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
로널드 B.토비아스 지음, 김석만 옮김 / 풀빛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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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소설을 쓸 수 있을까?

나는 내가 경험한 일들을 바탕으로 교육 관련 글들을 쓰고 책 몇 권을 냈다. 원래 글을 쓸 생각은 없었다. 어려서부터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어쩌다 보니 겪고 생각한 것들을 글로 남기게 된 것이지 소명의식 같은 것도 타고난 재능도 내것은 아니라 생각해 왔다. 가끔은 시도 쓰고 동화책도 출판했고 힘들 때 일기 삼아 이런 저런 글들을 쓰지만 아직도 나는 내가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안에 무언가 고여 나도 모르게 써나가야 하는 일들이, 교육 에세이니 칼럼이나 하는 잡문이 아닌 진짜 문학, 시나 소설로 솟아나는 일이, 내게도 생긴다면 어떨까.

 

이 책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글을 쓰기 위해읽은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국어 수업을 하며 서사개념을 가르치고 자유학기제 수업에서 드라마 대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스스로 공부를 하려 본 책 중 하나였다. 다양한 플롯의 종류를 대입해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구조화시켜 보기도 했다. 여태 봐온 다양한 드라마들이 이 플롯의 이론속에서 만들어졌겠다 싶어 거기 맞춰 해석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플롯 이론은 머릿속에 정리하면서 또 책 속에 언급된 수많은 책과 이야기들에 빠져들었다. 내가 아는 이야기, 들어보기만 한 이야기, 그리고 전혀 모르는 이야기까지. 그 적절한 예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재미있었다. 글쓰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란 뜻이다.

 

내가 만약 나만의 소설을 쓴다면 그것은 스무 가지 플롯 중 어디에 속할까. 공식에 맞춰 해석을 하다 보면 채워 넣어야 할 장면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수업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수업 과정을 해보듯 학생들과 함께 글쓰기 공부를 하기 위한 전 과정으로 나만의 서사를 쓰면서 탁월한 교재로 활용했던 이 책은... 어쩌면 먼 훗날 내가 어떤 소설을 쓰고는 서문에 감사의 인사를 남겨야 할 책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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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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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교과서에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미술>의 저자 이명옥 관장이 데이비드 호크니와 김호석의 그림에 대해 쓴 글이 나온다. 주제는 공감각적으로 그림 보기, 시각 매체인 그림을 청각적으로 접하는 감각에 대한 설명문이다. 학습목표는 설명문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나는 이 단원의 장점을 살려 다양한 미술작품 감상도, 그림과 음악을 함께 감상하는 시간도 모두 시도한다. 맨 첫 수업은 백지를 한 장씩 나눠주고 그림그리기부터.

학생들에게 종이를 세 면으로 나눈 후 물고기, , 집을 그려보라 한다. 물고기를 그리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옆으로 누워있는 물고기를 그린다. 사람을 그리라 하면 대부분 정면을 그리면서 물고기는 옆모습을 그릴까? 대개의 인간에게 물고기는 식재료이거나 먹거리인 어떤 사물로 인식되기에 그런 것이다. 우리가 바닷속에 사는 생선이라면 친구의 정면 얼굴을 바라보면 아름답게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상상은 물고기의 생태나 행동학과는 무관한 것이다. 내가 하려는 말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라는 것. 아이들은 대개 그런 관점의 폭을 넓히는 활동에 눈을 반짝인다.

 

룰루 밀러의 이 책을 읽으면서 (끝부분에 가서이지만) 내 수업과의 연관성이 떠올랐다. 소위 물고기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하여. 왜 제목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했을까? 원저의 의문형 제목을 살짝 비틀어 탁월하게 번역했다. 이 책은(책에도 운명이 있다 하는데) 좋은 내용에 마케팅, 멋진 번역(제목!!)까지 좋은 운명을 두루 안고 태어났다

