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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ㅣ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였다. 그때 죽음은 내게 참 먼 주제였다. 그냥 '생각할 거리'였을 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결국, 육체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적'사고를 기준으로, 영혼이라는 신비한 존재를 부정하는 결론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렇게 자잘한(좋게 말하면 치밀하고,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디테일한) 단계를 밟아나가야만 하는 걸까, 생각하다가, 그래, 대학 교양과목이라면 대상이 아직 논리구조가 잡히지 않은 어린 학생들일 터이니 이런 구체성이 필요할 것이며, 게다가 매 강의를 모아놓은 것이라지 않는가, 그러니 이해하자, 하고 조금은 견디며 읽어나갔다.
지루하긴 해도 책에서 얻을 것도 많았다. 나는 방과후수업이나 학교 특별활동 시간에'토론'반을 자주 운영하고 수업 중에도 토론수업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 책 속에서 제시되는 딜레마적 논제들은 토론에 활용하면 좋을 듯 싶은 것이 많다.
특히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꼭 죽음에 맞닥뜨리지 않아도 나의 몸과 정신의 정체를 생각해 보게 한는 명제를 많이 던져준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 책에서 제시되었던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게 한 후 그것들을 모아 글을 쓰게 하고 두레별로 토론을 시킬 작정이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 영혼은 있을까?
- 나의 영혼은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 육체와 영혼 중 무엇이 더 나의 본질일까?
- 나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은 무엇무엇이 있을까? - 몸, 생각, 느낌, 감각, 직관, 경험, 판단, 습관, 주변환경, 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나 가족, 장래에 대한 희망이나 계획, 사회적 지위, 매력, 전망....
- 지금의 나와 10년 전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 나는 죽은 후 어찌 될 것인가?
등등... 중구난방이긴 하지만 이런 질문들을 통해 과연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고, 궁극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도 찾아보고 싶다. 그렇게 의미있는 주제로 나아가기 전, 그저 논쟁을 위한 논쟁만을 펼쳐도 시간이 꽉 찰 것이다.
하여간 글 자체가 지나치게 자세하고 지루한 느낌은 있어도 이야기할 거리를 얻어서 나름대로 귀하여 여기고 있던 중, 이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올 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뉴스 속에서 만나는 무수한 죽음들, 공감의 영역이 좀더 치밀한 문학이나 영화 속에서의 죽음들도 이렇게 피부에 와닿은 적은 없다. 아마도 단원고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둔 사람들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억울하고 원통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통곡이 터져나오는 기이한 경험을 100일도 더 지난 지금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5월 26일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0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져 거의 몸만 살아 있던 세월을 살았던 아버지, 그러니까 진정한 아버지는 10년 전 돌아가신 것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뇌의 좌반구가 하얗게 죽어 달변의 혀를 묶어버렸고 입으로 음식을 넘기지도 못하고 하루의 반 이상을 잠으로 보내야 했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어쩌면 아빠는 당신만의 꿈의 영역을 무언으로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었다. 낭만주의자였으니까. 그러나 그런 상상은 곧 깨어졌다. 뇌의 좌반구가 죽어 언어능력을 상실하면 그 언어로 할 수 있는 사고능력도 상실한단다. 그러니까 아빠는 그냥 하얀, 아무 생각이 없는 나날을 보내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우리 곁을 떠나가실 때, 저렇게 고통을 겪을 바에는 얼른 떠나시게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존감을 다 버리고 남의 손에 의해 목숨을 연명했다는 사실을 아빠도 많이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남은 생을 다 희생해야 하는 엄마를 위해서도 아버지가 떠나는 일은 슬퍼할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가끔 생각한다. 좋은 아버지, 다정한 아빠인 적도 없었는데 왜 이렇게 그립고 아쉬운 것일까. 이미 10년 전부터 대화도 나눌 수 없었던 아버지에게 무슨 미련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도. 단지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진다. 아, 죽음은 그런 것인가 보다. 이 영원한 단절감... 49재를 지내고 돌아오면서, 아버지는 이제 진짜로 이승을 떠나셨대, 이렇게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정녕 아버지의 영혼이 있어 어디론가 갔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절에서 제를 지내며 무수히 읽었던 천수경 속의 그런 세계?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전에는 막연하게 죽음 너머에 무언가 반드시 있을 것만 같고 환생이나 윤회도 가능할 것만 같았는데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런 '희망'은 점점 옅어진다. 그리고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나도 언젠가, 어쩌면 머지 않아 죽을 것인데, 나는 늙음과 죽음을 겁낸 적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왔는데,어쩌면 죽음 너머 무언가 있다는 확신 때문에 그랬던것은 아닐까? 점점 그런 세상은 결코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면서 나의 죽음이 너무나 가깝게, 두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쩌면 셀리 케이건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논리적으로라면, 영혼이라는 것은 없다. 육신은 동력이고 원천이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그럴 듯하게 부르는 것은 뇌의 작용의 총합 혹은 신비화된 표현이다. 착한 영혼을 지녔던 사람도 아프고 난 후 강퍅해지는 일이 있다. 나도 수십년간 다듬어온 인격이 제대로 발현하려면 아프지 않아야 한다. 극단에 처하고도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다는 일이 쉽지 않다. 이런 생각은 또 바뀔지도 모른다. 죽는 날까지 수많은 사유가 나를 사로잡고 방황하게 하리라. 정립되어 철학이 될 만한 무엇을 가진다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죽는 날까지 고민하고 방황하는 '영혼'으로 남고 싶다. 내 죽음을 어떻게 맞아도 그 이후에 무엇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도정일의 표현대로, 삶이란 것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에,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살 일이다. 무엇이 남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무엇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허무가, 그래서 단 한 번 사는 이 생에 최선을 다하게 한다는 결론으로, 공허하기 짝이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살아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