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여행 에세이, 개정판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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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전문상담교사 자격증이 있다. 학교에는 전문상담사가 따로 오시므로 학생을 직접 상담하는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예전에 상담사가 없을 때는 주로 학생 상담을 맡아 했었고 지금도 업무 때문에 상담과 심리학에 대해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김형경을 보면서 나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심리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으나 꾸준히 공부해 왔다는 점. 그는 문학으로, 나는 교단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살고 있다는 것. 그러나 아마도 출발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였을 거라는 것...

 

이 책은 심리학 책이면서 여행기이다. 둘 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역들이다. 이 책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혼자 여행한 이야기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여러가지 심리학 키워드와 연관지어 풀어내고 있다. 내 기준으로 좋은 책은 그런 책이다. 일단 아무 생각 없이 읽고 싶은 책. 그리고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 밑줄을 치고,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고, 글에 인용하고 싶어지는 책. 이 책 역시 그 두 가지를 다 만족시켰다. 여기서 던져주는 키워드들을 모아 우리 학교 선생님들을 위한 상담연수 자료를 만들었다.

 

김형경은 독일 뮌헨 국립과학박물관을 둘러보고 말한다. “여행할 때 좀 더 일찍 이런 체험들을 했더라면 인생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런 여행이라면 매우 성공한 여행일 것이다.

그가 말한 버스 타고 한 바퀴는 좋은 여행 팁이다. 물론 나 역시 자유여행을 즐기면서 종종 써먹는 방법이긴 하다. 나는 그이처럼 오랜 기간 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여행을 해본 적은 없으므로 김형경이 사용한 방식 여행지에 가면 노선표와 지도를 놓고 가장 멀리, 골고루 돌 수 있는 버스나 전철을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오는 것 을 해보지는 않았다. 그래도 구애 없이 버스를 타거나 트램을 타고 여기저기 다녀본 경험이 꽤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드물게 그런 여행의 기억들이 있다. 생각에 잠겨 창밖을 볼 수 있는, 목적지가 불분명한 여행의 여유 혹은 불안, 나 역시 그런 여행을 좋아한다.

 

김형경은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신의 터전에서 멀리 떠나는 이유는 일종의 방어적 행동이라고 본다. 즉 여행은 총체적인 방어행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말에 몹시 격하게 공감한다. 왜 한국 여자들은 그렇게 해외여행을 좋아하는 것일까? 남편은 국내여행보다 해외여행을 선호하는 나를 의아해 한다. 나 역시 스스로가 궁금하긴 했었다.

나는 바로 여기에서 충족되지 못한 것, 현실의 불안과 불만에 대한 방어와 보상심리가 여행에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존중받지 못하는 삶, 묻혀버린 삶의 불만이 먼 이국의 땅에서 차라리 아무도 나를 모르는 땅에서 온전히 내가 나라고 여겨지는 충만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닐지. 농담 삼아 한국 남자들이 해외여행을 싫어하는 것은 좁아터진 비행기 좌석 탓이라고 어떤 한국여자들과 웃으며 이야기 나눈 적이 있는데, 해외여행에 관한 한국 남자, 혹은 여자들의 심리는 한번쯤 짚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이 책이 말하는 심리학적 기제들 중 유독 마음에 남았던 것들을 좀 정리해 보련다. 아마도 그것은 내 안에 있는 것들일 가능성이 높다. 가령, 김형경은 과도한 자주성을 의존성의 뒷면이라고 본다. 중독은 의존성이 가장 심화된 형태이며 대개 취약한 정신이 중독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도박이나 게임 같은 부류의 중독이 아닌 인정 중독도 중독의 하나이다. 어렸을 때 칭찬과 격려에 인색한 부모, 지지해 줄 줄 모르는 냉담한 부모, 감질 나는 방식으로 사랑을 주는 부모에게 양육된 경우에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란다.

책에는 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네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탐욕스럽다고 보인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라. ‘내가 지나치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타인이 나를 시기한다고 생각되면 나는 타인의 소유물 중에서 무엇을 파괴하고 싶은가?’ 누군가 나를 미워한다고 느껴질 때면 내가 지금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모든 사람이 다 내 모습의 반영은 아닐 것이다. 가령 나는 일머리가 게으른 사람(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비열한 사람을 싫어하는데 그건 분명 내가 싫어하는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격렬하게 싫어하는 사람 중에서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긍정적인 사람과 피해의식이 너무 강해서 세상 모두가 자기를 비난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의 모습에는 분명 내 모습이 비추어져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인정욕구의 뒤집어진 표현이기도 함을 심리학 공부 따위 하기 이전에도 이미 알고 있었다.

 

좀 새삼스러운 감은 있지만 위 대목은 인생을 성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내가 만약 남 험담을 하고 있다면 절반 이상은 결국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자각에 이르면 말로 짓는 죄업에 좀 더 조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아직 마음은 아니다. 마음으로 누군가 싫고 미운 것조차 참고 싶지는 않다. 여태껏 내가 주로 미워했던 사람들이 대개는 강자였던 점을 생각하면 미움과 분노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열쇠였기도 했다는 생각이다.

