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위한 국어교육
이계삼 지음 / 나라말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겨레 신문에서 이계삼 선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감성과 지성과 현실감각이 어우러진 글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 또래쯤 된 소위 386세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30대의 젊은 교사다. 나이가 좀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 것은 그의 상념들이 매우 무겁고 진지했기 때문이다. 뭐랄까 과거가 뒤에서 허리춤을 잡아끄는 지금 사람들의 우울과 염려같은 것이 도저히 그를 30대라고 생각하게 만들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도 90년대에 대학을 다녔지만 자기는 80년대 학번을 정서를 지녔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몇 있다. 90년대 초반, 대학은 아직 의분을 버리지 못했다. 전교조 세대이거나 거기 걸쳐 고등학교를 지나왔고 대학이 학생운동의 열기를 이제 막 꼬리떼기 하기 직전, 이 세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다 못해 음울하게 보아야 했던 (물론 그 세대라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세대들이 있다.  

아니, 그런 세대 분석이 아니더라도 어느 시대나 현실을 무겁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사는 일은, 참 괴롭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그런 사람들이 세상이 미쳐 날뛰는 것을 잡아준다고 생각한다. 바람이 빠져 날아가려고 요동치는 풍선을 꼭 잡아 다치지 않게 하는 묵직한 추와 같은 이들이, 그들은 비록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라도 세상을 망가지지 않게 하는 힘이요, 나아가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드는 무게라고 생각한다. 이계삼 선생은 그런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전교조 활동가인 그를 무엇보다도 '교사'라고 부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뛰어난(?) 교장, 교감도 많이 봐왔고 뛰어난 활동가나 운동가도 많이 봐왔고 뛰어난 시인이나 문필가도 있었으며 공부를 많이 한 선생들도 있었지만 '교사'로서 뛰어난 사람들은 많지 않다. 교사로서는 형편없지만 교장의 정치력을 현란하게 발하는 사람, 수업은 졸리기 짝이 없는데 정치가로 성공한 교사, 삶의 중심이 학교의 아이들이 아니라 자기 공부인 선생, 시는 정말 아름답지만 학교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해서 아이들과 동료교사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교사'는 교장이 되고 활동가, 정치가가 되고 박사가 되고 시인이 되는 발판이거나 부수적으로 딸린 이름이거나 할 것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수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교사이고 아이들을 꼭 끌어안는 선생이다. 그 과정에서 너무 아파서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시를 쓰게 했고 더 잘 가르치기 위해 공부를 더 해야만 했고 학교 현장에서 느낀 아픔과 아름다움이 그를 다른 어떤 이름으로 거듭나게 해야 했다.  

우리에게 교사 출신 ~~라는 이름이 붙은 명망가들은 많지만 정말 교사로서 훌륭한 이름난 사람(뭐, 물론 교사라는 직업 자체가 이름을 얻을, 얻으려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야 마땅하지만)이 없는 현실이 좀 슬프다. 교사들의 그릇이 작아서가 아니요, 정말 수업으로, 아이들과의 만남으로 교사가 인정받을 수 없는 현실이라서 그렇다 . 

이계삼 선생의 수업은 보고 배울 점이 많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자료들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고등학교에서 이렇게 수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나는 늘 내가 중학교 국어교사인 것을 감사한다. 시험성적에 얽매이지 않고 아이들의 잠재력을 건드려주는 수업을 할 수 있는 '국어;라는 과목을 가르치는 것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정신, 세상의 질서에 굴복하지 않아도 되는, 않아야 하는 문필의 정신이 국어과목에서도 살아숨쉴 수 있다는 것이 늘 고마웠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면 나는 지금의 고통에 2,3배 넘는 힘겨운 세월을 지나왔을 것이 분명하다. 교장, 교감이, 학부모가 교육과정이 팔짱을 끼고 내 수업을 도대체 뭐하는지 지켜보겠다, 조금만 이상한 짓을 하면 가차없이 너를 치겠다고 사방에서 벼르고 있는 세월을 20년 지나왔지만 언제나 아이들은 그 모든 수업에 최선을 다했고 재미있어 했고 나를 믿어 주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과연, 고등학교에서도 아이들과 그렇게 잘 갈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 앞부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수업계는 신학기 초에만 고생하고 나면 그 뒤부터는 학사 일정의 변동 사항에 따라 수업을 조정하는 일만 하면 되지만, 보충수업계의 경우 방과후학습 지도비 문제까지 겹치고, 방학까지 포함해서 보충수업 시간표와 수강과목 인원 및 강사 조정 등으로 1년 내내 엄청나게 바쁘다, 그래서 우리 학교는 수업계 담당 교사는 한 명인데, 보충수업계는 두 명이다, 담임교사가 학생 지도와 관련해서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부분은 아이들의 야간자율학습, 혹은 방과후학습 시간을 관리하는 데이다. 공식 교육과정과는 무관한 일에 제일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 

