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사에 의해 프로그래밍되어 연예 시장에 출시된 아이돌스타들은 태생적으로 기획 상품 이미지를 안고 갈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출중한 기량을 갖고 있더라도 저평가되기 십상이다. 전성기를 마감한 뒤 홀로서기를 위해 눈물겹게 노력해도 그들을 폄하하는 시선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아이돌스타의 젊음을 예찬하다가도 조금만 인기가 시들하다 싶으면 바로 등을 돌린 채 연예계의 숨은 장인들을 찾아가는 예능 PD들과 팬들의 행보는 청년들을 따돌린 채 기성세대의 아성을 쌓아나가는 사회의 모습과 흡사하다. 젊은 우상들을 연예계 혹은 사회의 변방으로 내모는 장본인은 청춘 예찬과 과잉보호를 일삼으며 젊은이들을 기획 상품으로 길들여놓은 바로 그 어른들이다. 방송국 안에서도 밖에서도 우리 시대는 어린 세대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용인할 만큼 너그럽지 않다.

 여성 버라이어티 쇼. 기획 단계에서부터 습관적으로 끼어드는 매력 측정과 커플 강박증을 생각해보자. 공중파의 여자 버라이어티에 심판 역할의 남자 MC를 갖다 붙이는 관행은 놀랍지도 않다. ..‘골미다’는 모든 미션의 포상을 맞선으로 설정해 각개 경쟁을 부추겼는데, 어떤 남성 버라이어티에도 없었던 이러한 발상은 여성의 애인 없음을 공공연히 결핍 상태로 규정한다는 면에서 성차별적이다.
 여걸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경쟁 시스템만이 아니다. 여성 예능인 집단을 불완전하고 깨지기 쉬운 것으로 여기는 편견도 그녀들의 입지를 위협한다. 물론 여성 예능인들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다. 편의주의적 출연, 뜨고 나면 어려운 미션을 기피하는 안일주의, 자기계발과 성취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과제 설정, 자극적인 토크 경쟁도 문제다. 
 아줌마들은 뭉치고 아가씨들은 대결하는 여걸 네트워크의 양상은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예능의 현실을 말해준다. 결혼과 출산으로 활동을 접었던 40대들은 조직력으로 지분을 넓혀야 하고, 경험과 역량이 부족한 20, 30대는 젊음과 매력을 내세워 살아남아야 한다. 예능이 골드미스, 영웅호걸 따위의 미명으로 아가씨들의 대결을 부추기는 현실은 안타깝고, 여걸들의 우정이 젊음과 아름다움을 포기한 뒤에야 실현된다는 사실은 서글프다. 양희은, 박미선, 송은이 캐스팅으로 여성들의 우정을 기분 좋게 묘사했던 여행 다큐 <행복한 수다 좋은 친구>와 같은 프로그램을 젊은 여걸들은 정녕 만날 수 없는가.

 예능에서 톱스타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은 예능활동으로 얼굴을 알려야 하는 직업 예능인이나 조연급 연예인들의 방식과 정반대다. 본업에서의 성취를 기반으로 톱스타가 된 이들에게 예능은 필수가 아니라 이미지메이킹을 위한 옵션이다. TV는 자기 작품을 홍보함과 동시에 소탈하고도 품위 있는 이미지를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환기시킬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방송 노출을 최소화해 신비감을 극대화한 뒤 인기 프로그램이나 권위가 검증된 코너를 골라 출연함으로써 VIP로 대접받게 된다. 부재를 통해 역설적으로 존재감을 증폭시키는 행보는 공급을 제한함으로써 고객의 수요와 충성도를 끌어올리는 디마케팅의 전형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우결>은 앞서나가는 연애담 같다. ‘결혼했어요’라는 과장법적 네이밍은 ‘살아보고 결혼하자’식의 진보론과 상통한다. 그러나 완벽한 연애를 향한 의욕은 진정성과 로맨티시즘에 대한 집착을 초래하며 <우결>을 보수적 판타지로 퇴행시킨다. 소녀시대 태연과 가상 부부였던 정형돈의 연인 공개에 대한 <우결> 팬들의 반발은 리얼을 가장한 드라마의 아킬레스건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 인위적 매칭의 부작용인 두 인격체의 충돌이 증발된 채 연인들의 소꿉놀이로 흘러가고 있다. .. 짖궂은 네티즌들이 인터넷의 <우결>관련 기사에 다는 “섹스하는 장면이 없다(그래서 가짜다)”는 댓글은 <우결>의 한계를 시사한다. 부부를 자처하는 닭살 커플들이 실제 연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진한 스킨십을 피하는 순간, <우결>은 착한 어른아이들의 순결 예찬이 되고 만다.

