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 안준철의 시와 아이들 벗 교육문고
안준철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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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면서, 선생님 얼굴을 여기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얼굴이 곧 그 사람이라고 말하면 외모지상주의가 되겠지만 안준철 선생님은 얼굴이 그 분의 삶을 그대로 닮고 있다. 보통 나름 명사 소리 듣는 분이 강연장이나 모임에 나오면 그이 가까이 가서 말도 붙여보고 싶으면서도 좀 멀리, 높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인데 이 분은 우리 학교에 계신 좋아하는 선배교사 같은 느낌이 들어 알고 지낸 사람인 듯 말을 걸게 된다. 조금도 당신이 어른이라거나 명사라거나 하는 권위주의가 없다. 그 선한 미소가 사람들을 덩달아 미소짓게 만든다.

 

나도 그렇게 몇 번 뵙고 같은 '안'씨라고 송구하게도 누이 소리를 얻어듣는다. 하지만 이런 다정한 대접은 내게만 돌아온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았음에도 담임을 맡고, 오랜 시간 한결 같이 반 아이들 모두에게 생일시를 써주느라 밤을 지새우신다. 교육공동체 벗 까페

http://cafe.daum.net/communebut 에 글을 올리면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댓글을 달아주신다. 누구에게나 사랑과 관심과 칭찬을 주시지만 그 어느 것도 '의례적인 것'이라는 느낌이 없다. 한 10년 전쯤 처음 보았을 땐 그냥 시인이자 교사로서 작은 명성을 갖고 있는 분인 줄 알았다. 그분이 명성을 기리지 않고 따스함으로 주변을 물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책을 읽을 때마다, 온라인에서 만날 때마다, 직접 뵐 때마다 느낀다. 그런 선생님이 아직 우리들 학교에 계시다는 게 고맙고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안타깝다. 아름다운 평교사의 귀감이다. 아이들을 정말로 사랑하는 교사의 진정한 모습이다.

 

혼돈과 방황 속에 사춘기를 보내는 우리 학교 아이들 몇몇에게 생활상담부에서는 이 책을 읽고 독서토론을 권했다. 아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다. 우리 학교에는 왜 이런 선생님이 없냐고 안타까워하면 난 고개를 숙여야 한다. 아이들아,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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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어트 Quiet -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수전 케인 지음, 김우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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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목적과, 이 책을 선택한 목적은 ‘우리처럼 내향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우리가 스스로 잊고 산 건 아니냐구~!’ 하는 각성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국의 사례가 아니었더라면 그런 목적에 더 잘 부합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점점 미국화 되어가는 대한민국 사회에 이 책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도 할 것이다. 경쟁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 외향적인 사람들의 천국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대한민국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이나 내면 중시의 문화를 단시간에 깨뜨리는 부작용이 있었음을 고려해 본다면 요즘 왜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전형적인 외향인은 숙고보다는 행동을, 의심보다는 확신을 좋아하고, 조심하기보다는 위험을 무릅쓴다. 미국은 인격의 문화에서 성격의 문화로 전환했다. 인격의 문화에서 이상적인 자아는 진지하고, 자제력 있고 명예로운 사람이었지만 ‘성격의 문화’를 수용한 뒤로, 미국인들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조용한 학생들을 말이 많은 학생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 한국은 아직 외향적 가치가 일반화되진 않았지만 점점 외향적인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대중에게는 침묵의 문화를, 리더에게는 다변을 요구하는 사회이다. 우리에게 침묵의 리더십은 없나? 외향적 리더십이 중심이 되면서 내면을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관과 성찰을 중시하는 불교적 가치관들은 무너지고 있다. 더불어서 다변과 달변, 나아가 권모술수가 ‘리더십’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른 많은 사례처럼, 귤이 탱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외향성이나 성격의 문화가 미국에서도 부정적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아마도 20세기 미국의 발전을 이끄는 동력이 된 측면도 있을 것인데 우리나라는 그런 내실은 빼고 겉에 드러나는 측면만 유입된 경향이 있다.

