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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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올까

전쟁은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

혐오는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

종교가 필요 없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등등의 완전무결한 어떤 세상에 대한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을 보면 의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하기에. 물론 우리는 그런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 노력해야 한다. 역사는 그런 노력이 헛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왔으니까. 하지만 그런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인간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 이 서평을 쓰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책 속 내용 중에 인간이 기도하지 않는 세상이 될 때, 그때야말로 인간 세상은 평화로워지지 않을까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한동일 선생은 신앙인이기에 절대선에 대한 신념이 있는 듯 보인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과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다를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인간이란 존재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기에 종교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기도는 꼭 필요하리라.

 

사르트르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아직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그려 볼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말했다 한다. 그리고 이 중 대표적인 것이 부재하는 실재의 개념이라고 했다나. 신은 존재하는 걸까?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없다고 주장하는 무지에의 오류를 범하고 싶진 않지만 아직까지의 삶에서 나는 현실과 과학을 믿는 자인 것 같다. 다만 여지를 열어둘 뿐. 다른 이의 생각을 존중할 뿐.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 알지 못할 존재에게 기도를 바친다. 내가 이 우주의 한없이 작고 하찮은 존재라는 겸손함으로 어딘가에 납작 엎드리고 싶을 때가 많다. 어떨 땐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 어린 존숭의 마음이 우러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때가 있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나의 친구는 살아생전 절집 나들이를 자주 다녔지만 병이 깊어 사경을 몇 번 헤매는 와중에 천주교로 개종 아닌 개종을 했다고 들었다. 그렇게 강인하던 사람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신에게 기대고 싶었으리라 싶다. 나도 그럴지 모른다.

 

저자의 말 중 기도를 통해 마음의 고통을 줄일 수는 있지만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에 위안을 얻는다. 종교를 갖지 않는 일은 확고한 신념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초월적 존재가 있을 수도 있고, 적어도 이 거대한 자연과 우주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만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신앙의 틀과 규율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 신심이라는 게 생기지 않는 나같은 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에 대해 신앙인이 해주는 최고의 말이다. 당신이 믿지 않아서, 기도하지 않아서 불행해질 것이라는 저주는 얼마나 불편하고 불쾌했던가.

 

2. 진정한 진보는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의 입장은 무엇일까 생각할 때가 많다. 신영복 선생이 말씀한 입장의 동일함은 종교인들의 세계관만큼이나 현실 세계의 인간관계를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입장이 달라도 수용할 수 있는, 수용해야 하는 고귀한 견해들이 많음을 알지만 말이다. 한동일 선생은 얼핏 보수적인 사람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는 본질적인 가치는 기본적으로 약자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란 점에서 진보의 관점이란 생각이 든다. 예수가 그랬듯이. 물론 근본은 신에게로 나아가긴 하지만 인간의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나 사회가 나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고 돌봐주고 보살펴준다는 느낌의 귀중함을 말한다. 코로나 당시의 한국 사회를 예로 들면서. 국가나 조직이나 공동체(종교적인 공동체를 포함하여)의 역할은 그런 것이리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이익과 착취의 효율이 아니라 공생과 돌봄의 관계로 공동체를 바라보는 이라면 그는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한동일 선생의 글을 좋아한다. 사고방식이나 삶의 태도는 나와 많이 다르지만 그의 학자다우면서 신앙인다운 모습과 세상의 약자에 대한 시선이 좋다. 지향의 궁극은 다를지라도 가는 길은 넓은 의미에서 같은 길이라 생각한다.

 

3. 낯선 언어를 공부하는 일

요즘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스페인어도 이 책에서 언급되는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비슷한 단어가 나와서 재미있었다. 새로운 언어를 아는 것은 또 하나의 세계를 아는 것이라고 누가 그랬다. 라틴어라는 세계는 현존하는 세계가 아닐 수 있지만 어차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만으로 삶을 채울 수는 없기에 의 영역으로서 저자가 언급하는 라틴어를 만난다. 다시 가볼 일이 있을지 없을지도 잘 모를 스페인이나 쿠바, 혹은 남미, 그래서 써먹을 일이 있을지 어떨지 알 수도 없는 스페인어지만 열심히 공부한다. 공부하는 동안은 세사의 근심을 잊고 낯선 언어로 꿈을 꾸어 본다. 스페인어로 책을 읽는 상상, 좋아하는 책을 원서로 읽으면 달라질 그 느낌에 대한 상상. 삶의 절반은 현실이나 핍진한 현실을 버티게 하는 절반은 꿈, 상상, 문학과 예술,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이 아닐까.

