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나에게 건네는 말 - 내가 왜 힘든지 모를 때 마음이 비춰주는 거울
고혜경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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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진정한 성장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 칼 융

안으로 뛰어들지 않고 세상을 향하는 길은 없다. - 칼 융

 

융의 말은 모두 네 안의 무의식과 그림자를 주의해서 살피라는 뚯인 것 같다. 오늘 날에는 개인을 중시하는 근대화를 거쳐 개인의 열등한 부분과 욕망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 시발점이 융이었다. 물론 융 이전에 우리에게는 질척거리는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고 선언한 프로이트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실체에 좀 더 섬세하게 다가가고 인간답게, 의미 있게 무의식의 존재적 가치를 논한 융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은 융의 이론 중에서도 꿈의 의미에 대해 고혜경이 특별히 정리한 책이다.

 

나는 나의 직업적 필요에 의해서도 심리학책을 열심히 읽고 있지만(학교에서 상담 업무를 맡고 있다), 사실은 나 자신 많은 꿈을 꾸고, 즐기고 의미를 부여하고 때로는 영감을 얻기 때문에 내 꿈이 궁금해서라도 꿈에 관한 책을 많이 읽는다. 당연히 꿈 분석에 공을 들인 융 이론과 관련된 책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다.

 

고혜경은 혼자서 꿈을 다루고 싶다면 예술 작업을 추천한다. 꿈을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꿈 내용을 기반으로 시를 쓰거나 춤으로 표현하는 등’. 나는 드문드문 일기장에 기록하던 꿈을 이 책을 읽은 이후부터는 아예 한 파일로 따로 저장하며 기록하고 있다. 다양하게 해석하기도 한다.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융 식의 해석을 찾아보기도 하고, 심지어 인터넷에 떠도는 동양식 해석(불이 나면 돈이 들어온다든지, 죽은 사람을 보면 좋다, 이런 해석을 보면 해석은 얕은 것 같아도 어딘가 분석심리학적 요소가 있다. 꿈은 반대라고 하는 것은 꿈이 주는 불길한 메시지가 사실은 당신 안에 풀어야 하는 불안, 욕망, 억눌림 등을 헤아리라는 의미와 상통하기도 한다.)도 찾아보면서 비교한다. 같은 꿈을 동양식, 프로이트 식, 융 식으로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책에서 나는 내 꿈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들을 찾아보았다. 가령, 나쁜 남자에게 쫓기는 꿈을 자주 꾸는데 그것에 대해 고혜경은 내 안의 억눌린 불안이 그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불안에 예민한 나의 성정은 그 자체로 날 불안하게 한다. 그렇게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나를 열심히 살게 하고 실수하지 않게 하고 글을 쓰게 만든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제는 정체를 밝히라고 말하고 싶기는 하다. 그러고 보니 책을 쓰면서 이런 꿈을 덜 꾸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세우고 싶은 나의 존재감은 아마도 글 쓰는 일로 충족이 되는가 보다. 내 안의 거친, 상처받은 아니무스는 내가 낸 책 몇 권으로 양지 바른 곳에 얌전하게 드러나고 내 꿈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내가 많이 꾸는 꿈 중에는 꿈도 있다. 꿈속의 집은 나의 정신세계를 뚯한단다. 과거에는 위태로운 집, 잠기지 않는 문, 그 집에 누군가 침입하는 꿈을 꾸다가 점점 꿈속의 집이 넓어지더니 급기야 집안에 너무 많은 문이 있어 밤이 되면 잠그러 다니느라 애를 쓰는 꿈을 꾸곤 했다. 여전히 잠기지 않는 고장 난 문들이 많았고 집은 지나치게 넓은데 너무 많은 물건이 쌓여 있는 꿈, 때로는 물이 새거나 창틈으로 물이 스며드는 꿈을 꾸기도 했다. 마치 침대 머리맡에 10여 권의 책을 쌓아놓고 읽는 나의 현실생활의 습관과도 닮았다. 이 일 저 일을 벌여놓고 시간 날 때마다 조금 씩 조금 씩 수행하는 내 일처리 방식과도 닮았다. 결코 심심한 적은 없지만 영어공부 하다가 스페인어 공부 하다가 수를 놓다가 해금 연습을 하다가, 취미도 이것저것 내키는 대로 하는 내 놀이방식과도 닮았다. 가끔 나는 무언가를 이루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가 뭘까 궁금할 때가 있다. 영어공부를 한다면 하루 열 시간씩 6개월을 영어에 미쳐 살았다는 사람처럼 해야 효과가 있을 터이지만 나는 내키는 대로 하루 10, 20, 이런 식으로 공부한다. 물론 그렇게 곰실곰실 쌓아나가는 성과들이 의미가 없거나 재미가 없는 건 아니다. 꿈은 아마도 나에게 좀 더 굵직하게, 좀 더 큼직하게 삶을 경영해야 한다고 경고하는 게 아닐까? 아니, 꿈은 경고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내가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나의 전전긍긍을 그렇게 어수선한 집으로 보여주는 거라고 해석하는 게 맞겠지.

