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티재 하늘 1
권정생 지음 / 지식산업사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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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병에 걸린 분옥이와 그녀를 사랑하는 동준이 이야기는 두세 번을 읽어도 눈물이 난다. 세상끝에 오두마니 홀로 놓여진 분옥이의 초라한 섬돌에 동준이 놓고 간 짚신이며 갈대비며, 동냥으로 모은 돈으로 사온 어여쁜 얼레빗, 그리고 저녁마다 들려주는 피리소리.. 그렇게 사랑을 전할 줄 아는 사람 몇 없는 지금 세상에ㅡ 그런 사랑 받을 수 있다면 아파도 좋으리란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게 살다가 동준이 품에서 죽어간 분옥이는 서럽지만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해야 할까...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은 군더더기 많이 달려 자아에 침잠하다 못해 자기도 모를 소리로 헤매고 다니는 요즈음의 소설과 달리 참으로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급히 좌절하기도 하고 곰실곰실 살림을 모아 다독거리며 잘 살아가기도 하고... 그 이야기의 진행이 어쩐지 동화처럼 뿌듯하기도 하고 전설처럼 아득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하나같이 할머니에게 고모에게 들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아직도 이산가족 모이는 자리에 가면 소설이나 동화, 아니 전설보다 더 기막힌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권정생님의 영혼은 특별히 작고 연약하다. 그래서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지 모른다. 따뜻하다. 하나님이 그러라고 그분을 그리도 아프게 하셨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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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
공선옥 지음, 노익상·박여선 사진 / 월간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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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장에 등장하는 지복덕 할머니였나. 다음에 어딜 가냐 하니 '근덕'이라 대답했던 게. 근덕은 내 첫 발령지인 삼척시에 가깝다. 근덕 해변을 달리던 시내버스의 흔들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초저녁 술 한 잔과 함께 고즈넉하게 이 책을 읽다 그 단어에 그리움이 치민다. 게다가, 그 할머니, 거기 뭐가 있는데요? 하는 작가의 질문에 '바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내가 요즘 너무 보고 싶어하는 저녁 6,7시쯤의 바다가 있다. 아마도 노익상 씨 사진이었던 것 같다. 그 시간의 바다는 새벽바다와 비슷하다. 그 시간이 되면 파도가 잘 치지 않는다. 그리고 바다는, 청회색, 짙은 은회색이었다가 어두워진다. 그 페이지를 펼치며 왈칵 울었다.

그래, 그건 내 개인적인 추억과 그리움이라 치자. 공선옥씨가 보기 좋고 놀기 좋은 관광지나 유적지를 다니며 글을 쓴 것이 아니기에 그가 만난 사람들은 아프고 그가 다닌 길은 눈으로만 따라 다니기에도 참 곤하다. 나는 그가 효순이와 미선이가 죽은지 얼마 안되어 찾아간 그 동네를 따라 읽으면서도 눈물이 났고 배달호씨를 추모하기 위해 떠난 길에서 또 많이 울었다.

이 땅에 공부 잘하고 야물던 가난한 집 아들들이 공고를 갔다, 그건 그들에게 자랑이었다는 대목에서, 그래, 맞다,는 생각과 더불어, 얼마전 화물연대 소속 한 간부가 라디오 인터뷰에서 말을 참 잘하는 걸 듣고 대학도 안 나온 사람이 아는 것이 참 많네, 라고 생각했다가 스스로 부끄러웠던 기억도 났다.

