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비처네 (양장) - 목성균 수필전집
목성균 지음 / 연암서가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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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목성균의 글을 그저 수필문학의 정수’, ‘문체의 미학으로 학습하기 위한 용도로 집어들었던 나는 읽으면서 서서히 알지 못할 향수에 젖게 되었다. 그가 묘사하는 고향의 풍광 등이 너무나 낯이 익다. 목성균은 38년생으로 나의 아버지뻘 세대이니 나와 정서가 같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시대적으로 공유하는 장면들이야 많이 있겠지만. 알고 보니 그의 고향 연풍은 내 아버지의 고향 괴산에 인접해 있고 나의 아버지와 사촌 언니, 오빠들이 공부하던 고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버지도 저런 풍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나는 장독에 지그시 기대앉아서 그 풍경을 바라보며 젊은 날의 고뇌와 사념들을 삭여냈다. 그때마다 장독은 내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섭섭하게 여길 거 없어, 마음이 클 때는 다 그런 거야.”(옹기와 사기 중)

 

연풍 갈매실 냇물 갈매실은 냇물이 휘돌아 나가면서 만들어 놓은 넓은 자갈밭이다. 자갈밭은 여름 장마에 벌창하는 냇물로 깨끗하게 씻겨져 있었다. 이곳에 앉으면 옹배기 같은 연풍 분지를 만들어 놓은 산맥이 한 눈에 바라보인다. 냇가 자갈밭에는 패랭이꽃이 지천으로 피었고, 그 위로 메밀잠자리가 한가롭게 군무를 추듯이 유유히 날았다.

...... 나는 냇물에 목욕을 하고 나와서 산그늘이 내리는, 달아서 따끈따끈한 자갈에 벌렁 드러누워 그 저녁그늘이 그리는 산읍의 소묘에 공연히 맘이 격앙되었다(산읍소묘 중).

 

나 역시 아주 어린 시절이긴 하지만 괴산과 연풍에 가본 적이 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내와 산이 눈앞에 그려지듯 느껴졌나 보다.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42년생이니 어쩌면 이 두 분은 서로 안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올라오시기 전에 혹시 학교 다닐 때 선후배로 만난 적은 없는지 물어볼 텐데..... 서로 면식이 없는 사이라 하더라도 글 속에 등장하는 내며 산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는 시골에 다녀오시면 가끔 다래와 으름 같은 걸 싸오기도 하셨다. 맛있기로는 고욤이 참 맛있다 했는데 끝끝내 고욤은 구경한 적이 없다. 목성균은 바래너미의 고욤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어쩌면 이렇게도 아버지가 말씀하신 고욤나무의 추억과 흡사한지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이 책을 읽어보시라 하면 아마 추억에 잠겨 밤새 책을 읽으실 것이고, 다 읽은 후에는 나에게 자랑을 하실 것이며 막걸리를 앞에 놓고 길게 독후감을 주거니 받거니 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래도 착 가라앉은 하늘이 반가운 일을 낼 것 같아서 온종이 서성거렸다. 동구의 둥구나무에 까치가 한 쌍 앉아 있다. 짖을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지 않다. 그 미물도 조용히 기다리기로 맘을 먹고 있는 것이다. 동네 워리들이 빈들에서 레이스를 펼친다. 그러다 가끔 모두 먼 산을 보고 멈춰 선다. 건너말 둔덕에 하얗게 서 있는 사람들 뭘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편히 쉬어 자세로 멍청하게 서 있다. 그때 눈이 왔다. 사람들의 기대감을 저버리는 법 없이 아주 양순하게 혹은 운명적인 모습으로 오는 눈이 첫눈이다(첫눈 중).

연세가 들어도 티브이에서 눈 오는 풍경을 보면 고향에 가고 싶어 하셨던 낭만적인 문인 기질, 그것이 나의 아버지였다. 나는 어린 시절 못생긴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놀리는 엄마에게 섭섭했었는데, 아버지 돌아가실 무렵 생각해 보니 삼남매 중 누구보다도 기질적으로 아버지를 많이 닮았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우리 남매들이 가진,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기고 감성적인 부분은 정도 차이가 다 있지만 어쨌거나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들이다.