 중견 배우 윤미라는 한 인터뷰에서 천박한 배역을 맡게 되면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실제 모델들을 면밀히 관찰하지만 그 생활에 무작정 뛰어들지는 않는다고 했다. “배우는 무슨 역할을 맡든지 품위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천한 생활을 하면 사람 자체가 천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채널과 기획사를 통해 프로그램과 방송 인력이 과잉 공급되면서, 소수의 고품격 프로그램과 톱스탈르 제외한 예능 제작자와 연예인들은 소비자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충격요법을 앞 다퉈 구사했다. 하지만 아무리 예능이 싼티와 자폭으로 진입장벽을 낮춰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소비자가 원하는 건 ‘세일’이지 ‘떨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획의 성실성과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결여된 자기 비하는 상품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하자 요인일 뿐이다.


  연예인이 무슨 공인이냐. 방송 자체가 국민의 세금과 간접지출(광고료)로 운영되는 공적 매체이고 연예인들의 활동 범위가 전적으로 시청자 여론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은 사실상 공인으로 취급될 뿐 아니라 정.재계 지도자들보다 훨씬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받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 코드>의 저자 강준만은 한국형 평등주의의 이중성을 “자신과 대등한 타인에게는 엄격하되 직접 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권위에는 순종하거나 침묵하는 형태”를 설명했다. 유행의 창조자이며 고소득자인 연예인들이 공적 영역에서 대중과의 교감을 추구하며 유행을 창조하는 TV 예능 프로그램은 ‘대등한 타인’과 ‘강력한 권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그렇기에 시청자와 여론의 이름으로 예능 프로그램과 예능은으르 비판하는 행위는 방송이라는 공적 영역에 대한 실력 행사로 귀결됨으로써 대중의 정의감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된다.

 아마추어의 열정과 프로의 장인정신에 대한 열광이 진실한 인간관계에 대한 향수와 결합하면서, 근래의 서바이벌 쇼에는 하나의 뚜렷한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형 오디션의 개성이라 해도 좋을 그 흐름은 나를 알아주는 참스승에 대한 그리움이다.


오늘날의 정보 쇼들이 예전보다 훨씬 실용적인 생활밀착형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포테인먼트 예능이 세상을 탐험하고 사회, 문화적 가치를 일깨웠던 진취성과 거시적 안목을 유보한 채 현대인의 불안과 자괴감이라는 네거티브 요소에 기대어 전문가 PR프로그램으로 기우는 것은 유감이다.

 시골 버라이어티. 삭막한 도시인과 푸근한 촌사람의 교류도 단골 플롯이다. 스타들과 현지 주민들 사이에는 젊은이들의 재롱과 어른들의 무조건적인 호나대라는 일정한 정서적 교환이 발생한다. 대학 입시와 취업 준비 양쪽의 부담감에서 해방된 1980, 90년대 대학생들의 나들이 같은 시골 체험은 농경사회의 기억, 치기에 가까운 청춘의 형기, 조건 없이 친밀한 관계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농어촌이 자연과 낭만에 대한 도시인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소모되는 현상과,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해도 무방했을 인위적 설정을 시골에서까지 고집하는 관성이 그것이다. 지금까지의 국가 정책이 도시인의 편의를 위해 농어촌을 희생시켜온 것처럼, 버라이어티 제작자와 시청자들도 농어촌을 언제든지 왔다 가면 그만인 일회용 관광지로 소모해온 것은 아닌지 반성할 때다.

