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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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인생에 파우스트를 세번째 읽다.

고등학교 때야 책읽을 욕심에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두 번을 읽었다. 다시 읽으니 그 어린 날 무슨 재주로 그렇게 읽어댔을까 싶다. 고전은 어린 날 한 번 읽고 나이 들어 또 읽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한다. 내가 단 반나절,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괴테가 거닐었다는 공원 기슭에서 그럼, 파우스트를 다시 읽어볼까나? 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내게 파우스트는 어린 시절의 치기어린 독서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20년 전의 기억에 가물가물 매달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파우스트 이야기를(대개는 서사시 양식에 대해 공부할 때) 들려주곤 했다. 마치 그 이야기를 잘 아는 양. 나의 말만 듣고 이 책을 과감히 구입했다 울상을 지은 중학생들 기하더뇨. 그러고 보면 어떤 후배가 던진 제발 선생들 자기도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 그럴 듯하게 떠들어대는 죄를 범하지 말라던 일갈이 참 의미있는 말인 듯하다.

다시 읽으면서도 여전히 넘나드는 줄거리의 전개가 생소하긴 했지만 적어도 첫째, 번역의 아름다움, 말하자면 말 뜻을 모르고도 줄줄 읽으며 즐거워하는 '말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마치 말 처음 배우는 아기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른 말을 따라하며 재미있어 하듯이. 물론 독어 원전으로 그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독어는 전혀 모른다.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즐거움이 컸다는 것은 그만큼 번역이 우수하다는 뜻이리라. 이렇게 가끔 아주 번역이 잘된 책을 만나면 좋은 창작품을 만난 것 못지 않은 기쁨을 느낀다.

둘째, 애니메이션, 영화, 만화, 광고 등 깊고 얕은 온갖 서양 문화의 뿌리가 여기 닿아 있음을 확인했다. 물론 파우스트도 그리스 신화와 독일의 전설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괴테의 '파우스트' 자체가 서양문화의 근원은 아니겠으나 원조나 '헹님' 격에 해당하는. 특히 근현대 문학의 멀지 않은 근원, 비론 곁가지는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이나 상업적 광고 따위로 가벼이 나타날지라도 그 많은 문화적 현상, 형상, 작업들에 수분을 대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발푸르기스의 축제 장면을 읽으면서 머릿 속의 수 초 간격으로 휙휙 지나가는 많은 비슷한 영화와 소설과 만화의 장면들을 만났다. 단연코 그 뿌리에 괴테의 파우스트가 있더란 말이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없지야 않다. 그것은 문화적 차이와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파우스트의 행적을 오로지 새로운 세계와 앎을 추구하는 지고한 갈망으로, 악마에게 피를 팔고도 용서받을 수 있는 순수한 욕망으로 여길 수 있는지, 나에게는 그의 욕심은 불손하기도 하고 오만하게도 여겨졌다. 너무 많은 것을 - 심지어는 신의 자리까지, 온갖 지식의 결정체를, 게다가 현실적인 사랑까지 그 모든 것을 - 탐하는 그를 단 한 순간에 지옥에서 천상으로 구원할 수 있는 것인지. 그가 마지막 순간에 많은 사람을 위해 옥토를 구현하려 애썼던 점도 지고지순한 목적의 신념의 실천이라기보다 삶에 의욕이 너무 넘쳤던 정치적인 행동으로도 보인다.

그의 행위 중 가장 (처음엔 욕심에서 시작되었을지라도) 순수했던 그레트헨과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일, 악마의 피보다 더 강력한 것은 누군가를 열렬히 순수히 사랑하는 일. 그래, 거기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쩐지 구원받는 파우스트의 모습에는 열정 그 자체로 90 평생을 휘몰아치듯이 살아냈던 천재 괴테의 자기 변명 같은 모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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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여우와 털장갑
니이미 난키치 지음, 손경란 옮김, 구로이켄 그림 / 한림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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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은 이 책을 나만큼 열렬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가끔씩, 특히 겨울이 다가올 때 읽어주곤 했지만, 대개는 잠자리에서 이 책을 읽은 후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잠기는 나와는 달리 우리 아이들은 '이 아기여우 정말 귀엽다, 키우고 싶다' 정도의 소망을 갖고 잠든다.

