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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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란 씨앗을 심는 일과도 비슷한데 그 씨앗은 1년만에 싹트고 꽃피지는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내 품에 있을 때 별 변화를 보이지 않던 아이들이 사실은 그 안에 공부하는 습관, 책읽기의 즐거움, 남을 배려하는 마음, 위기 상황에 여유있게 대처하는 자세 따위의 씨앗을 품고 내품을 떠난 후 그렇게 잘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것이 교육자로서 나의 기쁨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다니나 하다치 선생이 훌륭한 것은 6개월만에 부적응아를 읽고 쓰게 만들었다거나 학부모들의 지지를 얻어냈다거나 아이들의 사랑을 받았다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다니 선생의 사랑과 지도를 받은 데쓰조가 그렇게 잘 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음 해나 어쩌면 더더더 이후에라도 고다니 선생의 사랑을 바탕을 잘 커나갔으리라 믿는다. 고다니 선생님은, 내가 이 아이를 변화시키고야 말리라, 목표를 세워 싸우듯이 덤벼들지 않았다.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징그럽고 더러워 싫어했던 파리에 관심을 가졌고 몸을 낮춰 그 아이의 집에 가서 밥을 나눠 먹었다.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훌륭한 선생님이 되는 일은 어렵다. 과연 훌륭한 선생님이 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훌륭한' 이란 수식어가 능력에 해당하는 말이라면 말이다. 나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교사 말이다. 그 아이들의 문제와 아픔을 모두다 해결해 주거나 껴안아 줄 수는 결코 없다. 그런 과욕을 부릴 생각도 없다. 아프면 아픈 대로 문제해결은 아이들의 몫이더라도 나는 그 아이들이 학교에 왔을 때 적어도 우리 교실에서만은 부당하게 대우받고 나로부터 소외되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하고 싶다.

그래서 안정된 마음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책읽기의 즐거움을 알고 공부도 재밌다는 것을 알게 되어 몇년쯤 지난 후 자기도 모르게 늘 책을 읽고 스스로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이미 중학교 몇학년 때 담임 이름쯤은 잊을 법도 한 세월을 맞이하면서 잘 커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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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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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읽으면서 거기 담긴 몇 안되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더 보고 싶었다. 그렇게 검색을 해서 산 이 책을 사놓고도 오랫동안 들여다 보지 않은 이유가 뭘까. 어쩌면 역逆 피그말리온 현상을 연상케 하는, 체모가 다 그러나서 민망한 표지 그림 때문이었을까. 혹은 잘 펼쳐지지 않는 판형이나 딱딱한 종이, 구식 인쇄방식 탓?

청소년기에 3단 세로 식자판으로 세계명작 따위를 읽었던 세대인 내가 그런 것에 흔들리지는 않는다고 일단 말하고 싶다. 책 뒤에 이 책에 대한 서평으로 지은이 수지 개블릭이 어쩌구저쩌구 하여 고전적 연구를 하였다, 라고 써 있는데 나는 읽다 말고 그 '고전적 연구' 라는 대목을 다시 읽으며 쿡, 하고 웃었다. 좀 미안한 말이지만 르네 마그리트라면 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림 마다마다에 그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화가의 의식 혹은 무의식이 숨겨있을 터이고 만약 그런 의식이 없이 그려진(실지로 마그리트는 모든 그림을 그렇게 의식하고 그리지는 않았다고 했던 것 같다) 그림일지라도 그것을 사회적으로 혹은 원형적으로 읽을 수 있는, 읽으려는 어떤 코드나 노력이 가능하지 않을까. 난 그런 걸 기대했던 것이다. 어떤 그림이 어떤 그림과 비슷하다는 주제별 분류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고.