 빈곤을 개인의 문제로 간주하는 무한경쟁 성공론의 확산도 방송 소재로서 가난의 소구력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됐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세경 자매의 궁핍함을 청승으로 받아들여 불쾌감을 표출한 네티즌들)


<등 토닥여주는 강호동과 서바이벌의 눈물>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울음의 기능은 똑같다. 눈물 흘림을 통해 그들은 자신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임을 확인한다. 심리적 상처와 회한을 눈물에 씻어냄으로써 패자는 실패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승자는 계속되는 경쟁의 법칙에 자신을 다시금 순응시킨다. 눈물로 정화된 자들은 더 이상 경쟁의 법칙에 저항하지 않는다. 눈물의 씻김굿을 통해 그들은 서바이어벌 전쟁터의 모범적인 전사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예능 신파의 울음은-비록 창피하고 유치한 퇴행일지라도- 마음의 부정적인 감정을 안전하게 배설하는 행위다. 사람의 마음속에 질투, 분노, 자괴감 등의 악감정이 쌓일 때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그런 상황을 막지 못한 자신을 탓하거나, 자신을 그렇게 만든 타인과 바깥세상을 공격하거나, 울음은 두말할 것 없이 전자에 속하는 행위로서, 비극으르 막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단죄하고 징벌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현실 순응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사람을 힘들게 할수록 마음속의 응어리는 커진다. 속에 쌓인 것이 많을수록 감정의 배설 행위는 빈번하고 격렬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요즘 감동과 휴머니즘을 핑계 삼아 거세지고 있는 예능 신파의 물결은, 거꾸로 보면 현대인의 정신건강과 자존감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음을 증언하는 징후가 아닐까?


 예능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선, 흥미를 유발하는 소제목, 분야를 망라하는 다양한 예능에 대한 접근은 이 책의 장점이지만  '좀 더 깊은 내용을 보고 싶은' 욕망을 충족할 수 없다는 점과 단순한 결론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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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를 읽는데 한자 공부하려면 이이화의 한문 공부를 보면 좋다는거다. 고전강의를 다 읽지도 못하고 의욕이 넘쳐 한문책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그래, 이두랑 향찰이 있었어. 이렇게 글씨가 변하고 이렇게 읽는구나. 열심히 들여다보고 연습문제를 풀려고 하는데 뭘 알아야 말이지. 결국 1장도 못 넘기고 지지부진. 그럼 혹시 한자의 기초적인걸 알려주는 책은 없을까 싶어 찾아봤는데 만화로 나온 이이화 선생님의 책이 있다. 오호, 내가 아는 글자다. 500자만 익혀도 다른 한자를 읽을 수 있단다. 열심히 해봐야지.

 그랬구나. 중학교 때 한문 선생님을 좋아해서 잠깐 한문 공부한거 말고는 관심도 안 보이더니 갑자기 500자 외운다고 설레발 치는구나. 스페인어 책 사놓고 2년이 지났는데 영어 익힌 다음에 공부한다고 첫 장도 들춰보지 않았는데 이제는 한자 공부하는구나. 그랬구나.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체르노빌의 목소리로 변경함) 

 빵가게 재습격님이 도가니를 소설이 아니라 르포나 논픽션으로 썼으면 어땠을까란 얘기를 하면서 ‘언더그라운드’와 ‘체르노빌의 아이들’이란 책을 언급하셨다. 마치 오늘 그 책을 내 손에 넣지 않으면, 당장 읽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서둘러 검색을 하고 클릭 몇 번으로 구입해서 읽기 시작한 두 권의 책. 옴진리교의 사린 사건 피해자를 만난 하루키의 인터뷰집과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극화한 르포 소설이다. 언더그라운드는 반절 정도 읽다 정체됐고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소설이 안 읽히는 가을이라며 한쪽씩 근근히 읽고 있다. 


 그랬구나. 누가 읽어보라고, 누구 추천이라고, 이 책은 교양인들이 꼭 읽어야 한다고, 선정 도서라고 하면 사정없이 읽으려드는구나. 지적 허영심도 아니고 내가 왜 그러는지 나도 알 수가 없구나. 그랬구나. 책으로 공부하고 싶다면서 밑줄만 그었지, 체계를 잡아 정리하고 요약하고 내 나름의 생각을 글로 쓰는건 안 하는구나. 맨날 예능만 보고 바보처럼 웃는구나. 그랬구나.