나는, 시멘트로 지어진 일본의 어느 읍내 거리 풍경이 어린 시절에 본 동네나 여행가서 만났던 낯선 마을 풍경같아 가슴 시리다.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일본식 건축물이나 거리 풍경이 우리 것처럼 정겹게 느껴지는 현실이 불행하기도 하지만 추억이란 아프고 지저분한 것조차 세월이 지나면 아련해지는 것이 아닌가. 눈쌓인 고즈넉한 밤거리를 걷다가 노란 불이 켜진 집 창문을 발견할 때의 고마움은 꼭 일본의, 내 어린 시절의 장면이 아니더라도 똑같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겨울은 이상하게도 따뜻한 계절이었다. 요즘처럼 버스를 타도 사무실에 들어가도 어디나 다 따스하지 않아 늘 발이 시리던 어린 시절의 겨울이 더 따뜻했던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추웠다가 들어간 집이나 난로가 있는 교실이 그만큼 더 고마워서였을까. 추웠기에 더 따스했다는 말이니, 배 부른 추억이다. 어쨌든 내 옆구리에 끼고 사는 나의 아기 여우들을 위해 털장갑 하나씩 떠주고 겨울이 따뜻한 계절임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낯선 사람의 마을에 너무 작아 안타까운 어린 아기 여우를 보낼 수 있었던 엄마 여우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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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의사 드소토 선생님 비룡소의 그림동화 9
윌리엄 스타이그 / 비룡소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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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책 중에 여우가 나타나는 장면에서 거리의 풍경이 보인다. 서구의 어느 평화로운 거리. 그러나 거기 다니는 것들은 사람이 아닌 동물들이다. 드소토 선생의 치과가 무지하니 커서 그 안에 말이나 소와 같은 큰 동물 손님들이 앉아 있는 것처럼 유모차에 앉아 있는 아기 동물들이나 잘 차려입은 여우 따위가 참 신기한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도 그 그림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뭘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가끔 거리에서 마주치는 저 사람, 인간의 언어를 하고 있는 저 사람이 여우의 본성을 지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는가. 심지어 가까이 생활하는 동료나 친구에 대해서도 그런 의심을 가지게 되지 않는가. 물론 이런 상상은 신선하진 않다.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는 문학적 장치는 유치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걸 어쩌지?

게다가 현실에서야 여우같은 인간을 이겨낼 대안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그마한 쥐가 사나운 여우를 이겨낼 수 있는 논리적 타당성이 보장되자 이 이야기는 재미 이상의 든든함까지 확보한다. 물론, 여우는 이가 아픈 환자라는 약자(!)의 위치요, 쥐인 드소토 선생은 의학적 지식과 기술(!)까지 가지고 있는 치과의사 선생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음, 뭐랄까, 어떠한 경우에라도 환자를 치료해줘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적 의료윤리의식과 그렇다고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다는 현실적인 지혜가 절묘하게 어우러진(그러나 사실은 여우를 속인 것인데) 재미난 이야기다.

이 그림책이 재밌는 이유는 또 있다. 도르레를 걸어 올려 이를 빼는 장면, 소의 입안에 장화를 신고 들어가 치료하는 장면 따위가 갖고 있는 논리(과학성?)이 그 하나이고(그럴 듯하지 않은가!), 또 하나는 어쩐지 이 치과에서 치료를 받으면 치료과정의 고통은 하나도 없이 그 동안의 동통을 치료의 순간 일시에 제거해 줄것만 같은, 드소토 선생의 신통한 실력에 대한 신뢰감이다.

