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추억의 힘 - 탁현민 산문집 2013~2023
탁현민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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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난놈들끼리의 리그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탁현민은 여러모로 탁월한 사람이지만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범주도 만만치 않다. 자기들끼리의 인맥은 그 자체로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웃 오브 리그인 어떤 세계.

그렇다고 그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탁현민은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분명 우리 시대의 자산이다. 앞으로도 많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고 지지한다.

 

문학을 꿈꾸던 청년이 왜 문학의 길이 아닌 공연기획이라는 영역의 천재가 되었을까. 글은 정직하게 그 이유를 말해준다. 그가 신춘문예인지에서 안도현 시인으로부터 받았다는 평가는 매우 정확하다고 본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지만 더 잘하는 다른 일을 할 수밖에 없었겠다 싶다.

그의 글에는 외로움이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위트가 있다. 이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두 기둥은 외로움(감성)과 재치(창의력)이겠다 싶다. 그 사이의 불균형은, 이 사람이 갖고 있는 뛰어남 덕에 얻은 인맥, 즉 인복으로 채워질 것이다. 혼자만 뛰어난 천재형 인간에 그치지 않고 좋은 사람을 알아보고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사회성이 있어서 이 사람은 외로움을 타지만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한다. 당신의 시간은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 그 재능을 많이 많이 더 써 보시라. 세계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으니.

 

그의 책에서 건진 말 중 친구가 되지 못하는 스승은 좋은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되지 못하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다.’가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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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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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정신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으리라. 작가의 마음을 이렇게 추정해 보는 이유는, 내가 그런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지난 1년 반 남짓의 시간은 정신병의 시간같이 느껴지는 때였다. 개인사와 겹쳐, 20대를 제외하고 내 생에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닌가 싶을 만큼 어둡다. 문제는, 이런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직장 동료들 중 정치에 관심도 별로 없고 오히려 약간 보수적인 사람들조차 답답함을 호소한다. 비교적 강남좌파에 가까운 나의 형제들이 모이면 울분과 성토의 술자리가 펼쳐진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한숨을 쉬거나 술을 마시거나 욕을 하거나 자다 깨어 뉴스를 검색하거나 힘겹게 싸움을 이어나가는 마이너 언론에 후원금을 보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자조하고 있을 때, 조선희 씨는 소설이라도 써야겠다, 이 시대의 군상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아주 근사한 시대물이 나왔다고 본다, 나는. 훗날 이 소설은 비장한 해방 국면, 전쟁, 4.3., 광주 등의 역사를 기록한 시대물 못지 않게 ‘2023을 생생히 기록한 소설로 남을 것이다.

 

시대는 이것이 시대이다라고 인식한 사람에게만 시대가 된다.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세월일 뿐이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나는 내가 분명히 엄혹한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었다. 인지이고 각성이고 감지였다, 나에게 시대는. 그리고 그 영향은 이후의 삶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금 2023년은 또한 어떤 의미에서 이후 시대를 꽉 쥐고 흔들 중차대한 시기일 수 있다. 살기 바빠 그저 세월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 대신 민감하게 그걸 느끼는 사람들은 마치 말미잘의 촉수 속에서 이 치욕과 따가움, 아니 견뎌내지 못하면 결국 잡아먹히고 말지도 모를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에게서 그런 동지의식을 읽는다.

 

혐오 팬데믹이 만들어 내는 민주화된 지옥

진보적 지식인이자 중산층의 퇴직한 60대 부부, 그리고 그들의 2, 30대 자녀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나도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사는 일에 걱정이 없으면서 무슨 타령을 하느냐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에게는 각각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소설 속 가정처럼 레즈비언을 선언한 딸, 윤석열을 찍은 아들을 둘 만큼 극단적(?)이지 않을 뿐이다. 비슷한 연배의 가정마다 어떤 집은 경제적 문제, 어떤 집은 부부간의 갈등, 어떤 집은 질병과의 투쟁, 어떤 집은 다른 가족과의 신경전 등의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집이든 젊은 자녀가 있다면 그들의 취업이나 결혼, 육아 등의 문제가 장년층 부부의 가장 큰 이슈일 것이다. 이것이 개인사와 더불어 정치적으로 얽힌다면, 이것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소설 속 영한처럼 사회학적으로 고찰할 문제가 돼버린다.

