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피의 세계 (합본) - 소설로 읽는 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2015년 12월
평점 :
지금은 세 권의 책으로 거듭났지만 내가 읽은 구판 <소피의 세계>는 소위 ‘벽돌책’이었다. 청소년들에게 철학을 쉽게 알려주는 놀라운 소설이라는 화려한 명성 때문에 집어들었지만 이 두께 때문에 아이들이 압도되지 않을까 걱정했더랬다. 그리고 물론 나의 ‘동시다발이책저책뷔페초밥골라먹기식’ 독서 습관 탓이기도 하지만 읽는 데 오래 걸렸다. 어른도 단숨에 쉽게, 재미나게 읽을 책은 아니란 것이다. 중간쯤 읽을 때, 슬슬 책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할 무렵, 지인의 중학생 아들에게 이 책(물론 세 권짜리 새 판본이지만)을 선물한 나를 좀 반성하는 바이다.
어렵고 방대하다.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다니 조금은 쉬운 용어들로 갈무리를 했을 거라고 기대해 보지만, 구판에서는 어려운 용어들, 예스러운 표현들도 많다. 아무리 쉽게 풀어쓴다 한들 철학이, 그것도 서양 철학사를 망라하는 내용이 결코 쉬울 리 없다. 이 책은 반드시 어른이 먼저 읽고 청소년들과 대화를 나눠보시라 권한다.
이 책은 정말 대단한 책이다. 일단 어른이 되었지만 제대로 철학을 공부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읽으면 정말 좋을 만큼 서양 철학사가 잘 정리되었다. 최근에 넓고 얇게 지식을 정리해 준다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이보다 깔끔하게, 그러면서도 왠지 요약본을 읽는 것 같은 씁쓸함을 느끼지 않도록 정리된 책을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도 단지 지식만 나열하는 철학 강의가 아니라 ‘어떤 철학적 관점을 가지고 세상과 철학을 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일관되게 이끌어 가면서 철학사를 정리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열다섯 살 소녀에게 철학을 가르친다는 일은 단순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아니어야 한다. 올바른 철학적 탐구 자세, 삶을 살아가는 데 기본이 될 철학적 탐구 자세를 간직할 수 있도록 철학을 가르친다는 일은 얼마나 막중하고 귀한 일인가. 요슈타인 가아더는 그 자신 고등학교 철학교사로서 평생 이 문제를 고민했을 것이다. 이 책은 그의 교사이자 철학자로서의 고민의 집대성일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성공했다.
이 책을 찬양하고 싶은 두 번째 이유는 특히 소설로서의 성취이다. 어쩌면 ‘소설’은 장치일 뿐 정착 철학을 전하고 싶었을 터이지만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함에도 어찌나 철학적인지, 새벽에 엎드려 책을 읽다가 벌떡 일어나 나도 모르게 명상의 자세를 하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는....(과장 아님).