나는 그 배달호 씨 이야기 부분을 언젠가 수업에 활용하고 싶다. 그토록 쉬운 언어로 이땅의 노동자들의 자부심과 좌절을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는 글이 드물 듯 싶어서. 그러나 아이들도 나처럼 치미는 분노와 막막한 슬픔으로 눈물 고이리란 생각은 않는다. 나는 잠시, 내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냉철하게 이 글을 잘 읽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나의 눈물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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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가는 향기 멀리가는 향기 1
정채봉 지음, 김복태 그림 / 샘터사 / 198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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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속의 잠언들이 좀 안일하다는 생각을 하던 무렵은 아마 글씨가 빽빽하고 내용이 심각하여 이 세상을 그 책 한 권 읽음으로써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을 듯 싶은 책들을 즐겨 읽던 때였나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시 이 책의 (가끔 너무 교훈적일 때도 있지만) 짧고 깊은 이야기는 마치 시처럼 한 구절 읽고 열 번을 생각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게다가 어느 선사가 장난스레 붓질한 듯한 그림은 마음을 적당히 허허롭고도 편안하게 해준다 싶어 복사하고 약간의 색칠을 해서 교실 뒷칠판에 붙여두곤 했다. 아이들이야 이 말 많은 세상에 너무 많지 않은 말들로도 생각하고 감동하게 하는 이 책의 미덕을 깨닫지 못하고 만화보다는 품위있고 무게있는 그림에 눈길이 먼저 가겠지만, 어떠랴, 바로 이렇게 천천히 깨닫는 아름다움을 향해 어쨌든 우린 각자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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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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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란 씨앗을 심는 일과도 비슷한데 그 씨앗은 1년만에 싹트고 꽃피지는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내 품에 있을 때 별 변화를 보이지 않던 아이들이 사실은 그 안에 공부하는 습관, 책읽기의 즐거움, 남을 배려하는 마음, 위기 상황에 여유있게 대처하는 자세 따위의 씨앗을 품고 내품을 떠난 후 그렇게 잘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것이 교육자로서 나의 기쁨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다니나 하다치 선생이 훌륭한 것은 6개월만에 부적응아를 읽고 쓰게 만들었다거나 학부모들의 지지를 얻어냈다거나 아이들의 사랑을 받았다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다니 선생의 사랑과 지도를 받은 데쓰조가 그렇게 잘 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음 해나 어쩌면 더더더 이후에라도 고다니 선생의 사랑을 바탕을 잘 커나갔으리라 믿는다. 고다니 선생님은, 내가 이 아이를 변화시키고야 말리라, 목표를 세워 싸우듯이 덤벼들지 않았다.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징그럽고 더러워 싫어했던 파리에 관심을 가졌고 몸을 낮춰 그 아이의 집에 가서 밥을 나눠 먹었다.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훌륭한 선생님이 되는 일은 어렵다. 과연 훌륭한 선생님이 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훌륭한' 이란 수식어가 능력에 해당하는 말이라면 말이다. 나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교사 말이다. 그 아이들의 문제와 아픔을 모두다 해결해 주거나 껴안아 줄 수는 결코 없다. 그런 과욕을 부릴 생각도 없다. 아프면 아픈 대로 문제해결은 아이들의 몫이더라도 나는 그 아이들이 학교에 왔을 때 적어도 우리 교실에서만은 부당하게 대우받고 나로부터 소외되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하고 싶다.

그래서 안정된 마음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책읽기의 즐거움을 알고 공부도 재밌다는 것을 알게 되어 몇년쯤 지난 후 자기도 모르게 늘 책을 읽고 스스로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이미 중학교 몇학년 때 담임 이름쯤은 잊을 법도 한 세월을 맞이하면서 잘 커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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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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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읽으면서 거기 담긴 몇 안되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더 보고 싶었다. 그렇게 검색을 해서 산 이 책을 사놓고도 오랫동안 들여다 보지 않은 이유가 뭘까. 어쩌면 역逆 피그말리온 현상을 연상케 하는, 체모가 다 그러나서 민망한 표지 그림 때문이었을까. 혹은 잘 펼쳐지지 않는 판형이나 딱딱한 종이, 구식 인쇄방식 탓?

청소년기에 3단 세로 식자판으로 세계명작 따위를 읽었던 세대인 내가 그런 것에 흔들리지는 않는다고 일단 말하고 싶다. 책 뒤에 이 책에 대한 서평으로 지은이 수지 개블릭이 어쩌구저쩌구 하여 고전적 연구를 하였다, 라고 써 있는데 나는 읽다 말고 그 '고전적 연구' 라는 대목을 다시 읽으며 쿡, 하고 웃었다. 좀 미안한 말이지만 르네 마그리트라면 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림 마다마다에 그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화가의 의식 혹은 무의식이 숨겨있을 터이고 만약 그런 의식이 없이 그려진(실지로 마그리트는 모든 그림을 그렇게 의식하고 그리지는 않았다고 했던 것 같다) 그림일지라도 그것을 사회적으로 혹은 원형적으로 읽을 수 있는, 읽으려는 어떤 코드나 노력이 가능하지 않을까. 난 그런 걸 기대했던 것이다. 어떤 그림이 어떤 그림과 비슷하다는 주제별 분류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고.

마그리트는 전혀 상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물을 결합 배치하여 신비롭고 두렵게까지 느껴지는 '화면'들을 연출하였다. 그 이원성이라는 것은 개념의 혼돈 - 눈에 보이는 그 물건은 진짜 그거게 아니게? 하는 식의 - 과 정체성 규명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던진다. 밤과 낮의 공존, 거대한 하늘, 바다와 작은 생물체 혹은 무관한 사물의 공존 따위를 통해 이것은 왜 불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던진다. 그 답은 그 자신도 모를지라도 말이다. 차라리 설명 없이 그의 그림을 '흠뻑' 즐기면서 논리나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림이 던져주는 환상 속으로 빠지는 게 더 아름다운 감상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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