  

 

 

 

 

 성 감수성 훈련이란게 있다. 예컨대 여자인 내가 남자처럼 섹스를 해보는거다. 발기된 상태로 결합이 풀리지 않게 유지하며 키스와 애무를 곁들이고 달콤한 말을 속삭이기. 섹스에 대한 여러 담론이 있겠지만 기존의 어떤 틀 같은게 있다면 섹스를 하는 모든 여남, 인간, 생명체?는 힘들겠구나. 그런데 난 왜 굳이 여러 가지 많은 것들 가운데서 이런 얘기를 하는걸까.

 푸코에 의하면 나는 <왜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다’라고 말하기 위해 ‘그 정도의 정열’을 대가 없이 쏟는 것일까.> <성을 말하는 담론들을 근대를 관통하는 ‘지에 대한 의지’, 즉 온갖 인간적 군상을 ‘일람’할 수 있는 목록으로 정리하려는 터무니없는 야심의 흐름 속에 놓았다.> <제도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우리의 ‘의심’까지도 ‘제도적인 지’로 의심받는 그 제도에 속한다.>는 건데 구조주의는 여전히 어렵지만 내가 왜 그런지에 대한 단초 같은걸 얻었다.

 그랬구나. 일상적 성적 실천은 마초적이면서 입으로만 진보적인 성담론 얘기를 했구나. 그랬구나. 단초만 얻었지 정확히 뭔 얘긴지는 아직 모르는구나.

뒤늦게 안 사실, 빵가게재습격님의 추천 책은 <체르노빌의 목소리>.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읽으며 이건 왜 인터뷰집이 아니라 소설일까, 르포 소설이래도 소설 같은데 이러면서 봤는데... 그랬구나 무슨 책을 추천했는지도 모르고 막 의욕부렸구나. 그랬구나. 쥐구멍은 몸뚱이가 커서 못들어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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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11-10-18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랬구나" 요거 유행어예요?
치니님에 이어, 아치님도 열공 중이군요.
저도 올 가을부터 시작하고픈 공부 아이템이 있는데,
또 "그랬구나~"가 돼버릴지 모르니까, 입 다물고 있어야겠어요.
일단 시작부터 하고.^^

성 감수성 훈련, 처음 들어봐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도 스밀라가 남자처럼 섹스하는 기묘한 장면이 나왔던 거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Arch 2011-10-18 20:54   좋아요 0 | URL
무한도전 무도상사편에서 '그랬구나'편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저는 그저 설레발 공부죠. 정말 그랬구나 될 수 있는데 전 이렇게 터무니없이 각오하고 다짐하고 맹세하고 이래요. 꽃양배추님은 공부를 야무지게 잘 할 것 같아요.

저도 베티 도슨 때문에 알았어요. 김연수가 추천해서 저도 그 책 봤는데 잘 안 읽혔어요. 꽃양배추님이 다시 말씀하시니 읽어볼까 싶지만 과연, 읽을까 싶어요. 감이 부족해선지 소설의 은유와 공간을 상상하기 힘들더라구요.

치니 2011-10-18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명수형처럼 독하게, 안 된 거 같은데요.

근데염, 아치님, 제가 말한 그 독서 토론 세미나에서 12월 책으로 하필(!!!) 라캉 책을 선정한다대요 ~ ㅎㅎㅎ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70071
이 책을 선택한 좌장 말로는, 라캉 책으로는 이 책이 입문서로 최고래요. 쉽고 재미있고.
(아치 님이 자꾸 책 들인다고 마구 괴로워하는데도, 나는 또 책 소개하는구나, 그랬구나....ㅋㅋㅋ)

Arch 2011-10-18 20:58   좋아요 0 | URL
그랬구나, 박명수처럼 하려면 우선 사람이 독해야는데 제가 좀 애매하게 생겨먹었어요.

그 책, 꼭 읽어봐야겠어요. 영화인문학도 보려고 찜해놨어요. 라캉은 저기 위에 있는 책에서 인용한거고 전 라캉을 잘 모르겠어요.

근데염, 치니님. 저 안 괴로워요. 정말 괴로우면 이런 페이퍼 못쓰죠. 오늘 막 책을 보고 뭘 읽나 이러면서 이놈의 바람은 언제 그치나 이러면서도 살짝 즐거웠어요. 이런 의욕 같은거라도 있어야지 싶어서.