라틴어는 현실의 언어가 아니지만 단순한 몽상의 언어가 아니라 현실 언어의 뿌리이기에 의미가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서유럽 문화와 언어의 뿌리니까. 그래서 비현실적인 한동일의 라틴어가 매력적인가 보다.

 

4. 대략 알고 있었으나 자세히 알게 된 내용이 있다.

10세기 초반 영주 간의 다툼 등 정치적 대혼란의 시기에 민중들은 지배자가 아닌 교회를 중심으로 주거 집단을 형성. 교회 영토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하기보다 느슨하게 통치하면서 사법, 조세, 행정, 군사 분야까지 범위를 넓혀감. (마키아벨리는 비판했지만) 이런 교회 국가와 교황령에서 오히려 근대국가의 주권과 입법권 개념이 나옴.

 

유럽의 특성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그 지역의 건축, 문화, 정치적 토대들은 다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중세 유럽의 종교 권력은 재앙이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 시점으로 보면 고스란히 그 명과 암을 자신의 문화적 자산으로 다 품어 안고 있다. 나쁜 역사도 역사인 것이다.

 

중세 유럽은 전염병 탓에 노동력이 부족했고 (이것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의료) 기술 발전의 계기가 됨.

 

전염병의 역설, 전쟁의 역설 따위를 생각하며, 위기는 늘 기회가 되었구나 싶다. 환경이나 기후 문제도 그렇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5. 수업에 활용할 부분

칸트웰 대 코네티컷 판결 행인이 지나가는 길에 카톨릭을 부정하는 녹음테이프를 틀어 치안 방해죄로 기소된 여호와의증인 신도 칸트웰 사건 믿는 자유는 절대적이지만 행동의 자유는 그렇지 않다. 행동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규제의 대상으로 남는다.

 

이 내용으로 토론 수업을 해볼까 한다. 남학생들과 혐오표현을 표현의 자유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두 시간 정도의 토론, 주장글 쓰기 수업을 해마다 한다. 이때 헌법 정신(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위 내용도 함께 토론해볼 만할 것 같다. 한국 사회는 진영논리가 삶 전반과 가치관, 세계관 전반을 지배한다. 이 현상은 10대 남학생들에게까지 강렬히 영향을 미친다. 열네 살짜리 중1 남학생들이 어른들의 배금주의 가치관, 인터넷의 젊은 남자들의 혐오주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모습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그러나 부정적이라 해서 포기할 수는 없기에 가장 예민한 주제들로 토론 수업을 한다. 토론을 교육하는 것 말고는 가치관의 상충을 극복하고 의견을 통합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수업을 하게 된다면 헌법이 보장한 양심, 신앙, 신념의 자유는 인정, 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공유해야 할 것이다. 네오나치든 극우, 공산주의, 살인을 정당하다 생각하든 생각은 자유지만 행동으로 옮길 자유를 뜻하는 것은 아니란 것. 다만, 신념은 대개 행동으로 표출되기에 아무리 양심이 자유라 해도 좋은 가치관, 좋은 양심, 좋은 신념을 가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생각은 어떻든 그게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생각이 쌓이고 신념이 되면 실천하고 싶은 게 사람이기에 올바른 사고를 갖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도 강조해 가르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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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윤정은 지음 / 북로망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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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롯에 신선함도 없고 예상 외의 사건도 없다. 주인공 지은은 읽는 내내 드라마 <도깨비>의 저승사자의 연인이자 도깨비의 누이였던 배우 유인나가 떠오르는 캐릭터였다. 특히 맨 앞, 지은이 이생에서 마음세탁소를 열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요약해놓은 장면은 차라리 없었으면 싶다. 중학생 독서용 도서로 이 책을 검토하려 읽어본 바로는, 1이 읽는다면 나쁘지 않으리라, 싶은 정도지만 이야기 자체는 어린 학생들보다 30대 젊은이들(아마도 작가 또래일 듯한)과 그 부모 세대 이야기에 가깝다. 내용물에 비해 큰 명성을 걸치면 부담스러울 수 있으리라는 걱정이 앞선다. 책 속 에피소드 중 하나인 인플루언서 이야기처럼...

