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문법, 정치언어학으로 분석하다 - 언어는 질서다, 언어는 정치다
신동준 지음 / 한길사 / 2010년 9월
평점 :
서설에서 조선조의 사대부들이 한문만 열심히 습득하고 ‘한어’는 중인 출신의 역관들이나 배우는 것으로 치부한 사실과 사어 취급을 당한 라틴어의 처지는 같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또한 이로 인한 폐해도 막심했다, 문어와 구어는 공존해야 하며 문법지식이 없는 한 아무리 말을 유창하게 할지라도 높은 수준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공감한다. 늘 우리가 배우는 영문법은 누가 정립한 것인가, 미영식 문법이 일식 문법으로 변질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은 어떻게 왜곡되었을까 궁금했다. 또한 문법이 필요하되, 독해를 위한 문법이 아니라 ‘수험을 위한 문법으로 변질되는 과정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아직도 학원가에는 80년대의 맨투맨과 성문기초, 성문기본을 가르치고 있다.
정치언어학, 아무 데나 갖다 붙이지좀 말라~!
글쓴이의 취지는 한국이 향후 다방면에서 세계시장을 석권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영어를 제대로 구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을 위한 새로운 영문법이 필요하다, 정치언어학적으로 한국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영어가 필요하고, 영어를 잘 습득하기 위해서 올바른 영문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인 듯하다. 또한 이 책이 비교언어학적으로 역사언어학적으로 영문법을 재정립한 최초의 책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종으로 횡으로, 동서와 고금을 아우르는 영문법책을 썼노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과 취지를 달성했는지에는 의문이 많다. 박학다식을 자랑하고 있지만 언어학적으로 옳은 접근인지를 확인할 도리가 없다. 소위 ‘정치언어학’이라 표현할 수 있으려면 지금 현재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국내적인 정치현황(가령 분단이나 식민지, 독재의 역사의 잔재가 현대 한국에 미치는 영향과 영어권력의 관계 등)에 연관하여 영문법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방향제시를 했어야 옳지만 그러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필자에게 정치사상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묻고 싶을 정도이다. 그에게 정치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이 미래에 국제적으로 벋어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영어가 몹시 중요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싶다. 그만큼 언급이 없었다.
아마도 저자 신동준이 말하고 싶은 것은 ‘언어란 지금 여기서 생동하는 것이다, 현실언어가 중요하다, 또한 문법도 현실언어에 입각해 정립해야 한다, 언어를 고정적인 것으로 보진 말자’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 주제가 분명하고 옳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끌어들인 여러 가지 예들과 이론들이 적절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줄기를 제대로 잡지 않고 이것저것 많이 공부하기만 하면, 그리고 검증을 받지 않으면 공부한 물줄기는 강으로 바다로 가지 않고 엉뚱한 논밭으로 흘러들거나 심하면 가지 말아야 할 들판을 적실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제대로 줄기 잡고 공부하기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느꼈다.
제대로 공부하기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책
‘명동사’니 ‘형동사’니 하는 생격한 표현을 사용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형동사는 러시아 문법에 존재한다고 하지만, 또 동명사니 분사니 하는 표현이 일본식 영문법 표현이라 주체성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언어학자도 아닌 저자가 이런 표현을 마구 창조하거나 끌어다 쓰는 것이 바람직한지 묻고 싶다. ‘빈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말의 목적어와 영어의 목적어가 다르다는 점에서 Object를 목적어 아닌 다른 용어로 쓰고 싶어서 중국어의 빈어를 끌어왔나 보다.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이기도 하다. 우리말의 보어와 한문 문장의 보어가 다르고 문법 개념에서 어떤 공통적인 용어가 통용되지 않는 점이 이런 혼란을 일으킬 수는 있다. 하지만 문법은 일종의 법률적 약속인데 학술적 제안도 아닌 사견을 제시하는 것(검증도 되지 않은)이 옳은지 싶다. 역시 저자의 박학다식을 자랑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술자리에서 주워들은 건 많은 사람이 중구난방 떠들어대면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논박하지도 못한다. 심지어는 전문가가 있어도 그 말에 대거리를 하긴 힘들다. 왜냐하면 술이 취해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는 잘 모르는 영역이려니 하고) 혹해서 읽었던 문장들이 알고 보니 자기 도취에 빠져서 읊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이후의 저자의 모든 언술을 삐딱하게 잃고 있는 나를 발견하여 괴로웠다.
그러나 재미있었던 부분
물론 재미있게 여겨진 부분이 없지는 않다. 영어와 게르만어, 로만어의 비교와 발전과정은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중간태’, ‘아오리스트 시제(-하도다에 가깝다는 객관적인 시제를 말하는 것 같다. 영어의 현재완료형과 비슷하다나), 단수, 복수 말고 ’쌍수‘, 영어가 단어의 격(성분)을 문장 내 위치로 나타냈다는 것, 등은 신선했다.
또 영어의 굴절어미가 대거 생략된 까닭에 조동사가 꼭 필요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왜 영어는 서술어에 여러 단어가 필요한가 하는 평상시의 의문에 답이 되었다는 점에서 재미있었다. 언어에는 서열이나 우열이 없다고는 하지만 한국어의 조사 띄어쓰기가 어렵다느니, 한국어의 조사와 어미, 접사의 경계가 애매하다느니, 영어가 발음과 표기에서 원칙과 일관성이 없다느니, 영어 조동사의 쓰임이 복잡하다느니, 하는 식의 문법에서 애매하거나 불분명한 부분은 분명 있는데 여기서 그런 지적들이 등장하여 재미있게 읽었다.
그에게서 전제주의적 민족주의 냄새가 나
결미에서 저자가 ‘아멩글리시 일변도’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하는 것에는 동의한다. 국제 공용어로서의 영어의 기능은 ‘의사소통’에 있는 것이지 ‘미국인과 흡사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은 불가능하기도 할뿐더러 의미도 없다. 영어가 국제공용어인 까닭에는 물론 지금 현재 미국의 위상이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겠지만 과거 영국이 세계를 제패했던 역사도 무시 못하게 이유가 되고 양적으로는 인도 영어의 존재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계에는 다양한 영어가 존재하는 것이다. 미국사람을 만나야 하는 비즈니스맨이나 유학생이라면 미국식 영어가 필수이겠으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장은 옳되 그것으로 나아가는 정치사회학적 인식에서 저자의 사상적 공부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또한 한국이 국제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영어가 필요하다는 사고방식도 자칫 전제적인 민족주의로 나아갈 위험도 있다(위정자를 위시해 일선교사에 이르기까지 콩글리시로 천하를 평정하겠다는 발상의 대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p313 헐!). 소통의 도구로서의 영어가 공존과 공생의 도구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그러므로 올바른 영어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그런 철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영문법’을 기대했던 나의 잘못된 판단이 스스로 아쉽다. 물론, 새로운 방법으로 영어 문법을 다시 한 번 공부했다는 즐거움은 있었다. 그냥 문법공부를 하리라, 했다면 만족하고 읽었을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 뿐, 아니, 책값이 너무 비쌌을 뿐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