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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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존경할 만한 어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젊은 시절에는 그런 선배들이 없다고 생각했다. 학교 현장에서 그런 선배를 만나지 못했다. 물론 좋아할 만한 선배교사들은 더러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그런 선배가 되어야 할 나이가 되고 있는데, 나 역시 존경할 만한 선배로 불릴 자신이 없다.

 

리영희, 문익환, 신영복 같은 분들은 너무나 머나 먼 곳에서 우러러 보아야 할 분들 같았다. 그런데 황현산을 읽으면서, 마치 아주 가까이에 존경할 만한 선배가 있었구나 싶은 안도감을 느낀다. 황현산이 위대한 석학이 아니라서 우러러보이진 않고 그저 안도하는 것이냐고? 그런 건 아니다. 아마도 내가 문 공부하고 황현산을 같은 문학도라 생각해 선배라 여기는 건지는 건지도 모른다. 헤아려 보니 그분은 내 부모님 연배 정도 되는데, 주변에서 본 그 연배 어르신들은 교양이나 지적 수준, 개개인의 인격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보수적이다. 젊은이들과 대화할 때 우기기만 한다. 폭넓은 사고를 하기보다 내 자식, 나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자본주의적 가치를 옹호하고 편법과 부도덕에 대해 관용적이다. 전형적인 한국식 자본주의 사고방식에 윤리적 일관성 따위가 없다. 그러나 황현산 선생은 다르다. 선생 같은 어른이 곁에 있었다면 조곤조곤 세상을 달리 보아야 함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실 것 같다. 신문에 난 그 분의 칼럼을 꼭 챙겨 읽으며, 읽을 때마다 그 젊은 감각에 놀란다. 이 책도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 전에 쓴 글들로 채워져 있는데도 전혀 뒤처진 느낌이 없다.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올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진응연 시인 <용산 메랄콜리아>를 인용하면서)

...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 세상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이명박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2009)

 

그러면서 그의 글은 문학도다운 감성이 촉촉하다 나도 그의 물총새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다시 두근거림을 느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공자가 말한 것처럼 저마다 제 마음대로 행동해도 옳은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에 도달할 때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지도 모른다. 싱가포르처럼 법적 제재가 많아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는 사회, 일본처럼 공동체 문화가 사람들의 삶을 규제하는 사회, 프랑스처럼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규범이 사람들의 행동을 규약 하는 사회 중 무엇이 이상적일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느 사회나 제멋대로 행동하고 싶은 사람들과, 그들만큼 무지막지하고 잔인하게 행동하지는 않더라도 그냥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은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그들을 제약하지 않고도 약자들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있을까? 인간 본성이 그런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면 불완전하나마 지금까지 인류가 구축해 놓은 민주주의니 법치주의니 하는 것들이 기특하기도 하다. 정치나 법으로가 아니어도 그것이 가능한 세상을 꿈꿀 때,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말하기도 하고 종교적 경지를 논하기도 할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어떤 고난이 닥쳐도 그것은 내 마음의 문제라 여기라고도 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절대로 불가능할지라도 조금이나마 그 이상에 닿는 어떤 사회는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그런 사회를 만들려고 애쓰는 현실 자체가 가장 행복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역설일지라도. 독재와 맞서고 부조리와 맞서고 자본에 맞서는 일, 온갖 부당한 일들로 가슴 아파하는 일, 이 모두가 너무 괴로워 다시는 모태에 들고 싶지 않으나 주어진 이 생에서만큼은 크든 작든 뭐라도 하려고 애쓰는 일, 죽는 날까지 자포자기하지 않고 희망을 노래하는 일, 그런 삶의 과정이 그나마 가장 가치 있는 삶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 인사동에 나가봐야겠다. 책을 써야겠다. 집회에 나가야겠다. 그림을 그리고 조그마한 시골집을 알아봐야겠다. 어린 남자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야겠다.

 

그의 반민주에 대한 판단은 엄격하다.

그러나 현실의 조건이 이러저러하니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까지만 실현하자는 식으로 선을 긋는 것은 현실의 압제를 인정하자는 것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다.....