제목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은 없다. 요약하자면 포유류니 양서류니 하는 종의 구분 방식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이고 자의적인가, 특히나 소위 어류라는 분류는 잘못된 것이다, 라는 거다. 도대체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증거를 대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낸다. 다만 생긴 모습만 가지고 어류라고 묶어버리기에는 물속 생물들의 생물학적 구조나 생활이 너무나 폭이 넓다는 이야기 정도가 나온다. 이것은 과학적인 이야기이지만 결국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에 문제제기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책에 담은 그런 전복적 사고는 단지 종의 분류에 관한 문제제기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가 저자가 어렸을 때부터 추앙하다시피 추적하고 연구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유명한 과학자에 대한 긴 세월의 존숭이 뒤집어지는 반전, 그것은 사람들이 어류’ - 멍청하고 감각도 거의 없고 먹기에 딱 좋은 어떤 존재에 대한 전복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더불어 의식의 대반전을 요구한다. 당신이 옳다고 믿었던 어떤 존재를 깡그리 부정해야 하는 어떤 순간이 올 수 있다. 존경하는 학자가 알고 보니 우생학을 주장하고 돌아다닌 위장 평화주의자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나 그를 통해 세상에 대한 허무와 삶의 우울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크나큰 존재였다면. 그러니까 이 책은 데이비드 조던이라는 과학자의 정체를 낱낱이 밝히면서 지은이가 자신의 지난 삶을 송두리째 부정해야 하는 자아의 대각성을 바탕으로 쓰인 책이다.

 

이 대각성은 데이비드가 큰 업적을 세운 물고기 연구에 있어서도 일어난다. 세상에 어류라는 존재란 없다는 대각성. 과학은 참 묘하게도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가를 깨닫게 하고 대우주와 대자연 앞에서 삶의 허무를 깨닫게 한다. 그 엄청난 허무감이 오히려 우리를 살아가게도 한다. 그런데 그런 과학에 대한 신뢰와 의지가 이렇게 배신을 때리기도 한다면! 작가는 오히려 그 과정을 대오각성의 시간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는 살면서 내 인생의 많은 좋은 것들을 망쳐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그 곱슬머리 남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나를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해 주지 않을 것이다.

 

지은이는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잃을 때마다 그리하여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느끼지 않고 오히려 더더욱 냉정하게 삶을 대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다. 나는 20대 때 <숫타니파타>를 읽으며 그런 경험을 했다. 거대한 종교적 허무든 우주 물리학적 깨달음이든, 인간에게 받은 배신 때문에든, 엄청나서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거대함 앞에서 내 존재의 하찮음과 부질없음을 깨달을 때, 오히려 생에 충실해져야 한다.

 

이 책은 처음에 자신의 우울을 과학자의 생을 추적하며 극복해 나간 지적 여정을 보여주는 듯했지만 우생학을 고발하는 단계로, 그리고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오만을 돌아보는 단계로 나아간다.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선택받은 것은 아름다운 문체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서사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커다란 성찰에 닿았기 때문이다. 지은이의 좌절과 극복, 성찰과 사고의 전복, 그리고 깨달음의 과정을 함께 하면서 독자들 역시 자기 삶을 대입해 보고 돌아보고 함께 성장한다. 그런 책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 책이 칭송받는 이유는 그런 데 있다.

 

좋은 책은 다른 책을 부른다. 아주 천천히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있는데 룰루 밀러도 마침 다윈이 우생론자들에 의해 왜곡되는 점을 지적한다. <종의 기원> 자체는 지루할 정도로 꼼꼼한 보고서이지만 그 안에 담긴 다윈의 철학을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룰루 밀러는 그것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다윈은 유전자의 변이에 간섭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했다고, 불쾌하게 보일 수 있는 특징들이 사실 종 전체나 생태계에는 이로울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구조를 그리는 것은 상당히 무리한 일이니 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한다.

그리고 나는 저자로 하여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어류라는 분류의 무의미함을 깨닫게 한 책, 캐럴 계숙 윤의 <자연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을 구입했다. 제목의 의문을 좀더 풍부하게 입증할 증거를 보고 싶어서. ‘어류라는 분류가 없다는 명제에 대한 설명은 오히려 이 책이 아니라 나탈리 엔지어의 <원더풀 사이언스>를 읽다가 발견했다. 겉모습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종들이 많다는 이 책의 진화생물학챕터에서. 이렇게 책 한 권은 다른 책 읽기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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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세계 (합본) - 소설로 읽는 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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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세 권의 책으로 거듭났지만 내가 읽은 구판 <소피의 세계>는 소위 벽돌책이었다. 청소년들에게 철학을 쉽게 알려주는 놀라운 소설이라는 화려한 명성 때문에 집어들었지만 이 두께 때문에 아이들이 압도되지 않을까 걱정했더랬다. 그리고 물론 나의 동시다발이책저책뷔페초밥골라먹기식독서 습관 탓이기도 하지만 읽는 데 오래 걸렸다. 어른도 단숨에 쉽게, 재미나게 읽을 책은 아니란 것이다. 중간쯤 읽을 때, 슬슬 책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할 무렵, 지인의 중학생 아들에게 이 책(물론 세 권짜리 새 판본이지만)을 선물한 나를 좀 반성하는 바이다.

