그녀를 향해 아름다운 비명을 질러대는 세상이. 그리고 그것에 감사했다.

 

어쩌다 보니 미국문화에 푹 젖어 살고 있다. 영어 공부 한답시고 <프렌즈><모던 패밀리><가십 걸> 같은 미드를 주구장창 보고 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미국인들의 문화가 이제는 익숙해질 정도다. 가령, 외도는 기본, 이혼은 흔한 일, 청소년을 대할 때에는 늘 성적인 일탈보다도 마약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그게 너무 커서 임신 정도는 일도 아닌?) 가장 큰 것, 서로에게 솔직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 가족 간의 유대를 중시하면서도 분리는 확실히(우리 나라에 비하면) 하는 것, 등등.

 

<다시, 올리브>는 미드 속 도시(모던 패밀리는 캘리포니아가 배경이긴 하지만 중산층의 삶을 다루어서 좀 다른 분위기다)가 아닌 시골이 배경이고 주로 노년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그놈의 그 바람피우는 이야기는 여기도 하염없이 나온다. 귀 수술을 위해 입원한 중에 몰입해서 읽었다. 많은 이들은 저자의 소설 속 인물들의 인생사에 감정이입을 했나 본데, 나는 그들이 사는 마을을 상상하는 재미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전작은 읽지 않았지만) 이제는 노년이 된 주인공과 그의 이웃들의 삶을 통해 나의 늙어감에 대해 생각했다. 50대인 지금 생각하는 늙음이 아닌 죽음을 앞두게 될 늙음 말이다. 언젠가 올, 언젠가 반드시 올 그 늙음. 양상은 물론 다르다. 대개 혼자서 한적한 마을에 드넓은 집에서 노년과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미국의 노인들과는 좀 다르겠지만 대체로 혼자 외로움과 두려움을 맞이해야 한다는 점은 우리도 비슷하다. 우리 세대는 더 할 것이다. 언젠가는 누군가 반드시 혼자 남을 것이다. 그게 나는 아니었으면 해서 남편에게 나보다 오래 살아 나를 수습해달라고 농담 삼아 말하지만 내가 먼저 가고 남편이 혼자 남는 날들을 상상해도 마음이 아픈 건 사실이다. 부디 좀 외롭더라도 품위 있게, 자연과 더불어 어른답게 살다가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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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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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말줄임표......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너무 끔찍해서. 전쟁의 증언을 듣는 일은 어떨 때 유효할까.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려서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게 할 때. 물론 그런 일이 꼭 필요한 사람들은 그런 책을 읽지도 않지만 말이다.

여자의 목소리로 전쟁을 증언하는 일이 없었다 한다. 듣고 보니 그렇다. 어쩌면 한일 위안부 문제가 이슈가 될 때 그나마 거의 최초의 여성적 관점의 전쟁 조망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천수만 년 이래 늘 그랬듯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던 여성의 피해자적 관점의 증언이었다. 알렉시예비치처럼 참전했던 여성의 눈으로 전쟁을 증언하는 일이 얼마나 되었을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독보적이다.

 

