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책 중에 여우가 나타나는 장면에서 거리의 풍경이 보인다. 서구의 어느 평화로운 거리. 그러나 거기 다니는 것들은 사람이 아닌 동물들이다. 드소토 선생의 치과가 무지하니 커서 그 안에 말이나 소와 같은 큰 동물 손님들이 앉아 있는 것처럼 유모차에 앉아 있는 아기 동물들이나 잘 차려입은 여우 따위가 참 신기한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도 그 그림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뭘까?어쩌면 우리는 모두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가끔 거리에서 마주치는 저 사람, 인간의 언어를 하고 있는 저 사람이 여우의 본성을 지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는가. 심지어 가까이 생활하는 동료나 친구에 대해서도 그런 의심을 가지게 되지 않는가. 물론 이런 상상은 신선하진 않다.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는 문학적 장치는 유치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걸 어쩌지? 게다가 현실에서야 여우같은 인간을 이겨낼 대안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그마한 쥐가 사나운 여우를 이겨낼 수 있는 논리적 타당성이 보장되자 이 이야기는 재미 이상의 든든함까지 확보한다. 물론, 여우는 이가 아픈 환자라는 약자(!)의 위치요, 쥐인 드소토 선생은 의학적 지식과 기술(!)까지 가지고 있는 치과의사 선생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음, 뭐랄까, 어떠한 경우에라도 환자를 치료해줘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적 의료윤리의식과 그렇다고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다는 현실적인 지혜가 절묘하게 어우러진(그러나 사실은 여우를 속인 것인데) 재미난 이야기다.이 그림책이 재밌는 이유는 또 있다. 도르레를 걸어 올려 이를 빼는 장면, 소의 입안에 장화를 신고 들어가 치료하는 장면 따위가 갖고 있는 논리(과학성?)이 그 하나이고(그럴 듯하지 않은가!), 또 하나는 어쩐지 이 치과에서 치료를 받으면 치료과정의 고통은 하나도 없이 그 동안의 동통을 치료의 순간 일시에 제거해 줄것만 같은, 드소토 선생의 신통한 실력에 대한 신뢰감이다.내가 아이의 이를 닦으면서 무수히 지어 들여주었던 이와 이닦기와 치과치료에 대한 온갖 동화들의 장점을 모두 모아도 극복이 안되는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