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닭이 세조각 남았다. 맥주도 다 떨어졌다. 밤은 깊은데 술도 닭도 더 시킬 기미가 안 보인다. 내가 나설까 하다가 나서기 아치는 여러군데에서 낭패를 많이 봤으므로 잠자코 있었다. 아, 오늘따라 왜 술은 꿀꺽꿀꺽 잘도 들어가는지. 철분 부족을 이유로 육식의 삶을 시작하고 치맥 때문에 내가 잡식동물임을 인정하고 있는 마당에 치킨 하나 더 못시킬 이유가 무어랴.
직장 다니는 스트레스를 이렇게 풀고 있다. 적게 벌고 적게 쓰자, 야식은 몸에 무리를 줘 어쩌고 저쩌고, 공장형 축사는 동물한테 스트레스를 블라블라. 치맥이 엄청나게 맛있기 때문에 먹어대는게 아니다. '오늘도 치맥'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죄책감과 또 치맥인가 싶은 자괴감이 몰려온다. 그런걸 다 이겨내고 '오늘도 치맥'을 먹는다. 확고함에 놀랄 따름이다. 내가 이렇게 확신에 찬 사람이었던가. 그럴리가 없는데, 그럴리가.
* 부유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먹고살 형편이 되는 분들의 모임에선 주문을 망설이지 않는다. 오로지 내가 이 모든 시간을 견디는건 이렇게 잘 먹고 잘 취하기 위해서라도 되는 것처럼. 순대를 쳐다보는 눈빛만 보고도 살짝 비싼 순대도 떡하니 시켜주고 술은 넘칠 정도로 채워준다. 그때는 별로 먹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치킨 두조각 먹는 동안 접시가 바닥난 상황을 보니 맥주 먹는 속도가 빨라질 수 밖에. 어리석은 소리를 주구줄창 늘어놓는 것 같아 망설여지지지만 상대적인 것 아니겠는가.
'나를 받아주는 클럽에는 들어가기 싫'은 것처럼.
먹을게 없을 때 허기를 더 느끼는 것처럼.
술이 없대니까 없던 알코올 갈망이 생기는 것처럼.

* 같이 애니홀을 보는 모임이었다. 앞으로 몇 번 더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본다. 나는 수다스럽고 분열적인데다 산만하기까지한 우디 앨런을 좋아한다. 누군가 우디 앨런은 70년대판 너드 같지 않냐는 말에 한참 웃었다. 애니홀만 보자면 너드란 말도 틀린 것 같진 않다. 그래도 영화 속 캐릭터라지만 유명한 감독 보고 멍청하고 따분하다니! 문득 옥찌의 독후감이 생각났다.
마리화나 없이 섹스를 하다가 영혼이 빠져버린 다이앤 키튼과 그녀의 몸하고만 섹스를 할 수 없다고 투덜대는 우디 앨렌, 일상적인 대화 사이사이에 끼어든 속마음 자막. 애니홀은 우디 앨런식 영화기법의 정점을 찍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는 뉴욕이 아니라 여러 도시에서 영화를 만들지만 예전만큼 재미있지는 않다.
* 술자리에서 말을 튼 여자 사람과 지하철을 탔다. 무슨 얘기를 한담, 그런데 의외로 대화가 쫄깃쫄깃했다. 영문도 모르는 두 사람이 단지 집이 같은 방향이라고 같은 지하철을 탄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불안하지 않냐고 물었다. 몇년 전 나를 보면서 남들이 하나같이 하던 질문을 내가 전철 옆자리에 앉은 여자 사람에게 하고 있었다. 누가 그랬단다. 일생동안 불안할거라고. 정도 차이지 불안하고 불안정한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만큼 모으고 이렇게 아끼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긋지긋한 돈벌이를 언제까지 할지 기약은 없지만 다들 이렇게 사는거라고 생각했다. 다들 사는 것만큼 살 자신은 없지만 버틸 자신은 있었다.
그런데 내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놀 궁리 중이라는 여자 사람을 보니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은거다. 나는 기타도 못치고 손재주가 좋은 편도 아니다. 아마 무턱대고 논다면 그 전처럼 늘어지는 백수짓을 하다가 간간히 나중에 덜컥 거리에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라 답답해 하겠지. 그 동안 전망 없는 업종들을 전전했으며 잠깐씩만 일하는 즐거움 따위를 알아간 정도였다. 아직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걸 모르겠는데 기약없이 노는게 가능한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놨다.
여자 사람은 내가 백날 궁리만 하는 타입인걸 단박에 간파했는지 막걸리 만드는 것 뿐 아니라 여러 체험을 할 수 있는 '비비정 프리덤'과 오늘 있는 문화행사를 알려줬다. 흥, 내가 이런 사소한 미끼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인줄 알았나본데 맞다! 나는 그런 아치. 오늘은 신나게 놀고 제 4차 비비정 프리덤을 기다려야겠다. (급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