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우물에서의 은어낚시 - 1990년대 한국단편소설선
이남호 엮음 / 작가정신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책을 구입하면 뿌듯하기야 한결같지만 이 책이 오던 날은 더 그랬다. 소설을 즐겨 읽지는 않지만, 마치 어떤 영양소가 특별히 결핍되면 그 음식을 갈구하게 되듯 가끔 내게 소설이 필요하다. 너무나 바빴던 날들이 지나면, 너무 열심히 살았던 날들이 지나면, 시처럼 저녁바다처럼 그렇게 살았던 날들이 너무 길면, 난 지적으로 고아하지도 않고 환상의 세계도 아니며 뒤도 돌아볼 수도 있는 허름한 재래시장 같은 세상으로 나오고 싶어진다. 그럴 때 소설은 나에게 결핍되었던 어떤 무기질과도 같다. 그럴 때 난 이 책을 샀다. 가끔 그렇게 소설 한두 편으로 해소할 수 있는 갈증을 종합선물셋트처럼 푸짐하게 마련했다. 그래서 아껴 읽었다.

여기 담긴 작품이 모두 좋았는가, 뭐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양귀자의 소설은 늘 재미있지만 숨은꽃도 괜찮았다. 아마도 언젠가 읽은 것도 같다. 겉으로 초라하고 억세 보이는 시골 사내, 그 나름의 초탈한 삶의 이치를 꿰고 있는 남자 냄새 많이 나는 거친 사내, 그 안에 삶의 회한을 읽을 줄 아는 감성을 지녀 단소부는 술집여자를 알아 볼 수 있었던 사내... 그것은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아니무스다. 또한 내 초임발령 5년의 세월을 보낸 강원도 어느 지방에서 만날 법한, 있을 법한, 한 교실에서 나와 공부했던 사내아이들 중 어떤 아이의 혹은 그 아비의 것일 법한 그런 이미지이기도 하다. 게다가 바다가 아니더냐.

이렇게 여러 편을 모아 두껍게 만든 책들 대부분에는 큰 것 밑에 작은 놈을 껴묻어 파는 한 상자의 사과처럼 상술이 묻어있거나 작품을 모아 엮은 이의 편협함으로 인해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책은 그렇게 날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마치,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아침에 머리맡에 놓인 종합선물셋트를 열었을 때 싫어하는 과자가 하나도 없어 두고두고 한 열흘 쯤 뿌듯했던 그 날의 기억처럼 말이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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