어렵고 방대하다.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다니 조금은 쉬운 용어들로 갈무리를 했을 거라고 기대해 보지만, 구판에서는 어려운 용어들, 예스러운 표현들도 많다. 아무리 쉽게 풀어쓴다 한들 철학이, 그것도 서양 철학사를 망라하는 내용이 결코 쉬울 리 없다. 이 책은 반드시 어른이 먼저 읽고 청소년들과 대화를 나눠보시라 권한다.

 

이 책은 정말 대단한 책이다. 일단 어른이 되었지만 제대로 철학을 공부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읽으면 정말 좋을 만큼 서양 철학사가 잘 정리되었다. 최근에 넓고 얇게 지식을 정리해 준다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이보다 깔끔하게, 그러면서도 왠지 요약본을 읽는 것 같은 씁쓸함을 느끼지 않도록 정리된 책을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도 단지 지식만 나열하는 철학 강의가 아니라 어떤 철학적 관점을 가지고 세상과 철학을 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일관되게 이끌어 가면서 철학사를 정리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열다섯 살 소녀에게 철학을 가르친다는 일은 단순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아니어야 한다. 올바른 철학적 탐구 자세, 삶을 살아가는 데 기본이 될 철학적 탐구 자세를 간직할 수 있도록 철학을 가르친다는 일은 얼마나 막중하고 귀한 일인가. 요슈타인 가아더는 그 자신 고등학교 철학교사로서 평생 이 문제를 고민했을 것이다. 이 책은 그의 교사이자 철학자로서의 고민의 집대성일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성공했다.

 

이 책을 찬양하고 싶은 두 번째 이유는 특히 소설로서의 성취이다. 어쩌면 소설은 장치일 뿐 정착 철학을 전하고 싶었을 터이지만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함에도 어찌나 철학적인지, 새벽에 엎드려 책을 읽다가 벌떡 일어나 나도 모르게 명상의 자세를 하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는....(과장 아님).

 

이 소설은 액자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하 소설의 스포가 있으므로 아직 전반부를 읽고 계신 분이라면 내 글은 여기까지만 읽으시고 책을 다 읽은 후 나와 공감의 끄덕임을 나누길 바란다) 주인공 소피는 사실 유엔군 소령이 자신의 딸 힐데에게 철학을 알려주려고 쓴 소설 속 주인공이다. 문제는, 소피는 자신이 그저 현실 속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얼핏 청소년에게 철학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재미있는 구조적 장치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어한다. 종교적 신이든 자연 그 자체이든, 우주의 물리적 질서이든, 나를 있게 하고 살게 하고 결국은 죽게 할 어떤 존재, 우리 스스로의 의지를 뛰어넘는 거대한 어떤 존재에 대한 궁금함은 모든 인간과 생명의 근원적 질문 아닐까? 소피와 소설의 작가는 마치 인간과 신(자연)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때로 인생은 누군가의 조종과 농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사는 이 세상은 거대한 매트릭스의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어린 아이들이 자아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해보는 상상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영화로 승화된 상상이기도 하다. 종교인들은 그런 고민 자체를 종교적으로 구조화했지만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세계와그 세계 속 등장인물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이런 근본적인 질문은 결국 철학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작가는, ‘내가 지금 나라고 느끼는 나는 진짜 나인가, 아니면 누군가 만든 존재인가? 나의 행동은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인가, 어떤 거대한 존재의 조종에 의한 것인가?’라는 철학적 고민을 자기 작품 속에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그 사실은 책의 말미 무렵에나 밝혀진다. 그전까지 그저 아이들에게 읽히려고 철학사를 열심히 설파한 크눅스 선생과 요슈타인 가아더의 노력에 경탄했지만 이런 구조를 알게 된 후에는 작가의 천재성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인 소피와 크룩스 선생내가 소설 속 인물이라니! 내가 실존이 아니라 만들어진, 조종당하는 존재라니!’ 하는 존재론적 깨달음과 괴로움은 결국 그들을 만든 작가, 즉 힐데의 아버지인 크낙 소령의 몫이기도 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 역시 역시 요슈타인 가아더가 창작한 인물에 불과하니까. 이 질문은 끝이 없다. 요슈타인 가아더도 역시 누군가의 창조물일지도 모른다이 책을 읽은 나도, 당신도...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서구의 시각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종교적 배경이 없어도 나의 근본을 사유할 때 자주 떠오르는 질문이기도 하지 않은가. 영화 <매트릭스>는 기독교적 색채를 니체적으로 전복시키고도 같은 질문을 완전히 새롭게 구현해 현대인들의 실존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았나.