 

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내 모습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한다. 전의식을 반영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현실과 다르게 보이는 현실인물들도 나의 욕구나 불안을 반영할 것이고 속에 만난 죽거나 죽이는 인물 역시 내가 현실에서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한 메시지일 것이다. 꿈속에서 보이는 위협적인 인물, 미운 인물들의 모습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의 위협요소이거나 스스로 싫어하는 모습이다. 그런 인물들을 만나면 물어보라고 한다. 왜 내 꿈에 나타났는지. 이름을 불러주고 말을 걸면 모호함은 정체를 드러내고 부풀려진 에너지는 수그러든다. 이와 같은 과정은 고혜경이 광주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꿈분석 작업을 할 때도 한 말이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씻김굿처럼 죽은이를 불러 못다 한 말을 하게 하는 의례까 죽은 자뿐 아니라 산 자를 치유하는 좋은 행사인 것처럼 꿈속 인물 즉 나의 무의식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결국 현실의 나를 위한 의식이기도 한 것이다. 꿈은 대개 모호하게 끝난다. 누군가를 찔렀지만 그가 죽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고 어디선가 떨어졌지만 박살이 나기 전에 꿈에서 깬다. 그런데 저자는 소리를 지르거나 문을 열어보라고 한다. 꿈의 결론을 위해 용감하게 나아가는 것은 무의식을 만나는 일, 너의 정체는 무엇인지 확인하는 일, 오래 묵은 불안 혹은 욕망을 들추거나 청소하고 해결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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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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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어디선가 들은 아름다운 구전가요가 있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이제는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 모두 눈을 감고 생각하자

 

(중략)

산속에 사는 사람 감자 캐먹고

물가에 사는 사람 물고기 먹고

뒤뜰의 풀잎은 이슬 먹는데

별나라 사람들은 무얼 먹을까

 

쌍안경으로 별자리가 보이냐?

작사가도 작곡가도 알 수 없는 이 노래, 윤동주의 <눈 감고 간다>와 앞부분이 비슷한 이 노래가 나의 시심(詩心)과 우주적 상상력을 동시에 자극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나 역시 태양을 사모하고 별을 노래하는 아이였던 까닭이다. 6학년 교과서 거의 끝부분에 실렸던 지구과학은 신비롭고 흥미로웠다. 학습을 해야 할 내용 - 태양계 별들의 순서나 거리 따위 도 재미있었지만 덧붙여진 별자리 이야기에 매혹되었다. 진심으로 별나라가 궁금했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가 과학연구학교였던지라 6학년 여름방학 내내 과학연수를 받는 교사들과 함께 과학교과서 전 과정의 실험을 다 해 보며 서울 어린이 과학경진대회 준비에 매진했다. 그때는 나름 과학 소녀였다. 그리고 그해 가을 무렵 지구과학을 배울 때에는 엄마에게 천체망원경을 사달라고 졸랐다. 어디선가 당시 신세계 백화점 맨 위층에서 학습용 천체망원경을 판다는 정보를 입수해 엄마를 설득했던 것 같다.

