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랬듯이 아빠의 시작은 '참 쉽죠잉~'이다. 주말에 바람이나 쐬자며 아빠가 순천에 다녀오자고 할때만해도 터럭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본래 아치는 순진한 편이라 -에라이- 곧이곧대로 잘 믿는편인데다 이제는 웬만하면 잘 안 속는 딸을 위해 표정 연기까지 하는 아빠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람 쐬는게 단순 바람이 아니라 매실을 따야하는데다 아마도 하루종일이 될거란 얘기가 슬슬 나올 즈음 나는 모른척 발을 빼고 싶었다. 일을 하기 싫었으니까. 매실청을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굳이 거기까지 가서 친척분 도와드리는 것도 싫었다. 게다가 요즘 날씨가 오.죽.이.나.  
 아빠가 술을 드시니 운전할 사람이 필요하고, 옥찌들이 이모도 껴준다는 식으로 같이 거들자 안 갈만한 이유도 딱히 없는지라 말 끝에 가기 싫은데도 누구누구 때문에 간다는 토씨를 붙이며 투덜대면서 따라 나섰다.  

 짐작했겠지만 투덜거리면서도 일은 다 했고, 여럿이 한나절 동안 수십 자루의 매실을 땄다. 손으로 따다가 작대기로 두드려 그물에 담아서 골라냈다. 일하는 틈틈히 한켠에서 새참을 달게 먹고 시원한 아이스크림도 먹고 잠깐 눈도 부치고 참외도 먹고. 일을 다 했다고 했지만 먹는게 더 우선이었고, 그만큼 많이 먹었고, 허리 아프다면서 어깨를 토닥이다(뭔가 모자란) 어어 이건 정. 말. 매실 냄새잖아라면서 뭉글거리는 기분좋음에 흠뻑 취하고. 으음. 그랬어요.

 인건비도 안 나와 아는 사람 총동원해서 수확해야만하는 사정이 안타까웠다. 나야 하루 정도 수고하는거지만 이 더운 날에 고생하시는 분들께 이래뵈도 일 잘하는거라며 생긴건 꼭 촌사람인데 도시년인척 했던 것도 미안했다. 옥찌들에게 같이 일하자며 꼬득이다가 이모나 열심히 하란 소리를 듣고 쟤네들은 나와 다르게 라인을 잘 타는구나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왕은 새참의 내용물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당숙이었으니까. 옥찌들, 이모처럼 그렇게 먹을거 밝히다가는 너무 예뻐질지도 몰라, 아! 이 몹쓸 애드리브. 할말 없으면 그냥 사진이나 올리고 퍼뜩 자야하는데 말이지. 
 



응? 왜.. 안 가려고 했던거야. 이 좋은데를. 천지가 매실, 매실!




지민이랑 고모네 애기는 다라이(양동이라고 하면 부르는 맛이 사라짐)에 앉았다가 미끄럼을 탄다고 아웅다웅하다가.



'이게 매실이래요.' 마구 굴러서 거즘 거지꼴이 된 민.



씻는다고 들어간 집에서 찰칵! 옥찌, 왜 사진찍을 때 고개가 꺽이는거야?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진.  
덥고 지쳐서 계곡에 씻으러 가는 길에 불렀더니, 이렇게 대단히 궁금한 표정으로 뒤돌아보잖아.


  

 매실을 거의 다 따고 정리할때쯤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빗방울이 점점 거세졌다. 아빠는 평소에 신세를 졌던 분께 찾아가셨다. 찾아뵙고 인사만 해도 되건만 굳이 술을 마시더니 들큰하게 취해서 아저씨랑 농담도 진담도 아닌 이야기들을 나누셨다. 아빠 얘기는 듣는둥 마는둥 나는 아주머니께서 내어오신 수박을 먹으며 마당에 씨를 훅훅 뱉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누나랑 정원이 씨를 훅훅 뱉었었는데.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처음 보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신 아주머니. 아빠가 술이 과하셔서 자꾸 같은 말을 하는데도 같이 웃어주고 허물없이 대해주는 아저씨. 비가 오면 비를 좀 더 맞아도 돼. 머리숱은 원래 없었고, 시골비라 몸에서 냄새나게 하지도 않을거야. 비가 오면 잠시, 비를 맞아도 돼. 아무렴.
 마루에 걸터앉아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꾸 대문이 눈 앞에서 서걱댔다. 누구라도 금세 문을 열고 들어올 듯이. 한가로이 수박을 먹다가 누군가 저 문으로 들어오면 귀찮은 내색 없이 애써서 부산을 떨며 반가워하지도 않고 한두철 전 다녀간 사람 다시 들어온 듯 두 손으로 맞잡을 수 있다면.(서정주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일부) 매실 따러 갔다가 스물스물 무언가 맘 속으로 스며든다. 보고 싶은 사람 자주 보고, 사랑한다는 말 아낌없이 해주고, 허물은 모른척 넘어갈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그렇게 살고 싶어서 시골, 산 속 타령했는데. 어째 난 비는 비대로 맞고 냄새는 냄새대로 다 나버리는 사람이 되었을까.

 아, 몹쓸 애드리브에서 시작해서 널뛰기 하듯 정신없는 이런 페이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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