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가지 일을 한다. 아직 일주일밖에 안 됐지만 시간이 몸에 착 달라붙은 원피스마냥 쪼여지는게 느껴진다. 첫날은 피곤했고, 둘쨋날은 회의가 들었지만 셋째날부터는 재미있었다. 일하는게 재미있다기보다는 마약같은 '열심히 살고 있구나, 아치!'란 환각이 괜찮았달까. 안다. 열심히라기보다는 아빠 말씀대로 몸을 혹사시키는 미련한 짓을 하는 중이란걸.  
 알바가 아닌 직장을 잡아야겠다란 생각에 일을 구하는 동안 알바를 했다. 얼마되지 않아 직장을 잡게 됐고, 한달도 안 된 알바를 그만둘 수가 없어서 병행중이다. 잠정적이지만 둘 다 재미있어서 놓치고 싶지 않다. 잠이 부족하니 약간 힘이 없고, 틈만 나면 머리를 어디에 대려고해서 문제지만 아직은 견딜만하다.  

* 새로 다니는 직장은 시내에서 좀 떨어져있다. 아침이면 출근 한시간 전에 나가서 버스를 타고 교외로 나가야 한다. 어떤 날은 비가 왔고, 다른 날은 쨍쨍 해가 쏟아졌다. 별거 없는 서술이다. 날씨가 그렇다는건데. 하지만 희안하게도 서울에서 출퇴근할 때는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신경이 곤두서서 어쩔줄을 몰라했었다. 논이 있고, 나무가 더 눈에 많이 띄어서일까? 더운 날은 더운날대로 따사롭고, 비가 오면 비오는대로 촉촉하다. 이곳저곳 시골 마을을 돌아 제시간에 오는 버스조차 사랑스럽다. 이곳은 나무들마저 약간 무심한듯 무성하며 모른척 쑥쑥 자란다. 사육되듯이 좁은 땅에 틀어박혀 있는듯 없는듯 자라던 서울 나무들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 직장 사수. 내가 미친듯이 창을 바꿔가며 눈치껏 알라딘에 글을 쓰고 댓글을 달자 블로그가 있냐고 묻는다. 네네, 아니오. 흐리멍텅한 대답을 흘리고선 열심히 일하는척을 했다. 그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부득불 내곁으로 와서 자신의 블로그를 열어보였다. 보는둥 마는둥, '나 일하는 중이거든요.' 숨소리 한 방울, 두 방울. 그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다시 블로그에 대한 설명을 하는 사이 듣는둥 마는둥. 아, 그러다 '관심받고 싶어요.'란 그의 속삭임이 귀를 간질였다. 내가 그랬듯이 그 역시 그러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나. 서로가 필요한 시점이 들어맞는 마술같은 시간은 온갖 잡무를 떠맡고 있는 사무실 여직원에게는 사치인걸.

* 버스. 내 앞에 두 분의 할아버지들이 앉아계셨다. 창밖 트럭에서 엄마 무릎에 앉은 꼬마가 보였다. 꼬마는 손을 들어 우리에게 흔들어보였다. 무기력해 보였던 두 할아버지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더니 아이를 향해서 느릿느릿 손을 흔들어주신다. 할아버지들이 웃는다. 김영하는 여행자 도쿄에서 핸드폰의 막강한 기능으로 도시에 풍경을 만들어준걸 꼽고 있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웃는 사람들의 표정은 도시의 온도를 다르게 한다고. 휴대폰과 동급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겠지만 아이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통해 낯선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어버리는 것이다.

* 혼자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읽고, 히죽거리면서 뭘 할지를 생각하는 날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또 어떤 과잉인가. 난 밀려나지 않았어, 난 괜찮다고. 아무도 묻지 않고, 나조차 궁금하지 않은 색다를 것도 없는 생각과 행동을 보면서 본래 애인 몰래 바람피는 사람들이 더 애인에게 잘한다는 말이 떠오르고 말았다. 나는 그다지 만족하고 있지 않아서 감정을 목까지 끌어올려 '잘 지내고 있어!'라고 소리치는걸까? 안 들키기 위해 더 잘하는 바람여남처럼? 응? 