 

자유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말이 이 땅에서 자유를 억압한 적은 없지만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말은 민주주의도 자유도 억압했다(자유민주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학교폭력에 대해 쓴 부분이 있어 솔깃했다. 중고등학교 현장을 경험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학자나 대학 강단에 있는 이들이 흔히 그러듯 지나치게 포괄적인 이야기만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의 다음과 같은 글은 오히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할 때 읽어 주고 싶기까지 했다. 나 역시 학교폭력에 대한 토론수업이나 훈화를 할 때 폭력에 대한 폭넓은 사고를 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사람은 또 다른 각도에서도 누군가에게 혐오를 보인다. 어디서는 점잖고 특정인에게만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사람은 없다. 우리 아이가 집에서는 참 착한데 학교에서 친구를 때렸네요, 라는 학부모 말은 틀린 것이다.

 

학교폭력에 대한 관심을 폭력 일반에 대한 관심으로 넓혀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너무 많은 폭력 속에 살고 있고 그 폭력에 의지하여 살기까지 한다... 저 높은 크레인 위에 한 인간을 1년이 다 되도록 세워둔 것이나. 그 일에 항의하는 사람을 감옥에 가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너는 앞자리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폭력이 폭력인 것을 깨닫고, 깨닫게 하는 것이 학료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처방이다.

 

그의 문학관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책에는 베껴두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이 참 많았다. 자신이 문학의 길을 가게 했던, 어린 시절 섬마을의 풍취를 묘사한 글은 고등학교 시절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읽고 또 읽었던 감성을 떠오르게 할 정도다. 그는 시인을 자신에게 특별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 곧 시를 쓸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이 있다고 믿었기에 불행해진 사람들은 우리 시대에도 많다. 라고 설명하면서 시마 詩魔 라는 말을 썼다. 우리 학교에도 동료교사 중에 시인이 한 분 있는데 정말 시마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그토록 멋지고 아프고 아름다운 시의 세계에서 우리는 왜 헤어나오지 못하겠는가. 그를 보면서도 느끼고, 나 역시 (시를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의 시적 감수성을 토대로 공감하는 바이다.

 

그의 문학론은 이렇게 이어진다. 문학이 예술이라는 점을 새삼 느끼게 해준 황현산 님께 사랑과 존경을 전한다.

 

어떤 며느리가 아궁이에 불을 피울 때마다 시어머니를 풍자하는 노래를 불렀다. 누군가 이것을 시어머니에게 고자질하자 시어머니가 나도 그 노래 들었다. 노래로는 무슨 소린들 못하겠으며, 노래가 그렇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냐.”... 이것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다.

 

 

여름날 왕성한 힘을 자랑하는 호박순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으면 어느 틈에 자랄 것이며, 폭죽처럼 타오르는 꽃이라 한들 감시하는 시선 앞에서 무슨 흥이 나겠는가. 모든 것이 은밀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 댁 뒤란에서 보았던 뱀, 미술숙제를 다 끝내지 못하고 자던 밤 어둠 속에 떨어지던 싸락눈 소리, 어느 골목에서 맡았던 음식 냄새, 제사상을 밝히던 은밀한 촛불과 얼룩진 병풍, 쥐구멍에서 꺼낸 반쪽짜리 곶감, 나는 이런 것들을 애써 외워둔 적이 없지만 그 기억들은 내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잇다가 어떤 계기를 얻어 마치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처럼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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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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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은 읽은 지 오래 되었다. 책 한 권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거니와 한꺼번에 여서일곱 권의 책을 읽는 습관이 있고, 다 읽은 책을 정리하는 데 읽는 만큼의 시간이 들다 보니 이제야 서평을 쓴다. <윤리21>과 어슷비슷한 시기에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엄기호의 <단속사회>를 같이 읽었던 것 같다. 근대 이후의 시대를 조망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책들, 그리고 개인화로 인해 오히려 몰개인화 되어가는 근대(현대)인들의 이야기며 공동체가 붕괴되는 현상에 대한 입장들이 묘하게 겹친다. 시대별로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면 통찰력 있는 인문사회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들일 수도 있겠다.

 

칸트는 도덕성이 공동체의 규범에서 유래한다는 생각과 공리주의를 둘 다 비판했다.