 

더 나아가 나는 젊은 남자들과 젊은 여자들의 정치 사회적 세계관의 간극은 이 사회의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비록 중학생이긴 하지만 30년 넘게 남학생들을 가르쳐 오면서 10대 남자들의 의식구조가 2, 30대 남자들과 별로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10여 년 전에는 그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주로 여기고 폭력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정도의 모습(물론 부정적인 면만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젊은 남자들이 갖고 있는,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순수하고 정의로운 에너지와, 그것들이 뿜는 선한 영향력을 결코 무시하면 안 된다)에 그쳤다면 언젠가부터 이들의 가치관은 정교해지고 구조화, 논리화되어 간다. 이제는 그야말로 세계관이라 부를 만하게 견고해져 논리적으로 무너뜨리기 힘들다. 노무현, 문재인을 언급하지 않아도 반중국 정서, 여성의 군입대론, 가사노동의 분담 등에서도 그들의 논리는 그야말로 논리를 구축하고 있다. 이것은 이제 단지 일베의 영향으로 치부하고 부도덕하다고 한숨만 쉬어서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남녀갈등을 말하지만 어찌 보면 이제 겨우 시작일지 모른다. 나는 출생률이 줄어드는 가장 큰 원인에 부동산이나 육아, 교육비뿐 아니라 남녀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젊은 남자들은 내 여친도 페미가 아닐까 두려워하고 젊은 여성들은 내 남친에게서 일베나 스토커의 그림자가 숨어있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연애를 하다가도 몇 번 그런 낌새들을 느끼거나 경험하면 결혼은 더더욱 하기 싫은 일이 된다.

 

소설을 읽고 서평을 쓰려 했는데 어쩌다 시대론을 쓰고 있는 걸까. 하여간 이 소설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소설 속 아버지는 시대론을 쓰면서 이 시대를 극복하려 애쓰고 작가인 조선희 씨는 이렇게 소설을 쓰면서 이 시대를 살아내려 애쓴다. 내 아이들의 취업과 맞물려 우울증에 근접해 가던 나는 시를 쓰고 외국어를 공부하며 어떻게든 견뎌내려 애쓰다가 한두 달 전부터 처방받은 혈압약을 먹으면서 불면을 조금 극복하고 있다. 의사의 말로는 내가 먹는 심장혈압약에 긴장을 조금 완화시켜 주는 기능이 있다 한다. 그래서인지 극단적인 불안감이 줄고 자다 깨도 도로 잘 잔다. 그래,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어떤 방법들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들이 어딘가에는 있다. 그게 뭔지 적극적으로 찾아보자. 재미난 팟캐스트를 찾아 들어도 보고, 새로 운동도 시작해 보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도 보고, 피켓도 들어 보자. 뭐 이런 거 저런 것들을 하다 보면 좋은 세상도 올 것이다. 3년 후일 수도 있고 얼마 안 있어서일 수도 있다. 소설 속 말을 빌어, ‘그 안에 전쟁만 나지 않는다면.’ 이 우울의 시대를 뚫고 지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일단 조선희의 <그래도 봄>을 읽을 것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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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연수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83
김려령 지음 / 비룡소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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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힘 합쳐 키우는 이런 세상, 아직 어딘가에는 제법 있다고 믿어보자. 왜냐하면 작가 김려령이 묘사하는 명도단과 거기 사는 연수, 연수의 친구들이 너무나 리얼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정말 이런 마을이 있을 것 같으니까.

 

우리는 한숨을 섞어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어느 나라의 속담인가를 읊조린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힘주어 이 문장을 말하며, ‘그러니까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보아요.’라고 말했었다. 희망과 연대의 훈기가 느껴졌던 저 구호는 이제 그만큼 아이 하나 잘 키우는 건 힘들다.’ 혹은, ‘사회는 아이 낳아 키우는 일에 동참하라! 동참하라! 동참하라!’는 요구로 읽히는 세상이 되었다. 자신의 아이도 잘 낳고 기를 자신이 없는 세상에 남의 아이를 거두는 일이 가당키나 할까. 하지만 연수는 그렇게 이모부와 사돈 할머니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명리단 온 동네 사람들 손에 잘 큰다. 잘 크고 있다. 심지어 자기 친구들까지 데려와 함께 잘 큰다.

 

학교에 근무하는 나는 지금의 학교에 옛날 동네, 즉 아이를 함께 키워주는 마을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먹여주고 공부할 책을 사주고 문구를 손에 쥐여주고 야단도 치고 안아도 주면서. 물론 대부분의 학교는 아이들의 기대나 부모들의 요구에 못 미치며 무척이나 쌀쌀맞다는 걸 잘 안다. 내가 근무하는 사립학교가 우리 학교 특유의 분위기로 그러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해봐야 자족적인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집에서 맞고 방치되고 욕먹고, 제대로 된 사람다운 태도를 교육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괜찮은 어른으로 다가가려 애쓴다.