 

 

기업의 리더십

훌륭한 프레젠테이션 기술과 진정한 리더십 능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

- 말은 잘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지만 좋은 아이디어는 없는 사람들이 있다.

기업들이 프레젠테 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아이디어’보다 보여지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효과적인 CEO들 중 상당수가 내향적인 사람들이다 - 빌 게이츠 등-.

미국의 금융위기의 주범들은 한 때 강력한 리더십을 가졌다고 인정받은 다변과 달변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의 강력한 리더십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게 했다. 이런 일은 사실상 미국정부도 하지 않았던가? MB는 아니었던가? 예전에는 자신이 확신하지 못하는 공약을 내세울 때의 망설임이라도 있었지만 오늘날의 소위 ‘지도자’들은 강력하게 말하면 자신도 그 말에 스스로 확신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

조용한 리더십은 없는가? 노자가 말하는 식의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을 경지의 ‘요순정치’까지는 아니어도, 또한 강력함을 발휘할 땐 발휘하더라도 그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최고의 경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수업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학교조차 외부에 보여지는 행사를 잘해내는 사람이 리더십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세상이다.

 

외향적인 관리자 + 수동적인 직원, 내향적인 지도자 + 능동적인 직원의 조합이 오후려 기업을 잘 이끌 수 있다. - 내향적인 지도자가 오히려 외향적인 직원을 잘 이끈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상황을 지배하는 데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외향적인 직원의 자발적 활동을 보장하겠지?) 기업의 리더들은 말 많은 사람뿐 아니라 잘 듣는 사람을 키울 필요가 있다.

학교도 그렇지 않을까? 관리자와 교사,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조화와 궁합은 중요하다. 어떤 경우라도 강력한 지도력을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칫 독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에서

기도란 결국 내면의 추구, 묵상이어야 하는데 공동체적 지향으로 기도의 본질을 훼손하였다. 예수나 붓다나 항상 홀로 떠나는 사람이었는데... 고요, 묵상, 이런 것들이 불가능해지고 있다. 예수를 큰소리로 사랑하지 않으면 진정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하지만 미국과 한국의 교회는 큰 소리로 복음을 논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조용히 앉아 기도하고 묵상하는 사람보다 모여서 울부짖고 헌금하고 떼로 봉사활동을 하며 사진을 찍는 무리들... 이것을 저자는 ‘공동체적 지향’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궁금하다.

 

학교에서

미국식 집단사고와 우리식 공동체 의식은 뭐가 다른가?

협력 모형은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배울 때 학습에 주인의식이 생긴다는 이론을 내세우는 진보적인 교육이론이지만 결국은 기업의 팀 문화에 따라 자신을 표현하도록 아이들을 길들이기도 한다. (근대 학교 교육의 목표가 가장 기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 ‘노동자’를 양산하는 것이었던 것과 비슷함.) 요즘은 기업계가 그룹으로 일하니까 학교에서도 그렇게 한다? 협력학습은 팀으로 일하는 기술을 향상시켜 직장생활을 잘하게 한다? 결국 기업의 이윤추구 목표에 부합하기 위해 학교에서도 협력학습을 한다는 뜻이 된다. 일본이나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배움의 공동체’, ‘협력학습’이 추구하는 바와는 많이 달라 보인다. 우리가 지향하는 ‘협력학습’은 개개인의 뛰어남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가치관에 대한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자칫 기업의 ‘팀문화’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경종이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의 학교에서 교사는 다음의 것들을 모두 학생들에게 어떻게 길러줄지를 고민해야 한다. 한 개인으로서 조화롭게 자라기, 리더십 기르기, 독창적인 사람 되기, 배려와 존중으로 어우러지기... 그 가운데 어떤 것이 혹여라도 자기의 경제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거짓 이윤논리에 놀아나는지를 경계하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능력이나 사려가 없다면 교사는 영혼 없이 학생들을 기업의 노예로 기르는 감독관에 불과한 사람이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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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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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그다지 즐겨 읽지 않는 나이지만 비교적 좋아하는 작가였던 박완서 선생. 수업 시간에는 그가 40세에 문단에 데뷔한 이야기를 종종했었다. 요즘이야 나이나 이전의 직업에 상관없이 꿈을 펼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지만 나만 해도 육아에 지치고 세월에 지치면서 세상의 상식에는 맞지 않을지라도 ‘또 다른 삶’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박완서 선생을 통해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책의 뒷부분은 주로 ‘죽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사람 이야기일 뿐이지만 연세가 많았을 때 썼기 때문인지 고인이 되신 분들에 대한 추억들이 많다. 늘 느끼는 거지만 그냥 소소한 일들인데도, 또 거창한 수사를 별로 쓰지 않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바로 옆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세밀하게 그 느낌을 살려내는지, 정말 대단한 작가이다. 법정 스님 이야기의 세세함에 놀라면서, 한편 당신 스스로도 고인이 되어버리셨는데 맑게 살다 간 이들의 하늘나라 이야기를 듣는 듯 해 마음이 찡하다.