이 소설은 액자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하 소설의 스포가 있으므로 아직 전반부를 읽고 계신 분이라면 내 글은 여기까지만 읽으시고 책을 다 읽은 후 나와 공감의 끄덕임을 나누길 바란다) 주인공 소피는 사실 유엔군 소령이 자신의 딸 힐데에게 철학을 알려주려고 쓴 소설 속 주인공이다. 문제는, 소피는 자신이 그저 현실 속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얼핏 청소년에게 철학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재미있는 구조적 장치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어한다. 종교적 신이든 자연 그 자체이든, 우주의 물리적 질서이든, 나를 있게 하고 살게 하고 결국은 죽게 할 어떤 존재, 우리 스스로의 의지를 뛰어넘는 거대한 ‘어떤 존재’에 대한 궁금함은 모든 인간과 생명의 근원적 질문 아닐까? 소피와 ‘소설의 작가’는 마치 인간과 신(자연)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때로 인생은 누군가의 조종과 농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사는 이 세상은 거대한 매트릭스의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어린 아이들이 자아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해보는 상상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영화로 승화된 상상이기도 하다. 종교인들은 그런 고민 자체를 종교적으로 구조화했지만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세계와그 세계 속 등장인물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이런 근본적인 질문은 결국 철학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작가는, ‘내가 지금 나라고 느끼는 나는 진짜 나인가, 아니면 누군가 만든 존재인가? 나의 행동은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인가, 어떤 거대한 존재의 조종에 의한 것인가?’라는 철학적 고민을 자기 작품 속에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그 사실은 책의 말미 무렵에나 밝혀진다. 그전까지 그저 아이들에게 읽히려고 철학사를 열심히 설파한 크눅스 선생과 요슈타인 가아더의 노력에 경탄했지만 이런 구조를 알게 된 후에는 작가의 천재성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인 ‘소피와 크룩스 선생’의 ‘내가 소설 속 인물이라니! 내가 실존이 아니라 만들어진, 조종당하는 존재라니!’ 하는 존재론적 깨달음과 괴로움은 결국 그들을 만든 작가, 즉 힐데의 아버지인 크낙 소령의 몫이기도 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 역시 역시 요슈타인 가아더가 창작한 인물에 불과하니까. 이 질문은 끝이 없다. 요슈타인 가아더도 ‘역시 누군가의 창조물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은 나도, 당신도...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서구의 시각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종교적 배경이 없어도 나의 근본을 사유할 때 자주 떠오르는 질문이기도 하지 않은가. 영화 <매트릭스>는 기독교적 색채를 니체적으로 전복시키고도 같은 질문을 완전히 새롭게 구현해 현대인들의 실존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았나.
이제 곧 열릴 인공지능의 세계에는 이보다 좀 더 치밀하고 좀더 공허한 존재론이 난무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한때는 ‘신’께서 그걸 말해주실 수 있으리라 믿었고 인간의 시대, 계몽의 시대에는 철학자들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같이 고민해 보자’ 했으나 이제 곧 AI가 ‘사실은 내가 니 애비다’라고 말할 날이 올지도 모르니...
크녹스의 말 : 전혀 다른 작가가 어딘가에서, 딸에게 줄 책을 쓰고 있는 유엔군 소령 알베르트 크낙에 관해 책을 쓰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니?
묻는 자는 가장 위험한 인물
어쨌든 소설은 크눅스 선생이 드문드문 소피를 만나(처음에는 편지로) 철학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선생은 소피에게 철학적 질문의 출발은 ‘너는 누구니?’,‘세계는 어디에서 생겨났지?’에서 시작된다면서 ‘놀라워할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위 질문을 포함하여 ‘어떻게 세계가 창조되었는가. 사건의 이면의 의도나 의미는 무엇인가? 죽음 뒤에 또 다른 삶이 있는가? 이런 해답은 어떤 방법으로 찾아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등 소피에게 던져진 질문은 나 역시 나의 학생들에게 던져보고 싶은 질문이다. 국어 수업 중에 가끔 토론을 하지만 저런 철학적인 질문을 풍부하게 이끌기에는 수업시간이 턱없이 모자란다. 가끔 언론의 진실성에 대해 ‘사실이면 곧 진실인가?’ 혹은 사춘기의 특성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저자 셀리 케이건이 던진 질문들 ‘육신이 없어도 ’‘나는 존재하는가? ‘나’라고 부를 때 그 존재는 육신인가, 뇌인가, 영혼인가, 기억인가?’ 등의 질문을 던져 토론을 유도해 보기도 하지만 매우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토론수업이 꼭 필요하지만 쉽지 않아서 몇 해 전에는 ’바칼로레아 논술토론반‘ 동아리를 운영해 본 적이 있다. 기존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주제 중 중학생에게 적합한 주제들을 골라 토론을 해보았다. 다행히 우리 학교에서는 도덕과 사회 시간에 토론 수업을 이끄는 선생님들이 있다. 이들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토론수업을 열심히 하다 보면 이 경쟁과 성취 중심의 대한민국 청소년들도 철학적인 청년들로 자라나지 않을까.