* 같이 일하는 방글라데시의 바달. 내 나이를 묻더니 바로 '누나'라고 해준다. 방글라데시아 총각이 발음하는 누나라는 말은 너무 달콤해서 가끔은 오토리버스로 설정해놓고 계속 들어보고 싶다. 바달은 한국어를 제법하지만 서로 이해가 안 될때는 영어를 쓰기도 한다. 영어 발음이 구리네 어쩌네란 생각이 얼마나 촌스러운건지 요즘 잘 느끼고 있다. 둥근 발음이 안 되는 바달과 R과 T가 어색한 나 사이는 웃음과 몸짓으로 넘기는 경우가 제대로 된 문장으로 말할때보다 많지만 서로 안다.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보다 영어를 재미있어 한다는 것을. 그럼, 내 취미는 영어 공부라니까!  

* 사람들을 만나면서 기상예보보다 더 정확하게 맞추는게 있다. 이 사람이 혈액형을 말할 것인가, 아닌가. 잘 맞추지도 못하면서 나보고 무슨 형이라고 단정짓길래 아니라고 했더니 내가 이상해서 그렇단다. 그리고나선 다같이 짠 것처럼 자기 혈액형의 특징과 자신의 연애사에서 피했어야할 혈액형에 대해 얘기를 해준다. 듣고 싶지 않다고. 안 들을래. 소용없다. 이상한 혈액형, 소심한 혈액형, 무난한, 그리고...... 소용없다니까요. 난 이상한데 그 혈액형이 아니고, 난 그 혈액형이 아닌데 소심하다구요. 달콤 살벌한 연인의 박용우처럼 톡톡 쏘아붙이는 재미를 느끼기엔 난 너무 귀찮거나 무료한지도 모르겠다.  

 *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맞았다. 펄럭이던 스커트가 몸에 착 달라붙고 뒤집어진 셔츠도 물로 무거워졌다. 구두엔 빗물이 스며들고, 머리속까지 하얗게 젖어들었다. 비를 맞는다. 비가 온다. 빗물을 몇방울쯤 먹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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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7-12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지치지는 않는지..
그래도 힘을 내고 있는듯해 보기 좋으네요.
금요일날 내가 만나면 힘날 것 사줄게요 ^^
(뭘 머그면 몸보신이 될까?)

Arch 2009-07-13 10:02   좋아요 0 | URL
알라딘질 할 힘만 남아도 페이퍼 쓴다.니까 아직 괜찮은 것 같아요. 휘모리님 고작 일주일이래두^^
금요일날 만남! 넷째주가 모임이라 어떻게 할까 상의하려고 했는데.
좋아요. 우리 맛난거 먹읍시다.^^ 히~

무해한모리군 2009-07-13 11:27   좋아요 0 | URL
오기 힘들면 취소해도 좋아요.
일이 이리바쁘니 금토 밤을 새는건 힘들겠다 ^^
그럼 파마에 성공한 라주미힌님과 데이트 하는거죠 뭐~

Arch 2009-07-13 12:08   좋아요 0 | URL
둘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중이었어요. 지난번에도 모임 빠지고 해선.
일이, 그리 안 바빠요. 약간 핼쓱해진 것 정도? (티도 안 남.)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알라디너분들과는 간김에 만난다고 급만남이라도 제안해야겠어요. 히^^

그런데, 둘 데이트에 내가 껴서 진상 놓는거 아니죠?

무해한모리군 2009-07-13 15:42   좋아요 0 | URL
밤 12시에 부천에서 과연 급만남이 될까 ㅎㅎㅎ
표는 벌써 세장 예매해 놓았으니까
편안하게 생각해요.
힘들겠다 싶으면 전화만 주오,
일단 부천시민 머큐리님이 11시에 맛난걸 사주시기로 했어요 ^^
꽃미남과 데이트도 좋지만, 꽃미남 꽃미녀랑 같이 하는 데이트는 더 좋지않을까?

다락방 2009-07-13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래도 직장내의 부러운 풍경인건 말이죠, 누군가 나 블로그해, 너도 하니? 라고 묻는거에요.
세상에, 제가 있는 곳은 아무도 블로그를 안해요. 한명, 예쁜 직원이 있는데, 게다가 얘기를 할때마다 그 예쁜 감정이 마구 차올라서 이녀석이 하는 블로그라면 즐겨찾기 해줄수도 있다, 라고 생각했는데 물어보니 안한대요. 블로그는 귀찮다나요. 블로그를 한다면 더 친해질 자신이 있는데 아, 너무 아쉬워요. 그러니 제 블로그를 생뚱맞게 알려주기도 좀 뭣하잖아요. 나는 해, 나는 하니까 여기와서 놀아, 라고 말하기도 어째 뻘쭘. 그래도 슬쩍 알려줬는데 그다지 관심 있어 하지 않아요.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가 하고 있는거, 관심 있는거에 관심을 보이니, 내가 블로그 있다니까, 하고 아무리 소리친들 관심 없으면 뭐 시큰둥 하는거죠.

