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수인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주원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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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를 읽는 내내 그 신비로운 분위기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결국 서평을 쓰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무덤과 같은 옛 책들의 높은 서가, 바르셀로나의 돌 깔린 거리들, 끔찍하고 아르다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려있는 고택들... 그런 이미지들은 가득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줄거리는... 그리고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일단 기억하고 정리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이야기들 중 중심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었다. 그리고 분명 중요한 역사적 시기와, 그 시기를 살던 사람들의 아픔과 정치적 악행이 담겨있음에도 그것을 거시적으로 통찰해줄 철학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비록 서평을 쓰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바람의 그림자>가 주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너무나 그리워서(그러니까 뭐랄까, 서사보다도 서정이 더 강한 느낌, 마치 시를 읽고 난 것같은 느낌이 좋았다고나 해야 할까) 결국 영문판 책을 샀다. 원어로 읽으면야 더 좋겠지만 스페인어를 모르니 할 수 없이 영문으로... 그렇다고 영어를 술술 읽는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한국어로 다시 읽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그 분위기에 근접할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진도는 별로 나가지 않지만 지난 번 읽은 <더 리더>처럼 그냥 읽는 게 아니라 번역본을 남길 생각이다. 아주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내가 처음 번역에 손을 댄 작품이 될 것이리라 믿는다. 그리고 번역이 끝나면 서평도 쓸 수 있겠지.

 

그러던 중, 그렇게 어렵사리 다시 <바람의 그림자>를 읽던 중, <천국의 수인>이 나왔단다. 표지는 전작에 못 미치지만, 여전히 람블라 거리쯤으로 보이는 비에 젖은 돌과 가로등이 묘한 그리움을 부른다. 그러고 보니 사폰의 '문체'가 좋았던 것도 같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작품에 빠져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결과는? 역시, 줄거리가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왜 루이스 사폰에게는 독재정치의 어두운 역사가 그냥 배경사진처럼 해석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정치나 역사는 다양한 시공간에서 반복 변주된다고 보는 사람들 중에는 그것에 거리를 두고 '쿨'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쩌면 이 저자도 그런지 모르겟다. 나처럼 매 사안마다 눈물을 흘리고 분개하고 거리에 나가는 사람과는 좀 다른 부류인지도 모른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면서도, 영화를 만든 사람이 역사적 사건이나 정치적 아픔을 다루면서도 거리를 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비슷한 시기에 읽은 <천국의 수인> 역시 그러했다. 역사는 겉돌면서 그 안에 담긴 고뇌와 사랑, 같은 좀더 원초적인 것들에 집중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더 좋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처럼 그래서 아쉬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게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다른 것이다. 작가가 '글쓰는 이'로서 작품에 진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부분.. 주인공인 다니엘의 어머니를 죽이고 결국 나중에 문화부 장관이 되는 악당 교도소장 발스에 대한 부분이다. 소설가로서 다니엘의 어머니를 사랑한(어쩌면 다니엘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의심되었던) 다비드 마르틴에 대한 열등감으로 마르틴을 괴롭혔던 그가 결국 시기심에 못이겨 진정한 작가라 할 수 있는 이를 죽게 만들고 나중에는 '문화의 아이콘' 노릇을 하게된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에겐 문화예술인 출신의 장관조차 드물긴 하지만, 어쩌다 그런 지위에 오른 자가 있더라도 진정한 예술성 때문이 아니라 소위 '명성' 때문인 경우를 많이 보지 않는가. 문화권력으로서 그가 행한 악행은, 소설 속에서 묘사된 것만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문화현장에서도 곳곳에서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들은 어느 현장이나 비슷하게 일어날 수 있다. 수업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아이들을 사랑하지도 않았던 교사가 교장이 되는 학교, 신실한 신앙심을 가진 이가 종교의 수장이 되지는 않는 현실... 리더가 된다는 것이 정신적 귀감이 되는 일 말고도 실제의 행정을 잘해낼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게 현실이라고 인정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발스를 보면 그래, 그건 독재정권 직후의 스페인만의 문제는 아니었구나 공감되는 바가 참으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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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
조너선 코졸 지음, 김명신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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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서 읽었는데 누군가 연필로 밑줄을 쳐놓은 흔적이 있는 게 아닌가. 교사가 빌렸을 텐데 밑줄을 치다니? 하면서도 그 부분을 읽어 보았다. 기억하고 싶은 급한 마음이었을 터일 텐데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제가 저희 반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했던 것은 너희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선생님이 자유롭게 계속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란다면 교장선생님이 특별하게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에서 나무랄 데 없이 잘 해야 한다.”