 

다만, 개인적으로 한없이 마음이 약하고 우울한 시기에 이 책을 읽다 보니 본의 아니게 마음의 위로를 받은 점은 고맙게 여긴다. 나는 그놈의 마음이란 게 객관적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걸 머리로 잘 아는 사람이다. 그걸 안다고 해서 내 상황이나 마음이 잘 다스려지느냐, 그렇지는 않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들을 여럿 알고는 있지만 힘이 드는 건 힘이 드는 것이다. 그 와중에 이 뻔한 이야기는 울고 있는 엄마나 할머니를 토닥이는 어린 아기의 손길처럼 어설프고 귀여웠다. 그래, 누군가에게는 치밀한 구성과 뛰어난 대사로서가 아니라도 이렇게 위안이 되는 이야기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적어도 작가는, 이 이야기를 쓰면서 행복했을 것 같다. 그리고, 드라마로 다시 태어난다면 멋진 장면들과 사랑스러운 캐릭터들로 12회만큼 정도의 행복을 시청자들에게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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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살아도 안 이상해지던데? - 인간 네온사인 이명석의 개성 촉구 에세이
이명석 지음 / 궁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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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의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지친 와중에 만나는 온갖 끔찍한 뉴스들, 정치적인 불안, 개인적으로 아픈 몸, 그리고 퇴직을 고민하게 하는 학교의 금쪽이, 교권 추락 뉴스... 이런 것들을 안고 신경안정제 처방이라도 받아야 하나, 힘들어하면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동시에 읽는 7, 8권의 책들 중에는 1년 가까운 시간에 걸쳐 천천히 읽는 철학책도, 과학책도 있지만 이렇게 마음이 힘든 날에는 문학작품들도 잠들기 직전의 독서를 마무리했다. 조금 슬플지라도 아름다운 마음으로 잠들려고. 그리고 그마저도 힘든 날에 그나마 날 행복하게 했던 책 두 권 중 하나가 바로 이 <이상하게 살아도 안 이상해지던데?>였다. 한겨레 신문에서 빠트리지 않고 읽던 이명석의 글, 일단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재미있다. 그냥 허접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것 같지만 그 안에 고갱이가 있다. 그렇다고 엄청 어깨에 힘을 준 거대 담론도 아니다. 삶의 지혜랄지 성찰이랄지, 그런 게 있다. 나는 이런 글쓰기를 좋아한다. 적절한 유머감각, 힘빼고 말하기, 잘난 척하지 않기.

 

특히 이명석의 글은, 흔히 글 좀 쓴다는 이들이 다 하는 남의 말 인용하기가 없다. 이 사람은 남에게 보여주려고 이상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다. 머리를 기르고 재미있는 일을 좇고, 장난감을 들고 다니지만 그는 이상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재미나게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렇게 겁내지 않고 욕심부리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라고 누가 그랬다. 카잔차키스였던가, 무서운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는 사람, 중세에도 없었고 에리히 프롬이 고민했던 근대인의 소명이었으나 갖기 어려웠던 그 자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진짜. 욕심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부러움도 없고 그렇다고 거침없이 용감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삶은, 불가능하겠지. 그런 꿈조차 애써 꾸지 않는 이명석의 글은 한없이 울적한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준다. 마지막 한 챕터를 남기고 아쉬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렇게 좋은 글인데 이 사람 책은 왜 이리 잘 안 팔리는 걸까. 하긴 책이 좋은 것과 잘 팔리는 것은 아무 상관관계가 없는 일이긴 하더라. .

그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있는 몇 구절을 소개해 본다.

 

명심하자, 내 안의 어떤 자아가 저지른 일은, 나의 다른 자아들이 함께 책임져야 한다. 그러니 더러운 자아를 역겨워하고 부끄러운 자아를 교정할 수 있는 자아를 키워야 한다.

 

우리는 가끔 집을 뛰쳐나가고 길을 잃어야 한다. 상상 속의 연습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이런 남자들이 있다고 한다. 여자 가수가 걸스 캔 두 애니싱문구를 들엇다고, 여성의 삶을 돌아보는 소설을 읽었다고 시비를 건단다. 혹시 스스로 뭔가를 하는 것보다 여자들이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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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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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아니 에르노 지음

 

 

1.

수업 내용 요약과 수업 준비를 위한 독서 노트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 필요 없어졌고, 텍스트를 설명하기 위해 깨우친 박식한 언어는 더는 쓰지 않게 되면서 그녀 안에서 지워졌다.