나는 슬픔과 분노가 건강한 에너지가 될 수 있으며 부끄러움과 더불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감정이라고 믿지만 그래도 분노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표출되어 친밀한 관계를 그르치고 생을 퇴행시킨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내면화된 분노는 자살로 이어진다.’는 구절에 동의한다. 특히 ‘5분 이상 화가 난다면 그것은 나의 문제다.’라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많이 끄덕였다. 특히 내 나이쯤 먹으면 더더욱 어지간한 개인적인 분노에 대해서는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린 친구들도 정신적으로 성숙한 아이들, 안정된 양육을 받은 아이들은 함부로 화내지 않는다. 쫄지도 않지만 함부로 분노하지도 않는 그런 어린 남자아이들도 많이 봤다. 하물며 어른임에랴. 분노의 감정은 당연히 느낄 수 있지만 그 화를 잘 낼필요가 있다. 화를 표현하는 방식을 말함이다. 그리고 적정히 표현하고 난 분노는 5분 이내 처리할 수도 있어야 한다.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그만...’이라는 변명 속에서 자녀나 학생들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는 어른들을 많이 보았다. 부끄러운 일이다.

 

요즘 구스타프 칼 융의 이론을 공부하고 있는데 아직도 그가 말하는 무의식과 개인화의 관계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이것을 김형경은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리한다.

 

모든 개인의 내면에는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선하고 옳고 정의롭다는 성향을 간직하기 위해 무의식에 억압해 둔 그 반대 성향이 있다..... 건강한 자기애란 바로 그 병리적 자기애를 인식하고 그것을 의식 속으로 통합하는 행위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필생의 과제일 것이다. 융은 무의식이 건강하게 의식화되지 않으면 그저 운명에 불과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내가 누군지 정확히 찾고 더 나은 나로서 살기를 원한다면 내 안에 숨겨진 것들을 들여다보려 애써야 할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자아가 형성되고 있는 사춘기의 내 학생들을 위해서도 그 작업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론과 기법은 공부를 하면서 채워갈 문제이지만 지지자로서, 도와주는 이로서 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태도일 것이다. 김형경은 지지는 모든 형태의 정신 치료의 중요한 요소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아이들은 조금 비틀거리다가도 자신을 전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기 발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이 너무 지쳐서, 너무 나빠져서 돌이킬 수 없고 돌아올 수 없게 되기 전에 얼른, 그 옆에서 서 있다고 마음으로 알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지지 앞에서 훈육도 설득력이 서지 않을까.

프렌체스코 성자의 이야기는 교사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 다신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내가 가르치는 모든 아이가 천사라고 착각하지 말라던 어떤 동료교사의 말 앞에서, 모든 아이가 천사 아닌 것은 맞는데, 그래도 교사는 마치 자기 학생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품으려 애써야 하는 건 아닌지, 항변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내 앞에 있는 이가 너무나 단호해서 오히려 나는 그 말을 못하고 쩔쩔맸더랬다. 다시 그런 논쟁이 벌어진다면 무슨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성직관을 펼치느냐, 안선생, 꼰대 다 되셨구만.’ 이런 비아냥을 듣더라도 이젠 새들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 성자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아이들은 천사도 아니고 우리 교사들 역시 성자가 아니다. 하지만 우린 새도 아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새보다 훨씬 큰 뇌와 그보다는 잘 알아듣는 말귀의 소유자들. 우리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그들에게 보내는 지지가 그래도 아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안으로 끌어당기지 않을까? 어른들에 대한 상처와 불신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 주고 세상에 대한 증오를 눅지게 해주지 않을까? 100번의 따스한 말에 99번의 냉소로 답할지라도 돌아서 먼 훗날 내 마음을 조금은 느껴주지 않을까?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일까? 새들에게 설교하는 것도, 쇠귀에 경을 읽어주는 것도 아닌, 인간에게 들려주는 따스한 말들, 그렇게 힘이 드는 일일까?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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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결속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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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비한 소설을 뭐라 말할까. 지난 번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은 이후 세상에 이런 소설이 있었나, 싶었다. 아니, 어린 시절에 더러더러 읽었던 문학작품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났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파스칼 키냐르야 이 세상 하나뿐인 작가이겠지만 적어도 예전에 읽었던 문학작품에서는 이런 아우라를 느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을 뭐라고 말할까. 굳이 줄거리를 정리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주인공인 클레르가 추구한 삶은 그리 서사적이지가 않다. 물론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시몽과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면 그 역시 일상적인 인간의 삶을 서사적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자연의 일부분으로 마치 식물처럼 살았던 이유가 사랑하는 이를 가지지 못한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본성에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번역이라는, 언어의 조각이라는 예술의 영역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지독한 사랑을 삶의 자양분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면 보통의 사람처럼 먹고 자고 붙박여 사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유럽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줄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감성이 중요하다. 심지어는 메시지가 없어도 그만이다. 분위기와 아우라만으로도 문학이 된다. 물론 메시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계몽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다. 묘사가 많지 않아도 나는 클레르의 농막과 그가 헤매 다닌 숲과 바다의 풍경과 냄새가 맡아질 것 같았다. 간결하고 아름답다.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무엇과 결속이 되어 있다는 것일까? 클레르와 시몽의 사랑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바다로 걸어 들어갔던, 이 생이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사랑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클레르가 만난 자연과 우주의 또 다른 기운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모두 일상을 살 수밖에 없지만 어떤 형태로는 일상이 아닌, 알지 못할 세계에 대한 연결고리를 느낀다’. 어떤 사람은 종교로, 어떤 사람은 문학으로, 어떤 사람은 그저 세속적인 사랑에서라도 신비하고 영적인 연결의 느낌으로 일상의 남루함을 견뎌낼 수 있다. 그런 게 없다면 어찌 삶을 살아갈까. 그것이 좀 더 드높고 고결한 것이어서 우주의 기운 같은 것이면 더욱 좋긴 할 것이지만 그저 곁에 같이 사는 사람과의 결속감만이더라도 이 생은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문학과 예술이 그런 신비한 결속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 클레르의 삶은 나와 아주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밤중에 온 숲을 헤매면서 느끼는 충만, 혹은 결핍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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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처네 (양장) - 목성균 수필전집
목성균 지음 / 연암서가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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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목성균의 글을 그저 수필문학의 정수’, ‘문체의 미학으로 학습하기 위한 용도로 집어들었던 나는 읽으면서 서서히 알지 못할 향수에 젖게 되었다. 그가 묘사하는 고향의 풍광 등이 너무나 낯이 익다. 목성균은 38년생으로 나의 아버지뻘 세대이니 나와 정서가 같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시대적으로 공유하는 장면들이야 많이 있겠지만. 알고 보니 그의 고향 연풍은 내 아버지의 고향 괴산에 인접해 있고 나의 아버지와 사촌 언니, 오빠들이 공부하던 고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버지도 저런 풍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나는 장독에 지그시 기대앉아서 그 풍경을 바라보며 젊은 날의 고뇌와 사념들을 삭여냈다. 그때마다 장독은 내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섭섭하게 여길 거 없어, 마음이 클 때는 다 그런 거야.”(옹기와 사기 중)