이 일로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어떤 교사가 학교에서 정한 교육적 관례에 이의를 제기하려면 우선 학교 관리진이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다른 관행에 잘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너선 코졸을 좋아하는 면 중 하나는 그가 매우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지혜로운 교사이고 지도자라는 점이다. 위의 구절도 그런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좀 씁쓸했다. 이 책을 빌려갔던 어떤 교사 - 나의 동료교사 혹은 후배교사일 그...-는 코졸의 실천성을 읽기보다 현실과 타협하는 방법에만 주목한 것일까?

 

우리나라에도 실천성을 담보한 좋은 교사 출신 운동가가 꽤 있다. 저술이나 강의로 멘토 역할을 하는 사람이 적은 것은 우리 교사운동의 한계를 보여주지만 앞으로는 아마도 그런 방향으로도 많은 분들이 활약을 하시리라. 아직 우리에게는 '정치투쟁'이 교육 문제 해결에 더 유효했기에 많은 교사운동가들이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언급하고 싶다. 조너선 코졸은 우리에게 별로 없는, 교사들이 학교 현장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활동가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그는 거시적인 실천에만 앞장서는 사람이 아니다. '천상 교사'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예뻐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상적인 교사의 조건에 학교와 사회를 이상적인 곳으로 바꾸려는 변혁의 의지와 능력, 학교 현장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려는 의지와 능력, 철학 있는 수업을 구성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과 깊이, 수업을 잘할 수 있는 기술적 능력과 지적 수준 등도 있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변화 발전의 가능성을 믿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그들의 행보를 기다리며 지켜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그 모두를 갖춘 사람으로 보인다. 교사가 이 모두를 가질 수 없다면 적어도 교사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만이라도 가져야 한다. 혹은 거꾸로, 저 모두를 가지고 있다 해도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는 교사를 하지 말하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공립학교 붕괴는 남의 일이었다. 적어도 2008년 이전에는.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일제고사를 시행하고 자율형 사립학교를 세우면서 많은 이들은 우리도 미국꼴이 날 것이라고 걱정했다. 걱정은 5,6년만에 현실이 되고 있다. 조너선 코졸이 지적하는 학업성취도를 중시하는 미국 공립학교의 문제, 사립학교로 특화되어 상대적으로 슬럼화되는 공립학교의 문제, 학교가 거대해지면서 아이들은 쓰레기 취급받는 문제들이 우리나라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아래 글에 나타난 '운동장을 없애고 휴식시간을 없앤 이야기는 학업성취도 평가가 시행된 초기, 쉬는 시간 10분을 5분으로 줄이겠다고 난리를 폈던 우리나라의 어떤 초등학교 이야기와 묘하게 오버랩된다.  

 

수많은 도심의 공립학교는 성취도 평가를 통해 성취도가 낮은 학교라는 딱지가 붙을 것이다. 지원금 삭감을 포함한 제재를 받게 될 것이므로 사설 시험 준비기관에 돈을 내고 학생들에게 시험 준비를 시켜 줄 것을 의뢰한다. 이렇게 시험 준비에 더 많은 비용을 들이게 되면서 교수활동을 위해 쓸 수 있는 자금이 줄어든다.

시험을 잘 보는 기술을 연습시키느라 정작 교과내용 수업에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기도 한다. 심지어 시험준비 시간을 위해 아이들 휴식 시간을 빼앗기도 한다(애틀란타에서는 계획적으로 아이들이 놀 시간을 줄이기 위해 운동장을 만들지 않는다. 시키고의 성적 좋은 부촌의 몇몇 학교를 빼고는 휴식시간을 없애버렸다).