 

<세월>의 작가 아니 에르노는 교사였단다. 교사이자 작가라는 정체성에서 동질감을 느껴서 그런 걸까, 아마도 퇴직 즈음에 쓴 듯한 그의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 작년부터 나는 학교에 남아 있는 오랜 세월의 자료들을 하나씩 버리고 있다. 30년도 더 된 5차교육과정의 교과서들, 오래 전 제자들이 찾아와 잃어버렸다고 말하면 손에 들려보내려고 보관한 여분의 학급문집들, 교무수첩, 교육과정이 바뀌어 쓸모도 없게 되었으나 아이들이 정성껏 만들었기에 차마 버리지 못했던 신문, 시집, 소설, 수필, 시화들. 후배들에게 수업의 예시로 보여주려 고이 간직했던 그것들은 디지털 시대에 활용할 일이 없어진 손으로 쓴 것들이다. 자기 아버지 이야기, 여자 친구 이야기가 눈물처럼 아로새겨져 있는 학생들 글을 버리는 일은 왠지 가슴이 아프다. 내가 개발하고 여러 해 검토해 다져 만든 수업 지도안은, 내게는 보물이었겠지만 이제 곧 쓰레기가 될 터이다. 어차피 버려질 것들, 조금씩 미리 버려야 할 것들이다. 아니 에르노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정년퇴직을 5년 남긴 중학교 교사이다. 34년 동안 남자중학생들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쳤다. 남은 5년은 긴 세월일까 짧은 시간일까. 학생들의 반짝이는 눈빛이 온통 나의 말과 수업에 집중될 때, 깊은 생각으로 그 어린 얼굴들이 회한에 잠기는 표정을 지을 때, 친구들과의 수업에 한껏 즐거워할 때, 나는 교사가 된 나 자신을 기특해했고, 행복해었다. 그러면서도 몇몇 어린 남자들의 지저분한 수컷 본능과 잔인한 성정을 만날 때는 난감하고 절망스럽기도 했다. 저 아이들을 어떻게 잘 가르칠 수 있을까, 무엇이든 다 해줘서라도 좋은 삶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과, 1, 일주일에 두어 시간의 만남으로 저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인생에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있는 건지 회의를 느끼는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곤 했었다.

 

최근에 학교 현장을 힘들어하는 교사들의 목소리로 세상이 시끄럽다. 사실은 해묵은 문제가 이제 터졌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도 덩달아 학교가 힘들다. 고통을 당한 이들의 아픔에 지나치게 공감을 하는지 몸이 아프고, 이 깊고 복잡한 문제를 풀 해법을 갖고 있지 못해서 차라리 다 놓아버리고 싶기도 하다. 지난 34년을 살얼음 밟듯이 지나왔는데 아직 5년이나 남았나 싶어 남은 시간이 두렵기도 하다.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는 학생과 학부모를 만나는 것은 교사의 능력이나 정성과 무관하게 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나도 앞으로 어떤 거친 학생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든다 

 

2.

그는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그녀라는 명칭을 빌려 이렇게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바로 지금, 글로써 미래의 자신의 부재를 형태로 만들어 놓아야 하며, 20년째 자신의 분신이자 동시에 앞으로 점점 더 긴 시간을 보내게 될, 아직 미완성인 수천 개의 메모 상태에 불과한 이 책을 시작해야만 한다.

 

곧 사라질 자신의 존재를 글로 남기려는 용기는, 그가 꽤 괜찮은 작가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노의 <세월>은 단지 자신의 개인적이 추억담에 그치지 않는다. 유럽의 역사와 프랑스의 정치, 가로의 세월 틈틈이 엮인 씨줄의 개인사들이 다 담겨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그 동네 사람들은 아르노의 글에 깊은 감회를 느낄 것 같다. 읽다가 픽, 웃은 대목이 있다. ‘미테랑의 재선이 우리를 안심시켰다. 우파 정권 아래에서 항상 분노하며 사는 것보다 좌파 정권 아래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지금을 사는 이 씁쓸한 공감마저 이것도 지나가리라가 될 것이겠지만, 멀지 않은 세월 속에서......

 

삶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발전이었다. 그것은 잘사는 삶과 아이들의 건강, 빛이 잘 들어오는 집 그리고 밝은 거리, 지식, 시골의 어두운 것들과 전쟁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의미했다.

 

우리를 휩쓸어가는 것들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우울함을 느꼈다.

 

우리는 디지털로 현실을 고갈시켰다.

 

3.

그이의 글에는 노년의 회환과 더불어 삶의 덧없음, 그 때문에 만날 수 있는 인생에 대한 우주적 통찰이 있다.

 

부모들은 이따금씩 우리에게 대답하는 것을 잊고 초점 없는 눈빛으로 우리가 없었던, 우리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 그 시간, 옛날을 응시하는 듯했다.