만약 사람이 공동체의 규범에 따른다면 그것은 타율적이지 자유는 아니다. 정말로 자유로운 행위나 자유로운 주체가 있을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없다.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동시에 타자도 자유로운 주체로 취급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근대를 철학적으로 살피지만 한국과 비교해 읽는 재미가 있다. 식민주의에 의해, 그리고 근대화를 표방한 개발독재에 의해 강제로 무너져버린 농촌공동체에 대한 아쉬움이 21세기의 새로운 대안으로 모색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공동체를 비판하는 일본 철학자의 시각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일본은 공동체 문화가 아직도 지배적인 듯 보인다. 그것이 오히려 탈근대화를 막았을지도 모른다. 밖에서 보면 일본이 자본주의 사회임에도 자본이 인성을 극악하게 부패시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단단한 공동체적 결속이라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오히려 일본 내부의 진보적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는 걸림돌로 보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의 사회를 도쿠가와 시대에 일그러진 형태로 형성되고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해체되지 않은 마을공동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긴밀하고 친화력 있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은 없고 공동체만 있는, 그런 형태로 말이다. 식민통치와 전쟁, 분단으로 오히려 기존 공동체의 붕괴를 맛보아야 했던 우리와는 다른 경험이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말한 중세의 공동체와 비슷한 듯 보인다. 중세가 지나서야 개성이라는 게 생겼다고 본다. 물론 에리히 프롬은 그런 개인화의 갈 방향이 자본주의밖에 없었던 현실이 문제라고 지적하지만 어쨌든 타자화가 시작되면서 근대화가 시작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일본과 같은 동양도, 에리히 프롬의 서양도, 몰개성의 시대를 넘어 진정한 개성화의 시대는 맞이하지 못한 셈이 된다.

 

(근대화 이전의 일본)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적인데 자기(자아, 에고)’는 없다. 분열증적 인간(깊은 관계를 거부하는)... 자신들의 소작료만 지나치지 않으면, 자기 땅만 지킬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알 바 아니다. 다만 사회를 두려워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행동할 따름.

(현대사회) 대개의 사람들은 단지 악인이 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태어났을 뿐이고 기독교 공동체에 태어났기 때문에 기독교도가 되는 것뿐.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이지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잇는가가 아니라는 것(예 주식투자자의 경우, 개인적으로 좋은 사람일지라도 어디선가 전쟁이 나서 자기 주식이 오르면 좋아할 수 있다.). 즉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그가 무엇을 하는가와는 다른 것.

 

고진의 세계시민, 공공성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항상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반해 자신의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때로 현저하게 제한되어도 좋다. .. 통상적으로 공적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것인데도 칸트는 그것을 사적인 것이라고 하며, 역으로 거기에서 벗어나 개인으로서 생각하는 것을 공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개인을 세계시민(코스코폴리탄)이라고 불렀다.

천재적인 예술가는 이 공통감각에 반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고립되지만, 결국에 그것이 받아들여지면 이번에는 그것이 공통감각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토마스 쿤도 과학적 명제의 진리성을 만드는 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패러다임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칸트의 공통감각과 매우 비슷하다. 아렌트나 하버마스가 공공적 합의라 부르는 것은 사실 공통감각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의 합의이다. 하버마스는 코소보에 대한 공습을 공공적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이유로 지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유럽 국가끼리의 합의였다. 아렌트와 하버마스에 의거하면 공공성 = 국가인 듯.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세계시민을 말하면서 “‘좋은 사원, 좋은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사회의 도덕이다. 그러나 윤리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도덕성을 거스르는 것으로, 세계시민으로 행동하면 대부분의 경우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고 말한다. 소시민과 의식 있는 세계시민 사이의 갈등을 말하는 듯하다.

칸트는 종교적인 주장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을 형이상학이라면 논박했다. 윤리적인 한에서 종교를 인정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면 저 세상에서 구원받는 식이 아니라 자유로워지라는 지상명령에 다르기 위해서 그러한 신앙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고진의 윤리는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을, ‘도덕은 사회나 공동체의 도덕을 말하는 것이로 해석한다.

 

윤리에 대하여

예컨대 어떤 사람이 평생 사람이나 동물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면 돈이 있어서 그러한 입장에 놓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니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악을 면한 부자나 지배계급이 구원된다면 악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구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도 마찬가지. 부처나 예수도 저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타자에 대한 윤리가 중요했다.