 

또 다음은 코졸이 지적한 미국 바우처 제도의 맹점인데, 한때 '방과후학교 활성화를 위한 각종 지원금과 제도가 학교 현장을 휩쓸었을 때가 떠올라 씁쓸하게 읽힌다. 바우처 제도를 위해 내려온 돈을 써야 해서 학급마다 집은 어려운데 방과후학교를 신청하지 않은 아이들을 '색출'하고 방화후수업을 신청하라고 설득하느라 담임들이 애를 먹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는 단순하게 그래도 집 어려운 아이들에게 무료로 공부할 기회를 주려는 제도이니 좋은 거지, 라고 생각했는데 본질적으로는 결국 자신들의 성과를 위해 예산을 쓰는 일에 불과하고, 가난한 아이들이 정당히 받아야 할 세금의 혜택을 '성취도평가' 혹은 특정학교 살리기에 쓴 잘못된 제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우처 제도의 맹점

표준화 시험(성취도 평가)로 인해 교육계가 시장 경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우처 제도.

이들은 공립학교의 실패와 불평등한 분리 교육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바우처 제도 등을 도입하여 마치 가난한 집 아이도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난한 집 부모 역시 극소수이다. 가난한 아이들 부모 중에서도 바우처 제도 등을 이용할 수 있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아니다.

헤드스타트(취학 전 빈곤층 교육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조차 극소수이다.

학교 선택권을 가질 수 있는 빈곤층 학부모는 극히 일부분이고 정부나 교육당국의 선전효과만 높다, 결국 학교 당국의 선택권만 넓어질 뿐(우리의 자사고에도 사회적배려자 전형이 있지만 선전하고 난 후 그 아이들은 대개 부적응하고 전출가는 경우가 많다).

바우처 옹호자들의 주장(학교 민영화를 지지하는 세력) - 사립학교나 혼합형 학교의 성취도가 더 높다는 주장을 한다. 바우처 자금은 학업성취도에만 맞춰진 측면이 있다,

 

조너선 코졸은 또한 '미니학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유치원~ 8학년 과정의 학교에서는 고학년이 보조교사 역할을 하면서 자기성장이 가능한 학교이다. 아이들이 '선배가 되면서 저학년을 위한 보조교사 역할을 한다는 발상이 참신하다. 나는 수업 중에 협동학습을 통해 조금 먼저 이해한 아이들이 친구들을 가르쳐 주는 방식을 활용하는데 코졸의 발상은 그것을 학교 전체로 확대시키는 양상이다. 친구나 후배를 '가르쳐주는' 방식은 도움을 받는 아이에게도 좋지만 가르치는 아이도 성장시킨다. 다만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학교나 교실의 인원이 적어져야 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코졸은 미국 공립학교가 대형화하는 것을 경계한다.

 

내가 정작 좋아하는 부분은 "교육과정과 규칙 규준 목록과 외부에서 정한 교육방법 등이 아무리 훌륭하고 현명해 보인다 해도 교사와 학생 사이의 공감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와 같은 구절, 그리고 다음과 같은 수업 장면이다. 나 역시 온갖 정책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머리가 복잡하지만, 아이들과 어떻게 수업을 하고 학급운영을 할까 구상할 때 가장 행복하고, 그것이 현장에서 따뜻하게 구현되는 과정의 행복감 때문에 학교를 견뎌올 수 있었던 사람이다. 이 책에서 제일 좋았던 장면 중 하나는 다음 수업장면이다.

 

코졸이 랭스턴 휴즈의 시집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대부분이 흑인 아이들이었던 교실에서는 어, 지은이가 흑인이네!" 하는 술렁임이 일었다. 휴즈의 시 중 <지연된 꿈A Dream Deferred>을 읽어주자 한 아이가 다가와 어머니께 보여드리게 그 책을 빌려줄 수 있겠냐고 부탁하고 다음 날 그 시을 외웠다며 반 아이들에게 읊어주었다....

