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신경림 지음 / 우리교육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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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가장 힘들 때가 시를 가르칠 때이다. 이제는 '자유시, 서정시, 내재율' 이런 것은 안 가르치지만 아직도 표현법이나 작가의 연보, 행적, 무슨주의 따위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다양한 시도로써, 대중가요에서 시적인 부분들을 가지고 접근한 시수업도 있었고 아이들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 끝에 주옥같은 시들을 얻어낸 수업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수업에서도 우리가 정말 읽어보아야 할 아름다운 시들을 만날 기회를 주지 못하는 게 아닌가 아타까웠다.

교과서에 실리는 시들은 무슨 죄가 있나. 정작 아름다운 시들도(실지로 6차교육과정 이후, 교과서에도 괜찮은 시들이 많이 실리고 있다) 단지 교과서에 실렸기 때문에, 말하자면 스무 살에 만났더라면 감동적일 수 있었던 시가 중3 국어책에 실리는 바람에 지겨운 무엇이 되어버리는 슬픈 운명의 시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교과서적'이란 말을 결코 긍정적인 단어로 쓰진 않지 않는가!

이 책이 나온 지도 오래 되었고 내가 읽은 것도 오래 전이지만 이 책을 수업 시간에 활용할 엄두를 내진 못했다. 중3 학생들에게 보편적인 교재로 쓸만큼 쉬운 편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나 매스큼을 탄 후( 이 책이 TV에서 거론되던 그 즈음, 얼마나 시 가르치기가 쉽던지,)이 책을 아주 쉽게 교재로 활용하게 되었다. 이육사, 한용운, 정지용 부분을 진지하게 읽어내는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새겨보게 된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칭송하되 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과서에 실리는 시인들은 다 아름답고 훌륭해져 버리는 것이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것이라면 그것들은 대개 어딘가 관변행사장의 축사처럼 발이 땅에 닿아있지 아니한 공허하고 민망한 칭찬같은 것이리라.그러나 신경림 선생님 자신의 마음으로 시인을 고르고 자신의 발길로써 시인들의 흔적을 만나 결코 지나침이 없이 칭찬하였고, 그리하여, 칭찬하고도 부끄러워지는 일따위는 생기지 않게 하였다. 가령 이런 것. 육사의 시정신을 드높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시가 달콤하게 여겨지지 않아서 송구했던 마음에 대해 신경림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위대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시가 전부 위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 시는 좋은데 시인의 삶이 미진하거나 시정신은 좋은데 문학적 완성도가 부족할 때 느끼는 마음의 안타까움에 대해, 그 어느 쪽에만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고루 헤아려 읽어야 할 그 무엇이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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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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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의 '가족의 기원'을 읽었을 때, 너무나 명료해서 정신에 얼음 조각을 떨구듯 선듯했던 기억과, 우연이 아닌 논리적 과정들(물론 대안까지도 제시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로 여성의 불평등을 해설하는 그 논지가 너무 선명해서 먹먹했던 기억이 난다. 뒤집어 말하면 이것(남녀불평등이란 것)은 부당한 만큼이나 필연이었단 말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면 완벽한 짜임이 무릎을 치게 만든다. 정말 그럴 수도 있었을 것만 같다. 가령 이 세계에서, 제1의 성인 '움'이 우월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흔히 우리의 현실세계에서 남성이 생물학적으로 우세하여 여성을 지배할 수밖에 없다는(얼마나 많은 여성들도 그러한 논리에 동조하며 남성의 우월과 지배를 달게 받아들이는데!) 논리에 견주어 조금도 부족할 게 없어보인다.