왜 하필 여자의 전쟁 이야기여야만 하는가? 그 이유를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여자는 생명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나는 여자에게는 죽는 것보다 생명을 죽이는 일이 훨씬 더 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활동가의 냄새를 맡았다. 80년대 대학가에서, 그 이후에 많은 현장에서, 경색되지 않은, 살아 숨쉬는 활동가들이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의 피끓는 증언을 위해 단내 나고 땀내 나고 피비린내 나는 목소리로 열변을 토할 때, 결코 달변이 아니면서 말은 중간에 격앙 혹은 울음으로 툭툭 끊어지고 목소리는 쇳내가 나고 앞뒤도 없고 불안하고 그럴 때, 그런 이들을 보는 일이 감동스러우면서도 불편했던 경험이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난 기분이다. 글이란 게 보통 가슴이 끓어올라 써댔더라도 거듭 읽고 고치는 과정에서 순화되고 점잖아지는 법이다. 자기미화에 자기변명에 자기자랑에, 글은 점점 단정해지게 마련인데 이 사람의 글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설득하는 과정 그 자체가 날것으로 글에 다 녹아 있다. 이런 글은 또 처음 본다. 이 글을 꼭 써야 하고 이 책을 꼭 출간해야 하는 절박함은 작가가 를 알리는 일이 목적이 아니라 이 증언 그 자체를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 것에 있음을 힘주어 말해준다. 책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읽히지만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내용이라는 것 말고도 세상에 이런 목소리와 열의로 말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는 것, 그의 태도, 이런 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꼭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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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티처 - 제2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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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교 국어교사이지만 외국인을 가르칠 수 있는 한국어교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10여 년 전 서울교대에서 한국어교사양성과정을 듣고 시험을 치렀다. 시험은 몹시 어려웠다. 함께 수강했던 이 중 필기에 붙은 이가 23% 정도였고 그나마 다른 기관보다 많은 것이란다. 면접도 흔한 통과의례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근무하는 사립학교는 서울의 꽤 괜찮은 대학 병설학교다. 캠퍼스 안에 어학원이 있어 나도 영어를 배우려 몇 학기 다녀본 일이 있다. 한국어 과정도 있어서 들여다보았다. 내가 퇴직을 하고 이곳 한국어 강사로 일하겠노라 하면 받아줄까? 이런 상상도 하면서. <코리안 티처>를 읽어보니 전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나이 많은 이를 강사로 받을 이유가 전혀 없겠다. 그리고 교단에서 국어를 가르쳤다고 해서 반드시 한국어를 잘 가르치리라는 보장도 없다고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하여간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소설은 내게 매우 익숙하게 다가왔다. 전반적으로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뒤표지에도 쓰여 있듯 고학력 여성 노동자의 애환을 말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낯설지가 않다. 개개인의 서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이 처절하다.

요즘 젊은이들은 왜 그리도 자기 삶을 힘겨워하는가,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라떼는시대의 무게와 청춘의 무게, 개인의 무게가 삼중고로 나를 짓누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눈에 칼날을 세우고 살았던 것 같다. 지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쪽이 더 힘들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게 비교가 될까? 나는 지금의 청춘을 살고 있지 않은데 청춘의 눈으로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80년대는 적어도 취직은 잘 되지 않았느냐고 누군가 말한다. 그건 남자들 얘기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 여학생은 20% 정도밖에 없었다. 비사범대였던 우리 과에서 교직을 이수한 학생이 16명인가 그랬는데 대부분 성적 하위권이었던 열 명 정도의 남학생들은 졸업 전에 이미 전부 사립학교에 채용이 되었고 여학생 중 교사가 된 이는 나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나는 강원도에서 직접 우리 대학 출신 학생을 채용하고 싶다고 온 젊은 이사장(그 역시 남학생을 원했으나 그들은 모두 졸업 전 취업을 했기에)에게 뽑혀 강원도를 마다하지 않고 갔기에 교사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거의 만점에 가까운 우등생이었지만) 나중에야 자기 모교에 임용되었다. 여성으로서의 삶은 시대의 무게와 또 다른 방식으로 교직한다.

 

만약 이 소설이 각각의 개성과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캐릭터들의 연대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런 뻔한 구조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많을 것 같다. 왜냐하면....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므로. 많은 연대와 극복과 투쟁들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체념(묻어버림), 포기(혼자 우울증 약이나 수면제로 스스로를 달램), 소통 부재(모두가 낯설고 적으로 느껴짐)가 존재하니까. 그래서 아마도 어떤 이는 이 작품에 대해 그토록 혹평을 달았는지도 모른다. 작품 속 인물들이 다들 저마다 악다구니를 하고 있다고. 저마다 똑똑하고 저마다 아프지만 너는 어떠니? 내게 너의 힘든 사정을 말해봐. 우리 같이 생각해 볼래?’ 라고 말할 여지는 없는, 이것은 현실일 것이다.

사족을 하나 단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일 20~30대의 젊은 여성들은 그러나 여러 가지 역사적 경험을 통해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음을 안다. 소설 속에 지뢰처럼 박혀있는 부당하고 부당하고 부당한 일들에 모두들 스러지지는 않으리란 것을 나는 안다. 그러니까 소설은 그렇게 단절적으로 끝나되, 나는 혼자서나마 아닐 거야, 라는 희망을 읊어본다. 스물다섯 살 난, 잠시 일을 쉬고 있는 고학력 실업자인 내 딸에게 이 책을 읽으라 권할지 말지는 좀 생각해 보려 한다. 이 소설이 생각거리를 줄지, 그녀의 우울을 부추길지 잘 판단이 안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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