엄마가 어렵사리 사온 것은 그러나, 천체망원경이 아니라 고감도의 쌍안경이었다. 엄마는 그것도 무척 비싼 것이고 백화점에 천체망원경을 팔지 않아서 대신 사온 것이라고 하셨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옥상에 올라가 밤하늘을 보았는데 당연히 별이 보일 리 없다. 고개를 뒤로 꺾고 하늘을 휘젓던 내게 보인 건 달님. 그런데 놀랍게도 달의 분화구가 다 보이는 게 아닌가!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달의 앞모습만 보는 게 지쳐서 그만 둘 때까지, 꽤 오랜 가을과 겨울의 시간 별자리 대신 달을 바라보면서 사춘기 초입을 지났다. 그때 엄마가 진짜 천체망원경을 사다 주셨으면 혹시 이과로 진학하고 천문학을 전공했으려나.

 

상상력이 풍부해야 과학을 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다 보면 과학은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정연함으로 끝을 맺을 것이지만 저자처럼 그 중간을 감성과 상상력으로 채우는 이들이 있겠다 싶다. 아니, 과학자야말로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입증하는 그 과정은 상상력이 아니면 가지 못할 미지의 길이지 않은가.

가끔 자신의 우울의 끝을 우주로 날리는 학생들이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학생들 중에는 생각을 확장하고 확장하다 하늘과 별에 대한 궁금함으로 펼치는 이들도 있다. 상담실에서 만난 학생 중에 그렇게 우주에 대한 관심을 넌지시 드러낸 아이가 있다. 그에게 <코스모스>를 선물했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어른이 보기에도 너무 두껍다(보급판도 자그마치 719). 아무리 아름다운 문체에,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한 책이라 해도 과학의 기초 상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지루할 것이다. 나 역시 어떤 대목은 중학교까지 열심히 공부한 과학상식에 기대어 갑자기 튀어나오는 유클리드나 피타고라스를 겨우겨우 감당하며 읽어야 했으니, 공부가 싫고 학교가 괴로운 그 학생에게 과학책을 건넨 게 과연 잘한 일일까? 하지만 나는 아무 데나 펼쳤을 때 여기저기 보이는 행성들의 사진이나 상상화라도 들여다보라고 이 책을 안겨주었다. 혹시 또 아는가, 우울이 극심할 때, 그러나 우주로 날아갈 수 없을 때 상상으로 별나라를 여행하듯이 이 책의 아무 대목을 읽으며 그 소년도 우주여행을 할 수 있을지.

 

우울 따위 우주로 날려 버려!

케플러가 자기 어머니를 마녀사냥에서 구해내기 위해 책을 썼다는 이야기나 칼 세이건이 집필할 때 사슴이 집 앞 마당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어깨 너머로 그 원고를 들여다본(?) 이야기, 원시인들이 별자리를 보며 지구세상을 상상하는 이야기이며 인위도태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일본 바다에서 잡히는 사무라이의 얼굴 모양의 게 이야기 들은 그냥 그 이야기만으로도 흥미롭다. 과학은 논리가 아니라 꿈꾸기에서 비롯된 희망임을, 그래서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마치 문학도가 품고 사는 윤동주 시집처럼, 누군가의 손때 묻은 기타처럼, 어린 날을 위로해주던 그림책이나 애착인형처럼 그냥 품고만 있어도 따뜻하고 신비로운 그런 책이 될 수 있다. 누군가 이 곳이 아닌 먼 곳으로 가고 싶어 우울하다는 사람을 만나면 당장 이 책을 사서 베개로 삼으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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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마르크 로제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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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왜 파스칼 키냐르가 떠올랐을까. 프랑스 문학 특유의 섬세한 묘사가 돋보여서 그랬거나 아주 가까이에 존재하는 자연 호수, , 나무, 바람 따위-을 느끼게 하는 문장 때문에 그랬을까. 문학 혹은 음악적 감수성 때문이려나