임신할 수 있는 천혜의 능력이 갖는 우월성이여, 생물학적으로 폭력적이지 않기에 지혜로울 수 있다는, 그리하여 지배의 性이 되기 부족함이 없다는 논리의 필연적 귀결이여! 말하자면, 이것은 너희들의 논리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를 반증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것은 결코, 한 번쯤, 혹은 소설에서나마 여자가 남자를 지배해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결혼 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당한 여성의 지위에 대한 갈증을 온갖 자료와 책들을 찾아 읽으며 풀어보려고 몸부림친 시기가 있었다. 갈증만 더할 뿐이었다. 읽는 것으로 끝내고 지쳐 떨어져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평소에 작은 권리들은 찾되 굵은 사안에서는 남편에게 져주고 시댁에 대해 얌전히 순응함으로써 갈등에 대한 비겁하게 대처하기로 답을 내린 나에 비해, 남편이야말로 적극적으로 자기를 반성하고 끊임없이 거듭나는 양성평등, 나와 자기자신의 평등을 위해 몸부림쳐주었다. 그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의 나는 무지 얌전한 수퍼맞벌이주부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남편은 냉소적이었던 나보다 더 충격적으로, 감동적으로 이 책을 읽었다. 그 이의 이 책에 대한 감상은 '몸서리침'이었지만 이것은 또한 끊임없이 남성적 권위에 기대려는 자신의 모습에 반성의 칼날을 들이대주는 한 뿌리가 되었음이 틀림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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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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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오염된 하늘과 모자라는 흙과 초록에 대한 갈증을 심하게 겪지만 서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아직도 우리 산천이 초록으로 그득하고 물과 산이 풍부한 곳임을 발견하면 조금 안심이 된다. 사실은 그 산하마저 오염된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라, 아직은 내 눈에 띄지 않을 뿐 맑고 아름다운 것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음을 믿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남아있어서 세상을 아직도 맑게 한다는 믿음. 라다크가 그런 곳이라면, 바늘하나로 톡톡 터트려 없애버려도 되는 그런 쉬운 세상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답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라다크가 주는 문제제기, 문제제기들은 문제해결이 아니므로.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면서 서서히 나아가면 달라질 수 있겠지. 멈추게 할 수 있겠지. 아니, 최소한 늦추기라도 하겠지. 너무 늦지 않길 바랄 뿐이다. 라다크, 20세기에 남아있는 희소한 과거, 사실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대안인, 그곳이 '오래된 미래'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꿈 속의 미래'가 될까봐 한없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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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나 2004-04-14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고 살을 부비고 산 그 때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산 때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인간 - 인류에 관한 102가지 수수께끼
마빈 해리스 지음, 김찬호 옮김 / 민음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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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장난 아니게 두껍지만, 두께에 질릴 필요는 전혀 없다. 그것이 원저작부터 그런 것인지,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그리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제별로 3~4페이지를 넘기지 않게 작은 장으로 쪼개놓아 읽기에 부담도 없고(그 장들은 다음 장과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면 장의 끝부분에 그런데 일부일처제는 인간에게만 있는 걸일까? 이런 식으로 다음 장으로 이어질 질문을 남긴다.) 즉 한 장(章)씩 읽어도 무리가 없고 긴 호흡으로 읽어도 좋다는 말이다.

문화인류학이란 학문을 우리의 중등교육 체제의 어느 구석에서 배우고 가르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우리 민족을, 우리 사회를, 남들을, 문화를,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학문으로서의 학문이 아니라 실생활에 꼭 필요한. 그러나 아마도 교과목 중 세계사나 사회 과목 등에서 교사에 따라 언급이 될지언정 전혀 가르쳐지고 있지 않는 학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의 어떤 부분은 그 자체로 중학생에게 읽혀도 무리가 없을 만큼 쉽고 재미있다. 차례를 펼쳐 보라. 동성애라든지 일부다처제와 같은 결혼제도나 식인풍습 따위는 참 흥미진진한 주제로 보이지만 그런 풍습과 현상을 구조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는 결코 단지 선정주의적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 쉽고 재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제들이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전쟁, 주술, 경체, 권력 따위의 주제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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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저녁 - 개정판 민음의 시 56
유하 지음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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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라는 사람을 잘 모르지만, 시를 통해서 본 그 사람은 그야말로 내 스타일은 아님이 분명하다. 어쩌면 그는 재치만 창천한 사람일지도 모르겠고 쉽게 누군가를 사랑하고 자기 감정에 빠져 잘 허우적거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은 또 쉽게 식어버리고 잊어버리기도 하지 않는가. 그러나 사랑을 앓는 순간에 썼던 시를 거듭 읽으며 자기도취에도 쉽게 빠진다.

이것이 내가 유하의 시들을 몽땅 사들이면서 받은 그 사람에 대한 추측들이다. 번연히 내가 좋아할만한(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과 저자의 인격이 일치하지 않으면 읽지 않는다) 사람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의 시를 다 사모으는 일이, 마치 사랑할만한 가치가 없는 남자에 매혹되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일과 비슷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가슴아플때 그의 '사랑의 지옥' 따위의 시들을 다시 한 번 수첩에 옮겨적어보곤 한다. '바람 한 톨, 잎새 하나에도 주술이 깃들고(너무 오랜 기다림)''세상의 모든 저녁' 따위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귀절이나 제목들은 그의 재치의 소산인지, 그가 다른 이들의 공감대를 읽어내고 말로 이르는 능력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 나의 감정선이 매우 얄팍한 건지... 하여간 그의 시를 때론 사춘기때 불렀던 노래처럼 자주 읊어본다. 그래도 영화를 만드는 그는 배신을 때리고 돌아서는 연인의 뒷모습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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