 

기억에 남는 장면들을 파일로 메모하여 저장하는 버릇이 들었다. 책에 대한 복습을 하는 것이다. 여기도 그런 구절이 몇 있다. 내가 선생이라서 (사실 박완서 선생은 학교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는 편인데도) 당신 마당에 핀 꽃들 이름을 외우는 이유를 대면서 ‘공부 잘하는 아이, 예쁜 아이 말고도 말썽꾸러기도 선생님이 쉽게 이름을 기억해준다는 걸 알게 되면 나처럼 모든 평범한 아이는 평범 자체에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라고 썼다. 뜨끔하다. 나 역시 잘하는 아이 혹은 못하는 아이를 먼저 외우는 평범한 선생이다. 다른 선생들보다 아이들 이름을 다 외우고 늘 불러주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것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것을 많은 수업과 많은 학생 수 탓으로 돌리곤 했고, 평범한 아이들의 숨은 아픔에 대해서 교사들이 섬세하게 배려해야 한다고 늘 갈파하면서도 정작 그 아이들에게로 더 많은 관심을 보내긴 했던가... 말썽 피는 아이들 건사하느라 허덕허덕한 무능한 교사는 아니었던가... 내년 새학기에는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 ‘눈에 띄지 않는 아이들’ 이름을 먼저 외우고 들어가리라, 그들과 먼저 이야기를 나누리라, 다짐을 해 본다.

 

이건 별로 중요한 감상은 아니지만, 박완서 선생이 애주가라는 사실이 참 좋았다. 타고난 체질일 수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음주 문화’ 때문일 수도 있고, 사실은 그 분의 아픈 사연 때문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나 역시 적당히 취할 만큼의 음주를 자주 즐기는 사람으로서 어쩐지 공감이 되는 것이다. 술에 취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끄적거리는 시간이 참 좋다. 물론 식구들과 어울려서도 좋은 분위기에서 자주 마시다 보니 우리 집 아이들은 ‘술은 좋은 것’이라고 잘못된 가치관이 형성된 면도 있다. 고민은 되지만 버리기엔 아까운 즐거움이었는데, 선생의 술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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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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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 읽다가 때려쳤던 지난 번 책 이후, 그리고 ‘만들어진 신’의 중언부언에 질린 이후, 번역의 문제는 저자의 문제든 리처드 도킨스의 책은 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다시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두 가지. 개정판이 나왔다. 역자는 같은 사람이지만 번역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둔 듯 수정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이 책을 꼭 다시 읽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들이 군대에 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군대 간 지 벌 써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야 서평을 쓰니 참 오래 읽고 오래 정리하고 오래 쓰고 있다 싶다.

아들 군대 간 게 이 책이랑 무슨 상관이랴. 군대를 가겠노라 했던 그 무렵 연평도 사건이 터졌다. 불안한 마음에 나는 ‘이 정권 끝나고 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자 아이들에게 군대는 무슨 원죄처럼, 빨리 벗어버려야 하는 어떤 짐처럼, 한편 삶의 전환을 꿈꿀 때의 도피처처럼, 끈적하면서도 불안한 애착관계 같은 이상한 존재이다. 기대에 못 미치는 대학 생활 1년의 회의와 불안한 미래는 ‘이대로는 안 된다’(그럼, 군대 가면 뭐 달라지나?)는 위기의식을 갖게 했나 보다.그건 네 입장이고, 나는 어미로서 마음이 불안하다. 이 불안감의 근원이 뭔가, 자꾸자꾸 생각하다 온갖 기도와 주문으로도 가라앉지 않는 불안은 오히려 나를 쿨하게 만들었다.

