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어트 Quiet -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수전 케인 지음, 김우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쓴 목적과, 이 책을 선택한 목적은 ‘우리처럼 내향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우리가 스스로 잊고 산 건 아니냐구~!’ 하는 각성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국의 사례가 아니었더라면 그런 목적에 더 잘 부합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점점 미국화 되어가는 대한민국 사회에 이 책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도 할 것이다. 경쟁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 외향적인 사람들의 천국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대한민국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이나 내면 중시의 문화를 단시간에 깨뜨리는 부작용이 있었음을 고려해 본다면 요즘 왜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전형적인 외향인은 숙고보다는 행동을, 의심보다는 확신을 좋아하고, 조심하기보다는 위험을 무릅쓴다. 미국은 인격의 문화에서 성격의 문화로 전환했다. 인격의 문화에서 이상적인 자아는 진지하고, 자제력 있고 명예로운 사람이었지만 ‘성격의 문화’를 수용한 뒤로, 미국인들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조용한 학생들을 말이 많은 학생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 한국은 아직 외향적 가치가 일반화되진 않았지만 점점 외향적인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대중에게는 침묵의 문화를, 리더에게는 다변을 요구하는 사회이다. 우리에게 침묵의 리더십은 없나? 외향적 리더십이 중심이 되면서 내면을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관과 성찰을 중시하는 불교적 가치관들은 무너지고 있다. 더불어서 다변과 달변, 나아가 권모술수가 ‘리더십’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른 많은 사례처럼, 귤이 탱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외향성이나 성격의 문화가 미국에서도 부정적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아마도 20세기 미국의 발전을 이끄는 동력이 된 측면도 있을 것인데 우리나라는 그런 내실은 빼고 겉에 드러나는 측면만 유입된 경향이 있다.

 

 

기업의 리더십

훌륭한 프레젠테이션 기술과 진정한 리더십 능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

- 말은 잘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지만 좋은 아이디어는 없는 사람들이 있다.

기업들이 프레젠테 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아이디어’보다 보여지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효과적인 CEO들 중 상당수가 내향적인 사람들이다 - 빌 게이츠 등-.

미국의 금융위기의 주범들은 한 때 강력한 리더십을 가졌다고 인정받은 다변과 달변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의 강력한 리더십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게 했다. 이런 일은 사실상 미국정부도 하지 않았던가? MB는 아니었던가? 예전에는 자신이 확신하지 못하는 공약을 내세울 때의 망설임이라도 있었지만 오늘날의 소위 ‘지도자’들은 강력하게 말하면 자신도 그 말에 스스로 확신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

조용한 리더십은 없는가? 노자가 말하는 식의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을 경지의 ‘요순정치’까지는 아니어도, 또한 강력함을 발휘할 땐 발휘하더라도 그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최고의 경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수업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학교조차 외부에 보여지는 행사를 잘해내는 사람이 리더십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세상이다.

 

외향적인 관리자 + 수동적인 직원, 내향적인 지도자 + 능동적인 직원의 조합이 오후려 기업을 잘 이끌 수 있다. - 내향적인 지도자가 오히려 외향적인 직원을 잘 이끈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상황을 지배하는 데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외향적인 직원의 자발적 활동을 보장하겠지?) 기업의 리더들은 말 많은 사람뿐 아니라 잘 듣는 사람을 키울 필요가 있다.

학교도 그렇지 않을까? 관리자와 교사,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조화와 궁합은 중요하다. 어떤 경우라도 강력한 지도력을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칫 독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에서

기도란 결국 내면의 추구, 묵상이어야 하는데 공동체적 지향으로 기도의 본질을 훼손하였다. 예수나 붓다나 항상 홀로 떠나는 사람이었는데... 고요, 묵상, 이런 것들이 불가능해지고 있다. 예수를 큰소리로 사랑하지 않으면 진정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하지만 미국과 한국의 교회는 큰 소리로 복음을 논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조용히 앉아 기도하고 묵상하는 사람보다 모여서 울부짖고 헌금하고 떼로 봉사활동을 하며 사진을 찍는 무리들... 이것을 저자는 ‘공동체적 지향’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궁금하다.

 

학교에서

미국식 집단사고와 우리식 공동체 의식은 뭐가 다른가?

협력 모형은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배울 때 학습에 주인의식이 생긴다는 이론을 내세우는 진보적인 교육이론이지만 결국은 기업의 팀 문화에 따라 자신을 표현하도록 아이들을 길들이기도 한다. (근대 학교 교육의 목표가 가장 기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 ‘노동자’를 양산하는 것이었던 것과 비슷함.) 요즘은 기업계가 그룹으로 일하니까 학교에서도 그렇게 한다? 협력학습은 팀으로 일하는 기술을 향상시켜 직장생활을 잘하게 한다? 결국 기업의 이윤추구 목표에 부합하기 위해 학교에서도 협력학습을 한다는 뜻이 된다. 일본이나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배움의 공동체’, ‘협력학습’이 추구하는 바와는 많이 달라 보인다. 우리가 지향하는 ‘협력학습’은 개개인의 뛰어남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가치관에 대한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자칫 기업의 ‘팀문화’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경종이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의 학교에서 교사는 다음의 것들을 모두 학생들에게 어떻게 길러줄지를 고민해야 한다. 한 개인으로서 조화롭게 자라기, 리더십 기르기, 독창적인 사람 되기, 배려와 존중으로 어우러지기... 그 가운데 어떤 것이 혹여라도 자기의 경제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거짓 이윤논리에 놀아나는지를 경계하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능력이나 사려가 없다면 교사는 영혼 없이 학생들을 기업의 노예로 기르는 감독관에 불과한 사람이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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