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건축 - 꽤 인간적인 그래서 예술적인 건축 이야기
최준석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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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나쁘지 않았다. 책을 고른 내가 잘못이다. 나는 건축에세이를 좋아하지만 너무 많이 읽었다. 이젠 쌓인 양만큼 질적 전환이 일어날 때인 듯하다. 아직도 이렇게 달달한 책을 잡고 있기엔..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알랭 드 보통의 '행복한 건축'을 읽으면서, 그는 건축가는 아니니까 이렇게 조금은 중구난방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자기 관점으로 건축이든 미술이든 감상할 수 있다. 나는 건축에 대한 이론적인 어떤 바탕도 갖고 있지 않지만 나도 나름의 미적 감각으로 그걸 읽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나의 감상을 들려준다고 해서 그것을 듣고 싶어할 사람이 없을 뿐이다.  

건축가들이 쓴 건축에세이의 매력은 글쓴이만의 건축 철학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거장의 건축물을 논할 때에도,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의의를 언급하겠지만 그것을 넘어 승한 점과 박한 점을 자기 식으로 말할 수 있다. 자기 건축이 추구하는 바를 말하는 것도 들을 만하다. 승효상도 그래서 좋았고 안도 다다오도 좋았다. 김석남의 강의하듯 하는 에세이도 서현의 에세이도, 이일우나 김진애의 자기만의 '집'에 대한 고집이 좋았다. 

내가 건축에세이에 탐닉하는 것은 단지 꿈 속에 보는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집에 대한 환상에 대한 집착인지도 모르지만 이러저러한 집들을(직접 남의 집에 가 볼 수는 없겠지만) 자꾸 들여다보고 읽다보면 언젠가 내가 꿈에서 만나던 그 집을 닮은 집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걸 꿈꾸는 시간으로 나는 건축 에세이를 읽는다. 

이 책이 거리를 떠도는 듯한 느낌, 카페에 앉아  여성지의 잘 찍은 건축(집?) 관련 기사를 읽은 느낌이 드는 것은, 꼭 단점만은 아닐텐데, 그게 내게 아쉬운 것은 책의 지향점과 나의 지향점이 달라서 그런 거지 결코 필자의 잘못은 아니다. 미안하다, 후딱 읽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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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민중사 1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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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가 쉽진 않았다. 정직한 편집. 이제는 나같은 독자마저도 얍삽한 편집의 달콤함에 오염이 되었나 보다. 분량도 만만치 않지만 중간제목 없이 죽죽 나가는 서술방식이 짧게 끊어 읽기에 익숙해진 요즘 독서세태에는 좀 숨가쁘다. 

하워드 진이 준엄한 눈초리로 미국의 우편향에 경고장을 던졌다고 해서 이 책에 그의 주관이 회초리를 휘갈길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마치 소리를 질러대는 선생이 아니라 나즈막하게 아이의 잘못을 짚어주는 스승이 더 엄격하게 느껴지듯이 하워드 진은 흥분하지 않고 주장도 하지 않으며 엄청난 양의 객관적 자료들을 제시한다. JP모건 회사(나도 글로벌 금융위기를 떠들어대는 언론을 통해서나 들어본 미국의 거대자본으로 알고 있는데)가 남북전쟁 당시 불량 무기를 팔면서  얼마나 비열하게 자본을 긁어모았는지에 대해 말할 때에도, 흑인노예 해방의 아버지로 알려진 링컨이 어떤 논리로 당시의 백인 자본주의자들을 설득했는지도 자료로써 보여준다.  

미국의 역사는 인디언을 딛고, 흑인 노예를 딛고 백인 하인들을 딛고 다시 흑인 자유인들의 인권을 딛고 아동과 여성노동자들을 딛고 사회주의자들을 딛고 철도노동자들을 딛고 멕시코, 스페인, 필리핀 사람들을 딛고 여기까지 왔다. 전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의 역사가 그러하기에 합리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그들 입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 그런 역사 속에서 스러지기도 하고 견뎌내기도 하면서 쟁취해간 미국 민중들의 민주주의 역시 거기 있다. 그렇게 살펴보면 그들이 피흘려 얻어냈던 헌법 정신, 고통 받으며 살려냈던 인권의식, 짓밟히는 파업투쟁을 통해 하나하나 쟁여냈던 노동의 여건들의 위대함 역시 거기 있다. 미국의 두 얼굴인 것이다. 제국주의, 패권주의가 있는가 하면 미국 사회 내부에 굳건히 다져져있는 민주의식(비록 그들, 미국인들만의 민주라 할지라도)그리고 신뢰감 따위는 세월 속에서 고통 속에서 다져졌기에 견고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100여 년 동안 유럽과 미국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천천히 일구었던 합리주의와 민주주의와 근대화를 급격하게 해냈다. 어찌 보면 그 짧은 시간에 해낸 것이(자의든 타의든) 스스로 대견할 수도 있고 무수히 생략된 과정 때문에 시행착오가 그렇게 많아지는구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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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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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여자들의 에세이에 끌리고 있었던 자신이 보인다. 뭘까, 특히나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의식이 있든 없든, 자의식에 푹 절었든 어쨌든 자꾸 읽고 싶어지는 이유는? 이렇게 쉽게 읽히는 책을 읽고 있을 시간이 내 인생에는 별로 없지만 마치 가끔은 드라마도 봐야 해, 숨좀 쉬고 살자, 이런 기분.. 오랜만에 미장원에 가서 여성잡지를 볼 때의 흐믓한 기분 같은.. 것으로 읽었다.

