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가지 일을 한다. 아직 일주일밖에 안 됐지만 시간이 몸에 착 달라붙은 원피스마냥 쪼여지는게 느껴진다. 첫날은 피곤했고, 둘쨋날은 회의가 들었지만 셋째날부터는 재미있었다. 일하는게 재미있다기보다는 마약같은 '열심히 살고 있구나, 아치!'란 환각이 괜찮았달까. 안다. 열심히라기보다는 아빠 말씀대로 몸을 혹사시키는 미련한 짓을 하는 중이란걸.  
 알바가 아닌 직장을 잡아야겠다란 생각에 일을 구하는 동안 알바를 했다. 얼마되지 않아 직장을 잡게 됐고, 한달도 안 된 알바를 그만둘 수가 없어서 병행중이다. 잠정적이지만 둘 다 재미있어서 놓치고 싶지 않다. 잠이 부족하니 약간 힘이 없고, 틈만 나면 머리를 어디에 대려고해서 문제지만 아직은 견딜만하다.  

* 새로 다니는 직장은 시내에서 좀 떨어져있다. 아침이면 출근 한시간 전에 나가서 버스를 타고 교외로 나가야 한다. 어떤 날은 비가 왔고, 다른 날은 쨍쨍 해가 쏟아졌다. 별거 없는 서술이다. 날씨가 그렇다는건데. 하지만 희안하게도 서울에서 출퇴근할 때는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신경이 곤두서서 어쩔줄을 몰라했었다. 논이 있고, 나무가 더 눈에 많이 띄어서일까? 더운 날은 더운날대로 따사롭고, 비가 오면 비오는대로 촉촉하다. 이곳저곳 시골 마을을 돌아 제시간에 오는 버스조차 사랑스럽다. 이곳은 나무들마저 약간 무심한듯 무성하며 모른척 쑥쑥 자란다. 사육되듯이 좁은 땅에 틀어박혀 있는듯 없는듯 자라던 서울 나무들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 직장 사수. 내가 미친듯이 창을 바꿔가며 눈치껏 알라딘에 글을 쓰고 댓글을 달자 블로그가 있냐고 묻는다. 네네, 아니오. 흐리멍텅한 대답을 흘리고선 열심히 일하는척을 했다. 그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부득불 내곁으로 와서 자신의 블로그를 열어보였다. 보는둥 마는둥, '나 일하는 중이거든요.' 숨소리 한 방울, 두 방울. 그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다시 블로그에 대한 설명을 하는 사이 듣는둥 마는둥. 아, 그러다 '관심받고 싶어요.'란 그의 속삭임이 귀를 간질였다. 내가 그랬듯이 그 역시 그러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나. 서로가 필요한 시점이 들어맞는 마술같은 시간은 온갖 잡무를 떠맡고 있는 사무실 여직원에게는 사치인걸.

* 버스. 내 앞에 두 분의 할아버지들이 앉아계셨다. 창밖 트럭에서 엄마 무릎에 앉은 꼬마가 보였다. 꼬마는 손을 들어 우리에게 흔들어보였다. 무기력해 보였던 두 할아버지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더니 아이를 향해서 느릿느릿 손을 흔들어주신다. 할아버지들이 웃는다. 김영하는 여행자 도쿄에서 핸드폰의 막강한 기능으로 도시에 풍경을 만들어준걸 꼽고 있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웃는 사람들의 표정은 도시의 온도를 다르게 한다고. 휴대폰과 동급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겠지만 아이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통해 낯선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어버리는 것이다.

* 혼자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읽고, 히죽거리면서 뭘 할지를 생각하는 날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또 어떤 과잉인가. 난 밀려나지 않았어, 난 괜찮다고. 아무도 묻지 않고, 나조차 궁금하지 않은 색다를 것도 없는 생각과 행동을 보면서 본래 애인 몰래 바람피는 사람들이 더 애인에게 잘한다는 말이 떠오르고 말았다. 나는 그다지 만족하고 있지 않아서 감정을 목까지 끌어올려 '잘 지내고 있어!'라고 소리치는걸까? 안 들키기 위해 더 잘하는 바람여남처럼? 응? 

* 같이 일하는 방글라데시의 바달. 내 나이를 묻더니 바로 '누나'라고 해준다. 방글라데시아 총각이 발음하는 누나라는 말은 너무 달콤해서 가끔은 오토리버스로 설정해놓고 계속 들어보고 싶다. 바달은 한국어를 제법하지만 서로 이해가 안 될때는 영어를 쓰기도 한다. 영어 발음이 구리네 어쩌네란 생각이 얼마나 촌스러운건지 요즘 잘 느끼고 있다. 둥근 발음이 안 되는 바달과 R과 T가 어색한 나 사이는 웃음과 몸짓으로 넘기는 경우가 제대로 된 문장으로 말할때보다 많지만 서로 안다.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보다 영어를 재미있어 한다는 것을. 그럼, 내 취미는 영어 공부라니까!  

