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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티처 - 제2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7월
평점 :
나는 중학교 국어교사이지만 외국인을 가르칠 수 있는 한국어교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10여 년 전 서울교대에서 한국어교사양성과정을 듣고 시험을 치렀다. 시험은 몹시 어려웠다. 함께 수강했던 이 중 필기에 붙은 이가 23% 정도였고 그나마 다른 기관보다 많은 것이란다. 면접도 흔한 통과의례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근무하는 사립학교는 서울의 꽤 괜찮은 대학 병설학교다. 캠퍼스 안에 어학원이 있어 나도 영어를 배우려 몇 학기 다녀본 일이 있다. 한국어 과정도 있어서 들여다보았다. 내가 퇴직을 하고 이곳 한국어 강사로 일하겠노라 하면 받아줄까? 이런 상상도 하면서. <코리안 티처>를 읽어보니 전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나이 많은 이를 강사로 받을 이유가 전혀 없겠다. 그리고 교단에서 국어를 가르쳤다고 해서 반드시 한국어를 잘 가르치리라는 보장도 없다고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하여간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소설은 내게 매우 익숙하게 다가왔다. 전반적으로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뒤표지에도 쓰여 있듯 ‘고학력 여성 노동자’의 애환을 말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낯설지가 않다. 개개인의 서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이 처절하다.
요즘 젊은이들은 왜 그리도 자기 삶을 힘겨워하는가,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라떼는’ 시대의 무게와 청춘의 무게, 개인의 무게가 삼중고로 나를 짓누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눈에 칼날을 세우고 살았던 것 같다. 지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쪽이 더 힘들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게 비교가 될까? 나는 지금의 청춘을 살고 있지 않은데 청춘의 눈으로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80년대는 적어도 취직은 잘 되지 않았느냐고 누군가 말한다. 그건 남자들 얘기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 여학생은 20% 정도밖에 없었다. 비사범대였던 우리 과에서 교직을 이수한 학생이 16명인가 그랬는데 대부분 성적 하위권이었던 열 명 정도의 남학생들은 졸업 전에 이미 전부 사립학교에 채용이 되었고 여학생 중 교사가 된 이는 나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나는 강원도에서 직접 우리 대학 출신 학생을 채용하고 싶다고 온 젊은 이사장(그 역시 남학생을 원했으나 그들은 모두 졸업 전 취업을 했기에)에게 뽑혀 강원도를 마다하지 않고 갔기에 교사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거의 만점에 가까운 우등생이었지만) 나중에야 자기 모교에 임용되었다. 여성으로서의 삶은 시대의 무게와 또 다른 방식으로 교직한다.
만약 이 소설이 각각의 개성과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캐릭터들의 ‘연대’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런 뻔한 구조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많을 것 같다. 왜냐하면....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므로. 많은 연대와 극복과 투쟁들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체념(묻어버림), 포기(혼자 우울증 약이나 수면제로 스스로를 달램), 소통 부재(모두가 낯설고 적으로 느껴짐)가 존재하니까. 그래서 아마도 어떤 이는 이 작품에 대해 그토록 혹평을 달았는지도 모른다. 작품 속 인물들이 다들 저마다 악다구니를 하고 있다고. 저마다 똑똑하고 저마다 아프지만 ‘너는 어떠니? 내게 너의 힘든 사정을 말해봐. 우리 같이 생각해 볼래?’ 라고 말할 여지는 없는, 이것은 현실일 것이다.
사족을 하나 단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일 20~30대의 젊은 여성들은 그러나 여러 가지 역사적 경험을 통해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음을 안다. 소설 속에 지뢰처럼 박혀있는 부당하고 부당하고 부당한 일들에 모두들 스러지지는 않으리란 것을 나는 안다. 그러니까 소설은 그렇게 단절적으로 끝나되, 나는 혼자서나마 아닐 거야, 라는 희망을 읊어본다. 스물다섯 살 난, 잠시 일을 쉬고 있는 고학력 실업자인 내 딸에게 이 책을 읽으라 권할지 말지는 좀 생각해 보려 한다. 이 소설이 생각거리를 줄지, 그녀의 우울을 부추길지 잘 판단이 안 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