마그리트는 전혀 상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물을 결합 배치하여 신비롭고 두렵게까지 느껴지는 '화면'들을 연출하였다. 그 이원성이라는 것은 개념의 혼돈 - 눈에 보이는 그 물건은 진짜 그거게 아니게? 하는 식의 - 과 정체성 규명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던진다. 밤과 낮의 공존, 거대한 하늘, 바다와 작은 생물체 혹은 무관한 사물의 공존 따위를 통해 이것은 왜 불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던진다. 그 답은 그 자신도 모를지라도 말이다. 차라리 설명 없이 그의 그림을 '흠뻑' 즐기면서 논리나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림이 던져주는 환상 속으로 빠지는 게 더 아름다운 감상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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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 art 003 다빈치 art 18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신성림 옮김 / 다빈치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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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나는 그게 궁금하다. 천재는 도덕적이지 않아도 되는건지 하는 문제가. 살바도르 달리, 피카소, 모짜르트 그리고 디에고 리베라..또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오만방자한 도덕불감증 환자인 천재들이 단지 하늘이 주신 재능 때문에 그들의 부덕에 대한 용서를 받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디에고가 누군지 잘 몰랐다. 아주 오래 전에 우연히 - 지금도 별로 많이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전엔 더욱 생소했던 - 칼로의 그림을 보고 참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후 그녀의 그림을 더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지만 자료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이제서야 프리다 칼로의 그림과 생애를 대하게 되면서 '덤'으로 디에고를 알게 되었다. 덤이라지만 사실상 디에고야말로 세기적인, 세계적인 화가임을 책을 통해서 뿐 아니라 도판상의 그림으로라도 알 수 있었다. 그의 그림의 스케일이나 수준이나, 영향력 따위...

그에 비하면 칼로의 그림은 그녀의 이념이나 사회적 영향력 따위보다는 개인사에 교착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쁜 의미로 사용하는 '여성적인' 그림이라는 느낌이다. 물론 그녀의 그림 중에는 대지를 어머니로 형상화하고 우주와 생성을 노래한 것들도 있지만 특히 디에고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범위가 좁고 대신 깊은 느낌을 준다. 상처받은 영혼의 괴기스러운 아름다움, 죽음과 생성을 뛰어넘는 영적 세계, 외부와의 부조화, 지독한 외로움, 투쟁력... 나는 김정란의 시를 떠올렸다. 그런 뾰족하고 굴곡이 심한 파장의 예술세계가 묘하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림이거나 시이거나 그 영역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원한 것은 프리다 칼로의 그림과 인생이었기에 그런지는 몰라도 이 책이 디에고의 업적을 중심축으로(다루는 이야기의 양은 프리다 칼로의 것이 많지만) 하다 보니 디에고는 도덕적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천재성과 업적만으로도 참으로 위대할 뿐 아니라 프리다가 인고하면서도 간절한 사랑을 바칠 만큼 매력적인 인물인 듯이 서술하고 있다. 과연 디에고가 일반인이었다면 그의 문란과 방종이 이해받을 수 있었을까? 게다가 그는 공산주의자였다.

물론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그 어떤 진보적 이데올로기이든, 겉으로는 그것을 주장하고도 사회적 이념적 가치관과 개인적 사생활의 가치관이 전혀 따로 놀았던 '사이비'들이 한둘은 아니지만, 만약 디에고가 진정한 혁명적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었다면 결코 그토록 방종하진 않았을 것이다. 프리다 칼로를 몹시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바치는 어머니 같은 사랑과 이해를 사랑했던 것은 아닌지... 그의 신체구조는 몹시도 특이해서 처제나 아내의 친구까지 범하지 않고는 견딜 수도, 예술을 할 수도 없었던 건지, 만약 그랬다 하더라도 그의 예술을 위해서 그 정도는 용서해 줄 수 있다는 건지...