‘나의 모성애는 감성이나 영혼의 영역이 아니라 과학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즉 나의 유전자가 간절히 내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걱정이 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를 객관화시킬 때 오는 편안함은 있다. 마치 나의 존재가 이 광활한 우주에서 먼지같이 미약한 존재임을 알 때,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이 가벼워짐을 느끼듯 말이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마치 종교 서적을 읽듯, 과학에 기대 불안감을 위무 받을 목적으로 읽었다는 뜻이다. 뭐, 책의 내용에서 당장 나온 것은 아니지만 암컷의 모성애가 수컷에 비해 강한 이유를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것에서 나오는 것임이 뒤에 언급된다. 자식을 키우는 데 더 많은 공력을 들이는 것이 암컷이기에 대체로 동물들 대부분이 부성애보다 모성애가 강하다는 점, 수태 기간이 짧고 생산, 양육의 과정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자식을 어떻게든 잘 보호하려는 마음이 더 크다는 점, 이 책이 아니어도 들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답이 언제 나오나 기다리는 과정에서 더 큰 위로를 받다가, 천천히 읽는 책의 진도는 어느 새 아들이 훈련소를 수료하는 시기를 따라잡지 못했고, 자대배치에 이병 적응의 시간을 겪는 동안 나는 내가 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 목적조차 잊어버렸다.

 

책 속에는 더 많은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다.

그 중 ‘이타성’에 관한 대목도 재미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은,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도 다 유전자의 이기심이 작동하는 것이라는 것이고 인간이 자식을 입양하듯 도덕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메카니즘의 작동 때문이지 결코 과학적인 행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성을 떠나 나는 아이들에게 이 책의 이야기와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에서 본 황제펭귄의 행동을 묶어 ‘협력과 배려’ ‘공존과 공생’의 중요성에 대해 들려줄 이야기를 마련했다.

돌고래는 자기 친척이 아니어도 물 속에서 숨을 못 쉬고 죽어가는 동족을 보면 힘을 합쳐 수면 위로 밀어 올린단다. 포유류인 돌고래는 일정 시간 이상 물 속에 있으면 산소가 부족해서 죽는데 가끔 어린 돌고래나 병든 돌고래가 자기 힘으로 수면 위로 떠올라 폐호흡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죽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동족 보존을 위해 같은 동족을 구조하는 행위를 하는 셈이다.

황제펭귄도 영하 50의 서식지에서 알을 낳고 살며 그 혹한을 이기기 위해 서로 어깨를 맞대로 몸을 옹송거리는데 이때 ‘허들링’이란 걸 하면서 바깥에 있는 펭귄이 조금씩 안쪽으로 자리를 이동한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밖에 있는 펭귄들이 얼어죽을 것이고 결국은 공멸로 갈 것이다.

이것이 공생을 위해 유전자가 시키는 일이라 할지라도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가 싶다. 결국 인간의 ‘복지 시스템’이라는 것도 ‘약육강식’이라는 법칙에 의해서라면 공멸할지도 모르는 인간존재에 대한 유전자의 보호 시스템이 아닐까 싶다.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빈자를 구제하지 못하면 종족 보존이 안 될 뿐 아니라 범죄와 전쟁으로 결국 공멸로 갈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복지는 동정이나 시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인 것이다.