고대 철학자 중 ‘원자’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존재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은 묘하게 인간사의 고뇌를 불식시켜 준다. 어차피 원자로 돌아갈 것을, 그리고 ‘나’는 사라져도 나를 구성했던 원자는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을..... 허무할 것도 없고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인생을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누만. 이 책과 동시에 읽고 있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좀 다른 접근이긴 하지만 ‘허무하므로 인생은 치열하다.’ ‘내가 저 먼 우주의 한 줌 먼지로 사라지더라도 아쉬워하지 말라’ 말한다. 한 사람은 유물론자이고 한 사람은 절대신의 존재를 믿은 사람이긴 하지만 거대한 원칙 앞에 한없이 작고 작은 인간 존재를 깨닫게 해 준 철학자들로 인해 우리는 유한한 인생의 고뇌를 조금은 놓을 수 있다.
다른 철학책과 달리 마음에 남은 부분이 있다면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유사성을 말하는 장면이다. 둘 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문답법의 거장이었고 권력자들에 대항한 비폭력주의자였다는 것, 그리고 부당한 재판과 사형을 당했지만 사면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까지. 소크라테스는 잘 모르지만 이렇게 지역과 시대를 넘나들며 진정으로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또한 이 질척거리는 삶에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작가는 소크라테스를 ‘확신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고 무관심하지도 않았다.’고 표현한다. 아우렐리우스도 그러했고 예수 역시 죽음 앞에서 인간적이었다. 진정 큰 사람들은 함부로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오만방자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 방대한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이 다루는 ‘철학’이라 말하는 것은 결국 서양철학이라는 것에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은 서양뿐 아니라 세상 곳곳에 있었을 것이다. 제자라곤 함께 사냥길에 나선 어린 마을 청년 몇이 다인 소박한 문명의 마을 지도자들 중에서 아우렐리우스 못지 않은 우주적 존재론을 말한 이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소피는 나와 비슷한 듯 조금은 결이 다른 불편함을 말한다. 근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등장한 ‘여성’ 철학자 시몬 베이유를 공부할 때 소피는 ‘남자 철학자들은 모두 그들 고유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 관심은 실제 세계에 있다’고 말한다. 철학자들이 언급하는 ‘인간’은 모두 중년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서. 나 역시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면서 노동과 땀냄새가 없는 귀족 남자들의 윤리를 지금 시대에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를 고민했다. 소피는 ‘삶은 임신과 출산으로 시작되는데, 지금까지는 그들의 철학 세계 속에는 아기 기저귀와 빽빽거리는 울음 소리가 없었다’고 지적한다. 역시 소피는 자신의 이름답게 지혜롭다. 소위 철학사들은 늘 서양, 강자, 남자 중심으로 펼쳐졌다. 남아 전해지는 게 없는데 무엇을 어찌 다룰 수 있겠냐고 항변할 수는 있지만 철학사를 고찰할 때 늘 왜 약자와 노동자의 관점은 없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옳을 것이다.
책이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로 끝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다. 실존주의는 결국 이 세계가 어떻든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는 사고방식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되돌아갈 그런 ‘영원한 본성’은 없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또 자기가 언젠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리고 삶에 대해 아무 의미도 인식할 수 없을 때에 불안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염세주의가 아니다. 사르트르는 그 불안 때문에 더더욱 삶이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거대한 실체 앞에 작디작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떠오른다. 2십억 광년의 고독을 느꼈던 다니카와 순타로 시인과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질 자신의 존재를 고뇌했던 박정만의 시세계가 떠오른다. 그렇게 이 책은 철학에서 시작해 우주 이야기로 끝난다. 신이든, 자연신이든 우주물리학이든 인간의 존재는 하염없이 작고 작위적이지만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철학’하는 책, 소피의 세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