이제 곧 열릴 인공지능의 세계에는 이보다 좀 더 치밀하고 좀더 공허한 존재론이 난무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한때는 께서 그걸 말해주실 수 있으리라 믿었고 인간의 시대, 계몽의 시대에는 철학자들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같이 고민해 보자했으나 이제 곧 AI사실은 내가 니 애비다라고 말할 날이 올지도 모르니...

 

크녹스의 말 : 전혀 다른 작가가 어딘가에서, 딸에게 줄 책을 쓰고 있는 유엔군 소령 알베르트 크낙에 관해 책을 쓰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니?

 

 

묻는 자는 가장 위험한 인물

어쨌든 소설은 크눅스 선생이 드문드문 소피를 만나(처음에는 편지로) 철학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선생은 소피에게 철학적 질문의 출발은 너는 누구니?’,‘세계는 어디에서 생겨났지?’에서 시작된다면서 놀라워할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위 질문을 포함하여 어떻게 세계가 창조되었는가. 사건의 이면의 의도나 의미는 무엇인가? 죽음 뒤에 또 다른 삶이 있는가? 이런 해답은 어떤 방법으로 찾아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등 소피에게 던져진 질문은 나 역시 나의 학생들에게 던져보고 싶은 질문이다. 국어 수업 중에 가끔 토론을 하지만 저런 철학적인 질문을 풍부하게 이끌기에는 수업시간이 턱없이 모자란다. 가끔 언론의 진실성에 대해 사실이면 곧 진실인가?’ 혹은 사춘기의 특성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저자 셀리 케이건이 던진 질문들 육신이 없어도 ’‘나는 존재하는가? ‘라고 부를 때 그 존재는 육신인가, 뇌인가, 영혼인가, 기억인가?’ 등의 질문을 던져 토론을 유도해 보기도 하지만 매우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토론수업이 꼭 필요하지만 쉽지 않아서 몇 해 전에는 바칼로레아 논술토론반동아리를 운영해 본 적이 있다. 기존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주제 중 중학생에게 적합한 주제들을 골라 토론을 해보았다. 다행히 우리 학교에서는 도덕과 사회 시간에 토론 수업을 이끄는 선생님들이 있다. 이들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토론수업을 열심히 하다 보면 이 경쟁과 성취 중심의 대한민국 청소년들도 철학적인 청년들로 자라나지 않을까.

 

고대 철학자 중 원자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존재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은 묘하게 인간사의 고뇌를 불식시켜 준다. 어차피 원자로 돌아갈 것을, 그리고 는 사라져도 나를 구성했던 원자는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을..... 허무할 것도 없고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인생을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누만. 이 책과 동시에 읽고 있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좀 다른 접근이긴 하지만 허무하므로 인생은 치열하다.’ ‘내가 저 먼 우주의 한 줌 먼지로 사라지더라도 아쉬워하지 말라말한다. 한 사람은 유물론자이고 한 사람은 절대신의 존재를 믿은 사람이긴 하지만 거대한 원칙 앞에 한없이 작고 작은 인간 존재를 깨닫게 해 준 철학자들로 인해 우리는 유한한 인생의 고뇌를 조금은 놓을 수 있다.