 

연풍 갈매실 냇물 갈매실은 냇물이 휘돌아 나가면서 만들어 놓은 넓은 자갈밭이다. 자갈밭은 여름 장마에 벌창하는 냇물로 깨끗하게 씻겨져 있었다. 이곳에 앉으면 옹배기 같은 연풍 분지를 만들어 놓은 산맥이 한 눈에 바라보인다. 냇가 자갈밭에는 패랭이꽃이 지천으로 피었고, 그 위로 메밀잠자리가 한가롭게 군무를 추듯이 유유히 날았다.

...... 나는 냇물에 목욕을 하고 나와서 산그늘이 내리는, 달아서 따끈따끈한 자갈에 벌렁 드러누워 그 저녁그늘이 그리는 산읍의 소묘에 공연히 맘이 격앙되었다(산읍소묘 중).

 

나 역시 아주 어린 시절이긴 하지만 괴산과 연풍에 가본 적이 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내와 산이 눈앞에 그려지듯 느껴졌나 보다.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42년생이니 어쩌면 이 두 분은 서로 안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올라오시기 전에 혹시 학교 다닐 때 선후배로 만난 적은 없는지 물어볼 텐데..... 서로 면식이 없는 사이라 하더라도 글 속에 등장하는 내며 산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는 시골에 다녀오시면 가끔 다래와 으름 같은 걸 싸오기도 하셨다. 맛있기로는 고욤이 참 맛있다 했는데 끝끝내 고욤은 구경한 적이 없다. 목성균은 바래너미의 고욤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어쩌면 이렇게도 아버지가 말씀하신 고욤나무의 추억과 흡사한지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이 책을 읽어보시라 하면 아마 추억에 잠겨 밤새 책을 읽으실 것이고, 다 읽은 후에는 나에게 자랑을 하실 것이며 막걸리를 앞에 놓고 길게 독후감을 주거니 받거니 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래도 착 가라앉은 하늘이 반가운 일을 낼 것 같아서 온종이 서성거렸다. 동구의 둥구나무에 까치가 한 쌍 앉아 있다. 짖을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지 않다. 그 미물도 조용히 기다리기로 맘을 먹고 있는 것이다. 동네 워리들이 빈들에서 레이스를 펼친다. 그러다 가끔 모두 먼 산을 보고 멈춰 선다. 건너말 둔덕에 하얗게 서 있는 사람들 뭘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편히 쉬어 자세로 멍청하게 서 있다. 그때 눈이 왔다. 사람들의 기대감을 저버리는 법 없이 아주 양순하게 혹은 운명적인 모습으로 오는 눈이 첫눈이다(첫눈 중).

연세가 들어도 티브이에서 눈 오는 풍경을 보면 고향에 가고 싶어 하셨던 낭만적인 문인 기질, 그것이 나의 아버지였다. 나는 어린 시절 못생긴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놀리는 엄마에게 섭섭했었는데, 아버지 돌아가실 무렵 생각해 보니 삼남매 중 누구보다도 기질적으로 아버지를 많이 닮았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우리 남매들이 가진,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기고 감성적인 부분은 정도 차이가 다 있지만 어쨌거나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들이다.

이렇게 이 수필의 문학적 무게에다 아버지의 무게까지 얹어져서 일으면 읽을수록 더욱 좋았다. 오랜만에 아버지가 그립다.

 

아내와 아기가 눈발 속으로 사라지는 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기가 훗날 기억할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답지 못한 도벌꾼의 비열에 나는 비애를 느꼈다. “아빠 까까 사가지고 올게.” 아기에게 그렇게 말하고 의연하게 연행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때 권주사가 울고 있는 도벌꾼 아내와 어린것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아가야, 아빠 까까 사러 갔다.”

..... 인간적 배려의 한마디였다(어떤 직무유기 중).