 

완득이로 대박이 났던 김려령 작가의 작품은 일관성이 있다. 주변의 어른들이 힘을 합치는 따뜻한 세상을 꿈꾼다. 어떤 세상은 너무나 냉혹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잘 돌보려 애쓰는 어른들이 분명 있다. 그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게 안타깝지만, 그리고 어떤 이들, 어떤 가치관이 득세하느냐에 따라 어중간한 사람들의 태도나 분위기도 달라진다는 게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몇몇 따뜻한 어른들이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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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 - 좋아서 하는 외국어 공부의 맛
곽미성 지음 / 어떤책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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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나라 작가가 쓴 글, 특히 삶의 주변을 담은 에세이 글은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작가 이름 기억하는 일을 잘 못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 책은 제목보다도 작가 이름으로 기억했다. “뭐였지, 제목이? 이탈리아어 배우는 이야기, 곽미성이, ...” 이렇게.

 

한창 스페인어 공부를 하는 와중에 신문인지 주간지인지 신간 소개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어머! 영어가 아닌 외국어 공부를, 혹시 스페인어?... 는 아니고 이탈리아어란다. 스페인어와 친척어인데? 하여간 외국어 공부 이야기를 담았다 하니 궁금했다. 그리고 이 책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프랑스에 살면서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 살고 직업도 가진 여성이 뜬금없이 이탈리아어를 공부한단다. 그것도 단지 재미로(즐거움 외에 다른 목적은 없는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탈출이자 도피였다. 가장 가볍고 자유로운 해방의 외국어.. 이탈리아어는 천천히 나를 해방시키고 온전히 나의 것으로 확장되고 있었다..라고 작가는 썼다) , 필요나 삶의 절실성 때문이 아니란다. 그의 책에는 이탈리아어를 공유하는 과정이 자세히 담겨있기도 하지만 프랑스에서 살게 된 삶의 궤적도 간간이 등장한다. 내가 알고 싶은 이야기들이 다 들어 있다. 한때 프랑스어를 배웠고 그걸 다시 공부하고 싶지만 쓸모에서 실용성이 떨어지는 프랑스어 대신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는 나. 그러면서도 사실 딱히 어디 쓰려고라고보다 그냥 재미로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나. 뭐 운이 좋다면 스페인 계열 어느 나라 사람들을 위해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 혹은 어린이책을 번역하는 일에 스페인어와 영어를 활용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나이도 너무 많고 실력도 일천해 그냥 별 의미 없는 목표일 뿐인 나. 오히려 우울과 불안을 달래는 용도로 밤마다 침대에 엎드려 혼자 스페인어 동사변화를 외우는 나, 그럼에도 끊임없이 여기 아닌 다른 곳과 삶을 꿈꾸는 나이며 어쩌면 유럽 사대주의자인지도 모를 나에게 곽미성의 책은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것에 대한 꿈을 충족시킨다.

 

용감하게 낯선 나라에 가서 공부를 했단다. 어쨌든 지금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게다가 이제는 재미 삼아 제4의 언어를 공부해 본다. 이탈리아를 배우러 다니는 동안 파리 좌안과 우안을 넘나들고 거리를 활보한단다. 글 맨 마지막에 작가는 나는 작고 보잘것없지만, 나의 세계는 계속 커지고 있다라고 쓴다. 그래, 외국어를 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계가 생기는 거라고 누가 그랬다. 인정.

 

여행기에 허기와 추위, 불안이 없고 반려동물 키우는 이야기 속에 냄새와 털날림이 없어 좋듯이 나는 이 책을 통해 여행지로서는 빵점에 가까웠던 파리라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럼에도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모두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파리를 편안히 드나든다. 곽미성에 감정이입하여 셰익스피어 컴퍼니 서점도 지나치고 언젠가 오들오들 떨며 올랐던 노트르담 광장을 거쳐 이탈리아어를(혹은 스페인어를) 배우러 가 본다. 나에게는 그림책의 도시로 기억되는 볼로냐로 어학 체험을 떠나는 상상도 해본다.