 

다른 철학책과 달리 마음에 남은 부분이 있다면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유사성을 말하는 장면이다. 둘 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문답법의 거장이었고 권력자들에 대항한 비폭력주의자였다는 것, 그리고 부당한 재판과 사형을 당했지만 사면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까지. 소크라테스는 잘 모르지만 이렇게 지역과 시대를 넘나들며 진정으로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은 또한 이 질척거리는 삶에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작가는 소크라테스를 확신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고 무관심하지도 않았다.’고 표현한다. 아우렐리우스도 그러했고 예수 역시 죽음 앞에서 인간적이었다. 진정 큰 사람들은 함부로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오만방자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 방대한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이 다루는 철학이라 말하는 것은 결국 서양철학이라는 것에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은 서양뿐 아니라 세상 곳곳에 있었을 것이다. 제자라곤 함께 사냥길에 나선 어린 마을 청년 몇이 다인 소박한 문명의 마을 지도자들 중에서 아우렐리우스 못지 않은 우주적 존재론을 말한 이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소피는 나와 비슷한 듯 조금은 결이 다른 불편함을 말한다. 근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등장한 여성철학자 시몬 베이유를 공부할 때 소피는 남자 철학자들은 모두 그들 고유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 관심은 실제 세계에 있다고 말한다. 철학자들이 언급하는 인간은 모두 중년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서. 나 역시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면서 노동과 땀냄새가 없는 귀족 남자들의 윤리를 지금 시대에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를 고민했다. 소피는 삶은 임신과 출산으로 시작되는데, 지금까지는 그들의 철학 세계 속에는 아기 기저귀와 빽빽거리는 울음 소리가 없었다고 지적한다. 역시 소피는 자신의 이름답게 지혜롭다. 소위 철학사들은 늘 서양, 강자, 남자 중심으로 펼쳐졌다. 남아 전해지는 게 없는데 무엇을 어찌 다룰 수 있겠냐고 항변할 수는 있지만 철학사를 고찰할 때 늘 왜 약자와 노동자의 관점은 없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옳을 것이다.

 

책이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로 끝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다. 실존주의는 결국 이 세계가 어떻든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는 사고방식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되돌아갈 그런 영원한 본성은 없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또 자기가 언젠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리고 삶에 대해 아무 의미도 인식할 수 없을 때에 불안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염세주의가 아니다. 사르트르는 그 불안 때문에 더더욱 삶이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거대한 실체 앞에 작디작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떠오른다. 2십억 광년의 고독을 느꼈던 다니카와 순타로 시인과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질 자신의 존재를 고뇌했던 박정만의 시세계가 떠오른다. 그렇게 이 책은 철학에서 시작해 우주 이야기로 끝난다. 신이든, 자연신이든 우주물리학이든 인간의 존재는 하염없이 작고 작위적이지만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철학하는 책, 소피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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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 낙인과 혐오를 넘어 이해와 공존으로
나종호 지음 / 아몬드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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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 부르지 말자고 주장하는 정신과 의사의 글이다. 나종호 선생은 선택지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선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한가묻는다. 마치 개인의 의지에 따라 하지 않아도 되었을 선택을 한 것처럼 표현하지 말라는 저자의 주장에서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일갈한 에밀 뒤르켐이 떠오른다.

 

학교 상담실에서 자살 위험 학생을 상담할 때 자살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는다. 처음에는 그 서약서가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됐다.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는 것도 무서운데(너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든 적 있니?라고 어떻게 묻지?), ‘자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자.’라고 말하는 일은 쉬운가. 하지만 요즘 전문상담사들은 그렇게 상담하라고 교육받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살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은 결국 자살 행동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생각 단계에서 그것을 소리 내 말하고 의논하고 위로받고 치유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은 허망해 보여도 자기 글씨로, 자기 목소리로 자살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라고 말한 사람은 스스로의 약속에 책무감을 느낀단다.

 

죽고 싶다는 말의 진심은 어느 정도의 비율, 어느 정도의 깊이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의식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심인지는 본인도 모를 일이다. 강렬한 살고 싶다가 죽고 싶다는 의식으로 발현된 것일 수도 있고 단지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죽고 싶은 기분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정말, 더는 갈 데가 없다는 막막함에서 아주 근원적인 궁극의 극단 앞에서 진심으로 죽음을 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살 시도자, 혹은 성공자 중 정말 나를 죽음으로부터 구조하지 말아달라고 생각할 사람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그 방증이 자살 시도자들이 깨어나면 하는 말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란다.