 

이 대목은 고진이 현실에서 어떤 윤리로 살아갈 것인지를 설파했을 뿐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이제 고진과 같은 주장들은 많은 진보적 종교학자들 혹은 사회학자에 의해 반복 주장 되고 있지만 아직도 한국 기독교에서는 편협한 종교적 시각이 지배적인 것을 생각하면 그들을 붙들고 위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 우리가 더 크게 짓는 죄는 무엇인가, 도덕이 아닌 윤리의 영역에서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오십 보와 백 보의 차이

이 책에서 오십보와 백보의 차이라는 부분에서 매우 공감하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세상을 바꾸는 여러 가지 행동에서 오십보나 백보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망을 갈 때 가더라도 오십 보를 갔는지 백 보를 갔는지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예 도망을 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좋지만 현실 앞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 악인에게 조용히 부역을 한 사람과 소심하나마 무언가를 한 사람, 부정의한 세상에 맞서 하다못해 불복종이라도 한 사람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거부하지 못하는 많은 소시민 가운데, 망설이고 스스로 반성하던 사람들 속에 저항의 싹은 죽지 않고 숨어 있다. 가끔 꽤나 진보적인 사람들 가운데 그런 소심하고 나약한, 숨은 생활진보인들을 부역하고 침묵한 이들과 싸잡아 오십보나 백보나라고 비판하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해석이고 고진이 말하는 담론은 보다 크고, 전복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내가,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죄에 대해 사회구조를 탓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현상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가의 문제다.

 

우리가 실제로는 죄를 범하지 않아도 간접적으로는 범하고 있다는 사실(내가 쓰는 전기, 내가 방관하고 있는 것, 내가 누리는 커피와 여행, 내가 향유하거나 눈감는 정치...).... 예컨대 나는 소를 죽이지 않지만 비프 스테이크를 먹는다. 나는 군사적, 경제적 제국주의에는 반대하지만 그것에 의해 얻어진 생활수준은 향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면 자기가 손수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차이를 배제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논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될 논리이다... ‘자유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역시 개개인이 관계들의 산물이면서도 그것을 초월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개개인의 자본가와 경영자가 도덕적으로는 선하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자본의 담당자인 한 강제되고 마는 관계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단지 악인이 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태어났을 뿐이고, 기독교 공동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기독교도과 되는 것 뿐.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이지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괄호넣기, 배제에 대하여

나는 이 책을 한창 읽던 중에 한 동료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00샘이라는 젊은 교사는 매우 유능하고 학생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이인데 최근 들어 이런 발언을 자주 한다. “아침에 지각하는 학생이 있다. 많은 교사들이 지각하는 학생들 벌을 주거나 야단을 친다. 그러면서 약간 늦은 학생에 대해 출석부에 지각 체크를 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은 다르다. 벌을 줄 필요는 없다. 출석부에는 단호하게 체크를 해야 한다(물론 아이와 지각하게 된 사정에 대한 진심어린 상담은 꼭 필요하다).... 학생이 싸워 학부모 간 갈등이 생길 때 교사가 할 일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조사하고 학부모중재위원회를 잘 열어주어야 하는 것이지 사이에서 두 아이의 사정을 전하고 감정에 호소하고 설득하고... 하는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등등.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그이지만 과연 교사가 그러해야 하는지에 대해 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문제는 그와 같은 교사의 태도에 대해 공감하는 젊은 교사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합리적인 것일까? 학생들의 속사정에 깊이 들어가 때로는 (학생의 사정을 이해해 출석부 지각 체크를 하지 않는 따위의) 탈법도 불사(?)하는 교사와 합리적이고 정확하게 학사와 학생을 대하는 교사 중 무엇이 교사의 지향점이어야 할까. 어느 새 나도 나이든 교사가 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 21>이란 책을 정리하다가 재미난 구절을 발견했어요.

'괄호에 넣는다'는 표현.

도덕적, 지적 관심을 배제하는 것

예를 들면 의사들이 자기 가족을 수술하지 않는 것 같은 현상이랍니다.

 

더불어 이에 대해 고진은 이런 말도 하네요.

"언제나 무엇이든 사물을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만큼 비과학적인 일도 없다."

괄호를 벗겨야 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요.

 

00샘은 참 독특하게 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요.

혹시 내가 받아들이기를, 고진이 말한 '괄호에 넣는'것과 황샘이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같은 것일까요?

잘못 받아들인 것일까요?

