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 낙인과 혐오를 넘어 이해와 공존으로
나종호 지음 / 아몬드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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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 부르지 말자고 주장하는 정신과 의사의 글이다. 나종호 선생은 선택지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선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한가묻는다. 마치 개인의 의지에 따라 하지 않아도 되었을 선택을 한 것처럼 표현하지 말라는 저자의 주장에서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일갈한 에밀 뒤르켐이 떠오른다.

 

학교 상담실에서 자살 위험 학생을 상담할 때 자살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는다. 처음에는 그 서약서가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됐다.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는 것도 무서운데(너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든 적 있니?라고 어떻게 묻지?), ‘자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자.’라고 말하는 일은 쉬운가. 하지만 요즘 전문상담사들은 그렇게 상담하라고 교육받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살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은 결국 자살 행동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생각 단계에서 그것을 소리 내 말하고 의논하고 위로받고 치유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은 허망해 보여도 자기 글씨로, 자기 목소리로 자살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라고 말한 사람은 스스로의 약속에 책무감을 느낀단다.

 

죽고 싶다는 말의 진심은 어느 정도의 비율, 어느 정도의 깊이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의식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심인지는 본인도 모를 일이다. 강렬한 살고 싶다가 죽고 싶다는 의식으로 발현된 것일 수도 있고 단지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죽고 싶은 기분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정말, 더는 갈 데가 없다는 막막함에서 아주 근원적인 궁극의 극단 앞에서 진심으로 죽음을 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살 시도자, 혹은 성공자 중 정말 나를 죽음으로부터 구조하지 말아달라고 생각할 사람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그 방증이 자살 시도자들이 깨어나면 하는 말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란다.

 

책에 의하면 자살 생각에서 시도까지의 시간은 10분이 걸린다 한다. 대개 그 자살 생각이라는 것이 지속적이고 근원적이기보다 충동적으로 불쑥불쑥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심신이 안정되어 있을 때에는 본인도 주변 사람도 그 위험을 못 느끼기도 한다). 그런 생각이 불쑥 올라올 때 주변에 자살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들이 놓여 있지 않은 것도 중요하단다. 자살을 도울 물건들을 찾는 동안 마음이 안정되고 생각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물건들을 치우는 것이 효과적이다. 총기를 보이지 않게 치우거나 자물쇠를 채워두는 것, 뾰족한 것이나 밧줄 등을 멀리 두는 것 등도 필요한 시도란다. 정부에서 자살 예방의 방법으로 번개탄 판매를 금지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실소했지만 저자는 그것이 아주 무의미한 시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책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뉴욕의 사례들을 다루고 있지만 마국보다 열세 배 (10만 명당) 자살자가 많은 한국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많다. 나는 남자중학교에서 20년 넘게 상담 업무를 맡고 있다. 학교 상담에서 자살 위험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학생이나 학부모 모두 자살 고민이나 시도 등의 문제를 학교에서 아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감추기 바쁘다. 상담 과정에서도 학교에서 만나는 상담사를 선생님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만난 자살/자해위험 학생(혹은 가정)은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발견하는 자살 생각 학생 중에는 심각한 경험을 원인으로 갖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왕따 당한 일이나 가정에서 부모에게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상담 내용은 비밀에 부치지만 범죄나 자살과 관련된 내용은 학부모에게 고지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학부모 상담을 병행하고 서로 몰랐거나 오해했던 부분에 소통이 이루어면서 학생의 자살 생각이 줄어드는 경우도 많이 본다. 그러나 심각하고 근본적인 상처(부모의 학대나 심각한 상실 등)가 원인이었다면 학교 상담실이 할 수 있는 일은 보다 전문적인 상담이나 치료를 권유하는 일뿐이다.

 

지속적 애도 장애라는 공식 진단명이 있다 한다. 상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용어란다. 당연한 것 아닌가? 실연의 상처가 깊어도 오래 가고 삶에 영향을 미치는데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으로 잃었다면 그 정신적 충격은 가히 병을 부를 만하지 않을까? 시의성과 무관하게 쓰인 이 책에서 발견한 이 구절이 마음에 오래 남는 이유는 이태원 참사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 1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고 믿기지 않는다. 진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더 놀라운 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언론이 이태원을 언급하지 않는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죽은 자를 추모하는 것은 기억말고는 없다. 덜 아픈 죽음이라도 자꾸 그들에 대해 말하고 기억하는 것보다 좋은 추모는 없는데 하물며 허망하고 무도하고 억울한 죽음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세월호도 아팠는데, 그나마 세월호 사건은 끊임없이 부정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슈화가 되어 그나마 덜 잊혀지기라도 했는데 어떻게 이태원 이야기는 이토록 쉽게 잊히는 걸까. 누가 언급하지 말라고 으름장이라도 놓은 걸까? 부모들은 어떻게 이 영원히 극복될 수 없는 슬픔을 위로받는 걸까? 함께 뜨개질을 하고 아이들 교복을 입고 연극무대에 서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함께 팽목항에 들러 같이 소리쳐 아이들 이름을 불렀던 세월호 부모들은 그래도 그렇게라도 연대와 애도를 함께 했겠지만 이태원의 부모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이 무도한 세상에서...

 

칼 로저스는 자기 말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상담자를 만난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단다. 그런 존재를 만나는 일은 인생의 귀한 경험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나처럼 어린 학생들을 만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공감의 눈빛과 몸짓으로 그 어린 사람들이 보내는 상처의 사인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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