 

책에 의하면 자살 생각에서 시도까지의 시간은 10분이 걸린다 한다. 대개 그 자살 생각이라는 것이 지속적이고 근원적이기보다 충동적으로 불쑥불쑥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심신이 안정되어 있을 때에는 본인도 주변 사람도 그 위험을 못 느끼기도 한다). 그런 생각이 불쑥 올라올 때 주변에 자살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들이 놓여 있지 않은 것도 중요하단다. 자살을 도울 물건들을 찾는 동안 마음이 안정되고 생각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물건들을 치우는 것이 효과적이다. 총기를 보이지 않게 치우거나 자물쇠를 채워두는 것, 뾰족한 것이나 밧줄 등을 멀리 두는 것 등도 필요한 시도란다. 정부에서 자살 예방의 방법으로 번개탄 판매를 금지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실소했지만 저자는 그것이 아주 무의미한 시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책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뉴욕의 사례들을 다루고 있지만 마국보다 열세 배 (10만 명당) 자살자가 많은 한국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많다. 나는 남자중학교에서 20년 넘게 상담 업무를 맡고 있다. 학교 상담에서 자살 위험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학생이나 학부모 모두 자살 고민이나 시도 등의 문제를 학교에서 아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감추기 바쁘다. 상담 과정에서도 학교에서 만나는 상담사를 선생님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만난 자살/자해위험 학생(혹은 가정)은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발견하는 자살 생각 학생 중에는 심각한 경험을 원인으로 갖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왕따 당한 일이나 가정에서 부모에게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상담 내용은 비밀에 부치지만 범죄나 자살과 관련된 내용은 학부모에게 고지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학부모 상담을 병행하고 서로 몰랐거나 오해했던 부분에 소통이 이루어면서 학생의 자살 생각이 줄어드는 경우도 많이 본다. 그러나 심각하고 근본적인 상처(부모의 학대나 심각한 상실 등)가 원인이었다면 학교 상담실이 할 수 있는 일은 보다 전문적인 상담이나 치료를 권유하는 일뿐이다.

 

지속적 애도 장애라는 공식 진단명이 있다 한다. 상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용어란다. 당연한 것 아닌가? 실연의 상처가 깊어도 오래 가고 삶에 영향을 미치는데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으로 잃었다면 그 정신적 충격은 가히 병을 부를 만하지 않을까? 시의성과 무관하게 쓰인 이 책에서 발견한 이 구절이 마음에 오래 남는 이유는 이태원 참사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 1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고 믿기지 않는다. 진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더 놀라운 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언론이 이태원을 언급하지 않는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죽은 자를 추모하는 것은 기억말고는 없다. 덜 아픈 죽음이라도 자꾸 그들에 대해 말하고 기억하는 것보다 좋은 추모는 없는데 하물며 허망하고 무도하고 억울한 죽음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세월호도 아팠는데, 그나마 세월호 사건은 끊임없이 부정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슈화가 되어 그나마 덜 잊혀지기라도 했는데 어떻게 이태원 이야기는 이토록 쉽게 잊히는 걸까. 누가 언급하지 말라고 으름장이라도 놓은 걸까? 부모들은 어떻게 이 영원히 극복될 수 없는 슬픔을 위로받는 걸까? 함께 뜨개질을 하고 아이들 교복을 입고 연극무대에 서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함께 팽목항에 들러 같이 소리쳐 아이들 이름을 불렀던 세월호 부모들은 그래도 그렇게라도 연대와 애도를 함께 했겠지만 이태원의 부모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이 무도한 세상에서...

 

칼 로저스는 자기 말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상담자를 만난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단다. 그런 존재를 만나는 일은 인생의 귀한 경험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나처럼 어린 학생들을 만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공감의 눈빛과 몸짓으로 그 어린 사람들이 보내는 상처의 사인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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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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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아픈 이야기도 싫다. 그렇다고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늘 해피엔딩인 권선징악의 세계도 싫다. 아니, 나는 그냥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 소설은 열심히 읽는다.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어쩔 수 없이 읽어야만 한다. 특히 소설 읽고 노래가사로 재구성하기라는 수행평가를 하려면 아이들에게 읽히려고 가지고 들어가는 50여 권의 소설(해마다 업그레이드 된다)의 내용을 내가 잘 알고 있어야만 한다. 책 소개를 할 때 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야 하고 대화를 나눌 때 소설 속 상황을 잘 알아야 흥미를 지속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평가를 할 때 소설의 내용이 노래 가사에 잘 반영되었는지알려면 내가 당연히 소설 내용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 학교 도서실 사서 선생님은 이런 나를 위해 끊임없이 새로 나온, 혹은 새롭게 발굴된 좋은 청소년 소설을 권한다. 다른 책을 한아름 빌려가는 내 손에 지난 가을 덥썩 쥐어준 책이 이 <경우 없는 세계>이었다. 작가의 이름이 낯익다. 화제작이라 하여 읽은 <유원>의 작가 백온유다.