아이들에게 흑인이 쓴 책을 보여주고 싶었던 교사의 열망, 아이들에게 누더기가 아닌 새 책을 읽게 해 주고 싶던 열망을 절절하게 말하지만 젊은 시절의 조너선 코졸은 이 일로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다(교육과정을 위반했다고...). 교육과정에 없는 프루스트의 시를 읽어주었을 때는 칭찬했던 교장이 랭스턴의 시를 읽어주었다고. 어이없는 미국 교육현장이라고? 우리에게는 통일을 가르쳤다고 탄압받거나 학교에서 쫓겨났던 교사들은 없었는가? 꽉 막힌 이념 혹은 편견의 벽을 부수는 일은 미국 교사에게나 한국 교사에게나 고난의 길이다. 하지만 그런 작은 문제에 대한 큰 희생을 감내한 싸움들이 쌓이고 쌓여 그나마 부자들을 위한 교육당국의 전횡을 조금씩이나마 막아내는 것이다. 남의 나라 교육 이야기지만, 그리고 바로 지금, 최근의 이야기도 아니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 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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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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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 어린 늑대와 강아지들>을 내고 난 후, 책의 마케팅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된다. 사람의 가치도 그렇지만,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나온 것들은 마케팅과 포장의 힘으로 그 가치가 더 살아나기도 하고 말기도 한다는 것.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좋은 가치관을 지녔고, 잘 읽히는, 잘 쓰여진 책이다. 제목이 그럴 듯하게 자 지어진 덕에 좋은 책이 묻힐 염려도 없다. 방학 내내 식탁에서 야곰야곰 읽으면서 행복했다.

만화책 좋아하는 남편이 생일선물로 받은 <현미선생>을 다 읽은 직후인지라 아, 이본에도 이렇게 흙과 자연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따뜻한 마음이 들어 좋았다. 글이나 사진이 간결하고 어여쁜 것이, 그들이 만드는 담백한 빵처럼, 소박하게 만든 고급스러운 여성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읽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져 일부러 천천히 읽었다. 빵집이 있는 시골마을을 들여다 본듯 사진도 어여쁘고 주인장의 가족도 사랑스럽다.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전통의 자취도 아름답다.

 

 다만, 어째 이 책이 이토록 언론의 주목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아한 면이 있다. 이 책이 표방하는 가치대로라면 조용히 입소문으로 읽히고 퍼져야 더 어울린다. 그런데 미리 주요 일간지들에 소개가 되고 작가 인터뷰들이 실렸다..... 뭐 자본론을 언급하고 이윤추구를 하지 않는다 했으면서 자본주의적 유통방식으로 책이 알려지고 팔린다는 점이 좀 걸린다. 노력하면 더 잘 팔릴 수 있는 책들도 자본과 타협하지 않겠노라고 '작게 낮게 느리게'를 표방하는 출판사들도 있는데 말이다.

 

이윤을 추구하지 않느다는 말은 '돈을 더 벌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 벌려고 노력하는 마음을 갖는 순간부터 욕심이 끼어들면 초심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 마음에 동의하고 말고는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부패'에 대한 생각은 공감하는 바가 많다. 우리는 흔히 '부패'와 '발효'는 인간의 입장에서 유용한가 아닌가를 따지며 다르다고 말하지마 근본적으로 생명의 전환이라는 면에서는 같다. 부패하지 않음은 순환하지 않음을 뜻한다. 큰 의미에서 자연은, 개체의 죽음들 앞에서도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부패의 순환논리' 인 것이다. 그 의미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는 면에서 이 책의 미덕을 높이 살 수 있다. 아이들과 핵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자주 보여주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부해'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한 것도 좋았다. 핵 이후의 지구와 인류는 암담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지구의 지혜라면어떤 대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절박함이 '부해'라는 존재를 상상하게 했다. 만화영화는 나우시카의 존재와 더불어 '부해'를 제시함으로써 그나마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핵은 닮은 점이 많다. 참으로 근시안적이고 이기저이라는 점에서. 그러나 저자처럼 작은 움직임 속에서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생명을 조화시킬는 사람은, 지금은  소수처럼 보여도 매우 많다. 우리 나라에서도 곳곳에서 작은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다. 생협, 유기농사, 동네 도서관, 각종 소모임들... 지역에서 자가경제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들.... 거시 정치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런 작은 움직임들은 따로이면서 또 같이 언제인가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길어진 꼬리가 몸통을 움직이는 날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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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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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서 보는 히말라야는 푸르고 맑다. 언젠가 저 곳에서 죽는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등산을 질색하는 내가 그곳에 갈 기회가 있을까?