 

6.25 직후 할머니와 밭에서 무를 뽑고 있는데 인민군 패잔병이 나타났다. 두서너 살 위의 소년병이 조선무를 베어물자 할머니는 이리 와서 앉아 먹어요.” 하고 부르고 인민군은 할머니를 따라 밭둑으로 나와 할머니 곁에 나란히 앉았다. 무 한 개를 다 먹은 인민군은 밭둑에서 일어섰다. 할머니가 얼른 머리에 쓰고 계시던 무명 수건을 벗어서 해줄 게 아무것도 없네-.” 하시며 인민군 볼에 싸매 주셨다. 사시장철 밖에서는 쓰고 사시는 할머니의 살갗 같은 당목수건이었다. 소년병은 땀에 절어 퀴퀴한 냄새가 나는 할머니의 당목수건을 해주는 대로 가만히 받아들였다. 이미 뼛골까지 파고드는 산속의 추위를 겪은 때문일까, 당목수건에 밴 냄새가 고향의 부모님 냄새처럼 그리워서일까(소년병 중) .

 

목성균 수필에는 이야깃거리들이 많다. 산림공무원 시절 젊은 아기 아빠인 도벌꾼을 잡으러 간 이야기며 강원도에서 아내가 목도리를 떠서 덕장에서 일하는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이야기, 어린 시절 할머니와 산에서 만난 소년병 이야기는 애틋하고 감동적이다.

꼭 스토리가 아니더라도 그가 묘사하는 풍경이며 심리는 절묘하고 세밀하다. 어린 자녀를 둔 젊은 가장이었던 시절, 눈 속에 과자 사러 가는 어린 오누이를 바라보는 애틋한 젊은 부정이 내 마음에도 느껴지는 다음과 같은 풍경,

 

백설이 애애한 긴 겨울의 권태를 꾹 참게 하던 내 아이들이 만든 동화 한 폭. 눈이 쌓이지 않은 처마 밑으로 여섯 살짜리 계집애가 네 살짜리 사내애 손을 꼭 잡고 게처럼 모퉁이 걸음으로 가겟방에 과자를 사러 가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저것들을 잘 길러낼 수 있을까? 적설량이 젊은 가장의 기를 죽였으나 부성애가 바람꽃처럼 적설량을 떠들시고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목도리 중).

 

혹은 함께 달빛을 바라보는 개 이야기,

 

달은 혼자 보는 것이 좋지만 집에서 오래 기른 개하고 같이 보면 더 좋다. 침묵하고 같이 있어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젊어서 윗버들미에 살 때 가을 달밤이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우리 논머리 방천둑에 서 있었다. 그 때 내 발치에 우리 개 검둥이가 따라 나와서 너부죽이 엎드려 있었다. 개도 사람만큼 달을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꽤 긴 시간 동안 우리는 그렇게 있었다. 개는 앞발을 쭉 뻗고 발 위에서 턱을 얹어 놓고 있었다. 자세가 하도 편해서 자나 하고 개 얼굴을 들여다보면 개는 달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맑은 달빛이 눈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개에게 깊은 도반의 정 같은 것을 느끼고 개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개는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꼬리로 땅바닥만 두어 번 쓰는 것으로 내 관심에 응답을 했다(아파트의 불빛 중).

 

필시 마음이 따뜻하고 감성적이었을, 내 아버지 같은 감수성의 충청도 문인기질의 그 양반, 목성균이 아버지처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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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알고 싶은 유럽 TOP10 -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두 번째 이야기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2
정여울 지음 / 홍익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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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이번 5월 동유럽에 갔다 왔다. 해외여행을 자주 하는 편이고 배낭여행까지는 아니어도 자유여행을 자주 다녔건만, 새로운 여행은 언제나 설레고 긴장된다. 그러고 보면 한때(지난 여름, 가을) 늘 유럽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던 내가 떠오른다. 유럽에 대한 판타지 같은 것을 갖고 있었던 걸까? 그냥 여기 아닌 다른 세상을 꿈꾼 것일까? 하여간, 그런 꿈꾸는 목록 중에 동유럽도 들어있었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보면서, 과거 사회주의 치하의 폴란드, <사일런트 웨딩>을 보면서 음울하나 소박한 루마니아, 그런 동유럽을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유럽의 분위기는 고스란하지만 서유럽처럼 상업성에 물들지는 않은... 모든 여행이 다 그러하겠지만 환상일 것이다. 쿠바처럼, 글에서 본 그대로의 여행지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 뻔하다. 그럼에도 동유럽, 언젠가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렵사리 이번 5, 황금연휴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책 속에서 소개한 김소연 시인의 <어떤 날>이 재미있었다. 김열규 선생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문학이라는 게 늘 피안을 꿈꾸는 일이라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내가 밤마다 시달리듯이 꿈을 꾸는 것도 어쩌면, 현실에서 이루기 힘든 문학의 꿈을 대신하는 일이 아닐까. 여행도 어쩌면 쓰는 일 대신이 아닐까. 글을 쓸 수 없는 이들이 자기 대신 다른 이가 써준 시를 읽고 소설을 읽듯이 여행을 가면서 문학적 꿈을 대신 이루려하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서의 나

여행지에서의 나

어깨에 보이지 않는 짐 한가득

어깨에 최소한의 짐

침묵하고 있는 심장

들떠있는 심장

모두가 너무 가깝지만 모두가 멀기만 하다

모두가 너무 멀어서 모두가 그립다

감정노동만으로 쉽게 피로해진다

걷고 걸어서 피곤해진다

아무리 피곤해도 불면증

누우면 곧장 잠

내일 스케줄이 부담스럽다

내일 스케줄이 호기심 가득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일이 즐겁다

머릿속이 북잡해진다

머릿속이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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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혁명사 - 자유를 향한 끝없는 여정 쿠바 바로 알기
아비바 촘스키 지음, 정진상 옮김 / 삼천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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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월의 쿠바 여행기의 일부를 먼저 소개한다. 체 게바라의 유해가 묻혀 있는 산타클라라를 다녀온 부분이다. 노엄 촘스키의 딸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는 쿠바 혁명을 전반적으로 조망할 때 주로 그 시스템을 말하지만 또한 그 안에 있는 혁명정신을 놓지 않는다. 쿠바 혁명 정신의 두 줄기는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이다. 이런 게 정말 혁명이구나, 싶은 뭉클함이 있다. 남의 나라 성공한 혁명에 대한 부러움 때문만은 아닌 그 무엇이 있다.