도덕성이 담보되지 않는 천재에게 극찬을 보내지 말라고 주장하고 싶다. 좀 과격하게 말하면, 그 찬양은 위대한 예술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도 좋다는 이야기로 전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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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 복잡한 세상 & 명쾌한 과학
정재승 지음 / 동아시아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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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과학, 이렇게 말하면 과학자들이 싫어하려나. 그러나 내가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인문학이란 모름지기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교양적 바탕이란 생각을 한다. 자연과학적 교양과 지식이 삶에 기능적으로 작용한다면 인문학적 교양은 정서적으로 작용한다. 학술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일반인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자연과학은 실질적이고 효율적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피부에 와닿게 생각하지 못한다. 차는 운전할 줄 알아도 차의 구조나 원동의 과학적 원리를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자연과학은 조금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나 보라, 정재승 씨는 결코 그런 딱딱한 물리학자가 아니다. 나는 그가 인문학적 교양이 풍부한 자연과학자라기보다 진정 가슴으로 과학을 사랑하는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길래 사람들 가까이에서 피가 흐르고 맥박이 뛰는 과학을 헤아리고 이야기를 엮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서구의 많은 학자들이 문학작품 못지 않은 빛나는 문장으로 자신들의 학술적 논문들을 써내려갈 수 있는 교육의 바탕을 늘 그리워하며 나의 아이들에게 시를 읊는 과학자, 노래하는 정치가, 일기를 쓰는 자동차 정비공이 되어 달라고 당부한다. 나에게 새삼 과학적 상식이 '필요'했다기보다 '따뜻한' 과학, '살아숨쉬는' 과학이야기가 고팠기에 정재승의 과학콘서트를 읽었노라 하고 싶다.

프랙탈 이론을 처음 알게 된 게 10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참 막연하게 '인공지능'과 관련된 어떤 이론쯤으로 생각했던 그것을 쉽게 이 책은 설명해준다. 게다가 아프리카 문화 속에서 프랙탈적 요소가 발견된다는 이야기쯤에서는 그야말로 고고학이나 문화인류학적으로 결합될 법한 신비로움마저 느껴진다. 혹은, 산타클로스의 과학과 같은 이야기는 성 니콜라우스의 정신과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아이들과 함께 나눌 때 아이들의 좀더 치밀한 관심을 자극할 수 있는 재미있는 '나의 이야기 보따리'에 저장해 둘 수 있었다.

참고로 나는 수학이 싫어 국문학을 했다고 좀 과장되이 말하던 대학생이었고 화학 생물 물리에서 얻은 참혹한 결과를 만회하기 위해 국어와 영어에 매달려야 했던 불쌍한 고교시절을 보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책을 천천히 읽는 편인 내가 4박 5일 여행 중에 다 읽었다. 물론 이동시간이 좀 길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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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가 온다 우리문고 5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김경연 옮김, 유타 바우어 그림 / 우리교육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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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급문고나 추천도서로 선호하는 책에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재미있을 것, 간결하고 쉬운 문장일 것, 감동이 있을 것, 이 책으로 하여 다른 책도 읽고 싶어질 것. 그래서 애장하고 있는 책들의 목록에 나는 이 책을 과감히 끼워넣는다. 이 책은 그저 고학년 동화로 볼 수도 있을 만큼 쉽고 재밌다. 우화적 형식과 작가의 유머감각 넘치는 문체가 읽는 사람을 유쾌하게 만든다. 주인공인 '그 개'는 또 어떤가. 정작 자기 자신은 문제 해결을 위해 곰곰히 생각하는 과정을 빠뜨리지 않는 진지남이지만 남들을 대하는 태도나 어려운 사태를 헤쳐나갈 때는 무지하게 낙천주의자이다. 그런 호쾌한 성격은 한국 사람들 중에 찾아보기 쉽지 않지만 그런 사람이야말로 얼마나 사회적으로 건강한 존재인지를 익히 알고 있다.

게다가 '그 개'는 유능하기까지 하다. 단지 연륜이 쌓여서 이일 저일을 잘 해내는 것 같지는 않다. 평소에 익히고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고도 그는 겸손하다. 잘난척 하지 말아야지, 하고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잘났다는 생각조차 않는다. 누군가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를 사랑하니까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 개가 벌이는 이러저러한 행적들(특히 학교에서의 일은 직업적으로 공감이 갈 수밖에!)도 참 재미있지만 이 책의 미덕은 그 재미를 넘어서는 '그 개'의 인격과 지혜에 있다. 이런 인격체 어디 없나? 세상 살이에서 만나 볼 수 없어서 작가는 '개' 중에서 그런 인격체를 찾았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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