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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평점 :
화면에서 보는 히말라야는 푸르고 맑다. 언젠가 저 곳에서 죽는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등산을 질색하는 내가 그곳에 갈 기회가 있을까?
여행기가 좋은 점은 발에 물집 잡히지 않고 여행의 달콤함만 쏙 빼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행기를 즐겨 읽는지도 모르겠다. 머리에 무슨 빡빡하고 무거운 논리들만 꽉 차 있을 때, 비타민이 필요하기에 시를 읽고 무기질이 필요해서 소설을 찾는 것처럼, 영혼의 휴식이 필요할 때는 여행기를 찾아 읽는다. 실제로 여행도 좋아하지만 여행기를 읽는 일이 때로는 여행보다 더 좋다.
물론 히말라야를 등반할 일은 내 생에 없을 것 같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다른 독자들이 즐겁게 읽었다고 하지만) 등반을 상상하며 힘들었다. 평지를 하루 종일 걷는데도 견디기 힘들 저질체력을 지닌 나로서는 높은 산을 오르는 일은 상상도 하기 힘드니까. 사실 이 여행기는 몸은 오르지 않아도 눈으로만 히말라야를 오르고 싶은 사람에게 즐거운 책일 수도 있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정유정의 체력이 부러웠을 뿐이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은 약간의 대리만족 이외에 많은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밤중에 홀로 산을 오르는 그의 근성을 배우고 싶은 마음을 얻어간다.
그런데도 나는 어제 꿈에 히말라야에 갔다. 산에 오른 것이 아니고 작은 풀들이 깔린 나즈막한 초원과 마을길을 지난 것으로 보아 하산 후의 어느 마을 풍경쯤을 걸었나 보다. 아마도 나는 등반을 생략한 네팔의 마을을 탐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어떤가 싶다. 누구나 자기의 여행 스타일이 있고 다른 이의 여행방법에 대해 '그게 무슨 여행이랴?'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휴양이든 안식이든, 열정의 실험이든 자기 방식이 중요하다고 본다. 누군가에게는 한 번쯤 올라야 할 산 정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현지사람과 현지음식의 경험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누군가는 단지 그 하늘을 만나러 가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여행기는 당분간 꽤나 좋은 아이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여행기가 너무 범람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다. 시인도 소설가도 일반인도 너도나도 여행기를 쓰는 시대라고 시큰둥하게 생각했지만 여행을 다녀오면 누구라고 쓰고 싶고,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누군가 쓴 여행기를 읽고 싶고, 언젠가 어디론가 가고 싶은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라면 여행기는 대체로 매력적인 책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 읽으면 더 좋고, 아무도 읽지 않아도 나만의 기록으로도 좋은 여행기는 그래서 앞으로 당분간 오래도록 서점에 한 코너를 꾸준히 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