Arch님, 힘 조금만 남아도 페이퍼 쓰는거 계속 해줘요. 이렇게 일기같이 좌르륵 내뱉는 페이퍼 말예요. 읽다 보면 저도 무언가 생각하고 떠오르고 그러잖아요. 아, 그 예쁜 직원은 왜 대체 블로그를 안하는걸까요? 대체 왜? ㅜㅜ

Arch 2009-07-13 12:09   좋아요 0 | URL
아 진짜? 일기같이 좌르르 쓰느라 정작 일기는 못쓰고 있어요. 저도 무척 즐거운걸요! 그 예쁜 직원은 그냥 예쁘기만 한게 아닐까요? 다락방님은 예쁘고 블로그를 하지만. 막 갖다붙인 티가 좀 나죠?
 

 말만 많은 이글루스에서 김현진과 허지웅의 블로그를 찾아냈을 때 흡사 유레카를 발견한 듯 기뻤다. 오호,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또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매체에 실리는 정돈되고 정갈한 글도 좋지만 그냥 심심해서 쓴 듯한, 약간의 치기도 엿보이는 글들을 보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이 말야, 여러 방면으로 너무 뛰어나면 한 분야에서도 빌빌거리는 나 같은 사람 기죽어서 살겠어란 역시 마찬가지의 치기어린 생각이 들었으니까.  

 20대의 젊은, 그것도 여자인 에세이스트가(칼럼니스트였다가 왜 바뀌었는지 모르겠으나) 시사인에 기고를 한다고 했을 때부터 내게 김현진은 요주의 대상이었다. 감시를 한다거나 광적으로 그녀의 글에 집착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녀의 글은 여러 글 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눈에 띄고 글을 읽고 난 후에는 생각거리가 아니라 삶, 행동거리를 만들어주는 주의를 요하기 때문이다.   

 김현진은 얼마 전에 한겨레 칼럼을 통해 이명박 정부를 아무리 얘기해도 말귀가 통하지 않는 아버지에 비유했는데 그건 어떤 국정 진단보다 적절했다. 김현진이 주목한건 소통하려는 의지는 있으되 딴나라 세상에서 사는 아버지 얘기였다. 그러니까 그쪽이 상용하는 소통이란 단어는 말귀를 못알아듣는 자식들을 상대로 '왜 내 맘을 몰라주냐'란 앙탈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예총 문제를 얘기할 때도, 몇십년 동안 살아온 동네가 철거당하는 얘기를 할 때도 그녀는 이것이 한두번으로 끝날만한 일이 아니란 얘기를 했다. 나처럼 며칠동안 고민하고 양껏 스트레스 받으면 한동안은 불편한 마음 없이 지낼 수 있다고 자신하지도 않았고, 터무니없는 낙관이나 비관으로 자조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행동했으며, 행동하는 자신을 통해 성찰하며 성장했다. 이런 글쟁이를 둔 우리 시대는 얼마나 큰 행운을 갖고 있는건지. 

 가끔 김현진의 블로그를 보면서 나는 앞서 말한 행운이 마찬가지 이유로 얼마나 얄팍한 색을 갖고 있는지 느낀다. 순전히 '개인적인' 블로그에 '개인적인' 글을 올린걸 보고선 난 이 사람이 모순이 많다는 둥, 정치적인 입장과 삶이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둥의 생각을 한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소가 혀로 핥아놓은 듯이 처음부터 잘 빠진 사람은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전에 그녀 친구가 말했듯이 그러한 자신의 모순을 인정하고 고민하는게 진정으로 김현진이 갖고 있는 힘이란 얘기에 동감한다. 나는 나의 모순을 잘 알고 있다란 말로 모순을 합리화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인간 실존 운운의 낯뜨거운 수사에 빠지지 않으면서 말이다.  