 

요즘 나는 책에 대한 책에 많이 끌린다. 어떤 책은 지적 고양을 위해 섭취하지만 또 어떤 책은 영양가를 떠나 위안을 위해 읽기도 한다. 그림책, 그림에 대한 책, 문체가 아름다운 책, 오직 문체만으로 읽는 책, 여행에 대한 책,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냥 즐거운 책, 서점에 대한 책, 책에 대한 책... 그런 것들은 그냥 나를 위한 책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가 그런 책일 거라 생각해서 읽은 건 아니었다.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책인지 살피려 했던 거였다. ‘책방 할아버지라는 표현 때문에 이 책이 좀 만만하고 따뜻하게 여겨진 것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는 이, 감성적인 친구, 미학적인 만남을 위한 그 누군가에게 선물할 만한 책이다. 오히려 중학생들에게는 좀 어려울 것 같다.

 

그레구아르는 배움이 짧은 요양원 직원이지만 삶의 고비를 넘기려 하는 할아버지 파키에 씨를 만나면서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갖고 있던 지적이고 감성적인 자산을 그레구아르에게 물려주고 싶었나 보다. 그러나 한 사람을 한 사람의 인생을 책 앞으로 이끄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나도 국어를 가르치고 책으로 아이들을 만나지만 정말 책읽기를 싫어하는 아이, 기초적인 독해력을 갖지 않은 아이를 독서의 바다로 이끄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잘 안다. 심지어 나의 아들, 딸조차도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는 게 쉽지 않았는 걸. 내가 아는 모든 노하우를 동원하였건만.

그러나 파키에 씨는 그레구아르 안의 맑은 영혼을 알아본 건지, 아니면 삶의 끝자락에서 절박하게 만난 이가 그 아이여서 그런 건지, 그레구아르에게 자신의 모든 영적 에너지를 쏟아 붓듯 한다. 자기에게 책을 읽어 달라 하고, 다른 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라 하고, 삶을 마감하는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책으로 배웅하라 한다. 심지어는 끝끝내 병든 자신의 몸으로 다시는 찾아갈 수 없는 수도원, 거기에 있는 와상(누워서 책 읽는 알리에노르 조각상)을 자기 대신 찾아가 책을 읽어주고 오라는 미션까지 준다. 파키에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해주는 과정에서 그레구아르는 학교 교육에서 결코 맛볼 수 없었던 책읽기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알아간다. 그야말로 산 교육이다. 그 과정은 참으로 가열하고 아름답다. 나는 문체도 좋았고 그렇게 나이 많은 이가 젊은이에게 정신적 유산을 물려주는 과정을 보는 일이 참 좋았다. 가르치는 자로서 나의 자세를 돌아보았다. 많은 책을 건네고 읽히고 선물하며 독서교육을 해왔다고 자부하는 내가 과연 충분히 열정적이었던가 반성도 했다. 농담처럼 말하는 영혼을 갈아 넣고 삶을 녹여내는 가르침이란 이런 것일 터이다.

 

마음이 아픈 아이에게 이 책에서 그레구아르가 여행 중에 했던 것처럼 나무에게 책 읽어주기과제를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도 방과 후에 몽골에서 온 아이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집에서 어머니께 동화책을 소리 내 읽어드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냥 너 자신을 위해 책을 읽으라는 말보다 누군가를 위해 네가 책 읽어주는 이가 되라는 과제는 세 영혼을 구제할지도 모른다. 책 읽어주는 이, 듣는 이, 그리고 그 미션을 준 이.

 

이 책에서 얻은 시 한편을 우리 학교 선생님들을 위해 교사상담연수 ; 청소년 소설 읽고 우리 학생들 이해하기프로젝트를 하면서 인용했다.