 

아이들은 살아본 적 없는 그 시간에 대한 끈덕진 아쉬움을 간직했다. 타인들의 기억은 그들이 간발의 차이로 놓친, 언젠가 살아 보기를 희망했던 시대를 향한 비밀스러운 향수를 안겨주었다.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마치 이 호칭이 자신의 조부모님에게 귀속된 것처럼, 그들이 돌아가셨어도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는 본질의 어떤 것처럼.

 

이제는 그녀가 달리는 세상 속에서 부동의 자세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아들의 배우자의 배 속에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 .. 이 세상에서 자신이 빠르게, 지체 없이 대체된다는 사실이 그녀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 개인의 회고사나 푸념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 그이는 글 속에서 <그녀>는 거울 속, 사진 속의 끊임없는 타인에 해당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늙음을 인정하긴 어렵다고 푸념하면서도 이렇게 자기 객관화에 노력을 다했기 때문에 그의 글은 어른스럽다. 그리고 아름답다.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기대고

계절의 냄새를 손으로 잡았다.

 

최근에 아주 예쁜 색감의 잉크를 몇 병 샀다. 색깔별로 만년필을 갖지 못했기에 딥펜이 필요해 펜촉 몇 개를 사달랬더니 남편은 펜촉 수만큼의 펜대도 주문해 주었고 집에 있는 나무를 깎아 잉크병과 펜대를 놓을 수 있는 거치대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잉크를 찍어 에니 아르노의 다음 문장을 옮겨 적어본다. 아슬아슬한 나의 부모들, 머지 않아 다가올 나와 남편의 미래, 저렇게 허무하지만 너무나 허무하기에 두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집착할 것도 없는 삶에 대해, 그의 글이나 나의 마음같은 문장을 한 글자씩, 바다 색의 잉크로, 녹음의 빛깔로, 누런 종이에, 펜촉으로 종이를 살며시 갉아대며, 우리 모두 언젠가 사라질 존재로서, 그렇게 태어나고 사라질 것이라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워질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쌓인 사전은 삭제될 것이다. 침묵이 흐를 것이고 어떤 단어로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입을 열어도 나는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계속해서 세상에 단어를 내놓을 것이다. 축제의 테이블을 둘러싼 대화 속에서 우리는 그저 단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며, 먼 세대의 이름 없는 다수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점점 얼굴을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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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방문
장일호 지음 / 낮은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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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 세속적인 욕심이 없으면서도 책임감은 강한, 그리고 통찰적인 측면에서 진정 똑똑한 사람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라 생각한다. ‘기레기라는 멸칭은 그런 세상의 기대가 높은 만큼 꼭 그만큼의 실망의 표현이라 생각하며,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진정한 기자정신을 가진 훌륭한 기자도 많다고 생각한다. <시사인>이나 <한겨레21> 같은 데 실린 심층 취재 기자를 보면 기자는 다 기레기라는 말 함부로 못 할 것이다. 앞에 언급한 매체 말고도 다른, 포털에 잘 노출되지 않는 언론사에도 훌륭한 기사와 기자가 많을 것이고. 그런 존경의 마음을 담아 내가 아는 기자들의 책은 꼭 사서 보는 편이다. 그런데 마침 장일호 기자의 책이 나왔단다.

 

그는 몇 년 전 내 글의 원고 담당 기자였다. <시사인>에 방문해 잠시 만났다. 그때 만난 그이에게서 다른 기자들과 딱히 다른 면모는 보지 못했다. 겸손하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만큼의 사회성을 가진 일반적인 기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주로 전화 통화를 나눴지만 당시 막 시작된 남혐 여혐에 대한 원고에 대해 조심스런 의견을 주고받은 기억도 있다. 그때 받은 인상도 신중하고 진지한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이번에 나온 책에 에세이라는 말이 붙어 있어서 전문적인 취재 글이 아닌 부담 없이 읽어도 되는 책이라 여겼다. 그냥 의리로, 가볍게 읽을 생각으로 집어들었던 책.... 그만큼 나는 장일호 기자를 잘 몰랐던 것이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여태 내가 써왔던 글들이 부끄러웠다. 이 책 속 글들은 나는 진정으로 치열하게 살아왔던 걸까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만든다.

이 서평으로나마 장일호 기자, 당신의 글은 깊고 따뜻하고 아름다웠다는 말 전하며 건강은 좀 어떠신지도 묻고 싶다. 아프지 말고 좋은 글, 좋은 취재 더 많이 부탁한다는 인사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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