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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중2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교과서에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미술>의 저자 이명옥 관장이 데이비드 호크니와 김호석의 그림에 대해 쓴 글이 나온다. 주제는 ‘공감각적으로 그림 보기’ 즉, 시각 매체인 그림을 청각적으로 접하는 감각에 대한 설명문이다. 학습목표는 ‘설명문’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나는 이 단원의 장점을 살려 다양한 미술작품 감상도, 그림과 음악을 함께 감상하는 시간도 모두 시도한다. 맨 첫 수업은 백지를 한 장씩 나눠주고 그림그리기부터.
학생들에게 종이를 세 면으로 나눈 후 물고기, 새, 집을 그려보라 한다. 물고기를 그리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옆으로 누워있는 물고기를 그린다. 왜 ‘사람’을 그리라 하면 대부분 정면을 그리면서 물고기는 옆모습을 그릴까? 대개의 인간에게 물고기는 식재료이거나 먹거리인 어떤 사물로 인식되기에 그런 것이다. 우리가 바닷속에 사는 생선이라면 친구의 정면 얼굴을 바라보면 아름답게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상상은 물고기의 생태나 행동학과는 무관한 것이다. 내가 하려는 말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라는 것. 아이들은 대개 그런 관점의 폭을 넓히는 활동에 눈을 반짝인다.
룰루 밀러의 이 책을 읽으면서 (끝부분에 가서이지만) 내 수업과의 연관성이 떠올랐다. 소위 ‘물고기’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하여. 왜 제목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했을까? 원저의 의문형 제목을 살짝 비틀어 탁월하게 번역했다. 이 책은(책에도 운명이 있다 하는데) 좋은 내용에 마케팅, 멋진 번역(제목!!)까지 좋은 운명을 두루 안고 태어났다
제목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은 없다. 요약하자면 포유류니 양서류니 하는 종의 구분 방식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이고 자의적인가, 특히나 소위 ‘어류’라는 분류는 잘못된 것이다, 라는 거다. 도대체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증거를 대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낸다. 다만 생긴 모습만 가지고 어류라고 묶어버리기에는 물속 생물들의 생물학적 구조나 생활이 너무나 폭이 넓다는 이야기 정도가 나온다. 이것은 과학적인 이야기이지만 결국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에 문제제기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책에 담은 그런 ‘전복적 사고’는 단지 종의 분류에 관한 문제제기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가 저자가 어렸을 때부터 추앙하다시피 추적하고 연구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유명한 과학자에 대한 긴 세월의 존숭이 뒤집어지는 반전, 그것은 사람들이 ‘어류’ - 멍청하고 감각도 거의 없고 먹기에 딱 좋은 어떤 존재’에 대한 전복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더불어 의식의 대반전을 요구한다. 당신이 옳다고 믿었던 어떤 존재를 깡그리 부정해야 하는 어떤 순간이 올 수 있다. 존경하는 학자가 알고 보니 우생학을 주장하고 돌아다닌 위장 평화주의자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나 그를 통해 세상에 대한 허무와 삶의 우울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크나큰 존재였다면. 그러니까 이 책은 데이비드 조던이라는 과학자의 정체를 낱낱이 밝히면서 지은이가 자신의 지난 삶을 송두리째 부정해야 하는 자아의 대각성을 바탕으로 쓰인 책이다.
이 대각성은 데이비드가 큰 업적을 세운 ‘물고기 연구’에 있어서도 일어난다. 세상에 ‘어류’라는 존재란 없다는 대각성. 과학은 참 묘하게도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가를 깨닫게 하고 대우주와 대자연 앞에서 삶의 허무를 깨닫게 한다. 그 엄청난 허무감이 오히려 우리를 살아가게도 한다. 그런데 그런 과학에 대한 신뢰와 의지가 이렇게 배신을 때리기도 한다면! 작가는 오히려 그 과정을 대오각성의 시간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는 살면서 내 인생의 많은 좋은 것들을 망쳐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그 곱슬머리 남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나를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해 주지 않을 것이다.
지은이는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잃을 때마다 ‘그리하여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느끼지 않고 오히려 더더욱 냉정하게 삶을 대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다. 나는 20대 때 <숫타니파타>를 읽으며 그런 경험을 했다. 거대한 종교적 허무든 우주 물리학적 깨달음이든, 인간에게 받은 배신 때문에든, 엄청나서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거대함 앞에서 내 존재의 하찮음과 부질없음을 깨달을 때, 오히려 생에 충실해져야 한다.
이 책은 처음에 자신의 우울을 과학자의 생을 추적하며 극복해 나간 지적 여정을 보여주는 듯했지만 우생학을 고발하는 단계로, 그리고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오만을 돌아보는 단계로 나아간다.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선택받은 것은 아름다운 문체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서사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커다란 성찰에 닿았기 때문이다. 지은이의 좌절과 극복, 성찰과 사고의 전복, 그리고 깨달음의 과정을 함께 하면서 독자들 역시 자기 삶을 대입해 보고 돌아보고 함께 성장한다. 그런 책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 책이 칭송받는 이유는 그런 데 있다.
좋은 책은 다른 책을 부른다. 아주 천천히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있는데 룰루 밀러도 마침 다윈이 우생론자들에 의해 왜곡되는 점을 지적한다. <종의 기원> 자체는 지루할 정도로 꼼꼼한 보고서이지만 그 안에 담긴 다윈의 철학을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룰루 밀러는 그것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다윈은 유전자의 변이에 간섭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했다고, 불쾌하게 보일 수 있는 특징들이 사실 종 전체나 생태계에는 이로울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구조를 그리는 것은 상당히 무리한 일이니 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한다.
그리고 나는 저자로 하여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어류’라는 분류의 무의미함을 깨닫게 한 책, 캐럴 계숙 윤의 <자연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을 구입했다. 제목의 의문을 좀더 풍부하게 입증할 증거를 보고 싶어서. ‘어류’라는 분류가 없다는 명제에 대한 설명은 오히려 이 책이 아니라 나탈리 엔지어의 <원더풀 사이언스>를 읽다가 발견했다. 겉모습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종들이 많다는 이 책의 ‘진화생물학’ 챕터에서. 이렇게 책 한 권은 다른 책 읽기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