여행기가 좋은 점은 발에 물집 잡히지 않고 여행의 달콤함만 쏙 빼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행기를 즐겨 읽는지도 모르겠다. 머리에 무슨  빡빡하고 무거운 논리들만 꽉 차 있을 때, 비타민이 필요하기에 시를 읽고 무기질이 필요해서 소설을 찾는 것처럼, 영혼의 휴식이 필요할 때는 여행기를 찾아 읽는다. 실제로 여행도 좋아하지만 여행기를 읽는 일이 때로는 여행보다 더 좋다.

 

물론 히말라야를 등반할 일은 내 생에 없을 것 같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다른 독자들이 즐겁게 읽었다고 하지만) 등반을 상상하며 힘들었다. 평지를 하루 종일 걷는데도 견디기 힘들 저질체력을 지닌 나로서는 높은 산을 오르는 일은 상상도 하기 힘드니까. 사실 이 여행기는 몸은 오르지 않아도 눈으로만 히말라야를 오르고 싶은 사람에게 즐거운 책일 수도 있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정유정의 체력이 부러웠을 뿐이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은 약간의 대리만족 이외에 많은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밤중에 홀로 산을 오르는 그의 근성을 배우고 싶은 마음을 얻어간다.

 

그런데도 나는 어제 꿈에 히말라야에 갔다. 산에 오른 것이 아니고  작은 풀들이 깔린 나즈막한 초원과 마을길을 지난 것으로 보아 하산 후의 어느 마을 풍경쯤을 걸었나 보다. 아마도 나는 등반을 생략한 네팔의 마을을 탐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어떤가 싶다. 누구나 자기의 여행 스타일이 있고 다른 이의 여행방법에 대해 '그게 무슨 여행이랴?'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휴양이든 안식이든, 열정의 실험이든 자기 방식이 중요하다고 본다. 누군가에게는 한 번쯤 올라야 할 산 정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현지사람과 현지음식의 경험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누군가는 단지 그 하늘을 만나러 가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여행기는 당분간 꽤나 좋은 아이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여행기가 너무 범람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다. 시인도 소설가도 일반인도 너도나도 여행기를 쓰는 시대라고 시큰둥하게 생각했지만 여행을 다녀오면 누구라고 쓰고 싶고,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누군가 쓴 여행기를 읽고 싶고, 언젠가 어디론가 가고 싶은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라면 여행기는 대체로 매력적인 책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 읽으면 더 좋고, 아무도 읽지 않아도 나만의 기록으로도 좋은 여행기는 그래서 앞으로 당분간 오래도록 서점에 한 코너를 꾸준히 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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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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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였다. 그때 죽음은 내게 참 먼 주제였다. 그냥 '생각할 거리'였을 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결국, 육체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적'사고를 기준으로, 영혼이라는 신비한 존재를 부정하는 결론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렇게 자잘한(좋게 말하면 치밀하고,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디테일한)  단계를 밟아나가야만 하는 걸까, 생각하다가, 그래, 대학 교양과목이라면 대상이 아직 논리구조가 잡히지 않은 어린 학생들일 터이니 이런 구체성이 필요할 것이며, 게다가 매 강의를 모아놓은 것이라지 않는가, 그러니 이해하자, 하고 조금은 견디며 읽어나갔다.

지루하긴 해도 책에서 얻을 것도 많았다. 나는 방과후수업이나 학교 특별활동 시간에'토론'반을 자주 운영하고 수업 중에도 토론수업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 책 속에서 제시되는 딜레마적 논제들은 토론에 활용하면 좋을 듯 싶은 것이 많다.

 

특히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꼭 죽음에 맞닥뜨리지 않아도 나의 몸과 정신의 정체를 생각해 보게 한는 명제를 많이 던져준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 책에서 제시되었던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게 한 후 그것들을 모아 글을 쓰게 하고 두레별로 토론을 시킬 작정이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 영혼은 있을까?

- 나의 영혼은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 육체와 영혼 중 무엇이 더 나의 본질일까?

- 나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은 무엇무엇이 있을까? - 몸, 생각, 느낌, 감각, 직관, 경험, 판단, 습관, 주변환경, 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나 가족, 장래에 대한 희망이나 계획, 사회적 지위, 매력, 전망....