 

독특한 문제제기인데 받아들일 수는 없고(사실은 반박하고 싶은 것이오.),

그러나 아직 생각은 진행 중이고,

00샘은 좋은 교사라고 늘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꽤 좋은 교사라 믿었던 만큼 위와 같은 생각이 무겁고 두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논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논쟁할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므로 이야기를 던져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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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 문학의 비밀을 푸는 20개의 놀라운 열쇠, 개정증보판
정여울 지음 / 메멘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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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이 책은 짐작컨대 정여울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문학을 가르칠 때 사용한 강의록을 풀어쓴 것 같다. 문학을 접근하는 키워드를 이렇게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게 즐거웠다. 한편으로는 중고등학교의 문학(국어) 수업도 이렇게 주제별로 접근하면 좋겠다는 부러움도 있다. 중고등학교는 공통교육과정으로 설정된 교육과정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텍스트를 제시해야 하다 보니 주제 선정에 교사가 개입할 여지가 적다. 텍스트에 대해서는 제7차 교육과정이 비교적 자유롭게,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하라고 권장하지만 공교육 현장에서 그럴 배포를 지닌 교사는 많지 않다고 봐야 한다. 대개는 교과서를 벗어나지 못한다.

 

정여울이 예로 든 문학작품들은 사실 매우 보편적으로 읽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요즘 대학생들(국문과 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만약 교양과목으로 문학을 듣는 학생들이라면)이 이 작품들을 다들 읽고 수업에 들어올까 싶다. 하긴 이와 같은 현상은 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작품을 온전히 읽을 시간은 없고 작품에 대한 해설만을 배우는 현실이다. 그래서 어떤 국어교사는 일부러 설명 없이 2,3시간 동안 작품만 읽히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우상의 눈물>, <마지막 거인>, <행복한 청소부>같은 작품, 혹은 일부이기는 하지만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읽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기도 한다. 1시간 동안 여러 작품의 해석을 듣는 것보다 2시간 동안 한 작품을 오롯이, 스스로 읽는 것이 더 소중할 때가 많다.

 

정여울이 제시한 키워드들은 나의 학생들과 문학 공부할 때도 염두에 둘 만하다. 금기, 슬픔, 정체성, 죽음, 사물과의 교감, 패러디, 시점, 의인화, 은유와 환유, 상징, 아이러니, 알레고리, 트릭스터, 악인, 기억상실증, 공간, 날씨, 음식, 환상, 트라우마, 통과의례, 자기 정체성, 재앙, 러브스토리 등등이 그것이다. 이 중 중학교 교육과정에서는 시점, 비유와 상징, 시공간적 배경 정도를 가르친다. 최근에는 패러디 시 혹은 소설 쓰기 수업도 가끔 등장하기도 한다. 나는 해마다 자기 정체성을 주제로 시 쓰기’, ‘내 상처 수필 쓰기를 하고 있는데 이는 문학수업으로써보다는 문학을 자기성찰의 도구로 쓴다는 의미에 방점을 찍은 수업이다. 앞으로 슬픔, 정체성, 죽음, 사물과의 교감, 트릭스터, 악인, 기억상실과 같은 소재들을 문학수업에 활용할 만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여울의 관점에서 신선하게 받아들인 점들을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A.I.> 는 피노키오의 강도 높은 패러디라고 했는데 영화를 본 입장에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때 읽어서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 <위대한 개츠비>는 주인공이 아닌 이웃 닉의 시점으로 신비롭고 난해하게 묘사했다고 하는데, 보통 교과서에서 소설의 시점을 1인칭 주인공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이렇게 네 가지로 가르칠 때 학생들이 많이 하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예시자료가 될 것 같다. 학생들은 2인칭 시점은 없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 그럴 때 나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예로 들곤 했다. 사실상 다자 시점이고 로 바꿨을 뿐이긴 하지만 어쨌든 서술자를 로 부름으로써 ‘2인칭 주인공 시점을 취하고 있는 드문 소설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일종의 관찰자 시점으로써 흔치 않은 사례가 될 것 같다.

 

다음은 정여울이 제시한 은유법 문장들인데 이것 역시 수업에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적 표현에서 은유를 찾아보면 시험에 많이 나오는 표현법으로써의 비유나 별로 즐겨 읽지 않는 시에서 나오는 비유로써의 따분함을 벗을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모둠 친구들과 다음 문장에서 은유적인 부분을 찾고 원관념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자’, 이런 활동을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배가 시야로 들어오고 있다(공간으로 비유)

그는 어떻게 그 일에서 벗어났을까?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어제 너 때문에 정말 받았어.

너에게 을 떠넘겨서 미안해.

그녀는 뚜껑이 열렸다.

그는 그릇이 큰 사람이야.