그래, 솔직히 그렇게 읽기 시작해서 요일제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한 목요일에 다 읽어 버렸다. 독일 여배우와 친구가 된 이야기는 참 재미있었다. 너무 빨리 읽어서 좀 미안하기도 했다. 징징거리는 것보다 그녀는 훨씬 근사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만 조금 요사스러울 만큼 사랑스럽기도 하고 매력적이기도 한 이 여인은 본인이 울적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과하게 사랑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춘기 소녀같은 감성이 남아 있어서 '지하철 바람에도 가을을 느끼며' 오르락 내리락 하는 자신의 감성을 붙들고 글을 쓰고 있다. 여전히 그녀가 현을 울려주는 이땅의 많은 여인들이 있다는 게 다행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수도 있다. 나도 그닥 내키지는 않으면서도 자꾸 호기심이 당겨 읽고 싶었던 게 사실이니까.  

다만, 옛날, 80년대 이야기는 이제 그만, 거기 연 닿았던 이야기도 이제는 그만.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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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국어교육
이계삼 지음 / 나라말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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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에서 이계삼 선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감성과 지성과 현실감각이 어우러진 글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 또래쯤 된 소위 386세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30대의 젊은 교사다. 나이가 좀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 것은 그의 상념들이 매우 무겁고 진지했기 때문이다. 뭐랄까 과거가 뒤에서 허리춤을 잡아끄는 지금 사람들의 우울과 염려같은 것이 도저히 그를 30대라고 생각하게 만들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도 90년대에 대학을 다녔지만 자기는 80년대 학번을 정서를 지녔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몇 있다. 90년대 초반, 대학은 아직 의분을 버리지 못했다. 전교조 세대이거나 거기 걸쳐 고등학교를 지나왔고 대학이 학생운동의 열기를 이제 막 꼬리떼기 하기 직전, 이 세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다 못해 음울하게 보아야 했던 (물론 그 세대라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세대들이 있다.  

아니, 그런 세대 분석이 아니더라도 어느 시대나 현실을 무겁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사는 일은, 참 괴롭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그런 사람들이 세상이 미쳐 날뛰는 것을 잡아준다고 생각한다. 바람이 빠져 날아가려고 요동치는 풍선을 꼭 잡아 다치지 않게 하는 묵직한 추와 같은 이들이, 그들은 비록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라도 세상을 망가지지 않게 하는 힘이요, 나아가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드는 무게라고 생각한다. 이계삼 선생은 그런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전교조 활동가인 그를 무엇보다도 '교사'라고 부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뛰어난(?) 교장, 교감도 많이 봐왔고 뛰어난 활동가나 운동가도 많이 봐왔고 뛰어난 시인이나 문필가도 있었으며 공부를 많이 한 선생들도 있었지만 '교사'로서 뛰어난 사람들은 많지 않다. 교사로서는 형편없지만 교장의 정치력을 현란하게 발하는 사람, 수업은 졸리기 짝이 없는데 정치가로 성공한 교사, 삶의 중심이 학교의 아이들이 아니라 자기 공부인 선생, 시는 정말 아름답지만 학교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해서 아이들과 동료교사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교사'는 교장이 되고 활동가, 정치가가 되고 박사가 되고 시인이 되는 발판이거나 부수적으로 딸린 이름이거나 할 것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수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교사이고 아이들을 꼭 끌어안는 선생이다. 그 과정에서 너무 아파서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시를 쓰게 했고 더 잘 가르치기 위해 공부를 더 해야만 했고 학교 현장에서 느낀 아픔과 아름다움이 그를 다른 어떤 이름으로 거듭나게 해야 했다.  

우리에게 교사 출신 ~~라는 이름이 붙은 명망가들은 많지만 정말 교사로서 훌륭한 이름난 사람(뭐, 물론 교사라는 직업 자체가 이름을 얻을, 얻으려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야 마땅하지만)이 없는 현실이 좀 슬프다. 교사들의 그릇이 작아서가 아니요, 정말 수업으로, 아이들과의 만남으로 교사가 인정받을 수 없는 현실이라서 그렇다 . 