- 지금의 나와 10년 전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 나는 죽은 후 어찌 될 것인가?

 

등등... 중구난방이긴 하지만 이런 질문들을 통해 과연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고, 궁극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도 찾아보고 싶다. 그렇게 의미있는 주제로 나아가기 전, 그저 논쟁을 위한 논쟁만을 펼쳐도 시간이 꽉 찰 것이다.

하여간 글 자체가 지나치게 자세하고 지루한 느낌은 있어도 이야기할 거리를 얻어서 나름대로 귀하여 여기고 있던 중, 이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올 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뉴스 속에서 만나는 무수한 죽음들, 공감의 영역이 좀더 치밀한 문학이나 영화 속에서의 죽음들도 이렇게 피부에 와닿은 적은 없다. 아마도 단원고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둔 사람들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억울하고 원통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통곡이 터져나오는 기이한 경험을 100일도 더 지난 지금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5월 26일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0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져 거의 몸만 살아 있던 세월을 살았던 아버지, 그러니까 진정한 아버지는 10년 전 돌아가신 것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뇌의 좌반구가 하얗게 죽어 달변의 혀를 묶어버렸고 입으로 음식을 넘기지도 못하고 하루의 반 이상을 잠으로 보내야 했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어쩌면 아빠는 당신만의 꿈의 영역을 무언으로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었다. 낭만주의자였으니까. 그러나 그런 상상은 곧 깨어졌다. 뇌의 좌반구가 죽어 언어능력을 상실하면 그 언어로 할 수 있는 사고능력도 상실한단다. 그러니까 아빠는 그냥 하얀, 아무 생각이 없는 나날을 보내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우리 곁을 떠나가실 때, 저렇게 고통을 겪을 바에는 얼른 떠나시게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존감을 다 버리고 남의 손에 의해 목숨을 연명했다는 사실을 아빠도 많이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남은 생을 다 희생해야 하는 엄마를 위해서도 아버지가 떠나는 일은 슬퍼할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가끔 생각한다. 좋은 아버지, 다정한 아빠인 적도 없었는데 왜 이렇게 그립고 아쉬운 것일까. 이미  10년 전부터 대화도 나눌 수 없었던 아버지에게 무슨 미련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도. 단지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진다. 아, 죽음은 그런 것인가 보다. 이 영원한 단절감... 49재를 지내고 돌아오면서, 아버지는 이제 진짜로 이승을 떠나셨대, 이렇게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정녕 아버지의 영혼이 있어 어디론가 갔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절에서 제를 지내며 무수히 읽었던 천수경 속의 그런 세계?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전에는 막연하게 죽음 너머에 무언가 반드시 있을 것만 같고 환생이나 윤회도 가능할 것만 같았는데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런 '희망'은 점점 옅어진다. 그리고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나도 언젠가, 어쩌면 머지 않아 죽을 것인데, 나는 늙음과 죽음을 겁낸 적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왔는데,어쩌면 죽음 너머 무언가 있다는 확신 때문에 그랬던것은 아닐까? 점점 그런 세상은 결코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면서 나의 죽음이 너무나 가깝게, 두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쩌면 셀리 케이건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논리적으로라면, 영혼이라는 것은 없다. 육신은 동력이고 원천이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그럴 듯하게 부르는 것은 뇌의 작용의 총합 혹은 신비화된 표현이다. 착한 영혼을 지녔던 사람도 아프고 난 후 강퍅해지는 일이 있다. 나도 수십년간 다듬어온 인격이 제대로 발현하려면 아프지 않아야 한다. 극단에 처하고도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다는 일이 쉽지 않다. 이런 생각은 또 바뀔지도 모른다. 죽는 날까지 수많은 사유가 나를 사로잡고 방황하게 하리라. 정립되어 철학이 될 만한 무엇을 가진다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죽는 날까지 고민하고 방황하는 '영혼'으로 남고 싶다. 내 죽음을 어떻게 맞아도 그 이후에 무엇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도정일의 표현대로, 삶이란 것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에,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살 일이다. 무엇이 남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무엇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허무가, 그래서 단 한 번 사는 이 생에 최선을 다하게 한다는 결론으로, 공허하기 짝이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살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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