 

쿠바 여행기 8. 체 게바라를 다시 생각함

 

동트는 아름다운 비달광장은 잠시 고요했다. 잠시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있다. 새벽 3시까지 아마도 호텔 지하의 클럽에서 나는 소리인 듯한 라틴음악이 우리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밤중이나 새벽은 고요한 줄만 알고 살았건만... 그래도 아직 어둑한 아침의 광장은 가로등빛만 고요하고 저 먼 하늘이 동이 틀락 말락하니 아름답다. 감탄이 절로 난다. 참 예쁘게 잘 만든 광장이다. 광장이라지만 광화문이나 시청광장처럼 크지도 않다. 뜨리니닷의 마요르 광장도, 아바나의 빠르끄 쎈뜨랄도 조촐하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작은 공원같은 느낌...

 

하지만 아름다운 비달광장의 고요는 금방 끝난다. 공원 나무에서 잠자던 쿠바 새들이 아침이 왔다고 일제히 지저귀기 시작한다. 나무 하나가 저 새들을 감당할까 싶을 만큼 어마어마한 새들이 공원에 산다. 무서울 정도로 지저귄다. 밤 세시에서 아침 여섯 시까지, 하루 딱 세 시간 조용한 곳, 쿠바...

 

나는 여행을 다니는 동안 매일 밤 간단한 일기를 썼는데 산타클라라에서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체 게바라가 대통령으로 온다 해도 자유를 포기할 수는 없다. 무상의 질 높은 교육과 의료를 주면서 자유와 맞바꾸자 해도 거부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독선에, 오만에, 고집불통 역사왜곡 대통령이라니...’

 

체 게바라를 다시 생각함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겠으나 체 게바라가 한 말이라고 알고 있었던 말이 하나 있다.

모든 권력화를 지양한다

꽤 오래 전부터 나는 나름대로 이 말을 내 삶의 지표 중 하나로 삼았다. 혹여 내게 알량한 권력이나 권위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의연하게 살겠노라는 자기 다짐일 뿐 아니라 어떠한 권위주의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같은 것으로써. 체 게바라의 말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한 걸 보면 그저 그의 전기문을 읽다 정리가 된 말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카잔차키스가 묘비명에 쓴 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처럼 진짜 무서운 사람은 어디에도 마음이 얽매이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아무 욕심 없는 사람처럼 무섭고 멋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 말을 체가 했든 안 했든 그는 스스로 가질 수도 있었던 권력과 거리를 두었다. 호사가들은 체 게바라 일찍 죽지 않았으면 피델과 어떤 관계가 되었을까, 이런 상상을 하기도 하고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 가서 죽게 된 데에는 피델의 음모가 있었다는, CIA의 이간질에 의한 더리dirty’한 가십도 있지만 그의 죽음은 참으로 그다운 행적의 정점이다. 오래 살아서 쿠바의 미래를 밝게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죽어서도 쿠바를 이끄는 삶의 원동력(학생들이 수업 시작할 때 우리는 체처럼 될 것이다라고 외친다는데, 닮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할까, 이 아이들은!), 심지어는 티셔츠 속에서 쿠바인들을 먹여살리기까지 하는 훈훈한 사람이란 말이다.

 

2005년 즈음이던가. 신영복의 <강의>와 더불어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적이 있었다. 체 게바라가 누구인가. 그는 쿠바 사회주의 혁명의 장본인이다. 좀 단순하게 말하자면 공산주의자인 그의 평전이 레드 콤플렉스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정체성을 알고도 그토록 많은 이들이 그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인지, 이념성을 제거하고 낭만적 혁명의 겉만을 핥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베스트셀러의 속성 그대로 좀 있어 보이는 책을 들고 다니고 싶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인지... 그 현상은 지금도 내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체 게바라 평전>현실과 이념 모순도 그렇지만 신영복의 <강의>가 베스트셀러인 것도 고개가 갸웃거렸다. 인문학을 전공한 내가 읽어도 빠르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공부가 필요한 책이었는데 그 책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고? 그런데도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고? 세상을 달리 보고 세상을 다르게 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책은 왜 읽는 것인가에 대해 조금 심각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체 게바라의 낭만에 대하여어~’