 

우리 학교는 서울 시에 몇 남지 않은 사립 남자중학교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점점 그렇게 변해가기도 하지만 특히 청소년 소설에는 남자 청소년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별로 없다. 실제로 책을 읽는 비중도 여학생들이 많고 쓰는 이도 그러하다. 젊은 남자들의 서사는 게임의 세상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있나 보다. 그래서 나처럼 남자 청소년들과 문학을 가르치는, 요즘 세상에 좀 희한한 직업을 가진 이들은 이래저래 생각할 것도 많고 찾아볼 것도 많다. 전작 <유원>도 대단한 서사와 문체로 쓰이긴 했지만 여성 청소년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니 좋은 작품이되 우리 학생들에게 읽히기에는 딴 세상 이야기 같았다. 그랬던 경험 때문에 작가 이름을 보고 머리에 (우리 아이들이 이 책을 좋아할까?) 물음표를 달고 읽기 시작했다. 주로 출퇴근할 때 지하철을 이용하는 날 책을 읽는데, 두 번째 책을 들고 나온 날엔 길지 않은 정거장을 놓칠 뻔했다. 책 속 이야기, 치밀하고 처절하다. 시작할 때 펼쳐지는 피폐해진 쓸쓸한 청년의 아픈 이야기가 고통스러운 서사가 읽기 싫어 소설을 멀리하는 내게 또 불편한 마음을 준다. 그러나 그가 자동차 자해 공갈단이 된 한 청소년을 거두는 이야기에서부터 열심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가출 청소년 이야기를 왜 쓰고 싶었을까? 작가의 어떤 경험치가 그런 주제 의식에 맞닿았을지 궁금해 하다가 나 역시 학교를 떠난 아이들이 도대체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안타깝고 궁금한 내 마음을 들여다 본다.

비교적 평화로운 우리 학교에도 한 해 한두 학생씩 불편한 유예(의무교육인 중학교 교육을 마치지 못하는 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두면 자퇴가 아닌 유예가 된다.)가 발생하는데 그렇게 학교를 떠나 어지간해서 다시는 학교로 돌아오지 않는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정말 궁금하다.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아주 드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아무도 그들의 소식을 모른다. 소식이 들려온다 한들 소년원에 갔다. 보호관찰 중이다, 정도이다. 전국에서 한해에만도 수만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두는데 그 중 대다수가 가정폭력에 시달리거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거나 돌봄에 방치되어 범죄의 길에 발 담그는 경우, 혹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는 경우도 많다. 그 학교밖 청소년들에 대한 걱정이 나를 사로잡은 것처럼 백온유 작가도 가출한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 것인지, 그들의 내밀한 삶과 상처는 무엇인지 고민했었나 보다.

 

가출의 이유도 다양하겠지만 주인공처럼 얼핏 안정적으로 보이는 가정에서도 청소년의 등을 떠미는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경우처럼 어떻게든 올바르게 살아내려 애쓰는 아이들도 많겠지만 본의든 아니든 일탈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일이 더 많다. 이 책은 그런 아이들의 핍진한 세상을 집약해 보여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사람답게 살아내려는 아이 하나는, 부모에 대한 원망과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아무렇게나 막 살아버리려는 주인공 인수의 손목을 잡는다. 인수가 나빠지려 할 때마다 뒤에서 가만히 잡아당겨 주던 경우가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없을 때, 홀로서기를 애쓰던 인수는 거리를 떠도는 이호를 자신의 옥탑에 이끌어 먹이고 재움으로써 경우의 역할을 대신한다. 이호에게 더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말라고, 그래도 네 곁에 다 나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라고 알려주려 애쓴다. 어쩌면 그런 힘들이, 그런 손 하나가 우리가 아이였을 때 우리가 더 불행해지지 않도록 막아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 많은 나쁜 것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좋은 사람만으로도 세상은 살아지고 나는 더 나빠지지 않기도 하고 그런다. 그걸 보면 착하고 좋은 것은 얼핏 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세상을 지탱하는 정말 힘센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경우처럼, 그리고 이제 인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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