 바지춤에 담뱃대 꽂고선 뒷짐지며 호령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자신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외국 사람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도 아니다. 지극한 감상도, 지극한 냉소도, 지극한 권위도 묻어나지 않는 글. 아직은 부정문을 통해서 그녀를 규명해야할 정도로 정확히 '어떤 사람'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사람. 그런 사람의 글과 삶이 앞으로 얼마간은 맘을 아프게 만들지라도 나는 자꾸 김현진의 글을 찾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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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9-07-09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진의 글은 적당한 비율로 섞은 동동주+사이다 같아요. 걸쭉하고 달달한데 톡 쏘는 맛까지 있죠. 예전부터 봐 왔는데 스무살 남짓 한 무렵부터 굉장히 잘 썼죠. 자기색이 독특한 작가였어요. 요새는 정치 쪽으로 전업했나? 블로그 도메인좀 알려줘요. ㅎㅎ

머큐리 2009-07-09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Arch님 저도 작년부터 김현진을 좋아하기 시작했는데...이글 보니까 더 좋아지는것 같네요...

hanalei 2009-07-10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만 많은 이글루스에서" 제 블로그도 함 찾아 보세요

Arch 2009-07-10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잘님, 선금을 주시면 알려드리겠어요. ㅋㅋ 한번 찾아볼게요. 허지웅씨건 괜찮고? 미잘님의 리뷰를 봐서 잘 알고 있죠.

아, 머큐리님 안녕하세요. 히^^

레이시즌님, 원래는 '말 많은'이라고 쓰려고 했는데 말을 위한 말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말만 많은 이라고 쓰게 됐어요. 음.. 힌트 좀 주세요!
 

 저러면 왜 사귀나 싶은, 내가 아주 오래 전, 안달복달하며 이어보려고 했던 관계. 

남탓도 내탓도 누가 더 하자인지 우길 이유도 필요도 없다. 

- 니가 하는게 뭐 그렇지. 

 꽤 진실된 표정으로 이런 말을 건네는 남자는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정말 못생겼다. 아마 난 속으로 주제넘게 저런 말을 잘도 하는구나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웃을 때 주름이 자글자글해져서 이쁘네.'란 말에 시큰둥해지다가 다른 말들에 금세 웃어버리고, '너같은 애를 어디서 찾니'란 소리에 다시 샐쭉해서 입이 댓발로 나온 그녀, 그 여자. 우린 살아온 날도 달랐지만 어렴풋이 서로의 공통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와 예전의 나는 모두, 봄햇살처럼 빛나는 순간을 잊지 못하는거다. 그래서 이게 아닌줄 뻔히 알면서도 미련하게 버티고 있는거다.

 잘 이용하지 않던 메일 계정에서 옛날에 만나던 친구의 편지를 발견했다. 손, 외투, 바닷가, 그리고 따뜻하게, 따뜻하게. 잊고 있거나 잃어버린게 아닌데 자꾸 그 말 하나하나에서 아련한 감흥이 감지됐다. 생각날 때마다 그 사람과의 연애를 반성하고, 다시는 연애에 들어선다고해서 맘을 놓지 말자고, 남자와 여자가 생각하는 연애관은 하늘과 땅처럼 넓으니까 좀 더 여우처럼 굴자 등등 반성의 가짓수는 많아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좀 맹할 정도로 다시 어딘가로 뛰어들 생각에 문득 문득 설레곤 한다. 설레임 중독 내지는 연애 돌입 전 증후군. 

 제목 때문에 내게는 별로 눈에 안 띄었던 '사랑도 흥정이 되나요.'라는 영화. 굳이 왜 이 영화에 출연했을까 싶게 겉도는 모니카 벨루치와 머리숱이 얼마 없는데도 꽤 섹시했던 남자배우가 나왔는데 그들 각각의 사정과 별개로 영화는 감독이 '몰라 몰라'라고 머리를 감싸며 찍었을게 분명할 정도로 막 만든티가 확연했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잊혀지지 않는 대사가 있었으니, 

 남자 주인공의 친구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얘기를  하는 부분이었다. 여자는 가슴을 절제해야하지만 살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그럴 수는 없다라며 이렇게 말한다. 

- 언제 사랑에 빠질지 모르는데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정확하진 않은거 같다. 아치가 그렇지 뭐.)

  사랑, 연애는 여자의 속성인가? 나는 왜 그토록 설레임과 자기연민에 번번히 빠지는가. 친구는 남자들도 연애 문제로 고민하지만 창피해서 겉으로 드러내놓지 않는다고 했고, 나 역시 빈번한 멤버 체인지와 여자다운 속성이라 일컬어지는 연애 문제에서 비껴나고 싶어 가까운 친구조차에게도 연애 고민을 토로하지 못했다. 그런데 글을 쓰거나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고 있을때면 틀림없이 섹스든 연애든 사람 사이 관계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연애만은 아니었다. 나는 사람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사람에게서 행복을 찾으며 마찬가지의 이유로 비통해한다. 사람 때문에 자지러지듯이 웃어제끼고, 펑펑 울어대고, 자책하고, 원망하고, 갈망하고, 배척한다. 온갖 감정들 사이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이 자리해 있다. 연애뿐만은 아니었다. 연애가 좀 더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방식으로 맺어진 관계였을 뿐이다. 이름 붙여지지 않은 사이와 조목조목 이름이 붙은 관계들 사이에도 분명히 내가 간과하거나 더 집중했을 감정의 웅덩이가 있을 것이다.  