대중이 체 게바라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이념 때문이 아니다. 그를 민중에 대한 따뜻한 박애와 감성을 지닌 실천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는 말에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당당히 체 게바라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무탈한 이유도 그가 가지고 있는 낭만주의적인 이미지 때문이리라. 총의 이미지와 시의 이미지가 결합된, 민중에 대한 애정과 의사 출신이라는 출신성분이 어우러져 더욱 고상하게 보이게 하는... 그래, 네가 그 잘생긴 얼굴을 좋아하는 거겠지, 설마 사회주의 혁명을 하겠다는 건 아닐 터이지? 이런 시선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위험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면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사회주의자라는 이념의 아이콘으로보다는 이상을 꿈꾸었고 그것을 이루려 노력했던 인간으로 여긴다. 폭넓은 이상을 품는 사는 이는 얼마나 되며 더구나 그 이상을 이루려 온 몸으로 실천하는 이는 얼마나 되려나. 게다가 그 이상을 이룬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나. ‘우리 모두 꿈을 꾸자고 속삭이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달콤한 선동가. 하지만 그는 또한 리얼리스트이기도 했다. 그가 특별한 것은 이루지 못한 꿈의 안타까운 아름다움이 아닌, 꿈꾸고, 실천하여 결국은 이루어 낸, 독특한 현실주의적 낭만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또한 그는 분명 쿠바의 경체 시스템을 만드는 이데올로그이기도 했다. 이전에 책에서 읽었겠으나 그냥 무심히 넘기고 오랜 세월 동안 그의 이미지와 환상()인 잔영 때문에 놓쳐버린 바, 그는 그냥 꿈만 꾼 사람도, 실천만 한 사람도 아니었다. 비전과 대안을 지녔던 사람이다.

 

대한민국에서 보수정치의 전횡으로 진보진영의 격도 덩달아 떨어졌다는 한겨레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좀 포괄적으로 우리 편을 품고 가자는 주의이긴 하지만 진보라는 이름으로 품기에 우리에겐 어떤 규모와 격과 이론과 지혜가 많이 부족한 건 사실인 듯하다. 876.10 항쟁 이후 막 그걸 채워나가기 시작하는 듯 보였지만 얼마 안 돼 금세 꺾여버렸다.

 

혁명이든 개혁이든, 그냥 진보적 발걸음이든, 뭐라도 하기 위해서는

1. ‘현사태를 정확히 직시함

2. ‘직시에서 비롯된 논리적인 비판

3. ‘적과 싸움, 혹은 싸워 이김

4. ‘이긴 후 무너뜨린 폐허 위에 무엇을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대안 제시

5. ‘그 대안을 실현시킴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3단계까지도 가 본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체 게바라는 5단계, 그 너머를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그냥 총 들고 불도저를 이끌고 무기차량을 탈취한 혁명가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었다. ‘건설 쿠바에까지 나아갔으며, 건설에서 자기가 빠져도 무방하리라는 판단에서 자리를 놓고 떠난 사람이었다. 그가 사람들의 사무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놓고 떠남, 영원히 산화함의 미학에 있겠지만 나는 내가 그 앞 단계를 놓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막 싹트기 시작한 쿠바에 무엇을 심어놓았는가를 말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산업부 장관 등을 하면서 해낸 일들을 말이다. 그 부분을 정확히 봐야만 체를 온전히 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소비되는 티셔츠 속의 체 게바라가 아닌, 이론과 대안을 지녔던 자로서 말이다.

 

피델이라는 사람

사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체 게바라보다 피델 카스트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흔히 사람들은 체 게바라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낭만적 혁명가, 감성적이고 따뜻한 인간적 지도자라 생각해서 거리낌 없이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 피델 카스트로를 좋아해.”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체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선언하기도 전에 죽어버리지도 않았고 1960년에 명백히 공산주의자임을 선언한 피델,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세계적으로 장수독재를 한 인물인 피델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반공이 국시인 줄 착각하는 대한민국이서는 참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52년 독재를 했다는 피델의 우상화 흔적은 쿠바 어디서도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일단 그것이다. 12일의 쿠바 여정에서 길거리에서 피델의 얼굴 그림이나 이름을 본 것은 세 번도 안 된다.

 

내가 본 그 세 번의 피델 얼굴 혹은 이름 중엔 이런 것이 있었다. ‘Con fiDel Revolcion’(피델과 함께 혁명을)‘. 쿠바의 가장 큰 주민 자치조직이라 할 수 있는 CDR(Comite de Defensa de la Revolucion)은 원래 혁명방위위원회를 뜻한다. 말하자면 약자를 가지고 재미있게 표현한 것일 수 있는데 이 정도가 내가 본 피델을 기리는 구호정도였다. 쿠바 사람들은 왜 피델을 우상화하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어 본다. 그리고 그 답이 바로 쿠바의 공산주의가 다른 나라 공산주의 정권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 본다. 쿠바에는 살아있는 지도자를 추앙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다 한다.

 

읽은 책들(<쿠바 혁명사>, <쿠바의 민주주의>, <쿠바식으로 산다>, <교육 천국 쿠바를 가다>) 중에는 곳곳에 피델의 연설들이 등장한다. 피델은 유명한 선동가였다고 듣긴 했지만 이토록 달변인 줄은 몰랐다. 피델의 가장 유명한 연설 중에는 이런 게 있다.

바티스타 집권기인 1953726일 몬카다 병영 습격에 실패한 MSR대원들은 모두 체포되었으며 그중 피델 카스트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체포 된 피델 카스트로는 변호사 출신(아바나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이었기 때문에 자체 변호를 했다고 한다.