꼭대기(높은 지위) 밑바닥(삶의 저점) 반쪽(배우자)

 

교육과정에서 대유법혹은 상징으로 가르치는 환유 metonymy(속성이 비슷한 다른 낱말을 빌려서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활동도 재미있을 것 같다. 아이들이 많이 쓰는 환유를 만들어 보라고 하면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 용어같은 것들이 등장하지 않을까? 가령 경희중학교(내가 근무하는 학교 이름)는 롤(L.O.L 중학생들이 좋아하는 게임 이름)의 성지이다’, 이런 식으로?

 

그 빨강머니는 정말 정열적이야.

근사한 포드를 샀어.

지하철은 파업 중이다.

부시가 이라크를 공격했다.

광주는 역사의 대격변을 예고했다.

 

 

요즘 학교교육에서 부족한 측면 중 하나가 슬픔, 죽음, 부끄러움, 두려움에 대한 교육이다. 나는 문학수업의 목표를 설파할 때 공감능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가장 인간적인 요소 중 하나가 슬픔, 염치, 부끄러움, 두려움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사춘기 남자 중학생들이 갖고 싶은 일반적인 정신적 가치는 대담함, 강함이다. ‘슬픔, 염치, 부끄러움, 두려움들은 그들이 갖고 싶은 가치가 아니다. 성장과 경쟁, 성공과 성취를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부끄러워하는 일을 약한 일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염치나 부끄러움, 슬픔이나 연민같은 것들이 얼마나 인간적인 가치인지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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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동 행복한 상담실
선안남 지음 / 한빛비즈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에는 다양한 상담 사례가 나오지만 나는 특히 저자가 부모상처에 주목하며 상담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금의 상처는 대개 뿌리 깊은 근원을 가진 경우가 많고 대개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 부분을 헤아려야 진정한 상담이 이루어질 터이다. 나는 이 책을 올 가을 우리 학교 학부모 상담연수 자료로 활용하였다. <아들심리학 교실>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는 학부모 대상 연수의 첫 번째 주제는 나의 양육태도 돌아보기였는데, 책 속에서 저자가 분류해 놓은 부모 유형을 적절히 활용하여 학부모 활동지를 만들어 보았다

 

 

활동2-나는 어떤 부모인가 <명륜동 행복한 상담실> 참조

나는 어떤 부모인가

나의

양육유형()

나의 변명

내 배우자의

양육유형()

그의 변명

내 부모의 양육유형()

내 부모의 변명

1. 나르시스트

 

 

 

 

 

 

2. 학대자 형

 

 

 

 

 

 

3. 부부 갈등형

 

 

 

 

 

 

4. 경직된 부모

 

 

 

 

 

 

5. 방치자

 

 

 

 

 

 

6. 감정형

 

 

 

 

 

 

7. 무일관성

 

 

 

 

 

 

8. 하인형

 

 

 

 

 

 

9. 매니저형

 

 

 

 

 

 

10. 친구형

 

 

 

 

 

 

 

자신의 것뿐 아니라 배우자(남편)의 양육유형, 그리고 자기 부모의 양육유형도 함께 체크해 본다. 만약 자녀가 여럿이면 아이들마다 따로 해보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자녀마다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다를 수도 있는데 그 원인이나 부작용을 살펴볼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아래 유형 점검은 이 책을 많이 참조하였고 강의 중에도 저자인 선안남 씨의 상담사례도 같이 인용하였다.

 

1. 나르시스트 부모 어떤 부모는 자기애가 너무 강한 나머지 자녀를 자신을 확장하는 도구로 봅니다. 자기중심적인 방식으로 삶을 살기에 주변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희생당하거나 착취당하기 쉽지요. 이런 부모를 나르시스트 부모라고 칭하겠습니다. ... 나르시스트 부모의 중요한 특성은 무시착취입니다. 자신을 앞세우느라 자신이 너무 소중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을 존중해주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면 우리는 주눅이 들기도 하고 자주 마음이 상합니다. 더군다나 부모의 나르시스트 성향이 지나친 경우 자녀들은 부모를 빛나게 해주고 기쁘게 해줄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지요... 이런 부모는 다 너를 위해서라는 착각 속에서 자녀를 존중해주지 않고 상처를 입히는 일이 많습니다.”