 그럼,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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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6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늘 그랬듯이 아빠의 시작은 '참 쉽죠잉~'이다. 주말에 바람이나 쐬자며 아빠가 순천에 다녀오자고 할때만해도 터럭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본래 아치는 순진한 편이라 -에라이- 곧이곧대로 잘 믿는편인데다 이제는 웬만하면 잘 안 속는 딸을 위해 표정 연기까지 하는 아빠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람 쐬는게 단순 바람이 아니라 매실을 따야하는데다 아마도 하루종일이 될거란 얘기가 슬슬 나올 즈음 나는 모른척 발을 빼고 싶었다. 일을 하기 싫었으니까. 매실청을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굳이 거기까지 가서 친척분 도와드리는 것도 싫었다. 게다가 요즘 날씨가 오.죽.이.나.  
 아빠가 술을 드시니 운전할 사람이 필요하고, 옥찌들이 이모도 껴준다는 식으로 같이 거들자 안 갈만한 이유도 딱히 없는지라 말 끝에 가기 싫은데도 누구누구 때문에 간다는 토씨를 붙이며 투덜대면서 따라 나섰다.  

 짐작했겠지만 투덜거리면서도 일은 다 했고, 여럿이 한나절 동안 수십 자루의 매실을 땄다. 손으로 따다가 작대기로 두드려 그물에 담아서 골라냈다. 일하는 틈틈히 한켠에서 새참을 달게 먹고 시원한 아이스크림도 먹고 잠깐 눈도 부치고 참외도 먹고. 일을 다 했다고 했지만 먹는게 더 우선이었고, 그만큼 많이 먹었고, 허리 아프다면서 어깨를 토닥이다(뭔가 모자란) 어어 이건 정. 말. 매실 냄새잖아라면서 뭉글거리는 기분좋음에 흠뻑 취하고. 으음. 그랬어요.

 인건비도 안 나와 아는 사람 총동원해서 수확해야만하는 사정이 안타까웠다. 나야 하루 정도 수고하는거지만 이 더운 날에 고생하시는 분들께 이래뵈도 일 잘하는거라며 생긴건 꼭 촌사람인데 도시년인척 했던 것도 미안했다. 옥찌들에게 같이 일하자며 꼬득이다가 이모나 열심히 하란 소리를 듣고 쟤네들은 나와 다르게 라인을 잘 타는구나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왕은 새참의 내용물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당숙이었으니까. 옥찌들, 이모처럼 그렇게 먹을거 밝히다가는 너무 예뻐질지도 몰라, 아! 이 몹쓸 애드리브. 할말 없으면 그냥 사진이나 올리고 퍼뜩 자야하는데 말이지. 
 



응? 왜.. 안 가려고 했던거야. 이 좋은데를. 천지가 매실, 매실!




지민이랑 고모네 애기는 다라이(양동이라고 하면 부르는 맛이 사라짐)에 앉았다가 미끄럼을 탄다고 아웅다웅하다가.



'이게 매실이래요.' 마구 굴러서 거즘 거지꼴이 된 민.



씻는다고 들어간 집에서 찰칵! 옥찌, 왜 사진찍을 때 고개가 꺽이는거야?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진.  
덥고 지쳐서 계곡에 씻으러 가는 길에 불렀더니, 이렇게 대단히 궁금한 표정으로 뒤돌아보잖아.