이렇게 이 수필의 문학적 무게에다 아버지의 무게까지 얹어져서 일으면 읽을수록 더욱 좋았다. 오랜만에 아버지가 그립다.

 

아내와 아기가 눈발 속으로 사라지는 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기가 훗날 기억할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답지 못한 도벌꾼의 비열에 나는 비애를 느꼈다. “아빠 까까 사가지고 올게.” 아기에게 그렇게 말하고 의연하게 연행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때 권주사가 울고 있는 도벌꾼 아내와 어린것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아가야, 아빠 까까 사러 갔다.”

..... 인간적 배려의 한마디였다(어떤 직무유기 중).

 

6.25 직후 할머니와 밭에서 무를 뽑고 있는데 인민군 패잔병이 나타났다. 두서너 살 위의 소년병이 조선무를 베어물자 할머니는 이리 와서 앉아 먹어요.” 하고 부르고 인민군은 할머니를 따라 밭둑으로 나와 할머니 곁에 나란히 앉았다. 무 한 개를 다 먹은 인민군은 밭둑에서 일어섰다. 할머니가 얼른 머리에 쓰고 계시던 무명 수건을 벗어서 해줄 게 아무것도 없네-.” 하시며 인민군 볼에 싸매 주셨다. 사시장철 밖에서는 쓰고 사시는 할머니의 살갗 같은 당목수건이었다. 소년병은 땀에 절어 퀴퀴한 냄새가 나는 할머니의 당목수건을 해주는 대로 가만히 받아들였다. 이미 뼛골까지 파고드는 산속의 추위를 겪은 때문일까, 당목수건에 밴 냄새가 고향의 부모님 냄새처럼 그리워서일까(소년병 중) .

 

목성균 수필에는 이야깃거리들이 많다. 산림공무원 시절 젊은 아기 아빠인 도벌꾼을 잡으러 간 이야기며 강원도에서 아내가 목도리를 떠서 덕장에서 일하는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이야기, 어린 시절 할머니와 산에서 만난 소년병 이야기는 애틋하고 감동적이다.

꼭 스토리가 아니더라도 그가 묘사하는 풍경이며 심리는 절묘하고 세밀하다. 어린 자녀를 둔 젊은 가장이었던 시절, 눈 속에 과자 사러 가는 어린 오누이를 바라보는 애틋한 젊은 부정이 내 마음에도 느껴지는 다음과 같은 풍경,

 

백설이 애애한 긴 겨울의 권태를 꾹 참게 하던 내 아이들이 만든 동화 한 폭. 눈이 쌓이지 않은 처마 밑으로 여섯 살짜리 계집애가 네 살짜리 사내애 손을 꼭 잡고 게처럼 모퉁이 걸음으로 가겟방에 과자를 사러 가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저것들을 잘 길러낼 수 있을까? 적설량이 젊은 가장의 기를 죽였으나 부성애가 바람꽃처럼 적설량을 떠들시고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목도리 중).

 

혹은 함께 달빛을 바라보는 개 이야기,

 

달은 혼자 보는 것이 좋지만 집에서 오래 기른 개하고 같이 보면 더 좋다. 침묵하고 같이 있어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젊어서 윗버들미에 살 때 가을 달밤이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우리 논머리 방천둑에 서 있었다. 그 때 내 발치에 우리 개 검둥이가 따라 나와서 너부죽이 엎드려 있었다. 개도 사람만큼 달을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꽤 긴 시간 동안 우리는 그렇게 있었다. 개는 앞발을 쭉 뻗고 발 위에서 턱을 얹어 놓고 있었다. 자세가 하도 편해서 자나 하고 개 얼굴을 들여다보면 개는 달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맑은 달빛이 눈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개에게 깊은 도반의 정 같은 것을 느끼고 개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개는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꼬리로 땅바닥만 두어 번 쓰는 것으로 내 관심에 응답을 했다(아파트의 불빛 중).

 

필시 마음이 따뜻하고 감성적이었을, 내 아버지 같은 감수성의 충청도 문인기질의 그 양반, 목성균이 아버지처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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