이계삼 선생의 수업은 보고 배울 점이 많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자료들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고등학교에서 이렇게 수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나는 늘 내가 중학교 국어교사인 것을 감사한다. 시험성적에 얽매이지 않고 아이들의 잠재력을 건드려주는 수업을 할 수 있는 '국어;라는 과목을 가르치는 것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정신, 세상의 질서에 굴복하지 않아도 되는, 않아야 하는 문필의 정신이 국어과목에서도 살아숨쉴 수 있다는 것이 늘 고마웠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면 나는 지금의 고통에 2,3배 넘는 힘겨운 세월을 지나왔을 것이 분명하다. 교장, 교감이, 학부모가 교육과정이 팔짱을 끼고 내 수업을 도대체 뭐하는지 지켜보겠다, 조금만 이상한 짓을 하면 가차없이 너를 치겠다고 사방에서 벼르고 있는 세월을 20년 지나왔지만 언제나 아이들은 그 모든 수업에 최선을 다했고 재미있어 했고 나를 믿어 주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과연, 고등학교에서도 아이들과 그렇게 잘 갈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 앞부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수업계는 신학기 초에만 고생하고 나면 그 뒤부터는 학사 일정의 변동 사항에 따라 수업을 조정하는 일만 하면 되지만, 보충수업계의 경우 방과후학습 지도비 문제까지 겹치고, 방학까지 포함해서 보충수업 시간표와 수강과목 인원 및 강사 조정 등으로 1년 내내 엄청나게 바쁘다, 그래서 우리 학교는 수업계 담당 교사는 한 명인데, 보충수업계는 두 명이다, 담임교사가 학생 지도와 관련해서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부분은 아이들의 야간자율학습, 혹은 방과후학습 시간을 관리하는 데이다. 공식 교육과정과는 무관한 일에 제일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 

무슨 어록에 기록할 내용도 아닌데 나는 이 대목을 일부러 워드로 쳐서 저장했다. 어쩌면 이토록 똑같이 2~30년 전 학교 교무실 모습이 변하지도 않고 21세기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지, 중학교에서도 소위 '사교육없는학교'라는 모순어법으로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도 기가 막혀서이다. 우리 학교도 교육과정이 중심이 아니라 방과후학교가 중심이 되고 있다. 가장 주요한 부서, 가장 주요한 업무는 수업이나 상담이나 학급운영이 아니라 방과후학교이다. 나라에서 억대의 돈을 지원받고 본 수업이나 기초부진아 지도에 힘쓰는 선생들은 왜 방과후수업에 참여하지 않는지 닦달을 당한다. 본수업 부실을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항변하면 열의가 없어서 그런다고, 그러니까 공교육과 교사가 욕먹는다고 오히려 나무란다. 상담실은 무용지물이 되고 상담은 일탈학생 중심이 아닌 학습지도 상담으로 방향을 전환하란다. 학교는 경쟁과 성적향상의 목표를 너무나 노골적으로 소리높인다. 수업을 잘하는 선생은 눈에 띄지 않지만 방과후수업을 잘하는 교사와 방과후수업에 아이들을 많이 보내고 모으는 교사가 칭찬받는다.  

아무도 중학교(초등학교도?) 방과후수업의 문제점을 말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 때 좋은 취지에서 도입된 방과후수업 정신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인지 한겨레신문 같은 데서조차 비판의 소리는 없다. 교사들이 방과후수업의 문제점을 말하면 저러니까 선생들이 편하려 든다는 말을 듣는 거란 비판이 돌아온다. 그래서 대안이 학교가 9시까지 불을 밝히고 바깥에서 학원선생들을 끌어들여야 하는 것인가. 이계삼 선생 말대로 우리 학교 수업계는 한 명이지만 방과후수업관련 업무를 맡은 교사들 모두 4명, 거기다 교육청 지원으로 들어와 있는 행정직원까지 모두 다섯 명이 이 일에 매달리고 있다. 방과후수업 듣는 아이들이 먹을 석식신청서까지 그 교사들이 받는다. 학교 본 업무에서 쓰는 돈 씀씀이보다 더 큰 돈들이 왔다갔다 한다. 

학교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힘을 내야 하는데, 희망이 없으면 개개인이 갖고 있는 역량은 아무 소용이 없는데, 분노와 슬픔을 모아 불을 지펴야 하는데... 그래서 이계삼 선생은 교단에서 열심히,공들여 수업을 준비하고 자료를 마련하여 가르치고 아이들 가슴에 불을 지피고, 저녁에는 전교조 지회로,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의 진정성은 여기에 있다. 힘내라 이계삼, 힘내라 우리 아이들, 힘내라 이 땅의 교사들.. 우리 작은 얼굴이 세상을 바로 잡는다.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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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 2010-10-09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쑥 인사드립니다. 여러번 들렀지만 글만 보고 가곤 했는데 오늘은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올리시는 글 잘 읽고 있노라고, 다른 서재지기들과 교류를 원하시지는 않는 듯하여 그저 다녀가기만 한다고요. 꾸벅!!! 건필하시기를....