 

 

우리가 쓴 모든 것의 최초의 선구자인 신은

사람들이 취해 있는 이 땅 위에서

정신의 날개를 이 책 속에 넣어놓았다

책을 펼치는 사람은 누구나 거기서 날개를 찾아

영혼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저 높은 곳을 날 수 있다.

학교는 예배당과 같은 성소이다.

아이가 알파벳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하나씩 따라 읽을 때

문자 하나하나마다 미덕이 들어 있으니

그 심장은 이 겸허한 미광 속에서 은은히 빛난다.

그러므로 아이에게 책을 주어라.

손에 램프를 들고 걸어라,

그 아이가 따라올 수 있도록. -빅토르 위고

 

 

모두가 학교를 욕하지만 높은 정신을 지녔던 어떤 이는 학교에서 종알종알 책 읽는 아이들의 가치를 귀하게 평가했다는 생각을 해보면 학교를 지키고 있는 내가 조금은 자랑스럽다. 아이들에게 책 읽히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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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마르얀 사트라피 지음, 박언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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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는 이란 남서부에 있는 도시란다. 지은이 마르잔 사트라피는 이란 출신의 예술인이다. 여성이다. 이란에 대해 아는 바 없고 사실은 관심도 없다. 다만 학생들에게 읽힐 만한 책들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과정에서 이 책을 접했는데 나야 별로 관심 없는 분야라 할지라도 남자 중학생인 우리 학교 학생들이 읽으면 좋을 책일 것 같았다. 하지만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도 세상에 대한 눈을 넓히는 독서를 하게 되었음을 인정한다. 눈을 닫고 모른 척 했던 절반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란의 역사는 워낙 복잡해서 이 책을 읽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만큼이나 복잡하고 어리석은 역사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것 같다. 비슷한 연배(지은이는 69년생이다)에 조국이 역사의 격동을 겪어야 했던 청춘에 대한 공감으로도 이 책은 의미가 있었다. 지은이는 고문과 살인이 일상이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진보적인 부모 밑에서 남다른 감각과 지성을 지닌 소녀로 살았던 일에도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일반인이 겪기도 힘든 역사이지만 특히나 자유롭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춘기 소녀에게 남녀차별과 억압, 정치적 질곡의 사회를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 역시 사춘기와 청춘 시절까지를 군부독재 치하에서 보내야 했다. 중학교 때 소문으로 듣던 광주와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겪어야 했던 전두환의 역사, 대학생 시절의 6월 항쟁, 청춘 내내 맴돌던 최루탄 냄새와 불심검문, 잡혀가던 친구들, 남영동에 끌려갔다 온 남자친구... 물론 우리는 마르잔처럼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니다. 그리고 완벽하지는 않아도 이제는 민주정부를 누리고 산다. 해일을 피해 안전한 언덕에 올라 남의 고통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 책 읽는 심정이 편치만은 않았다. 하긴, 바깥에서 우리 한반도를 바라보는 이들은 우리가 핵전쟁의 위험 속에서 근근이 살고 있다고 안쓰러워 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나라 여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멀리 뉴스를 접할 때에는 폭격으로 아이들이 죽고 민간인의 삶이 파괴되고 여자들이 명예살인을 당해도 너무 흔한 뉴스의 피로함 때문에 아예 기사를 읽고 싶지 않게 된다. ‘타인의 삶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럴 때 문학은, 예술은 더 가까이 그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내게 속삭인다. ‘남의 일이라고? 이토록 생생한데? 너의 일일 수도 있었는데? 그들도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었는데? 차도르나 히잡 같은 베일을 쓰면 표정이 감춰져서 욕망도 억누르면서 그런 삶을 당연하다 여기며 살 거라 생각하지? 너와 똑같이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고 공부하고 배우고 싶어 하고 사랑하고 싶어 하고 가족과 헤어지지 않고 싶어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왜 몰라? .....채찍질이다.