비로그인 2011-10-1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구나... 이 말은 저의 독서기에도 아주 많이 써먹힐 말 같은데요? ㅎㅎ
책은 왕창 쌓아놓고 수박 겉핥기 신공을 펼치는구나. 그랬구나. 절반도 안 읽고 반납해버리는구나. 그랬구나.
그래도 아치님은 그 의지만큼은 대단하신 것 같아요. 추천 받으면 당장 사서 읽는 그 의지!
그게 끝까지 이어나가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겠지만요 ㅠ ㅠ

Arch 2011-10-18 21:03   좋아요 0 | URL
그랬구나, 말없는 수다쟁이님은 나랑 닮았구나.^^

막 다짐하거든요. 다 읽고 반납하자, 반납연기하자, 연체하더라도 다 읽자. 그런데도 한번에 수십권을 빌리고 산 책은 언젠가 읽을거라며 무한정 방치하고.
수다쟁이님! 제 의지, 너무 몹쓸 의지 아닌가요. 힝~ ㅜ,.ㅜ 책을 많이 읽어야 좋은게 아닌걸 아는데 이러는걸 보면 채워지지 않는 뭔가를 자꾸 책에다 쏟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좀 채워지면 좋으련만^^

2011-10-18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8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20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http://10.asiae.co.kr/Articles/new_view.htm?sec=voice1&a_id=2011092206371473731  

 시작은 이 기사였다. '안테나 뮤직의 라디오 스타'에서부터 글을 잘 써서 눈여겨본 김희주씨의 '우리에겐 '88만원 세대'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란 글. 
 88만원 세대론은 늘 있어왔지만 정말 그들, 혹은 내가 짱돌을 들고 맞서 싸우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최근 방영하고 있는 <하이킥>에서 백진희가 연기하는 88만원 세대가 지금의 20대를 보여준다면 희주씨 말처럼 '보스를 지켜라'의 은설은 20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낭만적이지만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녀(은설)가 잃지 않았던 건 '무엇'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지금껏 자신을 지탱해 온 삶의 자세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예컨대 돈과 권력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는 것, 자신의 마음에 솔직한 것 말이다.

 대학까지 나왔으면서 직장을 잡지 못하고 그렇다고 뭔가 하지도 않으면서 불안을 검은 거미처럼 키워갈 때가 있었다. 그때는 정말 '안정된 직장인'이 되고 싶었다. 안정되지 않은 비정규직이 되어 이곳의 돌아가는 사정을 보고 있자니 답답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내가 이곳을 뛰쳐나가 할 수 있는게 없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김경의 시도가 아찔하지만 부럽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7042022395&code=990000&s_code=ao059 


 

 

  

그리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의 이야기였다. 주택 융자를 갚을 때까지, 혹은 그 집을 팔 수 있을 때까지만 버티자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무언가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열심히 사들이는 나, 그리고 본질적으로 남에게 소비를 권장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매체에서 월급을 받기 때문에 그 시스템이 안겨다 주는 어떤 치욕도 참아왔던 나의 이야기. 자신이 살기 위해 남들을 밀어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사고 팔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것이 현대인의 운명임을, ‘마치 거대한 기계에 휘어잡’힌 개인들이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닌 채 살아가야 하는 시대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그리는 조지 오웰의 이 소설을 읽고 나는 문득 깨달았다.

머지 않아 곧 내가 회사를 그만둘 거라는 사실을. 그래도 괜찮다는 사실을. 소설의 주인공은 그러한 자각에도 불구하고 여지없이 현실의 중력으로 다시 끌려 들어가야 했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나에겐 우유값이나 학원비를 걱정하게 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없으니까. 천만다행이다.

아마도 다음 번 글은 ‘하퍼스 바자’의 김경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프리랜서 라이터 김경으로서 쓰게 될 거라고 믿는다. ‘군중이 개인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조지 오웰의 우려에 따라, 패션이라는 괴물에게 사로잡힌 군중과 억압적인 시스템에 나름대로 발랄하게 대항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명랑한 예비 소설가로서 말이다.


 구로사와 키요시 감독은 '밝은 미래' 감독 노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적어도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깔린 철로의 끝에 전세계의 미래가 있다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고. 