내가 아이의 이를 닦으면서 무수히 지어 들여주었던 이와 이닦기와 치과치료에 대한 온갖 동화들의 장점을 모두 모아도 극복이 안되는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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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산문집 - 짧은 여행의 기록
기형도 지음 / 살림 / 199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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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가 놓고 간 이 세상의 시들이 갖고 있는 '완벽한 아름다움'에 비해 치졸하기 짝이 없는 산문들 - 조금 머리 큰 고등학생이 실존이니 죽음이니 헤겔이니 푸롬이니 하듯이 - 이 짜증나서 덮어두고는 너무 오래 동안 꽂아만 두었다. 어느 날, 미련하게 돌고돌아 2호선, 1호선을 타고 귀가하는 전철에서 그만 왕창 읽어 버렸다.

세상에서 그래, 꼭 그림같은 사람, 언어가 필요없는 사람, 꽃같고 바람같은 이, 산같은 사람... 들이 많지만 그야말로 그 이는 '시(詩)'인 사람이 있다. 장 꼭도가 '나는 시다' 라고 외쳤지만 기형도야말로 '시'다. 아니 그 인간은 내가 만나본 적도 없으므로 그 '인간'을 시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 그 안에 녹아 있는 그의 모든 것, 너무나 기형도다운 그 무엇, 그게 시다.

기형도의 시를 읽으면서, 이 세상에 단 하나요 더 이상 그 아무리 갖고 싶어 몸부림쳐도 더는 나올 수 없는 그의 시가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자꾸 산문도, 그에 대한 추억담도 찾아 읽었지만 역시 기형도는 그의 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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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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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런 것은 '지적 허영심'이라고 지적했다. 나는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또한 비록 내가 교단에서 아이들에게 국어 또는 문학, 또는 예술을 가르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당장 이 책에 나오는 지식이 소요되는 것도 아니다. 쉽게 말하면 꼭 내가 이런 '아카데믹한'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이 책을(이런 비슷한 책들을) 읽는 목적도 지식을 축적해 언젠가 써 먹으리라는 실용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 왜? 답은 재미있어서, 이다.

정말 재미있게 이 책을 읽었다. 물론 지루한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책도 정확히는 '서양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야 제목이 맞을 듯 싶게 어린 시절 명작깨나 읽었다 하는 나도 접해 본 적 없는 작품들을 다루고 있어 특히 중세 유럽의 문학사조에 대한 부분은 재미없기도 했다. 그런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늘 그렇듯이 종과 횡으로 함께 책을 읽어나가는 재미가 만만치 않았다.

바로끄나 로꼬꼬, 낭만주의니 고전주의 등 무슨 계보를 형성해야 할 것만 같은 개념들을 지나갈 때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다시 뒤지고 괴테가 나오면 파우스트를 다시 읽고, 이런 식이었다. 그렇게 여러 날을 바쳐 읽고 밑줄 친 부분이 늘어나도 잘 정리가 되지 않아 나중에 '앗 그거 읽었던 부분인데 왜 생각이 나지 않지?' 그러면 황당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어쨌든 참 재미있는 책이었어'

백낙청 씨가 역자 서문에 해박한 지식, 높은 안목, 그리고 일관된 관점을 이 저서의 미덕으로 꼽아 놓았다. 거기에 파란 밑줄을 박박 그으며 감탄했던 이유는 그 세가지 미덕은 교사가 갖추어야 할 요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읽는 나는 지적 허영에 빠져 공부도 아니 하며 헤헤거리고 읽었을지라도 이 글을 쓴 아르놀트 하우저는 방대한 지적 소산을 쉽고도 명료한 문체로 무엇보다 대체로 편견없는 안목으로 풀어나갔다. 우리 나라의 숱한 지적 저작자들이 자기 자신도 모를 말을 어렵사리 풀어나가면서 지식 장사를 하는 것에 비하면, 이야말로 지식인이, 연구하는 학자가 갖춰야 할 자세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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