 

지은이이자 주인공인 마르잔이 어린 의협심에 못된 짓을 한 친구 아빠 이야기를 하면서 그 친구에게 응징하겠다 하자 마르잔의 어머니는 그 애 아빠가 그랬지. 하지만 그게 라민의 잘못은 아니잖니.”라고 말한다. 이 쉬운 말이 왜 그렇게 어려울까, 전대의 악행을 후대에게 복수하려 들면 그 어떤 역사도 발전하지 못하리라. 피의 역사가 아직도 계속되는 곳을 보면 그 복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무조건 용서를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책임을 분명히 하되 감정적인 보복의 욕구로 넘나들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마르잔의 부모는 마르잔을 유럽으로 보내기로 한다. 마르잔의 할머니가 떠나는 손녀딸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거다. “살다 보면 사내 녀석들을 많이 만나게 될 거야. 만약 그 녀석들이 네게 상처를 준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그건 녀석들이 멍청해서라고, 그렇게 하면 네가 남자들의 잔인함에 대응하려는 걸 막을 수 있을 게다.” 할머니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손녀의 자존감을 세워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헛된 복수에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말라는 지혜로운 이유가 더 크다. 하지만 나는 그 다음 말이 더 마음에 남았다. “언제나 존엄성을 잃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라.” ‘자존감의 의미를 이보다 명확하게 표현한 훈화가 있을까 싶다. 사춘기 초입에 내가 스스로에게 했던 말들과 비슷하다.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똑바로 걷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단단하게 살라고 스스로에게 뇌는 말들이 조금은 힘이 되고 위안이 된다. 할머니의 말은 마르잔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을까. 그냥 당당하라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라.’라니. 그 어려운 것을 해내야 존엄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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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노래 - 자연의 위대한 연결망에 대하여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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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 정재승, 최재천, 쳇 레이보,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과학자이면서 문학성 뛰어난 글을 쓰는 사람들 혹은 이야기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거기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의 이름을 더한다. 나는 문학이 영혼을 구제한다고 믿는 사람이다삶이 팍팍할 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문학작품과 예술 작품들이었다. 소설과 시에 젖어 살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현실의 효용을 위해 매진하지만, 삶이 핍진하다고 느껴질 때, 책장 어딘가에 사랑하는 시인의 시가 꽂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읽다가 잠시 멈춘 보르헤스나 페소아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황현산 선생과 문학에 대해 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잠자리에 들기 전 단 몇 분이라도 내 영혼은 숨을 쉴 수 있다.

 

그런데 문학적인 과학자라니. 과학은 정연한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아름다운 상상력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은 문학과 닮았다.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궁금함을 풀어가는 방식의 차이이다. 그래서 진정 과학의 세계를 탐구한 이들은 실로 문학적이었다. 뉴튼이 그랬고 어머니를 마녀사냥에서 구해내려고 이야기를 썼던 케플러가 그랬다. 우주를 탐구하다가 아름다운 문장으로 자기의 과학적 지식을 펼쳤던 칼 세이건 또한 그랬다. 거기 조지 해스컬을 더한다.

 

식물학자이고 나무를 탐구하는 그이지만 나무의 물성을 뛰어넘는 영성을 보는 이가 필자이다. 진정으로 나무와 교감하고 숭배한다. 사실 그러지 않으면 그 직업에 진정으로 종사하는 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을까? 강아지의 마음까지 읽고 헤아리는 강형욱,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짚는 오은영, 달팽이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엘리자베스... 교사도 그렇다.

 

해스컬은 케이폭 나무 이야기를 하면서 아마존 원주민들의 삶을 논하고 올리브 나무를 통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와 갈등을 짚는다. 그렇다고 거기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는다. 바라보는 이의 시선, 마치 오래 그 자리에 서서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았을 나무 같은 시선. 그리고 그는 유려한 문체로 삶의 풍경을 묘사한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내가 북미의 어느 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흐르며 미루나무를 스쳐 지나는 것 같다. 황폐한 바람 속의 올리브나무 언덕에 서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처절한 시위를 바라보는 것 같다. 케이폭 나무 위에서 원시림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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