 무라카미 류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선 재미있어야 한다고, 내가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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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11-09-2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야, 영원한 차도녀일 것만 같던 김경 씨도 마흔이 되니 전원주택에서 정원을 가꾸고, 흙집 지을 꿈을 꾸는군요.
브래지어와 하이힐에 대한 글을 쓰는 그녀보다, 다육식물 받침대를 손수 만들었다는 그녀가 훨씬 더 좋네요.
(지금 경향신문 링크 들어가서 지난 글들 몇 개 읽었어요.)
이 분, 애인 제대로 만나셨나 봐요. 역시 내 인생을 내가 못 바꾸면, 바꿔줄 사람이라도 만나야 한다는 진리.ㅎㅎ
에휴. 저도 흙집 짓는 게 일생일대의 꿈인데...



Arch 2011-09-30 10:02   좋아요 0 | URL
예전 김경 글에서는 멋부리는게 보였는데 지금은 부러 그러지 않아도 멋진 것 같아요.
맞아요. 그냥 스르르 뭔가 변하는 것 같아요. 나도 그래야할텐데~
저는 흙집 만들기 수강 들으려고 막 알아보고 그랬는데 그럼 시골로 가야하고, 농사를 지어야하고, 이런게 나랑 맞을까 싶어서, 사실은 게으름 때문에 무한보류중이에요.
 
작업실의 고양이 - 고양이를 사랑한 젊은 예술가를 만나다
고경원 글.사진 / 아트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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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양이란 동물이 지닌 예술적인 매력’에 대해서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고양이의 다채로운 털 빛깔과 무늬만큼이나, 작가들이 매료된 고양이의 모습도 다양합니다.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런 고양이의 숨겨진 매력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젊은 작가들이 만들어가는 다양한 작업실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나만의 작업실을 만들 수많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책상 하나, 방 한 칸만 있어도 멋진 작품이 탄생되는 모습을 보면서, 작업실이란 단순히 돈과 땅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양이와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동물과 함께 살고 싶다고 마음먹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주는 기쁨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기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사랑스런 모습뿐 아니라 생로병사까지도 함께 겪었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그 순간을 어떻게 책임지고 견뎌갔는지, 그 과정에서 느끼는 기쁨과 보람은 어떤 것인지, 함께 살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그 순간들을 전하고 싶습니다.

「고경원, 책을 내며」에서

말없이 다정한 나의 '고양이 삼촌' 일러스트레이터 유재선

신비로운 고양이 왕국의 창조자 일러스트레이터 마리캣

박활민이 만든 고양이 그림 액자를 하나 집어 들고 쌀집고양이를 나선다. 액자에는 갑갑한 삶에서 탈출구를 찾는 사람에게 실마리가 되어줄 고양이 스승님의 말씀이 적혀 있다.

당신은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불안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다. 당신의 삶을 죽이는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렇게 싫어하는 불안을 누가 당신에게 주었는가? 불안의 정체가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하지 않는다면 불안은 평생 당신을 따라다니며 삶을 망칠 것이다.

쫓기듯 불안한 삶을 사는 한국의 길고양이들과는 달리, 사뭇 여유로운 다르질링 고양이들의 매력에 자꾸 시선이 갔다. 그때부터 틈틈이 그곳의 길고양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돌멩이에다 고양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전통 자수와 목각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알 수 없는 평안함이 찾아왔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그리는 일에는 지친 마음을 다독이는 치유력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그렇게 다르질링에서 보낸 시간을 ‘인생 방학’이라고 불렀다. 인생에서 드물게 찾아온 선물 같은 휴식의 시간이었다.

금속공예가 신유진의 고양이의 추억 담은 나만의 장신구

노란 줄무늬 고양이 동식이,
"동식이는 집에 있는 남자 고양이들 중에서도 덩치가 좀 작고, 다른 애들에 비하면 꼬리도 못생기고 약해요. 하지만 겉으로는 덩치가 커 보이고 잘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아서, 이렇게 커다란 옷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모습을 표현해봤죠."

길고양이 찍는 '찰카기 아저씨' 생활 사진가 김하연

화가 성유진의 작품.