* 사람들을 만나면서 기상예보보다 더 정확하게 맞추는게 있다. 이 사람이 혈액형을 말할 것인가, 아닌가. 잘 맞추지도 못하면서 나보고 무슨 형이라고 단정짓길래 아니라고 했더니 내가 이상해서 그렇단다. 그리고나선 다같이 짠 것처럼 자기 혈액형의 특징과 자신의 연애사에서 피했어야할 혈액형에 대해 얘기를 해준다. 듣고 싶지 않다고. 안 들을래. 소용없다. 이상한 혈액형, 소심한 혈액형, 무난한, 그리고...... 소용없다니까요. 난 이상한데 그 혈액형이 아니고, 난 그 혈액형이 아닌데 소심하다구요. 달콤 살벌한 연인의 박용우처럼 톡톡 쏘아붙이는 재미를 느끼기엔 난 너무 귀찮거나 무료한지도 모르겠다.  

 *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맞았다. 펄럭이던 스커트가 몸에 착 달라붙고 뒤집어진 셔츠도 물로 무거워졌다. 구두엔 빗물이 스며들고, 머리속까지 하얗게 젖어들었다. 비를 맞는다. 비가 온다. 빗물을 몇방울쯤 먹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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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7-12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지치지는 않는지..
그래도 힘을 내고 있는듯해 보기 좋으네요.
금요일날 내가 만나면 힘날 것 사줄게요 ^^
(뭘 머그면 몸보신이 될까?)

Arch 2009-07-13 10:02   좋아요 0 | URL
알라딘질 할 힘만 남아도 페이퍼 쓴다.니까 아직 괜찮은 것 같아요. 휘모리님 고작 일주일이래두^^
금요일날 만남! 넷째주가 모임이라 어떻게 할까 상의하려고 했는데.
좋아요. 우리 맛난거 먹읍시다.^^ 히~

무해한모리군 2009-07-13 11:27   좋아요 0 | URL
오기 힘들면 취소해도 좋아요.
일이 이리바쁘니 금토 밤을 새는건 힘들겠다 ^^
그럼 파마에 성공한 라주미힌님과 데이트 하는거죠 뭐~

Arch 2009-07-13 12:08   좋아요 0 | URL
둘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중이었어요. 지난번에도 모임 빠지고 해선.
일이, 그리 안 바빠요. 약간 핼쓱해진 것 정도? (티도 안 남.)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알라디너분들과는 간김에 만난다고 급만남이라도 제안해야겠어요. 히^^

그런데, 둘 데이트에 내가 껴서 진상 놓는거 아니죠?

무해한모리군 2009-07-13 15:42   좋아요 0 | URL
밤 12시에 부천에서 과연 급만남이 될까 ㅎㅎㅎ
표는 벌써 세장 예매해 놓았으니까
편안하게 생각해요.
힘들겠다 싶으면 전화만 주오,
일단 부천시민 머큐리님이 11시에 맛난걸 사주시기로 했어요 ^^
꽃미남과 데이트도 좋지만, 꽃미남 꽃미녀랑 같이 하는 데이트는 더 좋지않을까?

다락방 2009-07-13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래도 직장내의 부러운 풍경인건 말이죠, 누군가 나 블로그해, 너도 하니? 라고 묻는거에요.
세상에, 제가 있는 곳은 아무도 블로그를 안해요. 한명, 예쁜 직원이 있는데, 게다가 얘기를 할때마다 그 예쁜 감정이 마구 차올라서 이녀석이 하는 블로그라면 즐겨찾기 해줄수도 있다, 라고 생각했는데 물어보니 안한대요. 블로그는 귀찮다나요. 블로그를 한다면 더 친해질 자신이 있는데 아, 너무 아쉬워요. 그러니 제 블로그를 생뚱맞게 알려주기도 좀 뭣하잖아요. 나는 해, 나는 하니까 여기와서 놀아, 라고 말하기도 어째 뻘쭘. 그래도 슬쩍 알려줬는데 그다지 관심 있어 하지 않아요.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가 하고 있는거, 관심 있는거에 관심을 보이니, 내가 블로그 있다니까, 하고 아무리 소리친들 관심 없으면 뭐 시큰둥 하는거죠.

Arch님, 힘 조금만 남아도 페이퍼 쓰는거 계속 해줘요. 이렇게 일기같이 좌르륵 내뱉는 페이퍼 말예요. 읽다 보면 저도 무언가 생각하고 떠오르고 그러잖아요. 아, 그 예쁜 직원은 왜 대체 블로그를 안하는걸까요? 대체 왜? ㅜㅜ

Arch 2009-07-13 12:09   좋아요 0 | URL
아 진짜? 일기같이 좌르르 쓰느라 정작 일기는 못쓰고 있어요. 저도 무척 즐거운걸요! 그 예쁜 직원은 그냥 예쁘기만 한게 아닐까요? 다락방님은 예쁘고 블로그를 하지만. 막 갖다붙인 티가 좀 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