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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평점 :
중1 담임이다. 해마다 쓰는 두레일기를 지금도 쓴다. 올해 아이들은 유난히 더 어린애들같다. 애기 취급하면 더 이쁜 짓을 한다. 사실 저들이 어리지만은 않다는 것을 잘 알지만, 어차피 다는 알 수 없는 저 속을 다 아는 척 하느니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들을 대한다. "너희는 '기품있는 열네 살'이야. 건방지지 않지만 도도하고 기품 있는 표정을 지어 봐." 이렇게 요구하면 그들은 정말 탐구적인 눈빛으로 총명한 소년의 표정을 짓는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아직 뭘 모르는데 실수한 거지, 너? '이러면 순진한 눈빛으로 참회를 한다. 아플 땐,' 우리 애기 어디가 아픈데?'이렇게 대하면 마냥 순한 아기양 같은 얼굴로 더 아픈 척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레일기를 쓰면서 아이들은 학구적인 모습 뒤에 세속적인 모습을, 이타적인 행동 뒤에 친구들에 대한 짜증을, 개구쟁이 모습 뒤에 사색하는 소년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다음은 우리 반 정우킴의 일기다.
척, 척은 안 좋은 것일까? 예쁜 척, 잘난 척, 멋진 척,,,, 난 척을 해 봤다. 쿨한 척, 그저그런 척, 무덤덤한 척... 뭔가 하긴 해야 하는데, 뭐라 해줘야 하는데, 그게 자꾸 빗나가 버리니 뭐라 할 수가 없다.... 힘들고 지치고 아프고 슬플 때 길을 가던 친구 역시 나보단 덜해도 그 아이도 힘들어 보일 때, 차마 내가 걔에겐 기댈 수 없어 그 아이에게 기댈 수 있는 내 어깨를 내줄 때, 안 힘든 척, 안 아픈 척,... 척을 해야 한다. 내가 쓰러지면 안 되니까... 그렇게 친구가 다 회복되어 갔을 때, 내 걸음은 점점 느려지다 멈추고 만다... 그저 그렇게 그냥 끝을 맞이한다. 무엇이든 어려운 일을 해내고 나면 거기에 따른 보상과 성취감, 만족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길던 인생을 끝냈을 땐 아무 것도 없다. 보상이고 포상이고 기쁨이고 성취감이고 없다,. 천국? 천당? 관세음보살? 그저 허례허식일 뿐, 그들이 죽어보지 않은 이상 그게 있는지 모른다, 죽었을 땐, 때는 이미 늦은 후... 요즘 찬현이는 아이들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왜 살까.. 그럼 내가 하나 묻는다. 살면서 어떤 느낌을 받는가 ?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이다. 답, 정답, 정확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싶으면 죽어보라, 죽고 나면 왜 사는지 알게 될 것다, 모르겠다고? 그대들이 떠들어대는 하나님 부처님은 어디로 갔는가?
나는 이렇게 답했다.
죽을 것이 뻔한데 왜 사나? 그리고 왜 열심히 사나? 그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는 건 아닌데.. 이유도 없고. 생명은 태어난 것 자체가 이유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의무라고밖에는. 오직 인간만이 왜 사나를 고민한다네. 어찌 보면 지구 자연 중 가장 사색적인 동물이고 어찌 보면 가장 오만한 동물이고 어찌 보면 가장 생명력이 떨어지는 동물이지. 나는 사춘기 때의 그 질문에 대답을 찾기도 전에 갑자기 너무나 바빠지는 바람에 살다가 살다가 여기까지 왔다네. 정우는?
소설은, 죽음으로 걸어가는 소년의 이야기다. 우리는 건강할 때에도 늘 죽음을 예감하고 준비하며 산다. 겪어보지 않았다고 해서 죽음의 무게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과 코를 맞대고 사는 사람의 심정을 우리는 모르는 것도 사실이다.이것은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정상적인 속도로 늙어가도 우리는 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고통스럽기 일쑤다. 몸이 늙는 만큼 마음도 따라 늙으면 차라리 괜찮다. 몸은 이주일이지만 마음이 조인성인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런데 아름이는 열일곱의 마음으로 여든의 몸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소설은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죽어가는 소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소년이 태어나게 된 이야기가 생동한다. 열일곱에 일찌감치 아기 엄마 아빠가 되어버린 맑고 천진한 영혼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부모들이 '생산'을 한 그 나이 즈음에 죽음으로 향해 가는 한 소년은, 몸은 죽음을 향하나 영혼은 이제 막 생성하는 그런 아이다. 인간에게 육신은 질곡이다. 내가 싫어하는 명언 중 하나인 '건강한 육신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가 다시 떠올랐다. 영혼은 대개의 시간 거울을 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좀 못난 몸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한다. 영혼은 자기 안을 들여다 보면서 오롯이 잘 자라고 갈고 닦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그걸 읽을 능력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아름다운 몸이 아름다운 인격을, 아름다운 얼굴이 아름다운 영혼을 만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건강한 몸이 영혼조차 활력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마도 소설가나 시인들은 잘 알지 않을까. 아름이는 그런 아이였다. 나이든 영혼의 지혜와 너그러움에 십대의 생명력을 함께 지니고 조금은 귀엽고 천진한 자기 부모를 들여다 보고 그것을 글로 쓰고 싶어했던.
아름이는 소년인데 지나치게 감성적이어서 작가의 유체이탈(상대 性에의 빙의)가 잘 안 이루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서하와 주고 받는 이메일이 아름인지 서하인지 헷갈릴 정도로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은 것(결론적으로 아름이나 서하나 다 김애란이었다는 것)이 조금 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론 남자 아이들의 감성이 얼음처럼 날카롭고 맑기도 하다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김애란이 재미있는 작가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그를 '읽고 싶은 작가'에서'좋아하는 작가' 반열로 올리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