무슨 어록에 기록할 내용도 아닌데 나는 이 대목을 일부러 워드로 쳐서 저장했다. 어쩌면 이토록 똑같이 2~30년 전 학교 교무실 모습이 변하지도 않고 21세기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지, 중학교에서도 소위 '사교육없는학교'라는 모순어법으로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도 기가 막혀서이다. 우리 학교도 교육과정이 중심이 아니라 방과후학교가 중심이 되고 있다. 가장 주요한 부서, 가장 주요한 업무는 수업이나 상담이나 학급운영이 아니라 방과후학교이다. 나라에서 억대의 돈을 지원받고 본 수업이나 기초부진아 지도에 힘쓰는 선생들은 왜 방과후수업에 참여하지 않는지 닦달을 당한다. 본수업 부실을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항변하면 열의가 없어서 그런다고, 그러니까 공교육과 교사가 욕먹는다고 오히려 나무란다. 상담실은 무용지물이 되고 상담은 일탈학생 중심이 아닌 학습지도 상담으로 방향을 전환하란다. 학교는 경쟁과 성적향상의 목표를 너무나 노골적으로 소리높인다. 수업을 잘하는 선생은 눈에 띄지 않지만 방과후수업을 잘하는 교사와 방과후수업에 아이들을 많이 보내고 모으는 교사가 칭찬받는다.  

아무도 중학교(초등학교도?) 방과후수업의 문제점을 말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 때 좋은 취지에서 도입된 방과후수업 정신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인지 한겨레신문 같은 데서조차 비판의 소리는 없다. 교사들이 방과후수업의 문제점을 말하면 저러니까 선생들이 편하려 든다는 말을 듣는 거란 비판이 돌아온다. 그래서 대안이 학교가 9시까지 불을 밝히고 바깥에서 학원선생들을 끌어들여야 하는 것인가. 이계삼 선생 말대로 우리 학교 수업계는 한 명이지만 방과후수업관련 업무를 맡은 교사들 모두 4명, 거기다 교육청 지원으로 들어와 있는 행정직원까지 모두 다섯 명이 이 일에 매달리고 있다. 방과후수업 듣는 아이들이 먹을 석식신청서까지 그 교사들이 받는다. 학교 본 업무에서 쓰는 돈 씀씀이보다 더 큰 돈들이 왔다갔다 한다. 

학교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힘을 내야 하는데, 희망이 없으면 개개인이 갖고 있는 역량은 아무 소용이 없는데, 분노와 슬픔을 모아 불을 지펴야 하는데... 그래서 이계삼 선생은 교단에서 열심히,공들여 수업을 준비하고 자료를 마련하여 가르치고 아이들 가슴에 불을 지피고, 저녁에는 전교조 지회로,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의 진정성은 여기에 있다. 힘내라 이계삼, 힘내라 우리 아이들, 힘내라 이 땅의 교사들.. 우리 작은 얼굴이 세상을 바로 잡는다.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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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 2010-10-09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쑥 인사드립니다. 여러번 들렀지만 글만 보고 가곤 했는데 오늘은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올리시는 글 잘 읽고 있노라고, 다른 서재지기들과 교류를 원하시지는 않는 듯하여 그저 다녀가기만 한다고요. 꾸벅!!! 건필하시기를....

구름배 2010-12-14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쁜 12월 아침에도 잠시 시간을 멈추고 읽고 느꼈습니다. 아침에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제 누리집에도 옮겨놓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