구름배 2010-12-14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쁜 12월 아침에도 잠시 시간을 멈추고 읽고 느꼈습니다. 아침에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제 누리집에도 옮겨놓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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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금닷컴 제프님의 손금의 정석 1
유종오 지음 / 여산서숙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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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선생님 중에 아주 영민하다고 학생들의 선망을 받던 잘생긴 총각선생님이 있었다. 스물 일곱밖에 안 된 나이에 철학적인 그의 언변과 태도와 행동과 더불어 이미 주역을 읽었다더라는 소문이 그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그는, 그저 여고생들의 마음을 울리는 우수어린 총각이기만 한 이는 아니었고 그의 지성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음을 그가 전교조 사태로 해직될 때도, 그 이후의 변함없는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조금 냉소적이었던 나에게조차 그가 주역을 읽었다더라는 말이 깊이 새겨져 남아있다. 

그 어렵다는 주역을, 단지 누군가의 사주를 보는 책이 아니라 우주를 담은 철학책이라는 그 주역을... 나도 언젠가 읽어보리라, 기왕이면 그 선생님처럼 20대가 가기 전에...라는 결심은 바쁜 삶에서 잊혀졌고 30대 어느 즈음에 한번 펼쳐보았다가 도대체 왜 내가 이걸 읽고싶어 하는 걸까, 집착 혹은 지적 허영이 아니라면.. 하면서 덮었던 기억이 난다. 

혹시 철학책이라더라, 라고는 했지만 그 안에 담겼다는 남의 운명을 볼 수 있는 열쇠가 10대의 나와 우리들을 흔들었던 건 아닐까, 내가 데미안이 했다는 독심술은 언젠가 나도 해 보리라 결심했던 것에서 한치도 더 나아가지 못했던 욕심일 뿐인 것 아닐까. 

손금은 왜 알고 싶어졌나 모르겠다. 정말 손금이 운명을 말해준다는 확신은 없다. 오히려 관상은 과학적으로 그 사람의 삶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손금에 그런 과학성을 찾아볼 근거는 없다. 그런데 왜 그게 궁금했을까. 

몇 가지 사례들에 혹할 수는 있다.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들이 주변에 좀 있으니까. 그래서 처음엔 재미삼아 들여다 보았다. 당연히 내 손금을 모델로. 적어도 내 인생에 대해 어쩌구저쩍구하는 건 부담없는 일이니까. 그러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손바닥을 들여다 보았다. 많이 들여다보고 싶지만 손금을 보고 있으면 영락없이 자기 운명은 어떤지 말을 해달라고 한다. 내 눈에는 아주 단순한 것 정도밖에 안 보인다. 나쁜 것이 보인들 말을 할 수도 없지만 내 눈에 보이는 것을 어찌 믿고 말을 해주겠는가. 

이 책의 저자는 손금은 바뀔 수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타고난 무엇이 있다 해도 본인이 그 길을 가지 않고 갈고닦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나의 손금에는 내가 결혼을 늦게 하고 독립적으로 살 것이라고 (배운 대로라면) 써있으나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일찍 결혼한 편인데 그것은 남편의 강력한 기운이 나의 고집을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나는 권력운도 있고 지향도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치관이 바뀌면서 내 인생은  '권력''자리'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후회도 없다. 그렇게 본다면 손금은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운명만은 아닌 것이다. 또한 운명이란 게 있다고 해도 본인의 운명만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배우자 등 주변 사람들의 갖고 있는 운명과의 조화와 상충이 또다른 운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식이 설령 나쁜 손금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부모의 좋은 기운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도 있고 좋은 운명도 나쁜 배우자를 만나면서 다 까먹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윤동주의 '소년'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이 귀절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었다. 작은 손바닥 안에 아름답고 슬픈 세상이 펼쳐진다. 그 강물 안에 그리운 이의 얼굴도 있고 세월도 흐른다. 그런 의미에서 손금은 한 사람의 인생이 흘러가는 강물일 수도 있겠다. 어떤 운명이 흘러가고 있는지 가끔 들여다본다. 재물복이 있네 결혼운이 있네, 가 아니라 내 인생이 여기만큼 왔다,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앞으로도 흘러간다, 여기 파란 강물을 따라.. 열심히 살면서 운명을 만나리라. 피해갈 수 없는 것도 있겠으나 슬픔 없다 할 수 없겠으나 좋은 인연들을 만나며 아름답게 살겠노라, 주로 내 손금을 바라보며 ,손금 공부는 일종의 명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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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꼬야 2013-05-31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가 너무좋아서 가져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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