 

... 너희들이 내 심장에 총구멍을 낸다 하더라도 조국, 정의로움, 인류에 대한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들은 진실을 가리기 위해 온갖 더러운 수단을 쓸 것이지만, 나는 꼭 너희들의 더러운 역사를 낱낱이 파헤쳐 세상에 알릴 것이다. 너희들이 날 방해하고 이 비좁은 공간에 가둘수록 내 혁명적 마음을 더 살아날 것이며, 너희들이 나를 침묵시키려 노력할수록 쿠바 인민들의 혁명적 동기는 더욱더 타오를 것이다. 또한 너희들이 수작을 해서 나와 전 대원들의 숭고한 정신을 왜곡시켜 내가 당장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요한 것도 아니며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우리가 많이 인용한 유명한 말들 중에 피델이나 체가 했던 말들이 많다. 체의 명언은 그가 죽어서더욱 빛나고 피델의 명언은 성공한 혁명이어서 더욱 빛난다. 비애의 역사 속에, 실패한 혁명 속에 스러져 간 많은 우리 혁명가들의 절창은 언제 다시 빛날 것인가.

 

아바나와 뜨리니닷의 놀랍도록 빛나는 별빛을 보면서 딸은 엄마, 저 별빛이 지금 것이 아니라며? 그런 생각하면 기분이 진짜 이상하지 않아?’ 라고 말했다. 그래, 때로는 이미 죽은 별이 마지막 발한 빛을 우리가 수백, 수천 년 후인 지금에 보기도 한다더라. 먼 하늘을 보면 시공이 뒤섞이는 것 같은 묘한 감상에, 내 작은 존재가 정말 우주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시간 속에 공간 속에 살고 있지 않는 것 같은 또 다른 존재감, 그런 느낌 때문에 시인들은 별을 자꾸 바라보았겠지.

 

최근에 역사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많이 생각한다. 나는 죽어도 역사는 남는 것, 지금이 아닌 또 다른 시대가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것, 그런 상념 속에 나의 나이 듦, 한 인생이 죽음 앞에 놓임, 이런 것들이 무의미해지기도 한다. 체와 피델은 죽은 혁명가, 살아남은 혁명가의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많은 이들의 인생에 또 쿠바의 역사에 그리고 세계의 역사에서 또 많은 화두를 던져준다.

 

이제 책 이야기도 돌아오자.

이 책에서 체 게바라는 인간은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탐욕과 소비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기적이지 않은 목표, 즉 사회에 참여하여 헌신하는 열정에 자극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도덕적 보상은 이렇게 정신적으로 제시되고, 또 구현되었다. 그래서 쿠바 학생들은 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체 게바라처럼 될 거야!”라고 외친단다. 마음에 새길 정신적 지도자를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게다가 그는 현재의 쿠바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관광 상품이기까지 하다!

 

그는 혁명가이자 철학자였다. 쿠바의 가장 급진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경제개혁의 설계자였다. 또한 혁명운동의 연대의 상징이기도 했다. 게릴라 활동 당시 농촌 빈민과 함께 생활해 민중의 믿음을 얻을 수 있었고 적어도 은수저 출신인 그 자신이 빈곤한 농촌 현실을 대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혁명 동지들과 함께 그리 했으니 도시 지식인 출신의 혁명가들이 민중에 녹아들어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

 

이 책은 체가 죽은 후 지속된 영웅적 낭만주의는 좀 더 현대적인 좌파 대안들이 들어서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현실적 대안을 내오기보다 체처럼 혁명적 길을 걷다가 죽음으로 이끌려진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사실 체의 위상은 그의 군사적 위업이나 게릴라 전쟁 이론을 훨씬 능가한다. 우리는 산악을 누빈 게릴라로서의 게바라를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재구성했다. 체의 공산주의는 단순한 경제의 재구성만이 아닌 의식현상으로써, ‘소외를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단다. “우리는 빈곤에 맞서 투쟁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소외에 맞서 투쟁한다.”

어쩌면 이것이 쿠바의 공산주의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다른 모습을 띄게 된 원인인지도 모른다. 소련식의 폭력적인 국가독재나 우상화가 횡행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인간적 공산주의의 모습 말이다.

실제로 쿠바에서는 소련에서와 같은 인권재앙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련과 밀접했지만 쿠바 문화에는 소련적인 것보다 미국적인 요소가 더 많다(이것은 좌파이기는 하지만 미국인인 저자의 말이다). 쿠바정부는 1970년대 말 미국으로 건너간 쿠바인들을 경멸하지 않고 이민자들을 초대했으며 달러 상점에서 쇼핑, 친척들에게 선물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친미 친자본주의자들을 숙청하지 않고 (재산은 몰수했지만)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물론 쫓아낸 것이니 잘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잔인하게 반대자를 죽이거나 감금해 버리는 다른 많은 극우 극좌 독재정권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혁명 초기의 쿠바 정부는 혁명정부가 임금을 인상하고 기업 규제를 강화하면 자본은 외국 등 도피처를 찾을 것이라는 딜레마에 빠졌었다. 이때 쿠바 정부는 토지개혁, 배급 등의 분배 시스템을 정비함과 동시에 교육과 의료는 인적자원이 물질적 자원의 부족을 메울 수 있도록 대중동원의 수단을 사용했다. 무엇보다도 마음과 의식을 움직이지 않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물질적 부족은 정신적으로 메꿨다고 해야 할까?

특히 문맹에 대한 공격은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간주되었다. 문맹과 교육결핍은 침묵, 주변화, 억압을 의미하니까. 대중교육은 불평들을 전복하고 가난한 이들이 정치적 주체가 되도록 하는 중요한 사업이라고 여겨 문자해득 운동을 벌였다.