 

새들이 배우자를 고르는 방법이 아주 재미있다. 그 세계에도 행실이 헤픈 암컷과 바람둥이 수컷이 있다. 처음에는 이들이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리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 자녀를 잘 보지 않기 때문에 이성에게 선택받지 못하게 된다. 유전자 법칙에 의해 조신한 암컷, 자상한 수컷의 유전자가 더 잘 퍼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암컷은 수컷을 고를 때 자녀를 잘 돌볼 것 같은 수컷을 고른단다. 사람도 결혼의 조건에 남자를 고를 때 우수한 자녀를 만들어 줄 이성에게 끌린다고 한다. 대부분의 여자는 건강하고 매력적인 남자를 고르지만 외모가 별로여도 똑똑한 남자 역시 여자들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유전자의 법칙 때문이 아닐까. 젊은 여자들이 멋진 남자에게 끌리다가도 결혼에 임박하여 여러 가지 조건을 따지면서 특히 자상한 남자에게 끌리는 것도 비슷한 이치 아닌가 모르겠다.

암컷 새들도 배우자를 고를 때 수태하기 전에 집이나 먹이가 준비되지 않으면 교접을 거부한단다. 우리 사회에 젊은 여자(남자도 마찬가지지만)들이 결혼을 미루거나 출산을 거부하는 것은 안전하게 자녀를 키울 조건이 안 된다는 것을 ‘몸으로’ 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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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법, 정치언어학으로 분석하다 - 언어는 질서다, 언어는 정치다
신동준 지음 / 한길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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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에서 조선조의 사대부들이 한문만 열심히 습득하고 ‘한어’는 중인 출신의 역관들이나 배우는 것으로 치부한 사실과 사어 취급을 당한 라틴어의 처지는 같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또한 이로 인한 폐해도 막심했다, 문어와 구어는 공존해야 하며 문법지식이 없는 한 아무리 말을 유창하게 할지라도 높은 수준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공감한다. 늘 우리가 배우는 영문법은 누가 정립한 것인가, 미영식 문법이 일식 문법으로 변질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은 어떻게 왜곡되었을까 궁금했다. 또한 문법이 필요하되, 독해를 위한 문법이 아니라 ‘수험을 위한 문법으로 변질되는 과정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아직도 학원가에는 80년대의 맨투맨과 성문기초, 성문기본을 가르치고 있다.

 

정치언어학, 아무 데나 갖다 붙이지좀 말라~!

글쓴이의 취지는 한국이 향후 다방면에서 세계시장을 석권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영어를 제대로 구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을 위한 새로운 영문법이 필요하다, 정치언어학적으로 한국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영어가 필요하고, 영어를 잘 습득하기 위해서 올바른 영문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인 듯하다. 또한 이 책이 비교언어학적으로 역사언어학적으로 영문법을 재정립한 최초의 책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종으로 횡으로, 동서와 고금을 아우르는 영문법책을 썼노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과 취지를 달성했는지에는 의문이 많다. 박학다식을 자랑하고 있지만 언어학적으로 옳은 접근인지를 확인할 도리가 없다. 소위 ‘정치언어학’이라 표현할 수 있으려면 지금 현재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국내적인 정치현황(가령 분단이나 식민지, 독재의 역사의 잔재가 현대 한국에 미치는 영향과 영어권력의 관계 등)에 연관하여 영문법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방향제시를 했어야 옳지만 그러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필자에게 정치사상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묻고 싶을 정도이다. 그에게 정치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이 미래에 국제적으로 벋어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영어가 몹시 중요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싶다. 그만큼 언급이 없었다.

 

아마도 저자 신동준이 말하고 싶은 것은 ‘언어란 지금 여기서 생동하는 것이다, 현실언어가 중요하다, 또한 문법도 현실언어에 입각해 정립해야 한다, 언어를 고정적인 것으로 보진 말자’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 주제가 분명하고 옳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끌어들인 여러 가지 예들과 이론들이 적절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줄기를 제대로 잡지 않고 이것저것 많이 공부하기만 하면, 그리고 검증을 받지 않으면 공부한 물줄기는 강으로 바다로 가지 않고 엉뚱한 논밭으로 흘러들거나 심하면 가지 말아야 할 들판을 적실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제대로 줄기 잡고 공부하기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느꼈다.