  

 매실을 거의 다 따고 정리할때쯤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빗방울이 점점 거세졌다. 아빠는 평소에 신세를 졌던 분께 찾아가셨다. 찾아뵙고 인사만 해도 되건만 굳이 술을 마시더니 들큰하게 취해서 아저씨랑 농담도 진담도 아닌 이야기들을 나누셨다. 아빠 얘기는 듣는둥 마는둥 나는 아주머니께서 내어오신 수박을 먹으며 마당에 씨를 훅훅 뱉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누나랑 정원이 씨를 훅훅 뱉었었는데.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처음 보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신 아주머니. 아빠가 술이 과하셔서 자꾸 같은 말을 하는데도 같이 웃어주고 허물없이 대해주는 아저씨. 비가 오면 비를 좀 더 맞아도 돼. 머리숱은 원래 없었고, 시골비라 몸에서 냄새나게 하지도 않을거야. 비가 오면 잠시, 비를 맞아도 돼. 아무렴.
 마루에 걸터앉아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꾸 대문이 눈 앞에서 서걱댔다. 누구라도 금세 문을 열고 들어올 듯이. 한가로이 수박을 먹다가 누군가 저 문으로 들어오면 귀찮은 내색 없이 애써서 부산을 떨며 반가워하지도 않고 한두철 전 다녀간 사람 다시 들어온 듯 두 손으로 맞잡을 수 있다면.(서정주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일부) 매실 따러 갔다가 스물스물 무언가 맘 속으로 스며든다. 보고 싶은 사람 자주 보고, 사랑한다는 말 아낌없이 해주고, 허물은 모른척 넘어갈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그렇게 살고 싶어서 시골, 산 속 타령했는데. 어째 난 비는 비대로 맞고 냄새는 냄새대로 다 나버리는 사람이 되었을까.

 아, 몹쓸 애드리브에서 시작해서 널뛰기 하듯 정신없는 이런 페이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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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젓이 카메라 앞에서 사람을 치는 전경. 그는 이미 시민의 안전을 지켜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한명의 충직한 하인일 뿐이다. 제목은 뉴스에서 브리핑을 하는 고위 경찰 관계자에게 가한 전경을 문책한다는 내용을 접한 아빠가 단박에 내뱉은 말씀이다. 물론 지들 앞에는 빠르고 강력한 욕이 배치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메일도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들춰본다는데 블로그야 오죽하겠냐싶어 따로 욕은 적지 않는다. 물론 국민들이 알고 싶을 정도로 아치가 유명한건 아니라 배포 문제로 비화되겠지만.

 아빤 이명박 얘기를 하면서 불우했던 환경과 자수성가했다는 내용을 언급하며 그만큼 서민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신적이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된다고 크게 나빠질건 없다고 생각하셨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다. 나이 드신 분들, 이명박을 찍었던 사람들까지 모두 광장으로 나오고 있다. 이렇게까지 할줄 몰랐다는거다. 정치적 무관심과 공부하지 않는 자신을 탓하기 보다는 아주 뜬금없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격분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냉소적으로 관망하고 싶지는 않다. 대체 우리는 왜 이명박을 찍었을까. 

 우리 안의 리틀 이명박론을 얘기한 김현진의 말처럼 사실 알게 모르게 나는 아니라고 하지만 이명박의 성공 신화는 나 자신의 속물적인 취향을 건드린 지점이 분명히 있었다. 조갑제보다 강준만이 더 나쁠 수 있다는 주장을 한 김규항의 말처럼 알량한 계급적 지표의 우위에 자족했는지도 모른다. 어려운 사람들은 나와 별개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고, 난 그렇게까지 죽을 정도는 아니란, 나도 마찬가지로 '곧 성공'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희망을 유예시키면 드러나는건 바닥인데도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세부적인 목록만 허무맹랑하게 갈아치웠다. 

 조금만 제대로 봤어도 쭉정이는 골라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 뭘 강하게 원하고 있는지, 이 사람의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사람을 구성하는 것에 좀 더 눈을 붙여두었을지도. 혹은 꾸준히 민주주의와 역사를 공부해왔다면 우린 좀 더 달라졌을까. 이제서라도 광장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응원해주고 싶다가도 여전히 이슈에만 목메는 것 같아 망설여지기도 한다.  

 당분간 극장에 가지 않을거다. 가더라도 영화가 막 시작할 때 들어갈 생각이다. 4대강 정비 사업 홍보물을 내 돈 주고 봐야한다는 것까지는 정녕 아이러니다. 부족한 세수는 만만한 사람들로부터 보충하고 국민건강보다는 돈벌이를 위해 담뱃값을 인상하고, 역시 마찬가지의 국민건강, 의료산업을 위해 시시각각 의료민영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정부. 너네 어떻게 할래, 나중에 어떻게 다 책임지려고. 자꾸 무슨 왕처럼 과문한 신하들이 자신의 맘을 못알아준다고 투정부리는 것도 아니고. 

 울일도 싸울 일도, 화내고 미치도록 짜증날 일도 많아질 것이다. 그럴때일수록 맘을 단단히 먹어야한다. 우리, 쉬운거였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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