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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그림책
헤르타 뮐러.밀란 쿤데라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평점 :
15페이지를 펼쳐 보시라. 지금도 동해안을 따라 국도를 타면 바다를 면하고 있는 작은 학교들을 볼 수 있다. 혹은 지금은 바다에 묻혀 버린 작은 초등학교의 전설들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으리라. 운동장에 서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작은 학교의 선생이 되어, 아니, 아이가 되어 거기 바다가 있는 줄도 모른 채 놀고 뛰고 공부하는 꿈, 아직도 이룰 수 있는 꿈...
52페이지. 다비드 그로스만은 커다란 책이랄지, 책을 닮은 가방이랄지, 누추한 혹은 한 보따리만큼의 그의 인생이랄지를 오른 손에 들고 길 위에 서 있는 한 젊은이의 그림을 놓고 '같은 장소에서 두 밤을 지내는 적은 결코 없는' 한 남자 이야기를 써 나간다. 그 말없음, 그 흔적없음, 그 욕심없음에서 도(道)가 느껴진다. 아직도 이룰 수 있는 꿈...
117페이지. 책을 가득 실은 거룻배를 저어 한 사람이 바다를 향해 간다. 그 그림자로 보아 저녁인 듯도 하고 해 뜰 무렵인 듯도 하다. 새벽 바다와 초저녁 바다는 닮았다. 파도가 잦아들고 일순 멈춘 듯, 푸른빛을 잠시 가시고 은회색이 된다. 새벽이든 어스름이든 어디론가 간다는 것, 위태하기 짝이 없는 책들을 싣고서. 그러나 그 사람의 뒷모습은 평안해 보인다.
몸에 병이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차라리 팔 하나가 없는 편이 낫겠다 싶을 만큼 절망했다는 어떤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활자 중독증처럼, 삶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책과 글에서 찾아, 읽고 쓰는 일로 업을 삼고 취미를 삼고 인생으로 삼은 이들에게 책은 환상이요 꿈이요, 꿈 속에조차 동반하고픈 벗이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읽을 수 없는 날이 오리라. 그 절망을 상상하는 끝에, 감은 눈 끝에 책을 실어나르는 배의 노 젓는 나의 모습이 천천히 바다 끝 어디론가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