 

 

아들러도 이 나르시스트형 부모에 대해 <아들러 심리학>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유명인의 자녀가 때로 부모나 사회에 대해 낙담하는 사람이 되는 이유는 부모를 추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신의 성공을 가정에서 자랑삼아 보이면 아이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특별하게 잘 자란 아이가 주목받으면 다른 아이들에게는 적대감을 심어줄 수 있다. 열등감을 느끼는 아이들은 우월해지고자 하는 노력(학업이나 이런 긍정적인 의미가 아님. 아들러는 일탈행동을 하거나 울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하는 모든 행동이 자신 상대방보다 우월해지려고 하는 행동이라고 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노력이 현실적이지 못하고 사회에 유익하지 않은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부부갈등이 많은 부모 에 대해서도 <명륜동...>에서는 어떤 젊은 아기 엄마의 사례를 보여준다. 아기가 이유 없이 새벽마다 울자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다.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상담을 받아보았는데 사실은 어렸을 때 부모가 서로를 비난하면서 자식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는데 자라면서 느꼈던 불안이 깊은 곳에 치유 받지 못한 채 자리 잡았던 것. 그게 좋은 배우자 만나서 잊혀진 줄 알았는데 새로 태어난 아이를 키우면서 터져 나온 거란다. ‘나는 불행하게 컸는데 넌 좋은 부모 만나서 행복하잖아, 그런데 왜 우냐’, 이러면서. 아이들 보는 데서나 듣는 데서 배우자를 흉보고 아이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면 안 된다. 아이가 내성적이면 우유부단한 성격이 되고 착한아이 콤플렉스를 느낄 것이고, 외향적인 아이라면 자기 잘못을 부모 탓으로 돌릴 것이다.

 

4. 경직된 부모

지나치게 원칙적이고 보수적인 부모가 여기 해당된다.

<아들러 심리학> 에도 재판관, 경관, 간수의 가정에서 범죄자가 나온다고 한다. 교사의 자녀들이 반항적인 경우도 많다는 것, 비행청소년 중 목사의 자녀들이 많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지나치게 경직된 원칙은 아이들로 하여금 불안과 적개심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야뇨증의 원인이 지나치게 엄격한 배뇨 훈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있으며 병적인 결벽증 역시 부모가 배변훈련을 혹독하게 해서 그럴 수 있다 한다. 아들러는 야뇨증은 나는 엄마가 생각한 만큼 성장하지 않았다, 보살핌을 더 받고 싶다는 표현이다.’라고 말한다.

 

5. 방치하는 부모

부모님은 항상 그랬어요. 나가서 맞고 오든, 선생님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든, 저를 보호해주고 제 편이 되어주지 않았지요. 진짜 아빠 맞나 싶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부모의 특성이나 힘든 사정 때문 등으로 자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 부모가 있다. 실제로 학교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이런 부모들을 많이 만난다. <명륜동>의 저자는 물론 아무리 열심히 보호하고 보살펴도 부모의 울타리에는 허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울타리를 되도록 튼튼하게 해주려고 했던 부모의 마음이 자녀에게 전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해지지 않은 마음은 위안이 되지 못합니다.” 라고 말한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떠올렸다.

 