 

제대로 공부하기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책

‘명동사’니 ‘형동사’니 하는 생격한 표현을 사용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형동사는 러시아 문법에 존재한다고 하지만, 또 동명사니 분사니 하는 표현이 일본식 영문법 표현이라 주체성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언어학자도 아닌 저자가 이런 표현을 마구 창조하거나 끌어다 쓰는 것이 바람직한지 묻고 싶다. ‘빈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말의 목적어와 영어의 목적어가 다르다는 점에서 Object를 목적어 아닌 다른 용어로 쓰고 싶어서 중국어의 빈어를 끌어왔나 보다.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이기도 하다. 우리말의 보어와 한문 문장의 보어가 다르고 문법 개념에서 어떤 공통적인 용어가 통용되지 않는 점이 이런 혼란을 일으킬 수는 있다. 하지만 문법은 일종의 법률적 약속인데 학술적 제안도 아닌 사견을 제시하는 것(검증도 되지 않은)이 옳은지 싶다. 역시 저자의 박학다식을 자랑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술자리에서 주워들은 건 많은 사람이 중구난방 떠들어대면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논박하지도 못한다. 심지어는 전문가가 있어도 그 말에 대거리를 하긴 힘들다. 왜냐하면 술이 취해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는 잘 모르는 영역이려니 하고) 혹해서 읽었던 문장들이 알고 보니 자기 도취에 빠져서 읊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이후의 저자의 모든 언술을 삐딱하게 잃고 있는 나를 발견하여 괴로웠다.

 

그러나 재미있었던 부분

물론 재미있게 여겨진 부분이 없지는 않다. 영어와 게르만어, 로만어의 비교와 발전과정은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중간태’, ‘아오리스트 시제(-하도다에 가깝다는 객관적인 시제를 말하는 것 같다. 영어의 현재완료형과 비슷하다나), 단수, 복수 말고 ’쌍수‘, 영어가 단어의 격(성분)을 문장 내 위치로 나타냈다는 것, 등은 신선했다.

또 영어의 굴절어미가 대거 생략된 까닭에 조동사가 꼭 필요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왜 영어는 서술어에 여러 단어가 필요한가 하는 평상시의 의문에 답이 되었다는 점에서 재미있었다. 언어에는 서열이나 우열이 없다고는 하지만 한국어의 조사 띄어쓰기가 어렵다느니, 한국어의 조사와 어미, 접사의 경계가 애매하다느니, 영어가 발음과 표기에서 원칙과 일관성이 없다느니, 영어 조동사의 쓰임이 복잡하다느니, 하는 식의 문법에서 애매하거나 불분명한 부분은 분명 있는데 여기서 그런 지적들이 등장하여 재미있게 읽었다.

 

그에게서 전제주의적 민족주의 냄새가 나

결미에서 저자가 ‘아멩글리시 일변도’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하는 것에는 동의한다. 국제 공용어로서의 영어의 기능은 ‘의사소통’에 있는 것이지 ‘미국인과 흡사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은 불가능하기도 할뿐더러 의미도 없다. 영어가 국제공용어인 까닭에는 물론 지금 현재 미국의 위상이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겠지만 과거 영국이 세계를 제패했던 역사도 무시 못하게 이유가 되고 양적으로는 인도 영어의 존재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계에는 다양한 영어가 존재하는 것이다. 미국사람을 만나야 하는 비즈니스맨이나 유학생이라면 미국식 영어가 필수이겠으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장은 옳되 그것으로 나아가는 정치사회학적 인식에서 저자의 사상적 공부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또한 한국이 국제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영어가 필요하다는 사고방식도 자칫 전제적인 민족주의로 나아갈 위험도 있다(위정자를 위시해 일선교사에 이르기까지 콩글리시로 천하를 평정하겠다는 발상의 대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p313 헐!). 소통의 도구로서의 영어가 공존과 공생의 도구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그러므로 올바른 영어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그런 철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영문법’을 기대했던 나의 잘못된 판단이 스스로 아쉽다. 물론, 새로운 방법으로 영어 문법을 다시 한 번 공부했다는 즐거움은 있었다. 그냥 문법공부를 하리라, 했다면 만족하고 읽었을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 뿐, 아니, 책값이 너무 비쌌을 뿐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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