또한 이미 교육받은 도시 쿠바인들을 교육과 의료에 동원하는 일은 의식화의 일환이기도 했다. 도시 학생들은 농촌에서 노동하면서 일정 시간을 보내야 했다(1960년대 농촌 노동을 위한 2주간 동원, 대학진학 예비과정인 도시 인문계 고등학생들은 학과수업과 노동을 병행하는 농촌 기숙학교를 다녀야 했다. 모든 의과대 졸업생들에게는 1년간 농촌에서 사회서비스 노동을 하도록 했고 1961년에는 치과 진료가 추가됐다).

 

이후 쿠바는 CIA의 피델 암살 음모, 1961년 피그 만 침입,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등을 겪고 미국의 경제 봉쇄의 어려움 속에서도 국제 원조를 아끼지 않는다.

1970년대 쿠바의 군사 활동은 전 세계적으로 미국 다음이었으며 제 2의 초강대 권력으로 간주되었다. 2006년까지 쿠바는 거의 40만 명의 병력과 7만 원조노동자들을 해외에 파견했다. 쿠바의 목표는 혁명에 안전한 세계를 만드는 것으로, 3세계 혁명운동을 도왔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간 원조 프로그램으로 1963년부터 1991년까지 약 1만 명의 의사 포함 3만 명의 의료노동자 알제리 등 해외 파견되었고 1998년에는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학생들을 위한 라틴아메리카의과대학을 설립하였다. 여기서 공부한 학생들은 장학금을 받는 대신 의료서비스가 취약한 공동체에서 5년간 복무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야말로 국경을 넘어 라틴아프리카에 과감히 연대한 것이다. 가난한 주제에 뭔 짓이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가난하지만 자기 나라 국민 모두가 최상의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받게 하는 나라가 쿠바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군사, 의료적 자원을 아낌없이 주변에 나눠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민중이 혁명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나라이다. 사는 방식은 다 다르겠지만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혹은 이간질해서 자국의 이득만을 취하는 국제사회의 사는 방식과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어쩌면 쿠바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이지만, 삶의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거연령 18세 하향에 대한 찬반토론을 하던 중 16세 선거를 실시하는 나라 중에 독일과 쿠바가 있다 하니, 한 보수 성향(2가 보수면 얼마나 보수이며 진보면 얼마나 진보냐, 할지 모르지만 똘똘한 녀석들은 이맘때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의 한 모범생(소위 전교권의 학업우수학생이다)쿠바는 못 사는 나라잖아요.’라고 말한다. 쿠바는 몹시 가난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가난이 국민을 굶게 하거나 돈 없어서 공부를 못하게 하거나 돈 없어서 아파도 그냥 죽어가게 두진 않는다는 것에 대해 설명해 주고 싶었다(시간이 없어서 못했지만).

 

쿠바에는 ‘CDR’이라는 것이 있다. ‘혁명수호위원회’, 주민자치기구이다. 만약 어떤 동네 노인이 요즘 들어 거리에서 보이지 않으면 CDR이 찾아가 확인하고 보건당국 등과 긴밀히 협력하여 그를 찾아가 돌본단다. 쿠바의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이런 모든 기구들이 주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감시기구라고 생각한다. 사실 아바나 거리를 걸으면서 거리가 무질서하지 않고 치안이 좋은 이유도 200미터 간격으로 보이는 경찰(혹은 그에 준하는 제복 입은 통제자들)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프라도 거리에서 한 초딩이 벤치에 신발을 신고 올라가자 경찰 총각이 매서운 눈초리로 아이를 쏘아 보면 손가락질을 하자 그 꼬마가 쑥스러운지 혀를 쏙 내밀고 얼굴이 빨개져서 후다닥 내려오는 걸 봤다.

 

아프리카는 전 세계 어딜 가나 대체로 홀대받는다. 하지만 쿠바는 좀 다르다. 물론 쿠바에서도 백인이나 뮬라토(혼혈) 돈을 더 잘 벌 수 있다고 한다. 특히 관광 사업에서는 더더욱. 그런 차별이 전혀 없지는 않은 것 같지만 적어도 쿠바의 예술은 자신의 기원 중 하나인 아프리카를 홀대하지는 않는 것 같아 보인다. ‘네그리튀드라 하여 흑인정체성, 흑인의 경험이나 문화의 가치를 평가하고 촉진할 것을 주장하는 흐름도 있었다. 일단 쿠바의 예술은 폭이 넓다. 현대미술관에 가서 정말 깜짝 놀랐다. 엄격한 사회주의 국가라 예술이 경직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체로 수용적이고 매우 창의적이다.

이 책에서는 쿠바의 문학에 대해 다른 나라 혁명들은 전쟁문학을 낳았지만 쿠바 혁명의 문학은 스스로 질문하는 느낌으로 창조된 문학이라고 평한다. 혁명 이후 문학 장려로 다양한 문학상 제정, 출판 장려 등 프로젝트로 <돈키호테>, <백년 동안의 고독> 등의 작품들이 쿠바 곳곳에서 출판되기도 했다가 이후 (아마도 혁명에 비판적이고 리버럴한) 문예지 <월요일>이나 파디야라는 작가에 대한 탄압이 있었나 보다. 쿠바의 문학이 어떠한지에 대해 알려진 바가 별로 없어서 좀 아쉽기는 하지만 우리가 다닌 거리에서 음악이나 미술에서 혁명성을 강조하거나 선전을 중시하는 모습은 거의 보기 어려웠다. 아마추어 화가들이 아방가르드하게 그려놓은 벽화 등을 자유롭게 접했던 것이 오히려 신선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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