이 소설을 읽고 나는 '엄마'에 대해 생각했다. 윤정은 강간을 당했기 때문에 상처받은 게 아니라 엄마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위무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 윤수 또한 그러했다. 네 살 아이를 때려죽인 열 살 난 여자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온 그 엄마의 태연함은 아이의 영혼을 유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엄마라는 존재는 참 힘들고 무겁다. 소설적 설정으로 필요했기에 그토록 그악하게 그려졌지만 윤정의 엄마는 딸을 사랑하지 않은 거였을까, 과연? 집안의 체면과 허영 때문에 딸의 상처를 덮어버릴 수 있는 엄마로 그려졌지만 꼭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많은 엄마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거나 상처를 준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아이들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 학교에 오는 엄마들에게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이기적이기도 하고 무지하기도 하고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특수한 경우 잘못된 운명 속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보다 자기자신 하나 건사할 수 없는 삶의 질곡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없다. 아니 거의 없다. 다만, 잘못된 사랑이 너무 많아서, 아이들은 잘못된다. (풀꽃 서평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학부모 연수 <아들심리학 교실>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한 번 돌아봅시다, 나의 부모에 대하여... 연민과 애정을 다 빼고, 객관적으로 내 부모가 이런 부모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바람은 없었는지요? 이런 부모를 만났더라면 내가 달리 성장하고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원망은 없었는지요? 어쩌면 지금 나의 아이들도 내게 그런 바람과 원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늙어가고 내 자녀가 자라 성인이 되어 가면 상하관계가 아니라 서로 인간적으로 다가가는 지점이 옵니다. 부모자식 간으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자식이 훌륭함을 인정하고 좋아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부모 자식 간이 될 수 있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아들이 아니더라도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는가요? 당신의 아들은 당신을 엄마가 아니어도 참 좋은 사람, 열심히 사는 사람, 멋진 사람이라고 불러줄 것 같은가요? 자녀는 나를 보고, 친근감을 느끼면서도 사는 모습을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는, 닮고 싶은 사람으로 평가할 것인가요?’ 그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그래도 나는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다. 내가 저희들을 위해서 밥하고 빨래하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라고 항변한다고 해서 자식들은 부모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아이들만 성장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준비가 다 되어서 부모가 된 사람은 없겠지만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그 실수와 오류들을 극복하고 부모로서 우리도 성장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노력과 스스로를 성장시키려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성찰하고 노력하고 성장하는 부모가 되기 위한 노력의 첫 단계를 뗄 때 도움을 준 이 책의 저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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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7
오스카 와일드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 전부터 보고 싶었던 소설인데 다 읽고 나니 뮤지컬을 한다고 한다. 매혹적인 소재이고 글인 만큼뮤지컬도 보고 싶어진다. 도대체 누가 그 아름(답다는)다운 도리언을 연기할까. 나는 김준수/박은태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그는 과연 도리언의 악마적 아름다움을 잘 표현할까 궁금하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서문에는 그의 예술관이 잘 나타나 있다. 유미주의라니. 아름다움만을 위한 아름다움이라니. 만약 정말 그렇기만 하다면 나같은 이는 이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지아름답기만 하지는 않다. 내 딸의 표현을 빌자면 장황하기 그지없는 18세기 영국 상류층의 유미적 취향에 대한 묘사나 그들의 유희들이 불편하거나 역겨울 수도 있다. 이 소설을 근거로 유추해보자면 유럽의 예술은 귀족이나 상류층들이 하도 할 일이 없어서 추구하고 추구하며 발달해온 것처럼 보인다. 물론 다행히도 역사 속에서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족적을 남긴 이들은 대개가 가난했기에 그런 오해를 하지 않을 수 있지만 말이다(그 가난한 예술가들이 유럽 상류층들의 물적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는 측면은 물론 간과하지 말아야 하지만).

 

도리언 그레이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남아도는 시간과 돈을 유미적 탐닉에 쏟는다. 그가 한때 유럽에 내로라하는 자수 작품에 관심을 가졌다는 대목에서 나는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이건 작가가 상류층 한량들의 예술적이랍시고 두는관심사에 대한 비판인 건지, 아니면 본인이 표방했던 대로 정말 당시 귀족들은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본래 유미주의란 게 의미가 없어도 아름답기만 하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믿을 만한 것 아닌가? 아마도 오스카 와일드는 그런 가치관에 스스로 발목을 잡힌 부분이 있을 것이다. 진정 아름다움만을 추구한 삶이 건강하지 않았음을 자기 삶으로 입증했으며, 바로 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그런 삶의 한계를 스스로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도리언의 멘토인 헨리 경의 말 자기 인생의 구경꾼이 되는 것이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지요.” 대로 도덕과 윤리가 우리를 옭죄어서도 안 되겠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이 결코 아름다울 수만은 없음도 보여주지 않았는가?

 

오스카 와일드가 했던 말, “바질 홀워드는 제가 생각하는 저의 모습이고 헨리 경은 세상이 바라보는 저의 모습이며 도리언은 제가 되고 싶어하는 저의 모습입니다.” 은 이 책을 쓰기 전에 한 말일까, 나중에 한 말일까? 무슨 불길한 예언처럼 도리언만큼 비참하게는 아니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삶도 망가지며 끝났다. 어떤 잉에게는 그 비극적 결말조차 일종의 아름다움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오스카 와일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질질 끌려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름답고 슬픈 길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간 것일까?

삶의 보수성을 지닌 나같은 사람은 그나마 이 책의 가치를 세상에 덮어버릴 수 있는 악은 없다라는 교훈을 주는 것으로, 모든 부와 명예와 인기와 자족을 누리던 인간류에게 당신 영혼의 뒷면을 보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책을 덮는다. 안타까운 것은 현실의 도리언들은 결코 그런 서늘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고 평생 부와 명예를 누리다가 죽거나,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여도 끝까지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발뺌을 한다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들에게도 비밀의 방에 그들 영혼을 반영하는 초상이 하나씩 있었으면 좋겠다. ‘천진악의 대명사인 박모 씨를 포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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