<불안한 식욕> 고양이인지 털 뭉치인지 모를 커다란 얼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손은, 토하고 싶어도 토해지지 않는 마음속의 지옥을 그대로 보여준다. 먹은 것을 반복해서 토해내는 심리의 밑바탕에는 자기 부정과 혐오감이 깔려 있다. 상습적으로 구토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토해낼 수 없으므로 한때 자신의 몸과 하나였던 것, 즉 먹은 음식을 토해낸다. 이들이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행동은 제 살을 허물어내는 자기 학대에 가깝다.

성유진의 그림에서 반복되는 구토의 이미지는 자학과는 다른 정화의 의미를 지닌다. 우울증에 걸려 폭식과 구토를 경험한 적이 있는 작가는, 자신의 몸이 속한 불안한 세계를 보타로스로 규정하고, 그 세계를 토하듯 몸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평안을 되찾으려 한다. 보타로스란 몸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바닥없는 지옥, 타르타로스가 조합된 개념으로, 무저갱처럼 깊은 마음의 심연을 뜻한다. 사람이 싫다면 헤어지면 되고, 몸담은 곳이 싫으면 떠나면 되지만, 정작 무서운 건 마음이다. 마음이 나를 베고 찌른다 해서, 내 몸에서 떼어낼 수 있을 리 만무하므로.

도예가 김여옥의 작품

인형작가 이재연
<어린 왕자를 만나다> 비스크, 혼합재료, 2010

같은 작가의 작품.
어린왕자에서 나온 노란 뱀과 장미

화가 신선미의 <당신이 잠든 사이 6>

작가가 만들어낸 개미요정들은 순수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되찾아주는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신선미의 그림 속 여인들은 대부분 깊은 잠에 빠져 있어 개미요정의 활약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줄어든 주스를 보고 의아해하거나 사라진 물건을 찾아 온 집 안을 뒤질 때도 그것이 개미요정의 소행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심지어 깨어있을 때도 사람들이 개미요정을 보지 못하는 건, 그들이 이미 상상의 세계로 가는 문을 닫아버린 어른이기 때문이다. 헌데, 어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개미요정도 고양이의 날카로운 눈은 피할 수 없다.

<진퇴양난> 장지에 채색, 30*130cm,2007

설치 미술가 김경화의 <굿모닝>전, 부산 대안공간 반디 설치 전경, 2008

유희성과 체험성이 강조된 작품을 주로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어린이 체험전시의 단골 초대작가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조소과에서 공부를 시작한 게 2004년이었다. 하지만 대도시 서울은 홀로 부산에서 올라온 작가에겐 냉담한 도시였다. 며칠 동안 사람들과 말 한마디 할 겨를 없이 보낸 날도 있었고 4.5평짜리 원룸에서 지내다 보니 갑갑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바삐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에 자신만 따라가지 못하는가 싶어 무력감이 들때면, 작업도 다 포기하고 그만 부산으로 돌아가야 하나 싶었다. 밤이 되면 착잡한 마음을 달래려고 산책을 나서는 게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그때마다 눈에 밟혔던 동물이 길고양이였다.
“낮에는 못 보던 고양이가 밤이 되면 보이는거예요. 안쓰러워서 부르면 도망가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길고양이와 나를 자연스럽게 동일시했던 것 같아요. 도시라는 곳은 왜 이렇게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까, 하는 생각을 늘 했거든요.”

화가 안미선의 작품

“제가 본 완두는 늘 어딘가에 갇혀 있는 고양이였어요. 가끔 산책을 시키면 무서워하고 나가는 걸 꺼려하지만, 늘 집 안에서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면서 동경하는 것 같았고요. 완두는 봄을 참 좋아했어요. 빌라에 살 때 화단에 꽃이 많았는데, 완두는 늘 거길 내다보면서 나비나 벌이 보이면 잡으려고 헛발질을 하는 거예요. ...... 제가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지만 성격상 하지 못했던 일, 나를 드러내고 싶었던 마음의 한 부분을 고양이로 표현하게 된 것 같아요. 안전한 곳만 찾아 숨는 완두지만, 언젠가는 자연 속에서, 또 더 넓은 세상에서 거닐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실크에 혼합재료