 

이미 다녀온 곳들이지만 스페인어가 능숙해진다면, 그리고 훗날 퇴직 후 시간이 많아진다면 다시 쿠바나 스페인에 가보고 싶다. 마드리드의 큰 서점에 가서 어린이 책을 많이 많이 사오는 상상을 해본다. 생각보다 스페인어권 책이 많이 번역되지 않은 우리 서점 시장을 생각해서, 일단 내가 번역을 해본 뒤, 정말 좋은 책은 한국어 번역을 추진해 보는 상상도 해본다. 이 모두는 꿈이지만 이루어지든 아니든 상관은 없다. 나는 그저 그 꿈꾸는 시간을 즐길 뿐이다. 나의 꿈놀이에 곽미성은 물을 부어주었다. 글 쓰는 동안 그도 즐거웠겠지? 읽으면서 나도 즐거웠다. 만약 내가 나만의 스페인어 공부 이야기책을 쓰거나 뭔가를 번역하거나, 번역을 위해 또다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어떤 나라에 여행을 간다면 나의 그 모든 행보가 누군가에게 또 즐거움을 줄 수도 있겠지? 삶이 행복한가 아닌가는 지금 만족스럽게 살고 있는가 아닌가가 기준이 아니다. 앞으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기대가 우리를 살게 한다. 괜히 자꾸 희망을 가지라라고 말하는 게 아닌 것 같다. 하여간, 당분간은, 덕분에, 이로써, 행복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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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는 우리를 들뜨게 하지
바나 지음 / 브레인스토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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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책들이 머리맡에 즐비하다. 너무 많은 책들을 동시에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일부러 일곱 권 이내로 볼 책을 정리하고 나머지 책들을 책장 높은 곳으로 옮겨 버렸다. 그 많은 책들 가운데 옮겨지지 않고 내 곁에 남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역시 그림이 있는 책, 만화, 자수나 옷 만들기, 드로잉에 대한 책, 나무나 풀, 새 이야기 들이다.

가끔 옷도 만들고 뜨개질하는 것도 좋아하며 드라마를 틀어놓고 수놓는 것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여유로울 때 하는 일들이고 대개는 의무감으로 채워진 시간들로 바쁘다. 집안 일, 직장의 일, 그리고 어렵고 무거운 책들을 읽고 정리하는 일, 영어나 스페인어 공부... 오해는 마시라. 이런 일들은 내 생존이나 생계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들이다. 아무도 내게 어려운 철학책이나 과학책을 읽으라 강요하지 않으며 실력이 늘지도 않는 영어 공부나 스페인어 공부는 사실 앞으로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그런 묵직한 일을 해야 열심히 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가 보다, 나는.

그런 와중에 짬을 내어 그림을 그리고 옷을 짓고 수를 놓을 때 가장 행복한 나를 발견한다. 뜨개질도 참 좋아하는 일이지만 몇 년 전 남편의 모자 몇 개를 뜬 이후 거의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러면서 뜨개실도 만지작거리고 오래 전 아이들 어렸을 때 떠 입혔던 스웨터를 꺼내 품어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그래! 이 책은 나를 들뜨게 하고도 남았다. 다른 이가 뜨개질하는 이야기로 대리만족을 느끼고도 싶었다! 이 책을 읽다 잠든 날들이 참으로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게다가 아일랜드의 삶을 사는 글쓴이의 이야기는 이국의 풍광과 삶의 경험까지 들려준다.

다만, 그이의 뜨개질 솜씨는 나같은 범인이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코로나 때문에 뜨개질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토록 몰입하고 이토록 발전하며 이토록 퀄리티 높은 작품을 만든다고? 그렇다면 글쓴이는 완전 몰입형 인간이거나 뜨개질에 타고난 이이거나 둘 중 하나다. 게다가 자기 직업에 충실하면서 이렇게 살고 있다니!

그이의 이야기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함뜨(온라인을 통해 함께 뜨개질하는 일)’ 이야기였다. 온오프 세계의 장점을 잘 버무린 이 연대의 힘은 참 아름답다. 문어발 이야기도 재미있다. 새로운 열정으로 새 작품을 뜨기 시작하며 일을 벌려놓는 것.

나는 아이들이 어려 가장 바빴던 시절에 한창 뜨개질에 몰두했던 적이 있다. 딸아이가 네 살, 다섯 살 때, 아들이 열 살 때 스웨터를 떠서 입혔다. 잠도 모자라던 그 시절의 육아 스트레스를 뜨개질로 녹여냈다고나 할까. 그리고 아이들과 옷 이야기를 하며 알콩달콩했고, 그 옷들은 작품으로 남아 지금도 추억의 대화거리가 되고 있다. 그때 떠 준 옷 이야기를 모티브로 <세상에서 가장 큰 담요> 동화책을 썼다. 돌아보니 눈물과 힘겨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름다운 추억만 남겨준 나의 뜨개질 역사다. 곧 다시 누군가를 위해 예쁜 옷을 떠 보리라. 글쓴이에 기대, 이번에는 솜씨가 훨씬 업그레이드 된 멋진 옷을 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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