펠트공예 인형작가 권유진

작가는 그 사이에 동네 길고양이들을 돌보는 캣맘으로 살고 있었다.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면 길고양이의 삶에도 눈이 가고,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문제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용기를 내어 그들의 삶에 도움을 주려고 뛰어들었다가 병들어 죽는 고양이들을 보며 상처입기도 하고, 버려지는 고양이들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기도 한다. 때로는 ‘왜 그들의 삶에 개입했을까’ 후회도 하지만, 결국 다시 마음은 그들을 향할 수 밖에 없다. 혼자의 힘은 미약하기에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어떤 고양이의 삶은 좀 더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길고양이에게 다시 손 내밀 수 있는 힘도 거기에서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가 만드는 모헤어 인형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을 권유진에게서 본다.


책을 읽다보면 취재하고 기획한 글에서 자료조사 업적을 전시하는 구태를 심심치 않게 본다. 상대방 얘기를 듣고 그 사람의 세계를 보는게 아니라 자신의 좁은 시야에 갇혀 글의 생동감을 떨어뜨릴 때도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취재와 사전 조사의 절차를 밟되 과하거나 부족함없는 글솜씨로 자신이 본 세계를 얘기한다. 아마도 고경원이 고양이 취재 전문 작가란 점과 고양이처럼(고양이가 실제로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심스럽고 사려깊게 취재원과 고양이, 작업실을 대했기 때문인 것 같다.

고경원의 글과 사진은 누군가의 작업실만 구경하고 나오려는 발길을 그 장소와 사람들, 고양이 곁에 머물게 한다. 글이며 사진, 구성까지 군더더기없이 잘 빠졌다. 야무지고 끈기있는 그녀의 손에서 다음엔 어떤 책이 나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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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26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가 참 다채롭네요. 귀엽기도, 신비롭기도, 아름답기도 해요.
또 다른 야무지고 끈기 있는 책이 나오길 기대해봐야겠네요 :)

Arch 2011-09-26 19:43   좋아요 0 | URL
그동안 여러 기획의 책을 읽었는데 이 책처럼 단단하고 읽을 맛 났던건 오랜만이었어요. 고양이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길고양이에게까지 맘이 미치는 부분들은 아릿하고 좋았어요.

알로하 2011-09-28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선미씨 작품은 참 고와서 좋아해요. 고양이는 매니아가 참 많은 거 같네요. 저도 이 책 술술 넘겨만 봤는데 흥미로웠어요~ㅋㅋ

Arch 2011-09-29 09:40   좋아요 0 | URL
그냥 술술 봐도 좋고 읽어도 좋았어요. 신선미씨 그림, 저도 좋았어요.
예술가와 고양이는 뭔가 어울리는데 개와 예술가라던가, 소와 예술가 이런건 좀 안 어울려요. 히~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826§ion=sc42§ion2=  

나도 팬할래요.  

버틀러: 몸, 주체, 성별, 성적 취향, 인권 등등이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틀에 의해 구성된다. 

 인식 가능한 틀에 들어맞는 존재들은 인정받지만 그렇지 못한 존재들은 인권을 박탈 당하고 살아있다는 것조차 부인당한다. 인식 가능성의 매트릭스가 '몸'이라는 인식되는 것들을 생산한다는 위의 논의가 실제 아픈 몸과 어떻게 연결될까. 내 몸의 아픔은 내 몸을 이해할만한 인식론적 틀이 있느냐의 문제로 볼 수 있다.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447§ion=sc42 이것도 좋아요. 명박 그림은 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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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1-09-24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틀러를 보면 어지럼증이 있는 저같은 경우... '섹스화된 몸'을 조금씩 들추고 있는데...남자라는 근원적(?) 한계가 페미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하는 의문을 달고 살지요..^^;

Arch 2011-09-24 10:17   좋아요 0 | URL
저도 어려운 책을 읽을 때면 어지러운데.^^
노동자성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정리가 잘 안 되네요.

꼭 당사자여만 느끼는건 아닌 것 같아요. 당사자라고 해서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는게 아닌 것처럼. 머큐리님이 여자가 될 수는 없지만 버틀러가 말한 것처럼 여러 층위의 사안들을 접한다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꼭 내가 철거민이 되고 정리해고된 노동자가 되지 않더라도.